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숨바꼭질(4) >
-그래서 밥은 먹었니?
-1시간 전에 먹었어요.
-메뉴는?
-토스트 1조각, 계란 프라이 하나, 딸기잼 큐브 1개, 버터 큐브 1개, 베이컨 1조각, 샐러드 한 그릇이요.
-부럽다.
-......
호국은 자신의 특기(기억력)를 적극 살려 귀여운 동물 그림과 함께 글을 써나갔다.
자신의 이름을 '과거' 라고 소개한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자신이 먹었던 식사를 크레파스로 그려주었다.
전형적인 서양식 어린이용 식단이다. 쌀밥에 길들여져 있는 호국에겐 어린이용이라고 해도 부러운 식단이었다.
기본적으로 한국인은 밥심이라 생각하며 쌀밥을 즐겨먹긴 하지만, 가끔은 브런치니 뭐니 하면서 멋들어지게 토스트와 베이컨, 샐러드를 곁들여 먹고 싶었다.
-그런데 절대 입으로 대화하면 안 되는 거야?
-안 돼요.
-속삭이듯이 말하면 모를 것 같은데?
-옆에서 듣고 있어요.
호국은 슬쩍 옆을 살펴보았다. 혹시 따로 설치된 도청기가 있나 싶었지만, 호국의 눈썰미로도 찾아낼 순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나 파파야 거품색(Papaya Whip) 써도 돼?
-써도 돼요.
눈 앞의 소녀에게 말하 않았지만, 호국도 색칠놀이로는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VR에 접속할 수 없었던 호국이 어린 시절부터 가장 많이 접했던 것이 크레파스와 색연필이었다. 자신이 쓰지 못 했던 희귀한 색도 인터넷을 뒤져가며 모두 외워버릴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커다란 스케치북에 각자의 영역을 두고 꽃과 풀이 가득한 배경, 귀여운 동물이나 푸른 하늘을 그려넣기 바빴다. 그러다 한 번씩 호국이 질문을 던지고, 소녀가 답변을 해주었다.
글자는 비슷한 색으로 덧칠해서 배경으로 활용했으며, 공간이 부족해지면 즉시 새 종이로 넘겼다.
또래의 아이들도, 지도 교사도, 부모님조차도 함께 해주지 않았던 색칠놀이를 23년 인생 처음으로 타인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키즈존에서 노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네.'
기회가 되면 상층부에 건의사항을 올려서 키즈존도 활용할 수 있게끔 허가를 받을 생각이었다.
'안전 여부도 문제없는 것 같고.'
색칠놀이를 하면서도 눈동자는 쉴새 없이 움직여 방 구석구석을 살폈다.
여자아이의 방에 어울리지 않는 CCTV나 자동으로 식사가 나오는 배급고, 그리고 그녀의 발목에 채워져 있는 두꺼운 족쇄.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만 해도 그녀가 이곳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 것 같지만, 호국은 생각이 부족할지언정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취직하기 훨씬 전부터 이런 상황이 이어져오고 있었다면 그에 걸맞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이제와서 자신의 독단으로 이 모든 걸 갈아엎는다? 눈치없는 놈도 감히 그러진 못할 것이다.
'행보관님도 병영 부조리 같은 건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걷어내는 거라고 했잖아. 갑자기 확 바꾸려고 하면 안쪽에서 크게 반발한다고.'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적절한 시기와 상황에 맞춰서 접근해야 한다. 물론 당시의 호국은 냅다 들이받아버린 적도 있었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의무 병역인 군대와 달리 직장은 하급자가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호국처럼 멍청한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나댔다간 1개월치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나는 것이다.
'나대다가 직장에서 잘렸다는 말은 죽어도 못해.'
가족들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겠나. 특히 여동생은 '네가 그럼 그렇지' 하고 아예 인간 대접도 안해줄 게 뻔했다.
-여기에 얼마나 있었던 거야?
-처음부터요.
-12년 전부터?
-처음부터요.
-그게 12년 전부터지. 어쨌든, 여기에만 있으면 갑갑하지 않아?
-평생을 기억 속에 살아와서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어린아이 답지 않은 답변에 호국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자고로 아이들은 순수하게, 그저 즐겁게만 자라야 하는 법이건만.
분명 누군가가 그녀에게 과할 정도로 무거운 책임감이나 의무를 지워준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반드시 밤 9시가 되기 전에 자라던가, TV 시청 금지라던가.
'애초에 TV도 없잖아.'
프롯을 이용하면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만화나 영화 같은 걸 보여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시험삼아 물어봤더니,
-이미 다 봤어요.
-다 봤다고? 어떻게? 여긴 TV도 없잖아.
-진짜 다 봤어요. 정 의심스러우면 아무거나 질문해보세요.
-좋아. 살인탐정 김코의 721화 범인은?
-절름발이요.
사실 호국도 보지 못 했던 에피소드라 슬쩍 프롯에게 확인해보라고 일렀다. 놀랍게도 절름발이가 범인이었다.
의도치 않게 스포일러를 당한 호국은 홧김에 다른 질문도 던졌다.
-캡틴 빌드 파이터즈 65화에서 주인공이 히로인의 뺨을 연속으로 후려갈기면서 한 말은?
-이 자식 한 대만 맞아. 아니, 두 대. 좋았어, 세 대.
-플라스틱 가면 526화에서 여주인공이 울면서 뭐라고 했지?
-왜 민트초코를 먹는 사람이랑은 같이 연기 할 수 없다는거지?
전부 정답이다. 학창시절에 할 짓이 없어 닥치는대로 이것저것 감상했던 호국의 기억속에는 여전히 그 명장면들은 남아있었다.
'알고보니 나보다 더 상팔자였던 거 아냐?'
이러다 벽의 틈새를 열면 벽걸이 TV가 나오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한참을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그녀는 갑자기 크레파스를 연필로 바꿔들었다.
-이만큼 많은 색을 썼으니 당분간 눈이 어지러워서 보지 못 할 거예요.
CCTV의 화질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여러 색을 마구 버무려놓은 스케치북까지 들여다보지는 못할 터. 다 큰 어른인 자신보다 그녀가 훨씬 더 똑똑해보였다.
-잘 됐네. 나도 크레파스로 글 쓰는 거 힘들었거든.
연필을 건네받은 호국도 본격적으로 아날로그 채팅에 뛰어들었다.
-궁금한 과거가 있다면 물어보셔도 돼요. 뭐든지 알고 있고, 뭐든지 대답해드릴 수 있어요.
-궁금한 게 딱히 없는데?
이미 실컷 물어봐서 더 나올 건덕지도 없었다. 그녀 개인에 대한 질문을 하는 건 당사자의 허락을 받아도 조금 민감한 문제인지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분명 있을거예요.
-음...아.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긴 했어.
-뭔가요?
-난 학창 시절에 친구가 없었거든. 왜 친구가 없었을까?
-허락을 받지 못 했거든요.
-누구한테? 부모님이나 담임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는데.
그녀는 메마른 입술을 가볍게 혀로 쓸더니 마저 글을 써나갔다.
-들을 수는 있지만 귀가 없고.
마치 숙련된 사람이 필기체를 휘갈기는 것 처럼 연필이 빠르게 움직였다.
-눈은 많지만 직접 볼 수는 없고.
여러 색이 뒤덮인 종이 위로 검은 글씨가 각인되었다.
-참수형(斬首刑)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 교수형(絞首刑)은 기꺼이 직접 행하는 존재.
마침표와 함께 그녀의 답변이 끝났다.
-그 자가 허락하지 않았어요.
호국은 물끄러미가 그녀가 쓴 글귀를 살펴보았다. 어딜 어떻게봐도 허무맹랑한 상상속 친구를 어려운 말로 묘사한 것 처럼 보였다.
'난 어릴 때 상상속 친구조차 없었는데. 역시 똑똑한 애랑 멍청한 애는 상상력부터 클라스 차이가 엄청나네.'
왜 어린 시절의 자신은 그렇게나 외로워했으면서 상상속 친구 하나 만들어내지 못 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복장이 뒤집어질 노릇이다.
그래도 어린아이들의 상상력은 함부로 부정하면 안 된다. 봉사활동을 갔을 때 함께 일하던 원장선생이 아이들이 말하는 게 설령 거짓말일지라도 일단 믿어주라는 말을 했었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아이가 엇나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맞장구 쳐주면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이유였는데, 그렇게 신뢰를 쌓으면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게 훨씬 더 쉽다고 주장하셨다.
-재밌네. 그 양반이 뭐 그리 잘났다고 내 앞길을 막으셨대?
호국이 큭큭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반대로 소녀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주 막돼먹은 양반이야. 나중에 만나면 멱살이라도 잡아야겠어. 아니지. 피해보상금이라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을까?
-그건...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역시 말로만 하는 건 임펙트가 부족하지? 엉덩이를 때려줘야 하나?
-......
-내 인생 참 고달프게 했는데 엉덩이로도 좀 부족하지. 아주 허리를 반으로 접어버려야 해.
그 나쁜 상상속 친구에게 악담을 더 퍼부어주려다, 소녀가 황급히 호국에게서 연필을 빼앗아 들었다.
-그정도면 충분해요. 이제 놀이시간은 끝나서 공부해야 해요.
이런 곳에서 갇혀사는 아이에게도 공부가 있다니!
호국은 통탄스러움을 금치 못하며 아쉬운 기색으로 일어섰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컨셉은 지켜주자는 생각에 소리내어 인사하는 대신, 살짝 손만 흔들어주고 나왔다.
호국이 나간 직후, 과거의 손에 들려있던 연필 중 하나가 반으로 쪼개지며 심이 있는 부위가 제멋대로 스케치북 위를 질주했다.
과거는 그저 옅은 미소를 띤채 새롭게 쓰여진 대량의 욕설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 분이 보는 앞에서 제 목을 칠 수는 없으셨나봐요?"
반으로 부러진 연필이 사납게 떨렸지만 더이상 욕설을 써나가지는 않았다.
"그 과잉보호가 언제까지 갈 것 같아요?"
연필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부릅뜬 '눈' 하나가 종이의 중심을 비집고 나타나 그녀를 마주보았다.
흰 종이를 마구 덧씌운 여러 색 때문에 '눈'은 매우 혼탁했지만, 그정도는 어렵지 않다는 걸 주장하는 듯 했다.
까르륵 웃음을 흘린 과거는 아이답지 않게 한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어서 가보세요. 그 분이 케네디 대통령처럼 머리가 터지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요? 저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어요."
외형은 10세 전후의 소녀에 불과했지만 내면은 소녀의 그것이 아니었다.
"잘못된 과거를 반복하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겠죠? '저'는 한 번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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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착했습니다."
"분석해봐. C 게이지는 얼마나 돼?"
"500에서 계속 상승중입니다."
"대단해......!"
유광조는 비릿한 미소를 흘리면서 자신의 모니터로 들어오는 실시간 C 게이지 변동폭을 예의주시했다.
B55에 존재하는 ES 6-144-1, 2, 3은 엄밀히 말하면 ES가 아니다. 그녀들 모두 생물학적으로 틀림없는 인간이며, 유전자상의 조상도 존재했다. 즉 족보없는 괴물이나 난데없이 외계에서 흘러들어온 불청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그녀들을 TF에서 굳이 ES로 규정한 이유는, 그녀들이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마다 C 게이지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C 게이지가 상승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 균열을 일으키는 건 오직 ES 뿐이니, 역설적으로 그녀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ES라고 규정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녀들은 완벽한 인간이면서도,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하나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세 자매의 공통점이기도 했는데, 그건 바로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들 중 누구 하나 나이를 먹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외형이 크게 변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아주 드물게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을 세포 단위로 뜯어보면 결국 노화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저것들은 세포 단위로 뜯어봐도 노화하질 않는단 말이지.'
그녀들에게서 뜯어낸 세포는 몇 시간 뒤면 갑작스럽게 사멸해버리지만, 일단 그녀들이 절대 노화하지 않는다는 건 밝혀낼 수 있었다.
마치 그 시간대에 영원히 고정된 것처럼, 세포 단위의 변화가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데이터 상으로는 더이상 이용가치가 없어 제 6 처리시설에 은폐했다지만, 그녀들의 위험성은 상당해서 2급으로 분류되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벌리는 것 만으로도 눈 앞의 인간을 죽여버릴 수 있고, 1초 단위로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일을 당장 실현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절대로 틀리지 않는 끔찍한 미래를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화면 너머의 '과거'는 분명 가드-079와 함께 그림만 그리고 있었지만, 현장의 C 게이지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성능 좋은 도청기를 방 곳곳에 설치해뒀음에도 목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지만, C 게이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가드-079와 6-144-1이 무언가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능하면 스케치북에 뭘 그리는지도 알아내고 싶은데......"
"두 사람이 머리를 바짝 맞대고 있는 탓에 CCTV의 설치 위치상 스케치북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건 나도 알아. 저 멍청한 새끼가 머리로 가리고 있는 '진짜' 내용을 보고싶은 거라고."
"...나중에 관리봇에게 스케치북의 회수를 명령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가드-079의 움직임은 어떻지?"
"6-144-2의 방 앞에 서서 스마트패드를 조작하고 있습니다."
유광조는 눈을 치켜떴다.
가만보면 저 괴상망측하게 생긴 낡은 스마트패드는 요즘 시설에서 지급하는 기종이 아니었다.
'규정상 통신기기는 TF에서 지급된 것만을 사용하는 것이 맞을텐데?'
개인 통신기기를 지참할 경우 기밀 유출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TF에 처음 입사하는 신입들은 모두 TF 전용 기계로 교체받는다.
"놈이 들고 있는 스마트패드. 저거 우리쪽에서 제공하는 기종이 아닌 것 같은데?"
"커스터마이징한 것 아닙니까?"
"어떤 놈이 저런 미친 취향으로 커스터마이징을 해? 당장 회수해서 조사해봐."
유광조가 짜증을 내자 그의 아래에서 일하는 연구원 한 명이 주변에서 대기중이던 개미부대원들을 손짓으로 불렀다.
곧 명령을 받은 개미부대원 몇명이 마뜩찮은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소리없이 움직였다.
이 프로젝트에서 유광조를 막을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FCD가 이곳에 직접 행차해도 그를 막을 수 없으리라.
'어서 움직여, 이 모르모트 새끼야. 우리의 가설을 네 손으로 직접 증명해달라고!'
덤으로 자신의 출세 길도 열어주었으면 한다.
그럼 빈말로라도 장례식에서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정돈 건네줄 의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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