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고찰(1) >
영역화 억제 작업 시즌이 끝난지 며칠이 흘렀다.
"후우, 긴장되는군."
이두근은 이미 몇 번이나 고쳐맸던 넥타이를 자꾸만 만지작 거리면서 넘쳐흐르는 긴장감을 애써 지우려 했다.
땀이 많이 흐르는 그의 체질도 이번 만큼은 자신이 나설 차례가 아니라며 땀 배출을 스스로 제한할 만큼 무거운 분위기였다.
높으신 분들을 상대할 때 아랫것들은 감히 홀로그램 아바타를 통해 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 때문에 제 발로 TF 본부의 대회의장을 직접 방문한 아랫것들은 긴장하는 게 당연했다.
"그쪽은 조사팀장입니까?"
대뜸 옆의 대기석에 앉아있던 한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힐끗 시선을 돌려보면 머리가 반쯤 까진, 조금 비쩍 마른 중년 사내가 이두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말쑥한 정장에 방문자용 ID 카드를 목에 걸고 있었는데, '제 5 연구시설 소속 3급 연구원' 이라고 쓰여 있었다.
'제 5 연구시설 연구소장의 바로 아래 라인이군.'
그의 보안 등급은 3급이라고 쓰여있었지만, 이런 자리에 일개 연구팀장따위가 방문했을리가 없다. 덧붙여서 이두근은 극히 예외중의 예외가 인정되었기 때문에 3급 조사관에 불과함에도 방문 자격을 얻었다.
'연구소장 대리로 온거겠지. 총괄팀장이라면 충분히 급이 되니까.'
3급 연구팀장에서 2급 연구소장으로 승진하기 위해선 한 가지 단계를 더 거쳐야 하는데, 바로 그 자리를 3급 총괄팀장이라 부른다. 본래는 존재하지 않는 직책이지만, 연구소장, 처리소장들의 재량에 의해 탄생하게된 임시직이다.
누군가를 총괄팀장으로 만든다는 건 각 연구팀과 경비팀 모두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 것이고, 그건 곧 차기 소장 자리를 넘겨주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우선 총괄팀장이 되어 모든 사람들을 이끌어 보는 경험을 쌓게 하고, 그 다음 시설의 관리 권한을 넘겨서 최종적으로 소장직을 위임해준다. 일종의 자기 라인 키워주기였다.
TF내에서도 시설의 소장직은 FCD가 직접 위임하기보단 현 소장에게 후임자를 선택하게 하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에 가능한 제도였다.
물론 FCD가 일방적으로 현 소장을 해임해버리고 자신들의 인물을 낙하산으로 처박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일단 그렇습니다."
"소속이...제 6 처리시설? 거기에 조사팀이 파견됐다는 소릴 들었는데 그쪽 팀이었습니까? 그래서 제 6 처리시설엔 뭐 조사할 건덕지라도 있었습니까?"
머리가 벗겨져서 괜히 머리숱 많은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것일까,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그런 성격이었던 것일까.
어느쪽이든 예의를 차리는 척 하면서 은근히 바아냥 대는 상대의 어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긴장감 때문에 구토가 쏠릴 지경인데,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상대의 태도는 매우 거슬렸다.
"기밀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하하! 감찰관도 아니고 고작 조사관이 조사한 내용들은 어차피 주요 연구시설에 모두 공유될텐데 기밀은 무슨. 그러지말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서로 지루하지 않게 제 6 처리시설 이야기나 좀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당신이 FCD였다면 당연히 보고했겠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고작 3급 연구원이라 FCD보다 먼저 보고받을 수 있는 권한이 없군요. 지루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아 저도 안타깝습니다."
상대가 먼저 직책을 건드리길래 이두근 역시 그의 보안 등급을 운운하며 정면에서 까버렸다.
같은 3급이라도 이두근과 상대에겐 큰 차이가 있었지만, 이곳은 제 5 연구시설도 아니었고, 이곳을 벗어나면 그와 엮일 일도 없기에 마음 놓고 까버릴 수 있었다.
상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차기 연구소장이라 불리우는 자신이 일개 조사관에게 까였으니 꽤 얼얼한 기분이었으리라.
"조사관으로서 변변찮은 실적을 내지도 못해 반쯤 귀양 가듯이 제 6 처리시설에 보내졌다는 얘기가 있던데...사실인 모양입니다?"
"24시간 현장에서 편히 일하는 사람들이랑은 다르게 이 쪽 일은 발로 직접 뛰어야 하는 일이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현장에서 편히 일했다면 실적 하나 둘쯤 내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 것 아닙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 일개 조사관인 제가 이 자리에 오지 않았습니까?"
"유배지에서 마땅히 보낼 사람이 없었으니 대리 자격으로 나온 것 아닙니까?"
"하하, 같은 대리 자격끼리 그런 세세한 걸 따질 필요가 있습니까?"
이두근이 자연스럽게 웃어넘기면서 강렬한 카운터 펀치를 후려갈기자, 제 얼굴에 침 뱉은 꼴이 된 상대는 주먹을 움켜 쥐었다. 욹으락붉으락하는 얼굴이 당장이라도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다 때마침 복도 끝에서 각 시설의 소장들과 대리인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을 확인한 이두근은 상대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그건 누가봐도 마무리 일격이었다.
"제 6 처리시설에 오면 일주일도 버티지 못할 양반이 라인 하나 잘 탔다고 나대는 모습, 심히 보기 좋지 않습니다."
"......!"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준 이두근은 다른 이들에게 먼저 달려나가 인사를 건넸다.
소장이 직접 방문한 시설은 제 1 처리시설, 제 2 연구시설, 제 2 처리시설, 제 3 연구시설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소장 대리직으로 방문했는데, 제 4 연구시설 만큼은 소장과 대리인 모두 도착하지 않았다.
듣기로는 제 4 연구시설이 영역화 억제 작업에 실패하여 결국 시설의 3분의 1이 오염, 이후 시설 종말 프로그램을 발동해 연구시설을 통째로 날려버렸다고 했다.
아주 짧은 탈출 시간 탓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 제 4 연구시설 인원 모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렸을 것이다.
"다들 모였으면...들어갑시다. 윗분들께서 기다리십니다."
제 1 연구시설 소장 대리로 방문한 요한 모르겐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PTSD가 심각하다고 들었는데, 용케 이 자리에 나오셨군.'
사실 제 1 연구시설도 시설 종말 프로그램이 가동될 뻔 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영역화 억제 작업은 간신히 성공했지만, ES가 대거 탈주한 것은 물론이고 시설 인원 대부분이 ES에 의해 사망해버렸다.
다만 탈주한 ES들은 결국 기동타격대에 의해 모두 제압되었으며, 연구원들을 몰살한 원흉은 제 1 연구시설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는 모양이다.
인적 손실은 매우 컸지만, 시설은 어떻게든 살릴 수 있었기에 제 1 연구시설은 아직 건재했다.
'하지만 그런 대사건이 터졌음에도 연구소장이 직접 행차하지 않을 줄이야.'
유광조를 이용해 작은(?) 수작을 벌였던 최고 수석 연구원. 제 1 연구시설의 소장직을 겸하고 있는 그는 FCD가 주최하는 본부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두근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요한 모르겐이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대회의장의 천장에 설치된 거대한 샹들리에를 통해 쏟아져 내리는 불빛 속으로 각 시설을 대표하는 자들이 걸어들어갔다.
시선만 살짝 옮겨서 상석을 올려다보면 홀로그램으로 투영된 FCD들의 아바타가 시야에 들어왔다.
권력의 정점, TF를 비롯해 전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 말 한 마디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들.
그들 앞에서 각 시설의 대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지극히 단순했다.
각 시설이 겪은 일에 대해 상세히 보고하는 것. 그리고 FCD 나으리들이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것.
한마디로 말해 공개 발표회와 청문회를 겸하는 지옥의 시간이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TF가 자랑하는 최고의 고문이 아닐까?
최고위원석에 앉은 인물, 이두근을 제 6 처리시설로 파견한 제임스 마커스가 턱을 괸 채 아랫것들을 근엄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부터 정기 본부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을 맡은 한 의원이 회의의 시작을 알리고, 각 시설의 대표자들의 선 보고가 시작되었다. 가장 처음 스타트를 끊은 것은 제 1 연구시설 소장의 대리인으로 참석한 요한 메르겐이었다.
그는 명망 높은 제 1 연구시설 소속 연구팀장이면서, 동시에 대사건의 중요 참고인이기도 한지라 FCD들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요한 메르겐은 대회의장 내에 존재하는 관리봇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준비해온 자료들을 업로드했다. 업로드된 자료들은 관리봇이 홀로그램화하여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개해주었다.
동시에 탄성 섞인 비명이나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가장 처음 공개된 자료가 하필 난장판이 된 메인 모니터룸에서 벌어지는 대학살극이었던 것이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다수의 연구원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점멸분쇄기. 이윽고 녹화된 영상의 시야 대부분이 핏물로 물들고, 믹서기에 뭔가가 갈려나가는 끔찍한 소음이 시끄럽게 울려퍼졌다.
인간의 죽음에 너무나도 익숙한 TF의 인간들이라도 저런 대참사를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비위가 좋진 않았다.
하지만 요한 모르겐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스마트패드를 조작해서 다른 자료를 메인으로 띄웠다. 그는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진 대학살극 따위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이 있었음을 밝혔다.
"보시는바와 같이, 절대로 뚫려서도 안 되고, 뚫릴 수도 없었던 제 1 연구시설의 보안망이 잠깐이지만 외부 세력에 의해 뚫렸었습니다."
그가 띄운 서버 접속 기록에는 분명 허가받지 못한 정체불명의 접속자가 둘이나 있었다.
"Eye-004, Ear-004. 저희조차도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고, 접속을 차단하기 위해 시설내의 모든 시스템을 셧다운 해야 했던 침입자들의 명칭입니다."
"자세히 듣고싶군."
웅성거리는 FCD 사이에서 유독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비교적' 젊은 목소리의 주인. 제임스 마커스가 이채 서린 눈으로 물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최고위원회 소속의 FCD들 역시 생전 처음 발생한 사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TF의 보안망은 이론상 절대로 뚫을 수 없다.
시설 내부에 직접 침투해서, 하드웨어(서버)에 직접 접촉해 해킹을 한다고 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해킹이 힘들다. 고성능 AI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하필 보안망이 뚫린 곳이 제 1 연구시설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전세계 최고의 보안 수준을 자랑하는 제 1 연구시설.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우는 자의 연구기록이나 각종 기밀 자료들이 쌓여있는 곳의 보안이 허술할리가 없다.
그런 곳을 단번에 뚫고 들어간 Eye-004 와 Ear-004는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인간이 아닌 건 말할 것도 없고, 고성능 AI라고 해도 말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침투 경로는 명백하게 외부였으니까.
"상대의 명칭을 알아낸 것도 사실 큰 성과라고 할 순 없습니다. 즉석으로 ID를 만든 것에 불과하니, 상대의 정체를 밝혀내는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진 않을 겁니다. 또한 역추적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이쪽의 최고 권한을 이용해 밴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해킹을 시작하자마자 최고 권한을 획득한 겁니다."
"그게 가능한가?"
"불가능합니다. 저런 짓이 가능한 존재는 장담컨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론상으로도?"
"이론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걸 봐주십시오. 침입자들이 빼간 정보 기록과, 침입자들이 간섭한 시스템 기록입니다."
요한 모르겐은 쉬지 않고 다음 자료를 띄워 올렸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거만한 꼰대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PTSD에 시달리면서도 발표를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