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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해피 고문재단-85화 (85/209)

< 경비 업무 일지 : 30일째(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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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흐...?!"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낯선 천장이다.

밝은 백열등 전구가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것 치곤 빛에 열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냉기로 가득찬 찜질방에 들어온 것처럼 전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미묘한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손을 움직이려 한 순간, 나는 자신의 몸이 무언가에 단단히 속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선을 살짝 돌려보면, 차가운 금속 족쇄가 양 팔과 다리에 채워져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난 분명...친구들과 진탕 퍼마시고...그리고...그리고......?'

몇 시간 전의 일인지, 혹은 한참 전의 일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친구들과 함께 신촌에서 술을 진탕 퍼마시며 놀았던 것이 마지막 기억인 것은 틀림없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여느 때 처럼 '덜 취한' 자신이 친구들을 택시에 태워 보내면서 술자리를 파했었다.

친구중 누군가가 아주 굉장한 글로벌 대기업에 취직했다며, 오랜만에 다들 모여서 그 친구를 축하해주었다. 우르르 몰려가서 술을 진탕 퍼마신 것 치곤 사고도 일으키지 않았고, 제대로 모두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나도 집으로 향하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분명 집 주소까지 불렀는데......'

드물게도 AI가 운전하는 자율주행 택시가 아닌 택시 기사가 직접 운전하는 택시에 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엔 완전히 기억이 끊어져버렸다. 아무리 떠올려도 머리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두통만 생길 뿐, 끝내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납치당한 건 아니겠지? 아니, 요즘 같은 시대에 사람을 납치해서 대체 어디에 쓴다고......'

장기밀매? 그것도 이젠 우스갯소리다. 실제 인간의 장기는 구하기도 힘들고 쓸데없이 비싼데다 면역거부반응이라는 큰 문제가 존재한다.

게다가 인공장기라는 좋은 기술이 상용화 되어 있는데 굳이 내 장기를 털어가려고 납치할 이유는 없지.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두통이 어느정도 해소되니 고개를 돌리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대체 뭐하는 곳이야?'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거라곤 흰 타일의 벽과 약간의 물기가 남아있는 바닥 뿐이었다. 내가 누우워있는 차가운 진찰대 옆엔 바퀴가 달린 선반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장기밀매에 대한 생각은 하기 싫었지만, 정말 불법 장기 적출 현장처럼 보인다.

족쇄를 풀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목청껏 소리질러 도움을 요청하자니, 정말 초록색 수술복을 걸친 의사가 들어올까봐 겁이 났다.

난 군대까지 다녀온 몸이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의사를 보는 순간 오줌을 지릴 거다.

있는 힘껏 몸부림쳐서 진찰대를 엎어볼까 고민하던 중, 갑자기 복부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으음......?"

처음에는 누군가가 부드러운 솜털로 복부를 살살 간질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몇 초 간격으로 간질거리는 느낌은 날카로운 칼날로 복부를 후벼파는 듯한 끔찍한 통증으로 이어졌다. 왜? 왜 아픈 거지? 아무것도 없는데?

"어, 으으으......!"

참기 힘들다.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발가락을 오므릴 만큼 고통스럽다.

차갑게 식었던 몸에선 순식간에 식은땀이 비오듯 흐르며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그럼에도 통증은 가라앉을 기색도 없이, 오히려 복부에 한정되어 있던 통증의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허벅지, 명치, 무릎, 흉부, 발끝, 정수리. 마치 종이 위에 떨어진 먹물처럼 복부에서 발생한 통증이 상반신과 하반신을 향해 순차적으로 퍼져나갔다.

'속이 메스꺼워. 근육이 단단히 굳은 것 같아. 살점을 도려내는 것 같아......!'

통증 속에서도 구토감을 느껴 무심코 헛기침을 해댔다. 그러자 내 입에선 쓰디 쓴 위액이 아닌 핏물이 터져나왔다.

자랑은 아니지만 평생 잔병치레 한 번 해본 적 없는 몸이다. 술을 진탕 퍼마셔도 다음 날엔 콩나물국 한 그릇 뚝딱이면 숙취도 말끔하게 씻어낼 만큼 건강했다.

신체검사를 받을 때도 의사가 너무 건강하다며, 부모님께 감사하라는 말을 한 적이 있을 정도다.

그런 내가 피를 토했다고?

"이게 대체 무스으으은......?"

알몸으로 누워있는 것도 엿같은데, 이젠 피까지 토하다니. 뭘 잘못 먹은 것도 아닌데 너무 이상했다.

마치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느끼고 있는 기분이다.

격통 속에서 고개를 흔들다가, 문득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한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사, 살려......"

창백한 인상에 서양적인 외모, 창백한 인상에 어딘가 기분나빠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다.

의사라면 이 고통도 어떻게든 해줄 수 있겠지. 아니, 해줘야 한다!

"제발......!"

젖먹던 힘까지 짜내 애원했다.

날 봐! 지금 환자가 고통스러워 하고 있잖아! 뭐라도 해보라고!

내 간절한 마음이 닿은 것일까, 의사는 두툼한 왕진 가방을 꺼내더니 뭔가를 집어들었다.

"아."

그건 메스였다.

날이 아주 잘 벼려진, 살짝 긋기만 해도 인간의 연약한 살점따윈 가볍게 베어낼 수 있는 의료용 메스.

그걸로 뭘 하려고, 라는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다시 한 번 찾아온 격통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를 악 문채 으으, 하는 신음 소리를 흘리는 게 고작이었다.

'안 돼. 그러지 마......!'

필사적으로 뜬 눈으로 의사를 노려보았지만,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복부에 메스를 갖다댔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살을 쨌다.

"으, 아아아!!"

마취 없이 진짜 생살을 찢는 고통은 상상이상이었다.

화끈화끈 달아오른 환부에선 끈적한 핏물이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머릿속에선 스파크가 팍팍 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메스는 멈추지 않는다. 마취도 하지 않았기에 메스가 어디를 째고, 어디를 건드리고 있는지 모두 느껴진다.

그리고 내 뱃속에 들어있던 무언가가 확 잘려나가는 순간, 저도 모르게 허리가 튕겨 올라갔다.

"으아아아아!!"

눈물과 콧물이 둑 터진 댐마냥 콸콸 쏟아져나왔다.

희미하게 뜬 눈으로 바라본 의사는 내게서 떼어낸, 완전히 썩다 못해 말라 비틀어진 살덩어리를 꺼내든 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씨발놈! 역시 불법 장기 적출하는 쓰레기 새끼였어!' 최소한 마취라도 해주던가!

내 인생이 여기서 허무하게 끝날 거란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하지만 의사는 다음 장기를 적출하는 대신, 왕진 가방에서 새로운 물건들을 꺼내들었다. 그건 검은 약물과 하얀 가루가 담겨있는 약병이었다.

"으, 으으으읍?!"

놈이 강제로 내 입을 벌려 검은 약물과 가루약을 함께 마시게 했다.

이제라도 마취를 시켜주는 건가 싶어 어쩔 수 없이 삼키긴 했다.

하지만 곧바로 후회했다.

곧바로 양 손이 부풀어 오르더니 폭발해버렸으니까.

"꺼...허어어어?!"

다음 양 다리.

뼈와 살점, 근육 하나하나가 폭탄처럼 펑펑 터지며, 있었던 것이 없었던 것으로 되는 감각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다 머리 안 쪽에서부터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사지와 같은 느낌이다. 두개골 안쪽에서부터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고 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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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검사를 받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괜찮아. 그거 내가 매일 마시는 거니까."

침낭 속에서 눈을 뜨면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나서 곧바로 아침을 먹고 순찰 업무를 시작한다.

드라마를 보면 보통 직장인들은 하루의 시작을 커피로 시작하는데, 호국 역시 B42에 들를 때 마다 다크다크 레인보우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하곤 했다.

최근에는 투명 뭐시기를 일부러 피해다니느라 다크다크 레인보우를 마신 적이 없었지만, 오늘 마셔보니 그 중독적인 맛에 새삼 놀랐다.

일주일 정도 마시지 않았다가 갑자기 입에 대니 상상 이상으로 맛없는 맛이 폭발해버렸던 것이다.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굉장한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걸 매일 드셨던 겁니까?

"어르신들이 왜 계피 사탕이나 홍삼 사탕 같은 걸 매일 입에 달고 사시는 것 같아? 맛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중독적인 맛이라는 게 중요한 거야."

-그정도면 마약 성분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넌 인간이 아니라서 이 기분을 잘 모를 거야. 분명 맛이 없는데...막상 빼먹으면 아쉬운 느낌이라는 게 있거든."

창백한 의사는 호국에게 다크다크 레인보우를 먹인 후에 곧바로 모습을 감췄다. 오늘은 일찍 파산했으니 더이상 카지노에 처박혀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리라.

호국은 진압봉을 붕붕 휘두르며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밥도 먹었겠다, 다크다크 레인보우도 한 잔 했겠다, 이제 일하러 갈 시간이다.

엘리베이터가 B44의 저위험군에서 멈췄다. 오후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경비견인 해피를 데려갈 생각이었다.

연구팀이 해피는 너무 위험해보이니 중간거점을 넘게 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탓에, 하는 수 없이 무인편의점에 해피의 집을 지어주었다.

그래봤자 시설 복구 작업에서 쓰고 남은 철판과 시멘트 조각을 대충 합쳐서 작은 아궁이 같은 집을 지어준 게 고작이었지만. 어쨌든 해피는 좋아했다.

아니나다를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작은 아궁이 같은 집 속에 누워있던 해피가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할아버지네 집에서 기르던 황구인 '누렁이'와 흑구인 '흑우'도 항상 이렇게 달려나와 반겨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호국에게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던 사람들에 비해 동물들은 항상 정직했다. 쓰다듬어주면 좋아했고, 꼬리도 마구 흔들어준다. 손을 내밀면 핥아주기도 하니, 그야말로 최고의 서비스를 자랑했다. 전선 꼬리를 붕붕 흔들어대는 해피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준 호국은 편의점 앞에 앉아 수첩에 뭔가를 쓰고 있던 신입을 불렀다.

"순찰 가야하니까 너도 와라."

탁, 소리나게 수첩을 덮은 녀석은 호국에게 다가오더니 대뜸 손가락으로 배를 쿡 찔렀다.

이번에는 간지럽지 않았지만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호국은 녀석의 뒤통수를 갈겨주었다.

"하늘같은 선임의 배를 함부로 찌르게 되어 있냐? 이러다 나중에 손가락이 아니라 칼로 찌르고 그러겠다?"

-어쩌면 새로운 인사법일지도 모릅니다.

"그딴 인사법은 필요없어. 미친놈도 아니고 남의 배는 왜 찔러봐?"

의사 양반이야 환자의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그럴 수는 있다. 의사는 환자에게 뭘 해도 인정된다.

그러니 자신에게 수십 종류의 약을 먹였던 것도, 머리에 전극을 꽂았던 것도, 잠도 재우지 않고 이상한 치료를 반복했던 것도, 호국은 절대로 의사를 탓하지 않았다.

어차피 헬멧을 쓰고 있으면서 괜히 아픈 척 하는 신입을 엘리베이터로 잡아 끌었다. B56으로 향하는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륵 닫혔다.

오전 업무는 호국과 프롯이 함께 B55까지 빠르게 순찰을 돌고, 오후부터는 경비팀 79기 맴버가 모여서 다시 B56 아래로 향한다.

B55 까지는 순찰해야 할 방이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B56 부터는 살필 장소가 많아지는 것은 물론, 내부 시설의 규모도 확 커지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보안 상의 이유로 B56 아래부터는 저위험군과 고위험군에 체크 포인트의 수가 대폭 늘어났다. 체크 포인트는 훌륭한 방화벽 역할을 해주지만, 일일이 잠금을 해제하고 통과하는 건 정말 귀찮았다.

한 번은 호국이 프롯에게 왜 시설 구조가 이따위냐고 물었더니, B55 아래로 내려갈수록 농사왕처럼 쇼생크 탈출을 꿈꾸는 탈출 꿈나무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도중, 프롯이 이어폰을 통해 은밀하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 시설에 은폐되어 있는 존재들을 탈출시켜주고 싶다고 생각하신적 있으십니까?

"다들 이유가 있어서 이 시설에 있는 거겠지. 햇빛 한 점 보지 못 하는 지하에서 살아간다는 게 측은하긴 해도, 그렇게까지 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

-그렇다면 해방을 요구 받으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도 일단 요청이긴 하니까 상층부에 건의를 올려봐야겠지. 상층부에서 허가해주면 내보내주는거고, 허가 안 해주면 안 된다고 해야지."

-꼭 이 시설을 벗어나야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대부분은 '그런 쪽'을 원하고 있을 겁니다.

"난 결정권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

그런 복잡한 생각이나 하려고 이 직장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니다. 호국은 좀 더 원대한 꿈이 있었고, 이 직장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는다.

'대충 10년치 연봉을 모으면 아주 비싼 VR 기기를 살 수 있겠지?'

배불뚝이 중년이 될 때 까지 열심히 일한 다음 자신에게 딱 맞는 VR 기기를 살 것이다. 그리고 남들처럼 일도 하지 않고 집구석에 처박혀서 실컷 놀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호국도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땅굴에서 몇 년이고 일할 자신이 있었다.

그 원대한 꿈의 시작이 갑자기 꼬였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다말고 멈춰버린 것이다.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는 '표시없음' 층에서 멈췄다.

문 앞의 공간은 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는 바닷가였다. 파라솔과 의자 하나를 놔두면 하루종일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은 모래사장이 호국을 유혹하는 듯 했다.

"닫아."

호국의 명령에 신입이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검은색의 매끄러운 지팡이가 들어와 신입의 손을 후려쳤다.

반은 웃고 있는 얼굴, 반은 울고 있는 얼굴의 흰 가면을 쓴 마술사. 6-30이 모자를 살짝 들어보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의 마술사 제복은 알로하풍으로 바뀌어 있었다.

호국도 조건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그가 대뜸 지팡이 끝으로 호국의 배를 쿡 찔렀다.

결국 호국은 폭발했다. "다들 내 배에 꿀 발라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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