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52화 (52/209)

경비 업무 일지 : 10일째(3)

대부분의 주변인들은 호국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호국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저 길을 걷다보면 쉽게 볼 수 있는 행인 A처럼 존재감이 적으면서, 지능마저 살짝 떨어지는 바보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런 호국에게도 놀랄 만큼 대단한 짬이 있었으니, 바로 게임으로 갈고닦은 추격, 혹은 도주전이었다.

흔히 1인칭 슈팅게임(FPS)를 하다보면 주인공이 갑작스럽게 위기에 처하거나, 반대로 악당을 쫓게 되는 돌발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게임 속 러시아 특수부대원이 핵배낭을 짊어지고 도망치는 테러리스트를 잡기 위해 30분에 달하는 추격전을 벌였던 것은 호국의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프랑스 경찰들이 방해하고, 테러리스트의 조력자들이 몸을 내던지면서 주인공의 추격을 저지했지만, 결국 주인공은 테러리스트를 붙잡는 것에 성공한다.

실제 추격전이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왜 게임 이야기가 나오느냐고 묻는다면, 호국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추격 방식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자세를 바로잡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점프는 가능한 적게 해야 해.'

복도에 마구 널부러진 크고 작은 장애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대로 아래를 보고 달리지 않으면 뭐 하나 밟고 데굴데굴 구르기 딱 좋은 지뢰밭이었다.

하지만 호국은 단 한 번, 복도의 풍경을 눈으로 스캔하고 뇌에 각인시키는 것 만으로도 발을 디딜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을 확보했다.

무리하게 점프를 해서 자세가 흐트러지는 일 없이, 변함없는 움직임으로 달려 장애물 지대를 통과했다.

이는 재미있게도 군 시절에 행보관 때문에 수없이 산길을 오르내려야 했던 호국이 지닌 또 다른 능력이기도 했다.

'좋아, 이 속도라면 저 놈이 아래로 도망치기 전에 붙잡을 수 있어.'

헐레벌떡 도망치는 농사왕은 팔 다리가 긴데다 쓸데없이 가늘기까지 했다. 튼튼한 근육과 관절이 받쳐줘야 팍팍 달려나갈 수 있으니, 농사왕의 움직임이 더딘 것도 당연했다.

우선 스카프처럼 치렁거리는 거적데기를 붙잡아 바닥에 패대기를 쳐줄 것이다. 자고로 도주 끝에 붙잡힌 놈들은 꼭 주인공에게 한 두대씩 맞는 법이었다.

티 안나게 때리면 뭐라고 할 사람도 없으리라.

'이제 7m.'

수식을 이용한 계산에는 매우 취약한 호국이었지만,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계산에는 매우 강했다.

슬쩍 보기만 해도 자신과 상대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앞으로 몇 걸음을 더 뛰어야 붙잡을 수 있는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야! 지금 잡혀주면 살살 때릴게!"

총도 살살 맞으면 안 아프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었다. 하물며 전류가 조금 흐를 뿐인 진압봉을 살살 휘두른다면 솜방망이나 다름없게 느껴질 터.

그러나 농사왕은 호국의 매력적인 제안을 듣고도 고개를 살짝 틀어 한 번 흘겨봤을 뿐, 멈추기는커녕 양 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콘크리트와 강철 파편을 미친듯이 흩뿌렸다.

낫과 괭이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굴삭기로 파괴한 것 처럼 너무나도 쉽게 바스러졌다.

무엇보다 터져나오는 파편의 양이 거의 칼날 폭풍 수준이라 열심히 달려오고 있던 호국은 파편 세례를 그대로 뒤집어 써야 했다.

믿고 쓰는 기동타격대 장비가 아니었다면 벌써 호국의 몸은 파편으로 인해 너덜너덜해졌을 것이다.

"야! 이제 살살 기회권은 날아갔어! 잡히면 좀 아프게 때릴 건데 괜찮겠어?!"

말 안 듣는 짐승에겐 매가 약이라고, 상대가 굳이 짐승이 아니어도 매가 약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한쪽 팔을 들어 목덜미만 가린 호국은 파편의 세례를 정면으로 뚫고 나아갔다.

보호 장구와 헬멧을 거칠게 두들기는 파편들 덕분에 근육통은 확정이었지만, 자신도 당한 만큼 되갚아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머리, 어깨, 발, 무릎, 발 순으로 때려준다.'

B50의 저위험군 복도 끝에 도달한 농사왕은 아래로 뻥 뚫려있는 구멍에 냅다 뛰어들었다. 처음부터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천장을 뚫고 올라왔던 것이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저 구멍을 막으려면 호국도 작정하고 진압봉이 아니라 삽을 들고 작업에 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지하 시설에 중장비를 가져올 수는 없으니 맨몸으로 시멘트 팍팍 퍼서 공구리를 쳐야할 것이다. 대충 흙과 모래부대를 쌓아 임시 벙커를 만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작업이다.

'그래도 구멍은 하나 뿐이겠지? 생각이 있다면 B51 전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을거야!'

기이하게도 발가락은 없는 놈인데 손가락은 멀쩡하게 다섯 개 붙어있는 놈이었으니 틀림없이 엘리베이터를 탔을 것이다. 반드시 탔어야만 한다.

군에서 배운 낙법을 지금 아니면 언제 써먹겠냐는 심정으로 과감하게 몸을 던진 순간, 아래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통만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쓰으으읍?!"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놈을 뒤쫓고 있었기 때문일까,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호국은 낙법을 취해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개구리처럼 접었던 다리를 힘껏 펼쳤다.

럭비공처럼 옆으로 튀어오른 몸은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는 콘크리트 조각과 완전히 멀어졌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운 호국은 목을 좌우로 흔들면서 뻐근한 근육을 풀어주었다.

"지금 막 좀 아프게권도 날아갔어. 이제 존나 아프게 밖에 안 남았네?"

호국이 경고를 하건마건, 농사왕은 그 이상 다가오면 따끔하게 찔러주겠다는 듯이 낫의 날끝을 겨눴다. 그 손은 어째서인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호국의 걸음걸이가 멈출 기색이 없자, 농사왕은 다시 한 번 괭이를 골프채마냥 휘둘러 콘크리트 조각을 날려보냈다.

벽이나 천장도 아무렇지 않게 박살내던 괭이의 힘으로 날려보내는 콘크리트 조각은 감히 인간의 눈으로 좇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눈썰미 좋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호국도 직감적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어 피하려 했으나, 오히려 목이 반대로 꺾이며 왼쪽으로 피하고 말았다.

순간 자신의 뇌가 너무 멍청한 나머지 피해야 하는 방향도 햇갈린 게 아닌가 싶었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든 콘크리트 조각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호국의 오른쪽으로 스쳐지나갔다.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피하긴 피했다.

"...봤냐? 이게 피.지.컬이다."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콧대가 높아진 호국은 진압봉을 위협적으로 붕붕 휘둘렀다. 중간중간 스위치를 눌러서 전류를 흐르게 만들자 꼭 야광봉을 들고 설치는 걸그룹 사생팬처럼 보였다.

항복해서 광명 찾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으니, 이제 지엄하고도 엄격한 호국의 판결만이 남았다.

입주자가 시설 관리에 비협조적이라면 가드가 좀 팬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나.

'우선은 다리!'

혹시라도 다시 도주할 것에 우려해 호국은 날렵하게 파고들어 농사왕의 다리를 노렸다.

요즘 의학 기술이 좋아져서 어디 한 군데 부러져도 금세 낫는다. 우선 다리부터 제압한 다음에 대가리를 깨부숴도 늦지 않았다.

"꼭 보험처리 해라!"

드라마의 주인공이나 내뱉을 법한 대사를 외치며 달려든 순간, 농사왕은 느닷없이 낫을 휘둘러 자신의 몸을 정확히 이등분 해버렸다.

농사왕의 하반신과 상반신이 서로 분리된 순간, 하반신은 폴짝 뛰어올라 호국의 일격을 피했다. 호국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는 틈을 타 상반신은 낫과 괭이를 휘둘러서 바닥을 기어 도망쳤다.

"...늘었어?"

한 명의 범죄자가 1+1 행사 상품으로 바뀐 순간 호국의 사고는 정지해버렸다.

이 경우, 하반신과 상반신 중 어느쪽을 먼저 잡아야 하는지 햇갈렸던 것이다.

도주의 우려가 있으니까 하반신부터? 반드시 깨부숴야 하는 대가리가 달린 상반신? 엄마와 아빠 중 누가 더 좋냐는 질문을 받은 것 마냥 혼란스러웠다.

IQ가 절망적으로 낮은 호국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인지부조화를 일으켰다.

무슨 도마뱀 꼬리 자르기 전술도 아니고, 상반신과 하반신을 분리해서 도망치는 미친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호국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농사왕의 다리가 현란한 움직임으로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어딜 어떻게 봐도 자신부터 먼저 잡으라고 유혹하는 광경이었다.

그렇다고 하반신에게 달려들면 쉽게 잡을 수 있을까? 그건 또 아니다.

무게가 절반 이상 줄어든 두 다리는 깃털처럼 가벼워진 나머지 스스로의 민첩함을 주체하지 못 하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

'좋은 작전이었지만 나한텐 어림도 없지!'

눈 앞에서 날뛰는 하반신을 붙잡을지, 벌써 저 멀리까지 도망친 상반신을 잡을지 무려 30초나 고민한 결과였다.

호국은 망설임없이 하반신을 지나쳐 농사왕의 진짜 몸뚱아리를 추격했다.

하지만 농사왕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하반신으로 계속 시간을 끌 수 없을 거란 사실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 멀쩡하던 다른 은폐실의 문을 마구 박살내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 그건 부수면 안 돼!!"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호국이 놈을 제지하기도 전에 B51의 입주자들이 하나둘씩 복도로 나오기 시작했다. 웬 미친놈이 아파트 전체의 초인종을 누르고 튄 것 만큼이나 대단한 반응이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ES 6-100 이었다.

굳게 닫혀있던 격벽이 산산조각난 순간, 6-100은 등 뒤에 짊어진 집과 함께 기어나왔다. 작은 승용차와 맞먹는 크기의 소라게가 6-100의 정체였다.

여기저기서 뻥뻥 터지는 소리와 파편들이 마구 휘날리고 있는 것이 어지간히도 불만스러웠는지, 입가에선 게거품이 뚝뚝 흘러내렸다. 거대한 집게가 찰칵찰칵 움직일 때 마다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저렇게나 큰 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집게발이라면 과연 얼마나 많은 양의 살을 뽑아낼 수 있을지, 무심코 게 먹방을 하는 상상에 소름이 돋아버리고 말았다.

'신선도를 유지하려면 이런 환경은 안 좋아.'

ES 6-100의 방 안에 마련된 수영장 같은 거대 수조가 보였다.

호국은 지나가는 길에 옆차기를 날려 소라게를 안으로 밀어넣었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것 치곤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게는 집게 말곤 먹을 게 적다는 말이 아주 틀린 게 아닌 모양이었다.

소라게를 무사히 귀가(?) 시킨 호국은 차례차례 박살난 문을 통해 얼굴을 내빼는 자들에게 소리쳤다.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그러다 다칩니다!!"

하지만 호국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용수철로 구성된 목을 쭈욱 내밀고 있던 광대가 기계로 된 입을 쩌억 벌렸다.

스피커가 내장된 입에서 막 음악이 흘러나오려는 순간, 호국은 망설임없이 그의 안면을 후려쳐 다시 안으로 밀어넣었다.

한창 사고가 터지고 있는데 하지 말라는 걸 하는 양반들이 꼭 있다. 마치 비가 온 직후에 계곡에 가지 말라고 해도 굳이 가서 사고를 일으키는 피서객들처럼.

졸지에 스피커에서 지직거리는 노이즈음만 흘러나오게 된 광대는 자신의 화려한 방 안에서 허우적거렸다.

대체 어디에 쓰이는 건지 모를 각종 날붙이와 서커스용 도구들이 즐비했는데, 광대를 표방하고 있는 ES 6-103에게 딱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당연하지만 작위적인 서커스 보단 자연스러운 마술에 더 흥미가 있는 호국은 6-103 따위를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이미 B51의 고위험군 복도 끝에 도달한 농사왕을 서둘러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기물이 파손됐다면서 내 월급을 깎는 일은 없겠지? 그런 일은 없어야 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호국과 농사왕 간의 추격전에서 발생한 기물파손은 호국이 그대로 뒤집어 쓸 가능성도 있었다.

'아직 받지도 못한 첫 월급을 이렇게 허무하게 날릴 순 없지!'

괘씸하게도 농사왕은 B51의 바닥에도 구멍을 파두었다. 무슨 두더지도 아니고 구멍 페티쉬라도 있는건지 집요하게 구멍만 찾아들어가는 모습이 짜증을 배로 유발했다.

그래도 다리가 없어 아래로 떨어지면 충격으로 쉽게 움직이지 못 할 것이 분명했다.

서둘러 놈이 떨어진 구멍으로 다가선 호국은 혹시 모를 2차 기습에 대비해 먼저 아래를 살폈다.

"......"

배를 까뒤집은 채 버둥거리고 있는 바퀴벌레.

바퀴벌레의 따스한 품 속에 파묻혀 마찬가지로 버둥거리고 있는 농사왕(2분의 1).

자다 깬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호국은 본능적으로 분출하려는 위액 마그마를 간신히 잠재웠다. 뭘 먹었더라면 구토 봉지를 꺼내기도 전에 속을 게워냈을 것이다.

호국은 저 아래에서 서로 부비부비 댄스를 추고 있는 것들에게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대체 왜 빌어먹을 바퀴벌레가 B52의 저위험군을 기어다니고 있었는지. 왜 하필이면 농사왕이 바퀴벌레 위로 떨어져 진한 허그를 하고 있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묻고싶지도 않았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너무나도 선정적인 광경에 혀를 내두르고 있던 호국은, 문득 벌렁 뒤집어져 버둥거리고 있는 바퀴벌레가 무언가를 입에 물고 있음을 알았다.

그건 식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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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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