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53화 (53/209)

경비 업무 일지 : 10일째(4)

못 본척 하고 아래로 뛰어내려서 둘다 함께 황천길 급행 코스로 보내버리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호국은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체액'이 사방팔방 튈 것이다. 차라리 층마다 뚫려있는 구멍을 메우는 게 낫지, 벽이며 천장에 튈 대량의 체액은 도저히 치울 자신이 없었다.

더럽다거나 무서워서 건드리지 못 하한다는 이유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발 아래에서 벌어지는 지옥 같은 광경을 마냥 지켜볼수만은 없었다.

호국은 때마침 자신의 옆에 다가와 선 농사왕의 하반신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스쿼트를 하듯 무릎을 오므렸다 펴면서 방정을 떨어댔다.

한 몸뚱이였다면 모를까, 다리밖에 남지 않은 하반신은 더이상 호국에게 큰 흥미를 끌지 못 했다.

"나중에 접착제로 붙여줄테니까 가만히 좀 있어."

정신사납게 하는 하반신을 내버려두고 훌쩍 뛰어내린 호국은 힘껏 도약하며 풀스윙으로 진압봉을 휘둘렀다.

찍어내렸다간 대참사가 벌어질테니, 농사왕의 머리통만 날려버릴 작정으로 진압봉의 궤도를 비스듬하게 수정했다.

전류가 흐르는 진압봉이 농사왕의 트레이드 마크인 밀짚모자를 후려 갈기기 직전, 놈은 양 팔로 안아든 바퀴벌레와 자신의 위치를 갑자기 바꿔버렸다.

바퀴벌레의 매끄러우면서도 튼튼한 등짝지에 진압봉의 튕겨나가는 순간. 호국의 자세가 흐트러진 것을 확인한 농사왕이 바퀴벌레를 있는 힘껏 밀어버렸다.

'앗, 아아......!'

차마 입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절규.

자신과 비슷한 키의 특대 바퀴벌레를 꽃다발처럼 안아들게 된 호국은 충격과 함께 복도 끝으로 튕겨나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남자(?) 품 속에 안겨있던 것이 이번에는 호국의 품 안에 안착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거부반응은 호국의 이성을 붕괴시키기에 충분했다.

"으아아아아아! 씨발!!"

크기는 쓸데없이 크고, 등딱지는 이상하리만치 매끈거린다. 보호 장구를 갖춘 덕분에 직접적인 신체 접촉은 없었지만, 그래도 무게감 만큼은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면 좀 무거운 사람이 올라탔나 싶었겠지만, 인간만한 크기의 바퀴벌레를 두 눈 똑똑히 보고 말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강제로 떠안게 되었다.

'내 피지컬은 대체 어디 간건데?!'

자신도 눈치채지 못 했을 만큼 대단했던 피지컬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고, 대신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들이 호국의 뇌를 더럽히기 시작했다.

바퀴벌레가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말은 그렇게 해도 몸은 솔직한 걸?' 따위의 말을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지옥이야. 여긴 지옥이야......!'

한평생 클럽은커녕 친구 집에 가본 적도 없는 호국에게 타인과의 스킨십은 매우 희귀환 체험이었다.

그런데 몇 안 되는 스킨십 중 하나가 바퀴벌레와의 진한 포옹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뇌를 통째로 꺼내서 락스에 푹 절여놓고 싶었다.

무거워서 짜증나고, 기분 나빠서 짜증나고, 심지어 버둥거리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서 수십 배는 더 짜증난다.

매끈거리는 등딱지를 손으로 밀어내기 힘들어, 무릎으로 차올려서 단숨에 날려버렸다.

철푸덕! 하고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지자 혹시 '체액'이 터져나온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물론 고개를 들어 확인했을 때, 바퀴벌레는 더듬이를 미친듯이 흔들면서, 초고속으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마치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호국은 슬그머니 진압봉으로 천장의 구멍을 가리켰다. 도망칠거라면 얼른 사라지라는 의도였는데, 기가막히게 알아먹은 바퀴벌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이 난리통에도 식빵은 물고 갔네.'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유뉴브(Younoob) 애청자인 호국은 바퀴벌레가 극심한 위기를 느낄 때 알을 깐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옷에 알 같은 건 안 묻어있는데...혹시 모르니까 일 끝나면 이 장비들은 싹 태워버리자.'

찝찝하다.

입고 있는 것 만으로도 왠지 몸 안에서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 같은 불안감에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 용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호국에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너 예쁘다, 라고 말만 해도 성추행으로 신고 당하는 세상인데.

하물며 특대 바퀴벌레를 던져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안겨주었으니, 그 죄가 멸문(滅門)을 당해도 모자람이 없다.

손에서 놓친 농기구를 다시 잡기 위해 엉금엉금 기어가는 녀석의 등 위로 호국의 엘보우 드롭(elbow drop)이 꽂혔다.

쾅!

바닥이 잘 튀어오르는 플라스틱 합판도 아니고, 무려 콘크리트에 합금강판이 덧씌워진 복도 위에서 들어간 엘보우 드롭이었다.

자신의 몸을 반으로 쪼개면서까지 추하게 도망치려 했던 사고뭉치는 호국의 기습적인 한 방에 녹다운 당했다.

사실 고작 한 방으로 끝내기엔 너무 아쉬운 감이 있었다.

호국은 천장의 구멍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하반신에게 소리쳤다.

"잘 보고 있어! 지금부터 네 상반신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똑똑히 보여줄테니까!!"

사람을 상대로 실전에서 써먹은 적은 없었지만, 행보관으로부터 유용한 기술들을 잔뜩 배웠다. 그중 하나가 바로 상대를 능욕하는 기술이었다.

우선 양 팔을 붙잡아서 등 뒤로 꺾은 뒤, 발로 살포시 등을 짓밟아주기만 하면 된다. 초보자도 방법만 알면 쉽게 할 수 있다.

단 너무 심하게 하면 척추나 어깨가 골절될 우려가 있으므로 중간중간 팔을 풀어주면서 다양한 기술로 전신을 주물러주는 게 포인트다.

이번에는 농사왕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힘껏 조르면서 다른 팔의 관절을 꺾었다. 숨이 막히는데 팔까지 꺾여서 이중으로 고통스러운 기술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숨을 쉬지 않는' 농사왕은 고통을 느끼지 않았지만, 이미 열이 바짝 오른 호국은 사소한 것 따윈 신경쓰지 않았다.

"등짝, 등짝을 보자."

엘보우 드롭을 먹였던 자리에 또 엘보우 드롭을 먹이는 건 살짝 양심이 찔렸다.

그래서 손가락의 중지를 뾰족하게 세운 주먹으로 마구 문질러서 전기 마사지를 먹였다.

이렇게까지 하면 비명이라도 내지를 법 하건만, 농사왕은 고문에 굴복하지 않는 저항운동가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육체적 고통만으론 자신이 받은 모욕감을 갚아주지 못 한다는 걸 알아차리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호국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일전에 엘리베이터에서 갇혔던 경험 때문에 편의점에서 산 것이었다.

"이게 눈 앞에서 타들어가도 멀쩡할 수 있나 보자고."

농사왕에게서 밀짚모자를 강제로 벗겨낸 호국은 라이터의 불꽃 끝에 가져갔다.

밀짚모자가 벗겨진 농사왕은 별 다른 반응이 없었던 조금 전과는 달리, 크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음부터 눈이 있지도 않았던 검은 눈구멍이 크게 커지더니, 긴 팔을 허우적거렸다.

어떻게든 밀짚모자를 넘겨받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은 묘한 자극을 불러 일으켰다.

라이터의 불꽃이 밀짚모자에 닿을 것 같으면 눈구멍이 커졌고, 멀어지면 눈구멍이 작아졌다.

할로윈 호박처럼 양옆으로 기괴하게 찢어진 입도 크게 벌어졌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괘씸한 놈에게서 효과적인 약점을 잡았다. 호국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위로 올라가서 경위서부터 쓸까?"

호국이 짧은 인생 경험으로 알아낸 것이 하나 있다면, 모든 사회인들은 경위서 쓰는 걸 끔찍이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민둥머리가 된 농사왕에게 수갑을 채운 그는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하반신도 함께 동행할 것을 명령했다.

호국에게 붙들려 질질 끌려가는 상반신과 그 뒤를 졸졸 따라가는 하반신은 여과없이 CCTV를 통해 외부에 송출되었다.

정확히 24분 하고도 31초만에 농사왕 대탈주(미수) 사건은 어이없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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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웨에에에엑!!"

전투기 조종사가 쓰는 헬멧과 비슷한 형태의 VR기기가 벗겨지며 사용자가 속을 게워냈다.

"게에에엑...카흑!"

굳게 닫혀있던 격벽이 열리고,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어오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무슨 미라도 아니고, 전신에 온통 흰색뿐인 제복을 껴입은 남자들이 쓰러져 신음하고 있던 소년의 몸을 강제로 붙들어 일으켜 세웠다.

그들 중 한 명이 손가락만한 조명을 사용해 소년의 안구를 확인했다. 안구가 빛에 반응하는 것을 확인한 그는 CCTV를 향해 OK 사인을 보냈다.

직후, 제법 연로한 노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실험체-7423. 아직 실험을 시작한지 3분 밖에 되지 않았다. 다시 뇌파 공유기를 착용하도록. 휴식시간은 없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도 아닌, 어딘가 먼 곳에서 CCTV로 지켜보고 있을 뿐인 남자가 스피커를 통해 강압적인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그의 말대로 실험은 시작된지 고작 3분 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의 허가가 떨어지거나, 혹은 무언가 '성과'가 있기 전까지 실험이 종료될 일은 없었다.

아니면 지칠대로 지친 왜소한 체구의 소년이 죽어버린다면 누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실험이 끝나겠지만.

실험체-7423이라는 코드네임을 부여받은 소년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어깨를 붙잡아 강제로 의자에 앉히는 '상황대응반' 대원들은 그저 상층부에서 시키는대로 명령에 따르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 역시 스피커 너머의 남자가 시키는대로 이곳에 앉아 몇 번이고 뇌를 혹사시켜야 했다. 일반인이라면 뇌를 전자레인지에 넣은 것 마냥 펑 터져버렸을 만큼 끔찍한 실험에 기약없는 성과를 얻어내야 했다.

"실험체-7423, 다시 '접촉' 한다. 준비하도록."

침과 토사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소년을 억지로 의자에 앉힌 흰 복장의 남자들은 널부러진 기계들을 다시 세팅했다.

"......"

눈 앞의 남자들에게 울고불고 매달린다고 한들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울고불고 매달려봤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혹시 자신을 불쌍히 여겨 하루쯤은 실험을 쉬게 해주지 않을까 싶어 일부러 자해한 적도 있었다.

결과는? 구속구에 묶인 채 반 강제로 12시간에 달하는 실험에 참여해야 했다.

눈앞에서 소년의 머리가 수박처럼 펑 터져나간다고 한들, 끈적거리는 뇌 조각과 피로 점칠되어도 그들은 무표정하게 고깃덩이로 전락한 소년의 시체를 치워버릴 게 분명했다.

-실험체-7423. 실험을 종료하고 싶다면 성과를 내라. 좀 더 깊게 '접촉' 하고, 정보를 캐내라. 현실의 너는 죽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죽는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소년은 입을 달싹이는 게 고작이었다.

소년이 실험대상의 머릿속에서 수천, 수만 번을 죽어나간다고 한들 실험을 중단해줄리가 없다. 오히려 그 현상마저 하나의 성과로 보고 실험을 강행할 가능성이 높았다.

내팽개쳤던 VR기기가 다시 소년의 머리에 씌워졌다. 가상현실에 접속할 수 있는 것은 다른 VR기기와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온라인 통신은 불가능했다.

인트라넷을 통해 직접 연결된 대상과 가상현실에서 접촉하는 게 전부였지만, 실험을 진행하는 입장에선 이보다 더 편한 것도 없었다.

우선 정보가 밖으로 새어나갈 일이 없으며, 실험체를 직접 투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리스크가 크게 줄어든다. 마지막으로 현실에서 관찰할 수 없는 특이한 정보를 뇌파로만 연결된 가상현실 속에서 확인할 수도 있다.

여기서 '확인할 수도 있다' 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자신의 뇌파로 구성된 가상현실에 상대를 초대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의 뇌파로 구성된 가상현실에 흙발로 무단침입을 하는 행위다.

그곳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적이며, 모든 것으로부터 공격 받는다. 또한 모든 것에 의해 철저히 배제 당한다.

-김미영의 기억이 필요하다. 그녀가 무엇을 봤는지, 무엇에 의해 살해당했는지. 마지막 기억의 편린을 끄집어내라.

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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