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50화 (50/209)

경비 업무 일지 : 10일째(1)

"세상에 하나님 맙소사."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자본 게 얼마만인지는 모르겠지만, 호국은 자신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것이 푹신한 침대와 이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기동타격대 전용 보급 상자에서 찾아낸 침낭은 굉장히 편했지만, 솔직히 침낭에서 잘 때 마다 근육의 뻑적지근함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침대 위라니? 혹시라도 옆을 돌아보면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함께 누워있는 게 아닐까 싶어, 호국은 조심스럽게 고개만 돌렸다.

"휴, 다행이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이렇게나 안도감을 느낄 줄은 몰랐는데, 사실 헐벗은 여자가 함께 있었다면 아무리 호국이라도 까무러쳤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호국은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최적의 컨디션을 만끽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단조로운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원룸 구조형 방이었다. 침대 역시 기본적인 싱글 사이즈에서 살짝 큰 수준이었다.

자신이 어째서 이런 방에서 잠들어 있었던 건지, 촌스럽게 막 걸치고 있던 기동타격대 복장은 어디로 가고 헐렁한 잠옷만 입고 있는 건지 고민해보았다.

하지만 고민한다고 한들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고, 결국 죽여주는 기억력으로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음?"

일단 뇌가 인식하면 절대로 기억을 잊지 않는 호국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는 생전 처음 맛보는 '기억상실'이었기 때문에 호국으로서도 굉장히 난처했다.

'분명 갑자기 시설 폐쇄니 뭐니 해서 따지려고 B5로 향했었지.'

이홍선 팀장과 그 휘하의 사람들이 호국에게 골탕을 먹이려는 건가 싶어 항의하려 했으나, 정작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 부터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뭔가 중요한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마치 그 부분의 기억만 지우개로 말끔히 지운 것 처럼 완전한 공백(空白)상태였다.

중요한 게 있었던 것 같지만 기억이 없으니 결과적으로 뭐가 중요한 것이며, 또 뭐가 심각한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꼭 기억할 필요가 있나?'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주변인들과 호국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감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뭔가를 까먹었고, 기억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호국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호국의 뛰어난 기억력이 비정상적이었다고 한다면, 지금 막 기억을 잊어버렸으니 오히려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도 주변인들과 똑같아졌다는 생각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 호국은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이 기쁨을 느끼면서 이홍선 팀장과 대화한다면 원만하게 잘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문 옆의 터치 패드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자 자동문이 열렸다. 그리고 때마침 방 안으로 들어오려던 한 남자와 마주쳤다.

"아! 깨어나셨습니까?"

화학 실험용 안전경(고글)을 착용한 중년 남성이 호국을 먼저 반겨주었다.

호국의 기억 속에는 없는 남자였다. 다만 이홍선 팀장과 같이 흰 가운 차림을 하고 있었기에 직감적으로 그가 상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혹시 일 안 하고 잠만 퍼질러 잤다고 욕 먹는 거 아닐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휴식 시간도 줄이면서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머리를 박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호국의 손을 먼저 잡아 악수를 나눴다.

"저는 이번에 제 6 처리시설의 새로운 연구팀장을 맡게 된 이두근이라고 합니다."

"어? 연구팀장은 이홍선 씨가 아니었나요?"

"아, 이홍선 씨! 안타깝게도 그 분은 집안에 우환이 생겨 어제부로 퇴사했습니다. 듣자하니 친부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으시다던데, 안드로이드에게 병 간호를 맡기기엔 불안해서 자신이 직접 해야겠다더군요.

"아......"

잠깐이었지만 호국은 이홍선을 만나면 따질 생각부터 했던 자신을 탓했다.

친부의 건강 때문에 평생 직장까지 내팽개치면서 친가에 돌아갔다니. 하마터면 그런 좋은 사람의 면전에 대고 쓴소리를 내뱉을 뻔 했다.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구나.'

생각해보면 시설 폐쇄인지 뭔지 하는 일을 이홍선이 벌였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연구팀장인 그가 최고 직급인 것은 맞았지만, 그렇게나 인성이 바른 사람이 호국을 시설에 처박아두고 그런 일을 벌였을 것 같진 않았다.

분명 외적 요인이나 다른 누군가의 소행으로 벌어진 돌발 사태였으리라.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호국은 이두근 신임 연구팀장에게 이홍선 전 연구팀장의 연락처를 물었다.

"연락처 말입니까? 안타깝게도 이미 퇴사한 직원의 개인 정보는 규정상 타인에게 공개할 수 없거든요. ...이거 어쩌죠?"

정말 난처하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는 그에게 호국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연락처를 얻는다면 그에게 따로 안부 연락이라도 건넬 생각이었으나, 규정까지 어기고 싶진 않았다.

"혹시 이홍선 전 팀장에게 따로 용무가 있으신지......?"

"아, 그냥 안부라도 전할까 해서요. 일단 저한테 실험 보조를 맡기셨던 분이거든요."

호국은 23년을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특히 학창 시절에는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종종 맡기곤 하는 자잘한 심부름조차 호국에겐 맡기지 않았다.

군에 입대했을 때는 부려먹는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특별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본 기억은 없었다. 그나마 떠오르는 게 있다면 부모님을 도와드렸던 일 정도가 있겠다.

'생각해보면 부모님도 내가 일을 돕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으셨지.'

아들이 항상 뭔가 도울 일이 없나 기웃거리는 걸 부담스러워 하셨던 것 같았다. 실제로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차라리 실컷 놀아보라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점에서 이홍선 전 팀장에게 안부조차 건네지 못 하게 된 건 조금 아쉬웠다. 처음으로 자신을 믿고 일을 맡겨준 사람이 아니었던가.

호국이 눈에 띄게 축 쳐지자, 이두근은 측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자자. 이미 떠나간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원래 만남이란 게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아니겠어요? 이홍선 전 팀장을 대신해서 제가 있으니, 이제부터 서로 잘 해봅시다. 어때요?"

"저야 좋죠."

그의 말대로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호국은 이두근이라는 새로운 인연에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제가 왜 여기에서 자고 있었던 건가요? 전 분명 엘리베이터를 타고 B5로 올라왔던 것 같은데...이상하게 그 뒤부턴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더라고요."

"아아, 맞다! 사실은...엘리베이터 사고가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사고요?"

"예. 이홍선 전 팀장이 퇴사하고, 제가 새롭게 파견되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추락해 있더군요. 추락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호국씨가 정신을 잃고 있었기에 제가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세상에...큰일 날 뻔 했네요."

그렇죠, 그렇죠. 그는 몇 번이고 맞장구를 치면서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혹시 자신이 큰 부상을 입어서 그런 건가 싶어 호국은 전신을 빠짐없이 훑어보았지만,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아, 부상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벼운 타박상과 뇌진탕 증세가 있었지만...우리가 어디서 일하는 사람들입니까? 직원의 복리후생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TF의 직원들입니다. 당연히 말끔히 치료해드렸죠."

"진짜 다행이네요. 어디 부러지기라도 했으면 꼼짝없이 일도 못 하고 누워있어야 했을 텐데."

"하하, 듣자하니 호국씨는 꽤 열심히 일을 한다던데...이참에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요?

"에이. 그건 아니죠. 저희 부모님이 그러셨는데 사람은 벌 수 있을 때 벌어둬야 한다더라고요. 젊어서 열심히 일하면 나중에 다 보상받는다고 그랬는데 쉴틈이 어디 있어요?"

"보기드문 일 중독자군요. 하지만 TF에선 가장 사랑받는 타입이기도 해요. 솔직히 그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즐겁게 일을 하신다는 점이 참 부럽습니다."

그는 열정을 가지기엔 이미 아저씨가 되어버린 자신을 탓하며 호국을 칭찬했다.

칭찬은 한낱 짐승도 재주를 부리게 만든다고 했던가? 마침 컨디션도 회복됐겠다, 호국은 당장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전 이미 충분히 쉰 것 같은데, 혹시 제 장비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벌써 일을 하시려고요? 그러지말고 하루 이틀 정도는 더 쉬면서 상태를 보는 게......"

"일 쉬면 그만큼 월급에서 깎이잖아요."

"그건 제가 상부에 잘 말해서 최대한 피해 받는 일 없도록......"

"그러면 너무 죄송하죠. 그냥 일 할게요."

어떻게든 호국을 방으로 되돌려보내려던 이두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국은 기어이 복도를 걸어 B5의 모니터룸에 도착했다.

'그러지 말고 좀 더 쉬죠!' 라며 이두근이 호국의 뒤를 따라나섰지만, 일을 하고자 하는 호국의 노예 근성 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와...사람이 굉장히 많네요."

이홍선 전 팀장과 만날 때만 해도 시설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줄은 몰랐다.

그런데 막상 진짜 전문가들의 일터에 발을 들여놓으니,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면서 직장인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은 대부분 이두근처럼 흰 가운을 걸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옷차림의 사람들이 호국의 시야에 들어왔다.

흰 가운과는 정반대 되는 검은 청소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자를 푹 눌러 쓴채, 흰 가운의 연구원들이 가져오는 자료들을 한데 모아두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들 중 한 명이 음침한 눈으로 호국을 바라보았을 때, 호국은 전신에 짜르르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멋있어......!'

검은색이라 확 튀지만 단조로운 디자인의 청소 작업복은 3D 직종에 종사하는 남성들이 선호할 만한 패션이었다.

저런 옷이라면 작업 중에 옷이 더러워져도 안심할 수 있었다. 마치 먼지를 털어내듯 가볍게 툭툭 쳐주면 그 어떤 오물이 묻어도 쉽게 떨어져 나올 것 같았다.

특히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핸드백 크기의 파우치는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다니기에 용이해보였다.

갑자기 전등이 나가버리면 멋지게 파우치의 지퍼를 열어서 손전등을 꺼내드는 것이다. 아니면 간식거리를 넣어둬도 나쁘지 않다.

마지막으로 호국의 취향이 적중한 건 작업복의 가슴팍에 부착된 마크였다.

마치 개미가 성난 것 처럼 머리를 처들고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하필 작업복에 개미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 최고의 디자인을 자랑했다.

누가봐도 나 노예요 하는 꼴이 오히려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으니까.

'나도...나도 입고 싶다!'

솔직히 보급 상자에서 슬쩍 했던 기동타격대 복장은 호국에게 살짝 불편한 감이 있었다.

안전성은 나무랄 데 없이 괜찮았지만, 아무래도 무게가 나가다보니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흘렀다. 그런 주제에 통풍이 좋지 않아 자주 세척하지 않으면 땀 냄새가 매우 심했다.

하지만 저 옷은 입기만 해도 편할 것 같고, 입고 작업한다면 직업정신이 더더욱 투철해질 것 같았다.

마치 경찰관에게는 제복이, 의사에게는 흰 가운이 어울리는 것 처럼.

호국이 그 옷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묻기 위해 다가가려던 찰나, 거대한 모니터 앞에서 작업하고 있던 한 연구원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ES 6-311이 B50 구역을 돌파! 요격 시스템이 먹히질 않습니다!!"

"B50 구역의 방화벽을 내려서 일단 길목을 차단해! 기동타격대가 아직 B49에서 준비중이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해!!"

"하지만...저 속도라면 방화벽을 내려도 금세 돌파할 겁니다!"

"그럼 뭐 어쩔 거야?! 기동타격대가 아직 준비가 안 끝났는데!"

B49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모니터 속에선 대체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군인들이 긴 복도를 바리게이트로 막고 있었다.

호국은 혹시 자신이 세상모르게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을 때 무슨 일이 터진 건가 싶어,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던 한 작업복 차림의 남자에게 물었다.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

"아무한테도 말 안 할테니까 저한테만 살짝 말해주세요. 제가 비밀 하나는 잘 지킨다니까요?"

"......"

"혹시 낯가림이 심하시면 적어주셔도 돼요."

마침 근처의 테이블에 있던 수첩과 펜을 집어 건네주었지만 상대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호국을 노려보기만 했다.

어쩌면 정말 단순하게 호국처럼 '낮은' 직급의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내용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호국은 일개 잡역부나 다름없는 가드였으니까. 이 범상치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호국은 개미만도 못한 존재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래서 출세 못 하면 서럽다더니......'

호국은 문득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실컷 깨지기만 했던 중대장이 떠올랐다.

그는 항상 진급에 목말라 있었다. 그게 어찌나 심했는지,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하지 못 하고 전역할 것 같아 매번 죄없는 병사들을 닦달하곤 했다.

특히 남들처럼 가상현실에 접속하지 못해 항상 눈에 들어왔던 호국을 미련한 놈이라느니, 나 중대장은 실망했다느니 등의 말도 안 되는 폭언을 퍼붓기 일쑤였다.

멋진 작업복을 입고 있는 상대 또한 호국이 자신과는 급이 맞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고 일부러 무시하는 듯 했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으니 호국의 예상은 꽤 정확했다.

'어쩔 수 없지.'

자신 같은 하급자는 상대하기도 싫다는데 별 도리가 있나.

하는 수 없이 호국은 바쁘게 돌아다니는 연구원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CCTV 영상들을 직접 살폈다.

그리고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했다.

지가 무슨 해적왕도 아니고 밀짚 모자를 쓴 미친 놈이 닥치는대로 시설을 다 때려부수고 있었다.

"...저 씨부럴 놈이?"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느냐면, 평소 험한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호국조차 무심코 육두문자를 내뱉을 정도였다.

호국은 자신이 저 난장판을 다 치워야 해서 짜증 나는 게 아니었다.

하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관리미숙에 의한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치욕감을 느낀 것이다.

만약 꼰대 기질이 다분한 높으신 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가드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시설이 이 모양 이 꼴 아니냐고 타박을 줬을 것이다.

일은 저 놈이 저질렀는데 왜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이란 말인가?

호국은 차라리 발가벗고 도로 위를 질주하는 게 덜 부끄러울 것 같았다.

조용히 분노를 태운 그는 자신을 뒤따라온 이두근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장비, 돌려주세요."

이두근은 식은땀이 멈추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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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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