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숨바꼭질(3) >
과거는 후회의 상징이다.
그때 좀 더 잘 할 걸, 그때 다른 방식으로 했더라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텐데.
초 단위로 뒤바뀌는 현실 속에서 막연한 미래를 위해 갈림길을 택한 인간들은 누구나 과거를 후회한다.
때문에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하는 한편, 이미 떠나보낸 것을 다시 붙잡을 수는 없다며 깔끔하게 포기하는 부류도 있다. 그럼에도 모든 이들의 과거엔 후회 한 점, 혹은 그 이상이 존재한다.
만약 과거로 되돌아가면 바꿀 수 있다?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맞이했을 것이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회로 얼룩진 과거는 족쇄가 되어 끝없이 쫓아오는 법. 어린 시절의 철없는 장난으로 다리를 부숴먹은 '미래의 축구선수'는 평생 과거의 추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과거는 되돌아가야 할 것이 아니다.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거의 추적을 따돌려야만 한다.
후회는 후회대로 남겨두고, 미래를 위해 과감하게 또 다른 후회를 저지를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의무이자 모순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 과거로 되돌아가서 과오를 없던 것으로 만들기? 아니다.
답은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을 '정확히' 알아내고 그것을 하나의 사례로 삼는다.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건을 현재에서 대비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과거를 알아내기 위해 TF는 재단 설립과 동시에 전 세계의 인류중 세계 복구에 영향을 받지 않은 모든 것들을 찾아나섰다.
ES, 인간, 혹은 무생물일지라도.
각고의 노력끝에 TF는 세 명의 소녀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첫 번쨰는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며 떠받들리고 있던 '현재'.
두 번째는 기독교의 총본산인 바티칸의 비호 아래 감춰져 있던 '미래'.
세 번째는 미국 오리건 주의 평범한 가정집에서 성장하고 있던 '과거'.
TF는 최초의 연구시설이 완공되기도 전에 세 명의 소녀들을 집중적으로 연구(실험)했다.
덧붙여서 그녀들 모두 언어의 다양성에 제약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실험 횟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날지언정, 어떤 언어로 질문하든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제 12 실험 보고서
질문 1 : 우리는 과거에 있던 일의 정확한 경위를 알고 싶다. 이론상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
답 1 : 이론으로 접근 불가능한 영역까지.
질문 2 : 재미있는 답변이군. 좋다. 그렇다면 아직도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과거의 사건을 한 번 질문해보겠다. 공룡은 무엇때문에 멸종했는가?
답 2 :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 하겠다.
질문 3 : 우리는 이런 생명체들의 멸종 원인을 묻는 것이다. 이 공룡대백과사전 속의 생명체들 말이다. 정말 모르겠나?
답 3 : 그런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질문 4 : ...거짓말이군. 지구상 지표면 아래에 널려있는 모든 화석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 정말 모든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맞나?
답 4 : (침묵).
-이후 '과거'가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는 것으로 실험 종료.
-제 27 실험 보고서
질문 1 : 정말 과거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면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의 진범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지? 알려주길 바란다.
답 1 : 진심인가?
질문 2 : 진심이다. 알고 있다면 숨김없이 대답해주길 바란다. 우리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의 진범에 대해 반드시 알아내고 싶다.
답 2 : ....[X-XXX].
-이후 질문자 역할을 맡았던 존 맥스터 4급 선임 연구원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관통당해 즉사했다.
-존 맥스터 4급 선임 연구원의 두개골 파편 속에서 발견된 것은 더이상 유통되지 않는 6.5mm 탄환의 탄두였다.
-과거가 말한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파악하지 못 했다.
-제 61 실험 보고서
질문 1 : 케네디 대통령과 같은 국제 정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요 인물을 암살, 혹은 배후에서 조종한 자가 정말 존재하는가?
답 1 : 존재한다.
질문 2 : 정체를 알려달라고 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런 존재들과 대적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길 바란다.
답 2 : 모른다.
질문 3 : 좋다. 그렇다면 얼마전에 사망한 존 맥스터 4급 선임 연구원을 사망케 한 존재가 그런 부류에 속하는가?
답 3 : 맞다.
질문 4 : 그렇다면 그들이 과거의 어떤 사건들에 개입했는지 알고 싶......
-조나단 메리 3급 연구팀장은 질문을 하다 말고 갑자기 책상을 밟고 올라가 주먹으로 천장의 전등을 박살냈다.
-그리고 전등과 연결되어있던 전선을 뽑아내 자신의 목에 감아 자살을 시도하려 했다.
-가드 07팀 9번 대원에 의해 저지되어 생존. 그는 극심한 PTSD 증상에 시달리다가 '처리' 되었다.
-제 190 실험 보고서
질문 1 : 오늘이 너에 대한 마지막 실험(면담)이다. 어떤 기분인가?
답 1 : 오늘 하루도 언제나처럼 어제의 하루가 될 것이다.
질문 2 : 네 자매들은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하지만 너는 대부분의 실험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답 2 : 내 역할이 곧 끝나기 때문이다.
질문 3 : 역할이 끝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고, 현재가 과거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다면 너는 죽기 전 까지 과거를 기록(기억)하면서 살게 될 텐데, 어째서 역할이 끝날 거라고 확신하는 것인가?
답 3 : 과거에 그러한 일이 있었고, 머지않아 다시 한 번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내 역할은 그때 끝날 것이라는 걸 알고있다.
질문 4 : 이해가 안 된다. 너는 과거만 말하는 게 아닌가? 어째서 미래의 일에 대해 논하고 있나?
답 4 : 자신의 생일이 1월 1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몇 년이 흐르더라도 자신의 생일이 내년 1월 1일에 돌아온다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일은 다시 한 번 일어난다.
질문 5 : 좋다. 그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려달라.
답 5 : 사형집행인이 돌아오면 우리의 순번도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역할이 끝나는 것이다.
-이후 '과거'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했다. 이는 '현재'와 '미래'에게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이었다. 미온적이나마 협조하고 있던 다른 두 명도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들로부터 더이상 얻어낼 정보가 없다고 판단해, TF는 그녀들은 이용가치가 없는 제 6 처리시설에 은폐시키기로 결정했다.
여기까지가 TF 서버에 보관되어있는 과거, 현재, 미래 중 과거에 대한 정보였다.
프롯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호국에게 귀띔해주려다, 그가 지나치게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묻어두었다.
왜냐하면 호국은 당장 그런 머리 아픈 설명보다도 어느 쪽 방에 먼저 들어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과거에서 도망치고 싶은데 과거로 가라니, 이상하지 않아?"
용케 그 모순을 파악한 호국을 칭찬하려다, 프롯은 부드럽게 우회해서 설명해주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려다 소집이 걸려서 식사를 하지 못 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평생 아침 7시에 식사를 걸렀다는 과거에 쫓기는 것이니, 과거로 되돌아가서 아침 7시에 식사를 해라. 그런 의미 아니겠습니까?"
"...잘 모르겠는데. 그 날 아침 7시에 식사를 걸렀다면 다음 날 아침 7시에는 제대로 챙겨먹으면 되잖아. 왜 굳이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거지?"
"모든 인간이 그렇게 쉽게 과거의 미련을 떨쳐내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먹지 못한 아침식사를 그리워 한다면 다음 날은 제대로 챙겨먹자고 생각하는 게 당연합니다만, 과거에 돌아가서라도 빼먹은 아침 식사를 챙겨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봐야 똑같은 과거일 뿐인데 그런 사소한 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니, 이해를 못 하겠네."
"가드-079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과거'의 방문 앞에 설치된 키패드에 보안 카드를 갖다대려던 호국의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은 일만 일어날 거라면,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렇습니까? 어쨌든 그런 부류도 있는 겁니다."
묘하게 가시가 느껴지는 호국의 말투에도 프롯은 아랑곳 하지 않고 '개인차가 있다'는 말로 대화를 끝맺었다.
과거라는 단어 자체를 꺼려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어쨌거나 호국은 최종적으로 과거의 방을 선택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오른 쪽 다리에 두꺼운 금속 족쇄를 달고 있는 소녀가 공부용 책상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키즈존 구역이 굉장히 넓었던 것에 비해 과거의 방은 기껏해야 투룸을 하나로 합친 수준이었다. 굳이 비교 대상을 말하라고 한다면 방의 구조나 인테리어가 B46의 '그것'이 살고 있던 방과 비슷했다.
아기자기자한 풍채가 느껴지지만, 동시에 창문이 하나도 없어 밋밋한 맛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 지하 시설에 창문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느냐마는, 호국은 복도와 연결된 창문도 없다는 점을 매우 안타깝게 느꼈다.
세간의 사람들은 창문은커녕 빛 한줄기 들지 않는 VR 룸에서 24시간을 보내고도 멀쩡하게끔 변했지만, 이곳에 VR룸이나 기계 같은 건 없었다.
색칠놀이에 쓰이는 색연필과 크레파스, 그리고 그림책과 스케치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외엔 머리빗과 손거울과 세트인 바비인형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장 밖에 나가기만 해도 놀거리가 천지인 키즈존이 존재하는데, 한창 뛰어놀 나이의 아이가 이런 답답한 방 안에 갇혀서 그림만 끄적이고 있는 건 너무했다.
'나도 못 써본 150색 크레파스를 쓰고 있다고......?'
그녀와 자신의 과거에서 엄청난 격차를 느낀 호국은 왠지 모를 질투를 느꼈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그림만 그리게 놔두고 싶지 않다. 당장 키즈존으로 내쫓아서 하루종일 땀내 나도록 놀게 해주고 싶다.
구체적으로는 트램펄린에서 뛰어올라 역덤블링으로 풀장에 뛰어드는 기술을 전수해주고 싶다. 소꿉놀이에서 아침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연기하게 하고 싶다.
그때,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호국에게 프롯이 때아닌 경고를 해왔다.
-가드-079. '과거'와 대화하기 전에 주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반드시 3개 이상의 질문을 하고, 3개 이상의 답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내부 규정이야? 가드 메뉴얼엔 그런 거 없었는데?"
일개 가드의 메뉴얼은 물론이고 3급 보안등급을 자랑하는 경비팀장 메뉴얼에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내용이다.
하지만 TF의 서버에서 몰래 정보를 빼낸 프롯은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주의사항들을 알려주었다.
"별 이상한 규정도 다 있네. 어쨌든 질문 3개에 답변 3개면 되는 거지?"
-그렇습니다.
호국은 어린아이의 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화장대에서 의자를 끌어와 그녀의 맞은편에 놓았다.
아이보다는 노인들을 상대해본 경험이 훨씬 더 많은 호국은 기본적으로 아이를 대하는 게 서툴렀다. 아이들은 전부 순수하다고들 하지만, 요즘 아이들 만큼 영악한 악마도 없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봉사활동을 나갔을 때 다른 중학교에서 나온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일을 심부름처럼 대신 해주다가 뒷담화의 대상에 오른 적도 있었다.
'특히 사춘기의 여자애들은 진짜 대하기 힘든데......'
그림을 그리고 있긴 하지만 그녀는 초등학교 고학년처럼 보였다.
VR 때문에 세간의 정보를 빠르게 접하게 되는 요즘 아이들은 사춘기도 빠르다는 말을 뉴스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여긴 VR이 없으니까...아직 사춘기가 아닐지도 몰라.'
새하얀 눈처럼 순수한 아이라면 어색하게나마 대화를 이어갈 자신이 있었다.
"흠흠!"
크게 헛기침을 한 호국은 우선 프롯이 주의한대로 일상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밥은 먹었냐, 반찬은 잘 나오냐,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냐.
순식간에 3개의 질문을 던졌지만 눈 앞의 소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호국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호국은 검은 머리칼을 지닌 외국인 여자아이에게 한국어로 질문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럴땐 모든 방면에서 전문가인 프롯의 도움을 빌리려다, 문득 그녀가 내민 스케치북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정확히 한국어로 답변이 쓰여 있었다.
-우리 얘기를 들을거예요. 그러니 말로 하면 안 돼요.
호국은 조심스럽게 눈알을 굴렸다. 자세히 보니 방의 구석에 CCTV가 달려 있었다. 스피커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면 저쪽에서 듣고 있을 수도 있다.
소녀의 프라이버시도 존중해주지 않을 줄이야.
호국은 그토록 써보고 싶었던 150색 크레파스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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