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휴가(1) >
호국이 TF에 입사해 제 6 처리시설의 경비로 일한지도 벌써 18일째를 기록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구덩이에 빠진 날 이후, 호국은 농사왕을 부려먹거나, 가끔 복구 작업을 손을 거들기도 하면서 다소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복구 작업이 한창 진행중인지라 누구도 호국에게 순찰 업무를 최우선시 하라는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B41부터 B49까지의 층을 순회하며 간단하게 순찰 업무를 끝내곤 했다.
물론 농사왕이 생각보다 열심히 일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관리봇의 계산에 의하면 시설 전체 복구까지는 앞으로 한달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꿀을 빨 수 있는 기간이 생각보다 적다는 사실에 실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1개월에 딱 한 번 나갈 수 있다는 개인 휴가를 떠올렸다.
TF산하의 모든 시설은 경비 인원을 맞추기 어려워, 경비가 개인 휴가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예를 들어 6월 15일에 휴가를 나가고자 한다면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얘기해야 했다. 사전 신청 기간도 기간이지만, 시설 관리자가 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휴가는 자동적으로 쌓이게 된다.
그게 바로 언제 사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무더기 휴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하지만 호국은 농사왕에게 일을 맡겼던 그날부터 휴가를 기획해두었기 때문에 프롯의 도움을 받아 휴가 신청서를 양식에 맞게 작성했다.
개인용 비서 AI 답게 프롯은 호국이 휴가를 얻어야만 하는 이유(거짓말이 섞인)들을 다양하게 준비해주었다.
인간은 오랫동안 햇빛을 못 보면 우울해지니 휴가를 통해 심적 안정을 얻어야 한다던가, TF에 입사한 첫 달에 가장 의미있는 휴가를 보내고 싶다던가, 말도 안 되지만 교묘하게 사람의 심리를 자극하는 사유들이 신청서를 빽빽이 채웠다.
당연하지만 그런 휴가 신청서를 받아든 이두근은 영 탐탁치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 이런 시기에 휴가를 가셔야 하나요?"
"한 달에 한 번 쓸 휴가를 미뤄서 다음 달에 두 번 가느니, 차라리 한 번씩 꾸준히 가는 게 업무 효율이 더 좋아질 것 같아서요."
'IQ 84의 생각이 아닌데?'
이두근은 호국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결국 이렇다 할 만한 건 밝혀내지 못 했다.
내부 규정상 휴가가 미뤄질 수는 있을지언정, 휴가 자체를 없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따라서 하급자가 원한다면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휴가를 허가해주는 편이 업무 스케줄이 잘 돌아간다.
"후우, 좋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가셔야 하는 게 휴가니까요. 당연히 보내드려야죠."
사실 직급상 이두근이 호국의 휴가를 막을 수 있는 권한도 없었다.
그는 아직 모르고 있는 눈치였지만, 이미 일반 시설 경비에서 경비 팀장으로 승진한지 오래였다.
기동타격대든 연구원이든 경비든 '팀장' 이라는 직책을 달게 되면 더이상 일반 근무자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팀장은 소속 부서를 막론하고 관리직에 해당하기 때문에 관리를 받을 입장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두근도 정식으로 이 시설의 관리자가 된 게 아니다. FCD의 명령을 받아 개미부대와 함께 위장 잠입한 일개 조사관에 불과할 뿐.
오히려 순수하게 직급을 따지자면 호국 쪽이 조금 더 높은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휴가는...오늘 정오에 나가기로 되어 있네요?"
"예. 비행기표 예매해뒀거든요."
정확히는 하나부터 열 까지 전부 프롯이 했다.
"보기와는 다르게 참 빠르시네. 휴가 신청서는 수리해둘테니 12시가 되면 모든 장비를 반납하고 나가시면 됩니다."
"개인 물품은 가지고 나가도 되죠?"
"상관없습니다. 다만 개인물품에 내부 정보를 숨겨서 나간다던가...하는 불상사는 없도록 주의해주셔야 합니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으셨다고 해도 내부 정보를 유출하면 중징계를 피할 수 없다는 거 아시죠?"
가드 메뉴얼에도 TF 내부 정보는 외부에 발설 엄금이라고 쓰여있었다.
이래서야 가족이나 학창 시절 동창들을 만나더라도 자랑스럽게 취직 이야기를 할 수도 없다.
'그래도 직장에서 잘리는 것 보단 낫지.'
한 순간의 허세를 위해 TF 내부 이야기를 떠벌리다 중징계를 받는 건 호국이 생각해도 너무 멍청한 짓이니까. "신입이랑 해피는 못 데리고 가서 좀 미안하네."
시간에 맞춰 시설에서 빠져나온 호국은 산길을 걸어내려 오면서도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본래 즐거운 휴가 계획은 신입과 해피까지 모두 데리고 나가서 한바탕 노는 것이었는데, 시설 인원중 절반 이상은 반드시 남아있어야 한다는 내부 규정 탓에 데리고 나오지 못 했다.
이두근에게는 자신이 없어도 업무를 해줄 사람이 있다고 말은 해뒀지만, 장비를 반납하는 순간까지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필 신입에게 업무를 맡겨두고 저 혼자만 휴가를 나가는 모습이 좋게 보였을리는 없지만, 어쩐지 팀이 무시받고 있는 것 같아 호국도 살짝 언짢은 기분이었다.
"하...그건 그렇고 남부 지방이라 그런지 진짜 덥네."
하루종일 공기 순환 시스템과 온도 조절 장치가 돌아가는 시설 내에 있었으니, 여름의 무더위를 체감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공항에 도착하기 까지의 과정이 사막을 횡단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다.
-비행기. 참 그리운 물건입니다.
공항에 도착하고나서부터 갑자기 프롯의 텐션이 올라갔다.
프롯은 요즘 비행기에 탑재된 AI 들이 시설 관리 AI를 기반으로 탄생한 것이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비행기에 탑재된 AI는 차량 자율 주행 시스템과는 차원이 다른 정교함과 계산 능력, 오류 검증 및 복구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많은 것을 한 번에 다뤄야 하는 시설 관리 AI에게서 요구되는 스펙들인데, 비행기처럼 매우 주의깊게 다뤄야 하는 물건에 딱 어울립니
다. 제가 LA에서 한국으로 운반될 때는 인간 조종사가 조종간을 잡았지만, 우리가 타게 될 비행기는 인간이 조종간을 잡지 않아도 되게끔 설계되어 있습니다.
"난 헬기 타고 끌려와서 잘 모르는데, 요즘 비행기는 사람이 조종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저걸 보십시오. 포잉 사의 949 여객기입니다. 제주도로 오가는 동남아 여행객들을 주로 실어나르는 기종인데, 주 통제 AI와 보조 통제 AI가 함께 탑재되어 있습니다. 연식으로 따지면 제 후배들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 너 후배 많아서 좋겠다."
막 들어오는 해외 항공사의 여객기를 가리키며 떠들어대는 프롯은 정말 순수하게 신이 나 있었다.
가상현실과 인연이 없어, 자연스럽게 AI와도 가까워진 적 없었던 호국은 관리봇과는 정반대되는 프롯의 성향이 썩 마음에 들었다.
비록 진짜 인간은 아니지만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딱딱하기만한 관리봇보단 한 수 위였다.
"그런데 AI가 비행기를 몬다는 건, 너도 비행기를 몰 수 있다는 거네?"
-데이터만 있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다운로드 해봐도 됩니까?
시설을 벗어나자마자 대한민국 전역에 깔려있는 무료 와이파이로 접속한 프롯은 그야말로 날고 기었다.
호국이 전혀 모르는 앱을 스마트패드에 직접 다운 받거나, 독자적으로 앱을 개발해서 호국의 자산을 관리해주기도 했다.
비행기 조종법을 얻는 것 쯤이야 프롯에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소지품 검사 및 티켓 확인을 비롯해 가벼운 절차를 끝마친 호국은 프롯이 싼값에 표를 예매한 비행기에 올랐다.
지금은 성수기라 관광지로 향하는 비행기 표값은 조금 비싼 편이지만, 여전히 수많은 관광객들이 제주도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가상현실에서 현실과 다름 없는 여름의 바다를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이 넘치겠지만, 아직 현실에서의 관광 상품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어쩌면 머리 아픈 가상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진짜 현실의 관광지에서 편히 쉬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제주도에서 서울로 향하는 사람은 의외로 굉장히 적었는데, 덕분에 호국은 창가 자리에 타고도 널널한 공간을 확보했다.
호국을 뒤따라 들어온 사람은 총 세 명밖에 없었다.
한 명은 여름에 완벽하게 대응해서 머리를 빡빡 밀었지만, 모순적이게도 후덥지근할 것 같은 정장을 껴입고 있는 젊은 사내였다.
나머지 둘은 커플로 보이는 남녀 한쌍이었는데, 구석 창가 자리에 앉아 연신 수다를 떨어댔다. 조금 이르게 제주도에서 휴가를 즐기고 돌아가는 듯 했다.
호국은 스마트패드에 이어폰을 연결해 프롯과 향후 경비팀 운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방식은 비록 터치패드 채팅이었지만, 굳이 소리내어 수다를 떠드는 커플들과 자신은 다르다며 정신승리를 하는 감도 없잖았다. ---------
비행기가 이륙한지 10분 정도 흘렀을까.
민머리의 남자는 에어컨 바람이 쌩쌩 불어나오고 있음에도 후덥지근함을 견디지 못 하겠다는 듯 손부채를 부쳤다.
결국 참다못해 스튜어디스를 호출한 그는 목이 마르다며 냉수를 요구했다.
비행 시간이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국내선에서 승객이 까다로운 요구를 했다면 큰 낭패를 봤겠지만, 고작 냉수를 부탁받았기에 스튜어디스는 즉시 준비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남성이 슬그머니 따라들어갔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준비실에서 무언가를 질질 끄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준비실에서 냉수를 들고 걸어나온 그에게 커플 남성이 지나가는 어조로 물었다.
"처리했어요?"
"화장실에 처박아뒀다."
본래 탑승객이 20명 이하일 경우, 그것도 운항 시간이 짧은 국내선에 승무원이 탑승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공항은 사전에 TF측으로부터 'TF 직원이 공항을 이용할 것이다' 라는 정보를 받아 일부러 승무원 한 명을 추가했다.
일반인 입장에선 마치 항공사가 VIP를 위해 개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일행중 누구도 특별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김호국 한 명만이 특별한 인물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민머리의 남자는 자신이 제공받은 정보가 틀림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구석 자리의 커플에게 신호를 보냈다.
"우선 목적지 변경부터 하지. 마스터께선 가능한 빨리 '상품'을 보고 싶어 하신다."
"여부야 있겠습니까."
커플 남성이 여성에게 턱짓하자, 그녀는 즉시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들어갔다.
이내 스튜어디스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녀는 남성에게 선글라스 속에 감춰둔 전자칩을 건네받았다.
"그거 하나면 조종실 보안 시스템도 바로 뚫릴 거야."
항공 AI의 보안을 위해 여객기의 조종실은 허가받은 엔지니어만 출입할 수 있다. 그 보안 시스템을 작살내서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해킹 전자칩이었다.
스튜어디스로 위장한 그녀가 조금 어색한 걸음걸이로 조종실에 향하자, 민머리의 남자는 저 앞에 홀로 앉아있는 청년을 예의주시했다.
"설마 이런 일로 하이재킹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우리도 의뢰주가 그 분이 아니었다면 거절했을거라고요. 그래도 새로운 신분과 거액의 보상금을 준비해주신다고 하니 다행이지만요."
"그 점은 걱정할 필요 없다. 마스터께선 '상품'만 무사하게 전달받는다면 보상은 확실하게 해주시는 분이니까."
하지만 '상품'의 가치가 조금이라도 훼손되면 지옥의 악귀와 버금갈 정도로 무섭게 변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알리가 없는 사기꾼 청년은 곧 받게 될 거액의 보상을 한껏 기대하는 눈치였다.
'상품'만 제대로 확보한다면 이 비행기도 다시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물론 현지의 전문가들을 동원해 블랙박스는 모조리 새로운 것으로 교체할 것이다.
그렇다면 추적당할 일도 적을 뿐더러, 상대가 자체적인 조사를 진행한다고 해도 결국 자신들의 꼬리를 잡을 수는 없을 테니까.
일단 조종실의 보안 시스템만 망가뜨리면 항적을 남기지 않을 방법도 준비해두었다. 그 뒤엔 마스터 소유의 민간 비행장에 착륙시키면 끝.
상층부의 지시를 받고 시행한 계획이지만 너무 쉽게 풀렸다.
'돌발사태로 '상품'의 가치가 훼손될 바에야 일이 쉽게 풀리는 편이 좋지.'
머지않아 비행기는 중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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