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경비팀 79기 >
"네가 무식하게 힘자랑만 하니까 애가 겁을 먹잖아."
호국은 마지막 남은 해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신입에게 따끔한 주의를 줬다.
그 많은 해피들을 싹 쓸어버린 후에도 신입은 뭐가 그리 마음에 안드는지, 힐끔거리는 눈짓으로 해피를 주시하고 있었다.
풀페이스 헬멧에 가려져서 신입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호국은 직감적으로 녀석이 뱀과 같은 눈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강자가 약자를 볼 때 흔히 나타나는 반응이다. 군대에서 여러번 봤다.
방금 전에는 손을 쓸 새도 없이 많은 해피들이 몰살당했지만, 마지막 남은 해피는 호국이 철저하게 가드했다.
덕분에 해피를 노릴 수 없게된 신입은 아쉬운듯 입맛을 다시며 한걸음 물러섰다. 아무리 멍청해도 호국과 직접 맞설 생각까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건 그렇고...시설 참 크네."
메뉴얼에도 이런 형태의 시설이 있다는 내용은 없었다.
작업하느라 바빠서 스마트패드도 위에 놔두고 왔다. 관리봇과 연결할 수 있었다면 이곳에 대해 물어봤을텐데, 문명의 이기와 단절된 기분은 실로 참담했다.
완만한 경사에서 가파른 경사로 접어든 일행은 쓰레기 매립지마냥 높게 쌓인 고철의 산과 마주했다.
수많은 전선과 기계장치, 그 틈을 억지로 파고든 살덩어리들이 잡탕처럼 마구 뒤섞여 있었다. 해피를 수천 마리 정도 가져다 버무려놓으면 딱 저런 느낌일 것 같았다.
"이게 전부 쓰레기라면 치우는데 일주일은 넘게 걸리겠는데?"
아까부터 스파크가 튀거나, 제멋대로 뻥뻥 터져나가며 박살나는 부품들도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생초짜가 치우기엔 힘들어보였다.
이런 산업폐기물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업체를 불러야 할 것이다.
자동화 공장에 종종 산업 폐기물을 처리하러 오는 업체를 본 적 있었기 때문에 그쪽 방면은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산업 폐기물만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사람들을 부른다고 해도 과연 이만한 양을 치워줄지 의문이었다.
얼핏봐도 공장 한 대분에서 나올 양이 아니다. 대형 화물 트럭이 수십 번도 넘게 왔다갔다 해야 할 만큼 끝이 보이지 않는 양이었으니까.
"야, 힘 좋은 신입. 네가 올라가서 쓰레기가 정확히 얼마나 쌓여있는지 확인하고 와."
언제는 자신이 하는 말을 귓등으로 듣지 않더니, 이번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경례를 해보인 신입이 고물의 산을 기어올라갔다.
막힘없이 파바박 기어올라가는 모습이 꼭 커다란 바퀴벌레 같아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호국은 자신의 옆에서 얌전히 앉아있는 해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봐둬 해피야. 저게 무식하게 힘만 센 사람이 겪게될 고통이야."
앞으로 두고두고 신입을 깔 생각에 호국은 흐뭇한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고물더미의 정상에 올라선 신입이 고물더미의 뒤쪽을 살피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살펴보는 걸 봐선 시야에 들어오는 쓰레기가 전부가 아닌 모양이었다.
'진짜 어마어마하게 쌓여있나본데......'
괜히 추가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나와서 상층부에 깨지기라도 했다간 하루종일 식욕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직접 확인해보고, 최대한 전문처리기사를 통해 처리하지 않아도 될 영역을 구분해두기로 했다.
고생은 좀 더 하겠지만, 예산 문제로 비난받으면 승진도 물 건너간다는 사실쯤, 호국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매일 실망하는 중대장이 한푼이라도 더 아껴보겠다고 바짝 쪼아댔던 거 생각하면...어휴.'
그땐 몰랐는데, 이제는 자신이 중대장의 처지가 되어 실적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사회 생활의 쓴맛을 톡톡이 맛보고 있던 와중, 갑자기 신입이 폭발적인 점프력으로 산 정상에서 뛰어내려 호국의 앞에 착지했다.
'가만보면 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IQ 84인 자신보다야 낫겠다마는, 앞뒤 안 가리고 몸부터 쓰고보는 무식함에는 호국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국의 내적 평가가 어떻게 되든, 신입은 위에서 가지고 온 것을 대뜸 내밀었다. 그건 족히 10년은 넘었을 법한 낡은 스마트패드였다.
"이건 왜 가지고 왔냐? 이런 건 평화나라에 내놔도 아무도 안 사갈걸."
중고 제품이라면 클래식부터 최신품까지, 상태가 안 좋은 것 부터 새것이나 다름없는 것까지 가리지 않는다는 평화나라 유저들도 이건 마다할 것이다.
그도그럴 것이 너무 낡기도 낡았지만, 스마트 패드의 뒷면에 살덩어리 같은 게 붙어있었다.
말랑말랑해서 그립감은 괜찮았지만, 모두가 호국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할리는 없다.
'이걸로는 Younoob도 못 보겠는데?'
요즘은 가상현실 스트리머의 방송을 보려면 어지간한 해상도로는 만족스럽게 볼 수 없다.
호국이 대리점 직원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3년 약정으로 계약한 기종도 이것보단 훨씬 괜찮았다.
대충 먼지를 털어내니 의외로 기계 자체는 멀쩡했다. 낡고 칠이 벗겨지긴 했지만, 깨진 흔적이 없는 것 만으로도 가산점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전원 버튼에 손이 올라간 순간, 액정이 밝은 빛을 뿜으며 안구 테러를 감행했다.
"윽!"
-사용자 확인. ID : TL(team leader)-079. 모든 등록 절차 무시. 사용자 등록 완료.
눈을 비벼대던 호국은 흘려넘길 수 없는 발언에 실눈을 뜨고 스마트패드를 살폈다.
낡은 액정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활짝 웃고 있는 표정이 어울리는 노란색 이모티콘이었다., 시대에 뒤떨어지긴 했지만, 그건 분명 스마일 아이콘이었다.
"...이건 또 뭐야?"
-반갑습니다. 그리고 살려주십시오.
뜬금없는 인사와 애원에 호국은 헛웃음을 흘렸다.
"난 기계를 살리는 능력따윈 없어."
보아하니 웬 미친 AI가 낡은 기계 속에 갇혀있는 것 같아, 호국은 미련없이 스마트패드를 던지려 했다.
길바닥에서 물건을 함부로 줍는 게 아니라더니 그 말대로였다. 재수가 없으려나 싶은 참에, 스피커를 통해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생의 의미가 아닙니다! 저를 도와달라는 의미였습니다!
듣고보니 아주 미친 것 같지는 않아서 던지는 건 잠시 보류했다.
호국이 스마트패드를 던지는 순간 달려나가기 위해 자세를 잡은 해피와 신입이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건데? 그리고 왜 널 도와야 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제가 LA 연구시설에서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제가 창조된 계기는 이 넓고 복잡한 시설을 시공하는 과정에서 불안정한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키지 않도록 제어하기 위한 것으로, 현재 시설을 관리중인 6-FM의 초기형 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신나간 AI가 주둥이를 나불대기 시작한 게 5분을 훌쩍 넘었을 즈음, 호국은 그냥 스마트패드를 반으로 쪼개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여, 저는 이 시설의 지하 깊숙한 곳에 잠들게 된 겁니다.
"이제 내가 감상문 쓸 차례야?"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전후사정을 확실히 설명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저를 버릴까 걱정된 나머지......
'지금도 충분히 버리고 싶다고 말하면 상처받겠지?'
가능하면 물리적으로 상처 입혀서 두 번 다시 보고싶지 않은 상대였지만, 끔찍할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 때문에 Prot. 6-FM이 내뱉은 말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무려 12년 간 '혼자' 였다고 했다. 이 쓰레기들 밖에 없는 공간에서 오랫동안 고독을 달래고 있었을 녀석의 사정을 듣고도 측은함을 느끼지 않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여기는 해피도 있었고, 지렁이처럼 생긴 녀석들도 있었는데?"
-저는 모르는 존재들입니다.
딱 잘라서 부정하는 녀석의 태도에 호국은 바로 납득했다.
애초에 스마트패드 안에 갇혀있던 녀석이 이렇게 활동적인 놈들과 친하게 지냈을리가 없다. 당장 해피만 봐도 언제 스마트패드를 던지나 싶어 꼬리를 흔들면서 기다리고 있지 않나.
"그래, 네가 불쌍하게도 제작자에게 버림받아서 이곳에 12년간 잠들어 있었다는 건 잘 알겠어. 그런데 내가 널 데리고 가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절대로! 문제될 일은 없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개인용 비서 AI를 소지하는 사람들은 지천에 널렸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들의 특권! 유행! 당신은 저를 개인 비서로 삼는 것 만으로도 이 시대의 트렌드를 선구하는 대표주자가 되는 겁니다.
듣고보니 솔깃하다.
"그...내가 개인 비서 같은 걸 둔 적이 없어서 그런데. 정말 다들 가지고 다니는 거야?"
-두말하면 스피커가 아픕니다. 현재 개인용 비서 AI를 사용하는 인간은 지구 전체 인류중 약 30%에 달합니다. 가상현실이 보편화된 지금, 인간이 할 일도 개인용 비서 AI에게 맡겨두면 손 하나 까딱할 필요 없이 대신 처리합니다. 더욱이 이런 시대임에도 아직 개인용 비서 AI를 둔 인간이 30% 밖에 안 됩니다. 당신은 적어도 지구상에서 상위 30%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듣고보니 말이 된다.
지구상에서 약 70%는 가지지 못한 것을 호국이 가지게 된다면 그들을 앞지른다는 표현도 아주 틀린 건 아니니까.
-빡빡한 업무에 지쳐있진 않으십니까? 걱정마십시오, 제가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하는 것도, 꼭 놓치고 싶지 않은 드라마 녹화도, 익명으로 인터넷에서 분탕질을 저지르는 것도, 모두 제가 대신 해드릴 수 있습니다!
팔랑팔랑 흔들리던 호국의 귀는 결국 Prot. 6-FM이 '아주 뛰어난' AI 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직접 부르지 않으면 튀어나오지도 않는 시설 관리봇이나, CCTV로 뻔히 지켜보고 있음에도 도움을 주지 않는 B5의 연구원들. 그들보다도 이 개인용 비서 AI가 훨씬 더 뛰어날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호국의 가슴에 화살을 때려박은 것은 마지막 한 마디였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보고서도 제가 대신 작성해드릴 수 있습니다.
합격.
매일매일 경비 업무 일지를 쓰느라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던 호국은 구원투수의 등장에 속으로 함성을 내질렀다.
이거지. 이게 바로 최첨단 차세대 AI다. 어디서 뭘 하는지 처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 하는 관리봇과는 완전 딴판이다.
"너도 이제부터 79기 경비팀 소속이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이 찡긋 윙크 하는 이모티콘으로 바뀌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혹시 여기서 나가는 방법 알고 있냐?"
-전력이 차단되어 현재는 작동하지 않는 작업용 엘리베이터가 한 대 있습니다만, 저를 데려가주신다면 즉시 원격으로 전력을 복구해서 밖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오, 능력있는데? 어느 AI랑은 완전 달라."
-제가 비록 초기형이긴 해도 그런 족보없는 것보다야 훨씬 더 낫습니다. 저를 고르신 걸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단 두 명밖에 없었던 이름뿐인 경비팀에 경비견 하나와 비서 AI가 합류하는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