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68화 (68/209)

< 경비 업무 일지 : 휴가(6) >

"우선 앉아봐. 너한테도 프렉티나님의 가르침을 전수해줄테니까."

"밥부터 먹고 하면 안 될까?"

금상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등가죽에 들러붙은 배부터 채워야 가르침이든 뭐든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김시영은 단호한 태도로 호국을 이끌어 빈 자리에 앉혔다.

"아니, 가르침이 무슨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끝나면 밥 줄게."

"당장 하자."

밥 준다고 하는데 가르침이 무슨 대수라고.

김시영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플라스틱 용기 앞으로 가서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이, 호국은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한 여성을 바라보았다.

짧은 민소매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 치마, 넥타이 대신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직장인인 듯 했다.

'역시 인기많은 음식점은 여자 손님도 많이 오는구나.'

슬쩍 고개를 돌려보면, 그녀와 비슷한 또래의 직장인 여성이나 화려하게 꾸미고 온 여대생들도 눈에 들어왔다.

남자 손님들은 대부분 30대 이상의 아저씨들밖에 없었다면, 여자 손님들은 20대의 젊은 아가씨만 보였다. 아마도 블로그에서 엄지를 척 세우는 빡빡이 캐릭터가 박힌 후기글을 보고 찾아온 것이리라.

"아, 아아...프렉티나님!"

호국의 옆에 있는 그녀도 상태가 심상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급기야 양 팔을 하늘 높이 들어올리면서 프렉티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눈은 닫혀있었지만 입은 쉴 새 없이 열려 있었다.

가만보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작은 목소리로 연신 '프렉티나님...프렉티나님...'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호국에게 들러붙었던 아저씨도 어느새 다시 눈을 감고 프렉티나님을 호출해대기 시작했다. 이쯤되면 이 가게 사장이 김시영이 아니라 프렉티나님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가만, 이게 밥을 먹기 전에 해야 하는 절차라면 나도 해야 하는 건가?'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핀 호국은 어색한 자세로 양팔을 들어올렸다.

간절히 바라면 프렉티나님이 나서서 도와주실 것이다.

"프렉티나님, 제게 사자 같은 호랑이 같은 코끼리 같은......"

모든 남성들이 바라마지 않는 소원을 빌기 위해 빌드업을 하던 찰나, 막 준비를 끝낸 김시영이 호국에게 날카로운 주사 바늘과 연결된 튜브를 내밀었다.

"역시 너도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구나. 기다려봐, 지금 곧 프렉티나님을 만나게 해줄테니까."

프렉티나님을 만나는 것과 멀쩡한 몸뚱이에 바늘을 찌르려는 게 무슨 관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김시영은 호국에게 주사 바늘을 찌르지 못 했다.

호국의 피부에 닿은 순간 바늘이 크게 휘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ㄱ'자로 꺾인 게 아니라 스프링을 감듯이 빙글빙글 꺾였다.

"미안. 내 근육이 좀......"

보디빌더처럼 대단한 몸은 아니었지만 단련과 작업으로 다져진 실전압축근육은 충분히 탄탄했다. 주사바늘을 튕길 정도로 판타지틱하게 탄탄한 건 아니었지만.

김시영도 군 시절의 호국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알고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튜브를 치워버렸다.

"원래 가나안(Canaan)의 꿀물은 직접 음용하기보단 체내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훨씬 더 좋지만...지금 남아있는 튜브가 없으니까 우선 음용부터 시작해보자."

"마시라고?"

"그래. 하지만 프렉티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음미하듯이......"

"꿀꺽꿀꺽. 끄윽!"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던 호국은 김시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죽그릇을 원샷했다. 너무 급하게 마신 탓에 트림까지 나왔다.

"뭐라고?"

"...아니야. 가나안의 꿀물을 모두 음용했다면 이제 프렉티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하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속박된 영혼을 자유롭게 할 차례야. 그럼 비로소 네가 원하는 진정한 소망을 이룰 수 있어."

"사자 같은 호랑이 같은 코끼리 같은 정력도?"

"육체 또한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하나의 감옥일 뿐이야. 그런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마."

테이블 위에 낡은 책을 올려놓은 김시영은 양 손을 펼쳐서 가슴께에 올린 채 읊조렸다.

"이제 마음 편하게 먹고, 눈을 감은 채 머릿속의 모든 생각을 하나씩 지워봐. 어둠 속에서 자신이 혼자 남아있는 것 같은 감각을 떠올리면 편할거야."

호국은 김시영이 시키는대로 대충 자세를 잡았다. 어차피 머릿속을 비우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혼자 남아있는 자신만 상상했다.

누구도 나오지 않는 현실에 자신 혼자 있는 것은 익숙했으니, 그런 상상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머리가 따끔따끔 쑤시긴 했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김시영의 목소리가 다음 지시를 내렸다.

"이제 마음의 눈을 뜨는 거야. 너를 속박하는 육체의 눈을 빌릴 필요는 없어. 진정한 유랑자는 마음의 눈, 즉 영혼으로 세상만물을 살피고 느낄 수 있으니까."

물론 시키는 걸 그대로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었다. 김시영이 말하고자 하는 건 결국 눈 안 뜨고 보기니까 투시법 같은 것인데, 호국에겐 그런 대단한 능력이 없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 집중하는 척 해야지.'

슬쩍 눈을 뜬 호국은 자신의 앞에서 눈을 감고 있는 김시영을 보았다.

"마음의 눈을 개안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가나안의 꿀물을 음용했으니 네게도 그럴 자격이 생겼거든. 그러니까 심혈을 기울여서 집중해봐."

"......프렉티나님."

"그래. 프렉티나님을 영접하는 거야."

좀 치사하긴 해도 치트키는 원래 이런 맛에 쓰는 거다.

"프렉티나님을 영접했다면 이제 네 존재를 그분께 알리면 돼. 너라는 죄인이 속죄를 위해 이곳에 왔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속세의 모든 죄와 속박을 벗어던지겠노라 맹세하면 되는 거야."

"어떻게?"

"프렉티나님께서 가르쳐주실 거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보이는 거라곤 팔을 휘휘 저으며 프렉티나님을 찾고 있는 다른 손님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귓가를 자극하는 것은 그들이 하염없이 부르짖고 있는 프렉티나님의 이름.

무언가 느껴진다, 라고 알 수 있는 건 시원하다못해 추울 지경인 에어컨 바람 속에서도 후끈후끈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 몸 뿐이었다.

아무리 호국의 IQ가 낮다고 한들, 이 모든 과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군인 신분으로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던 교회에서도 배운대로 열심히 기도했지만 신과 만나기는커녕 대화조차 하지 못 했다.

다들 교회를 꾸준히 다니면 방언이 터진다거나, 꿈 속에서 신을 만나 '깨우침'을 얻는다고들 하는데, 호국이 겪었던 가장 신기했던 경험은 목사님이 예배를 한창 진행하고 있을 때 등 뒤의 십자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던 것 뿐이었다.

'그것도 사실은 십자가를 고정하던 못이 낡아서 떨어진거였다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지.'

요컨대 특정 종교를 가지거나 강한 신념으로 무언가를 믿는다고 해도, 딱히 특별한 경험을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호국의 입장이었다.

뭘 경험해본 적이 있어야 믿지.

결국 몇 분을 그냥 보낸 호국은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온 김시영의 질문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프렉티나님께서 뭐라고 하셔?"

"어...음."

IQ 84가 도움이 안 되는 상황 1순위는 당연하게도 스스로 머리를 써야 하는 상황이다. 누군가 내뱉은 그럴듯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면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상황에 맞게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힘들었다. 그건 뇌 속에 저장된 지식을 고난이도로 응용하는 것이니까.

지어내는 말을 내뱉을 경우 거짓말이 되기 때문에 호국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도 기껏 초대해준 동기를 무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계속 집중하는 척을 했는데, 일순간 옆자리의 여성이 꺽꺽대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곧이어 그녀를 기점으로 손님들이 하나둘씩 프렉티나님을 찾는 대신 목을 움켜쥔 채 꺽꺽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가려 하는 그들 속에서 호국과 김시영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게 무슨......"

"프렉티나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시영이 박제가 걸려있는 벽 앞으로 달려나갔다.

"프렉티나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어린양들을 내치시다니, 당신답지 않으십니다!!"

박제 앞에 무릎 꿇은 김시영은 간절히 애원하는 어조로 소리쳤다.

"어린양들이 다시 자유를 잃고 있습니다! 유랑의 자격마저 잃어버린다면 저들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 속에 갇혀지내야 합니다! 부디 저들을 굽어살펴 주십시오!!"

만약 김시영이 길거리 연극 배우였다면 호국은 아낌없이 5만 원 짜리 지폐를 꺼내 그의 모자에 넣어줬을 것이다.

평소의 음침하고 소심해보이던 모습과는 정반대되는 높은 음량과 기백이 있는 말투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반면 호국은 열정적인 배우로 돌변한 김시영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주변 사람들부터 챙겼다.

'다들 체하기라도 했나?'

의자에 반쯤 눕듯이 기대거나, 아예 팔걸이에 늘어져서 고개를 떨군 사람들도 있었다. 식사를 한 뒤에 흐트러진 자세로 오래 앉아있었다면 체할 법도 했다.

호국은 바로 옆자리의 여성이 목을 움켜쥐고 끅끅대자, 뒷목 아래를 가볍게 쳐주었다. 자기 딴에는 편해지라고 친 것이었는데, 상대는 놀랍도록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몇 번의 헛기침 끝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호국과 눈이 딱 마주쳤다.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눈동자는 조금 전의 아저씨와 크게 다를 것 없어보였지만, 지금의 그녀는 호국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프렉티나님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예?"

"다신 안 그럴게요. 정말이예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제가 실수했던 것 같아요. 한 번만...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아니, 용서고 자시고 저는 그냥......"

'꺼흑!"

그녀가 다시 목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여 호국은 한 번 더 등을 두들겨주었다.

아니나다를까, 급격히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아예 머리를 박고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이런식으로 대화하다간 끝이 없겠다는 생각에 호국은 대충 용서할테니 어서 일어나라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호국이 만약 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더라면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다 죽어가는 얼굴에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흘러넘치는 얼굴로 바뀐 그녀는 몇 번이고 배꼽인사를 하더니,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갔다.

"특이한 사람이네."

사실 다이어트도 잊고 이 식당의 음식을 배불리 먹은 것에 큰 죄책감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호국은 김시영이 프렉티나님을 울부짖는 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며 꺽꺽대는 손님들의 등을 차례차례 두들겨주었다.

모두 하나같이 다이어트를 하다 실패하기라도 했는지, 호국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대충 용서한다는 말이 떨어지면 감격의 눈물을 흘리거나,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허둥지둥 가게를 빠져나갔다.

어느덧 단 한 명의 손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호국은 문득 자신을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김시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너...너 대체 뭘 한 거야?!"

"아, 미안. 사실 아무것도 안 보여서 집중하는 척만 했어."

거짓말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고 자신도 용서를 구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시영은 자비로운 용서 대신 다짜고짜 호국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지? 네가 프렉티나님께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인거지?! 그래서 그 분이 신도들의 자유를 도로 회수해버린거야! 네가 그런 태도를 보였으니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그냥 집중하는 척을 했을 뿐인데 설마 비난을 받을 줄은 호국도 몰랐다.

애초에 밥 먹으러 와서 이런 일을 겪게 될 거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할 것이다.

"앞으로 조금이었는데! 조금만 더 하면 나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비, 비행기 표 정도는 대신 끊어줄 수 있어. 이번 달 월급 받으면......"

가나안 땅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호국에게 사람 한 명쯤 외국으로 보내줄 여력은 있었다.

허나 김시영은 안도하기는커녕 더욱 불같이 화를 내며 호국에게 달려들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김시영이 주먹을 치켜들고, 호국이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피하려 움직인 순간.

두 사람의 고막을 찢을듯한 여성의 절규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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