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엘리베이터(2) >
'아무것도 없네.'
검은 벽이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내릴 공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코앞을 꽉 막고 있는 검은 벽이 등장하자 조금 어이가 없었다.
사람이 타고 내릴 공간 정도는 줘야 엘리베이터를 타는 의미가 있는 것인데. 호국은 이 건물 설계도를 짠 놈이 분명 자신과 맞먹는 수준의 IQ일 것이라 생각하며 혀를 쯧쯧 찼다.
다들 10층에 도달할 때 마다 마주하는 검은 벽을 보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으리라. 이러려고 건물 설계를 맡겼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겠지.
호국은 일어나서 도로 문을 닫는 것도 귀찮아, 그냥 저절로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의 기능이 아주 망가진 게 아니라면 스스로 문을 닫고 원래 목표로 했던 것으로 데려다 주겠지.
그러기를 10초, 1분, 몇 분. 아무리 기다려도 문이 닫히질 않아 짜증이 확 치밀었다. 돌아가면 반드시 엘리베이터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체해서 쓰레기 매립지에 갖다 버리겠다고 마음 먹었다.
"어휴, 경비란 놈이 엘리베이터 때문에 일도 못 하고......!"
벌떡 일어나 '닫음' 버튼을 누르자 거짓말처럼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다행히 이번에는 버튼 패널이 미친듯이 발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 대신 호국이 특정 층의 버튼을 누르지 않았음에도 엘리베이터가 저절로 움직였다.
층수 표시기는 10에서 5로 바뀌었다.
'10에서 5, 5 다음은 1인가?'
0층이란 건 존재하지 않으니 다음은 1층 아니면 B1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호국은 쓴웃음을 지었다. B1이라도 데려다 준다면 제 6 처리시설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주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새삼 이상한 일들을 한 두번 겪는 것도 아니고, 디멘션 점핑 트럭으로 호주도 다녀와봤는데 엘리베이터 순간이동이 뭔 대수란 말인가.
그때, 5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한 번 스르륵 열렸다. 여전히 띵! 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맛이 간 시스템이 한 둘이 아닌 듯 했다.
'음?'
이번에도 그냥 '닫음' 버튼을 누르려던 호국은 문 앞에 서있는 한 여성을 보고 손을 멈췄다.
검은 벽 밖에 보이지 않았던 10층과는 달리 5층에는 제대로 타고 내릴 공간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좁은 복도. 성인 남성 서넛 정도가 서로 몸을 비비적 대며 간신히 오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신기한 점은 칠흑같은 어둠을 밝히는 전등이나 횃불도 존재하지 않았는데, 여성이 홀로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었다는 점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다들 스마트패드는 필수적으로 들고 다니는데, 특이한 사람이네.'
호국이 알고 있는 2050년대의 현대인이란, 가상현실에 중독된 족속들이었다. 가상현실에 접속하지 않은 때에도 스마트패드를 들고 다니며 항상 인터넷으로 타인과 교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잠시라도 손에서 스마트패드를 떼놓으면 정말 현대인이 맞냐고 물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눈 앞의 여성은 스마트패드는커녕 핸드백이나 장지갑 조차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느껴지지 않음에도 하늘하늘 나풀거리는 흰 원피스 차림이 전부였다.
'안 탈 건가?'
조금 전 부터 가만히 서있기만 하길래 호국은 그냥 '닫음' 버튼을 눌러버렸다.
문이 닫히려 하자 그제야 마음이 급해졌는지 그녀는 소리없이 스르륵 걸어들어왔다. 탈거면 빨리 탈것이지, 하고 중얼거린 호국은 다시 층수 표시기를 바라보았다.
이 엘리베이터에 갇혀있는 건 짜증나는 일이지만, 이번엔 어느 층으로 가게 될지 살짝 기대가 되기도 했다.
"이런 씨......"
호국의 예상이 또 한 번 빗나갔다. 더 아래로 내려갈 줄 알았던 엘리베이터는 5층을 넘어 다시 10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그 검은 벽과 마주할 생각에 슬슬 분노게이지 쌓이는 기분이었다.
띵!
"오?"
여지껏 울리지 않았던 띵! 소리와 함께 10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여느 때처럼 문을 열어주었다.
놀랍게도 검은 벽이 아닌, 한 건물의 계단과 이어진 복도가 나왔다. 추정컨대 외딴 아파트이거나 일반적인 빌딩인 듯 했다. 그 증거로 복도의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제외하면 그 어떤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대낮의 제 6 처리시설에서 한밤중의 외딴 곳으로 나올거란 생각은 못 했기에 호국은 덜컥 겁이 났다.
'아직 점심도 못 먹었는데, 지금이 한밤중이라면 저녁까지 굶은 거 아닌가?!'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일하는 법인데. 어이없게 두 끼나 손해를 봤다는 생각에 호국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먼저 복도로 나온 호국은 여전히 엘리베이터 안에 남아있는 여성에게 물었다.
"그 쪽은 안 내려요?"
그녀는 호국의 부름에 고개를 들더니 스르륵 걸어나왔다. 아니, 걸어나오려 했다.
콰아아아아앙!!
미쳐버린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빠르고 강하게 닫혀버린 엘리베이터의 문은 그녀가 나오지 못 하게 했다.
이윽고 층수 표시기의 숫자가 굉장히 빠르게 바뀌다가 '666'에서 멈췄다. 직후, 층수 표시기의 불빛이 완전히 꺼지며 엘리베이터도 운행을 멈춰버렸다.
"666층이면 얼마나 높은 거지?"
대충 밤하늘의 별과 훨씬 더 가까워질테니 공짜로 천문을 즐길 수 있으리라. 문득 자신도 우주에 가서 별 구경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유모를 자괴감이 더욱 크게 밀려왔다.
VR 기기도 못 구해서 가상현실을 즐겨보지도 못 하는 놈이 우주는 얼어죽을 놈의 우주.
무수히 이어진 계단을 타고 내려와 마침내 건물 밖으로 나온 호국은 주변의 색채가 아주 단순한 구조라는 것을 깨달았다.
밝은 곳은 백(白), 어두운 곳은 흑(黑).
어두컴컴한 밤하늘 속에서 빛나는 달과 별도 자세히 보면 단순한 백색의 원이나 점에 불과했다.
색채다운 색채를 가진 것은 호국뿐. 제주 감귤 모양이 새겨진 제주도 특산품 잠옷과 진한 살색은 오히려 호국을 굉장히 이형적인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돌아가면 잠옷도 바꿔야지.'
역시 제주 감귤이 그려진 잠옷은 자신이 생각해도 센스가 구린 것 같았다.
삼디다스 슬리퍼를 신은 채 터덜터덜 도로를 걷고 있으려니, 검은색의 건물들 사이에서 백색의 빛이 새어나오는 골목길을 발견했다.
무의식적으로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약간 중독적인 기름과 불향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주변 건물들 사이에 자리잡은 먹자 골목인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주머니를 뒤지던 호국은 바텐더에게 카드를 맡겨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서 절망했다. 두 끼나 손해를 본 인간이 먹자 골목 식도락을 포기해야 한다니.
'아니지. 냄새랑 구경은 공짜잖아?'
이왕이면 돈내고 사먹는 게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지만, 돈이 없으니 배째고 냄새만 실컷 맡으면서 구경하는 수 밖에.
먹자 골목으로 들어간 호국은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먹거리 천지를 보았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인터넷의 옛 기록을 뒤져보면 특정 지역에서 온갖 잡다한 이유로 축제를 벌이면서 노점상을 동원해 야시장을 벌였다고 한다.
지금 호국이 보는 광경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검은색 천지의 인간들이 각자 맡은 요리들을 열심히 만들어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에게 내주고 있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검은 국물에 눈처럼 새하얀 면발을 삶아서 풍덩 빠뜨리는 국수집. 검은 철판 위에 이것저것 뒤섞인 흑백의 반죽을 올려서 노릇노릇하게 굽는 전집. 그밖에도 검은 기름에 흰 닭을 튀기거나, 검은 소스를 흰 밥 위에 뿌려주는 노점상들이 골목 초입부터 끝을 모르고 늘어서 있었다.
'여기가 바로 신세계구나.'
카드. 카드만 있었다면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고독한 대식가 노릇을 했을 텐데.
호국은 흐르는 침을 닦으면서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적당히 떨어져 구경했다.
음식을 팔고 있는 노점상 주인들은 주로 흰 옷을 입은 검은 인간들이었지만, 음식을 사먹는 손님들 쪽은 검은 옷을 입고 있는 흰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값을 지불하기 위해 흰색으로 이루어진 작은 동전을 하나씩 건넸는데, 그것이 주인의 손에 닿으면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캬...기름 흐르는 것좀 보소.'
검은 기름에서 튀겨낸 흰 닭은 일부가 그슬려진 것 처럼 군데군데 검은 부분이 있었다. 거기서 뚝뚝 흐르는 검은 기름은 비쥬얼적으로는 이상할지 몰라도, 냄새 만큼은 가히 천하일미(天下一味)였다.
저 통통한 닭을 접시 위에 올려놓고 손으로 우악스럽게 다리부터 잡아 뜯으면 기분이 째질 것이다. 잘 익은 살이 다리와 함께 뜯겨나오면 그걸 기호에 따라 소금이나 양념에 살짝 찍은 뒤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된다.
'간다간다 뿅간다!'
상상만 해도 입이 즐겁다.
입 안 가득 차오른 부드러운 닭다리 살을 정성껏 씹으면 짭조름하면서도 고소담백한 맛이 느껴지리라. 양념을 첨가한다면 매콤달달한 맛이 더해질테니 고작 닭 하나로 혀를 마약에 취한 것 처럼 헤롱헤롱 거리게 만들 수 있을 터.
하지만 돈이 없는 탓에 아쉬움 속에서 닭집을 지나쳐야 했다.
쿵!
"어이쿠, 죄송합니다."
호국은 먹거리에 정신이 팔려 앞을 보지 않다가 친 행인에게 다급히 사과했다.
호국과 부딪친 행인은 다른 이들과는 생김새부터가 달랐다. 상당히 큰 키에 지나칠 정도로 슬렌더한 체형, 길게 늘어진 팔과 다리는 조금만 세게 후려갈겨도 엿가락처럼 부러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점은 가게마다 자리잡고 있는 손님들과는 다르게 그의 옷차림은 제대로 된 검은 정장이었다는 것이다. 등 뒤에서 꿈틀거리는 기형적인 촉수만 아니었다면, 호국은 멋쩍게 웃으며 그를 지나쳤을 것이다.
'두 끼나 굶어서 내가 미치기라도 한건가. 저것도 삶아서 초장 찍어먹으면 맛있겠다고 생각하다니......'
일단 사과는 했으니 그대로 지나치려 했으나, 상대는 걸음을 조금 옮겨 호국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몇번이나 지나치려 해도 자꾸만 앞길을 막기에 호국은 큰 키의 상대를 올려다 보았다.
검은색의 잘 빠진 중절모에 새하얀 달걀 같은 이목구비가 없는 얼굴이 호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에 계실 만한 분이 아니군요."
입도 없는데 냉기가 풀풀 쏟아지는 음성이 들려오자 호국은 깜짝 놀랐다. 복화술인가 착각할 정도였다.
"입이 없는데 말을 하시네요?"
"당신께서도 눈이 없음에도 보고, 귀가 없음에도 듣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혼자 이곳에 오신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카드를 놔두고 왔거든요."
카드를 가지고, 해피와 신입을 데리고 왔다면 그럭저럭 잘 즐기다가 돌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주변을 향해 말했다.
"이분은 신경쓰지 말고 계속 먹어라."
그제야 손이 멈춰 있던 손님들이 다시 허겁지겁 식사를 재개했다. 호국은 괜히 자신 때문에 주변에 폐를 끼친 것 같아 머리를 긁적였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곳은 반전(反轉)의 세계입니다. 일부는 흑백의 심판대라고도 부릅니다만, 사실 그건 정확한 명칭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흑과 백을 구분하고, 각기 걸맞는 위치로 보내주는 장소일뿐, 실제로 심판을 행하지는 않습니다."
"아아......"
뭐가 뭔지 모를 때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라. 어린 시절의 호국은 IQ 84가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그렇게 배웠웠다.
호국이 듣는둥 마는둥 해도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앞서 걸어가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세계에서 용납되는 것은 철저한 흑과 백뿐. 흑백 이외의 색채나 감정, 영혼은 일체 인정되지 않습니다. 가끔 반전술(反轉術)을 이용해 이곳으로 겁없이 기어들어오는 외부인이 있습니다만, 그러한 존재들은 모두 각 구역의 담당자들이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것 참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뭔가를 관리하고 지킨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죠."
홓국 본인도 TF 소속의 경비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심정을 잘 알았다.
외세가 침입하면 막아야 하고, 내부에서 터지는 각종 사건사고에 대응해야 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순찰을 돈다는 건 맨 정신으로 하기 힘들다.
"하하, 당신께서 그리 말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신들과 달리 저와 같은 존재들은 반전하여 바깥의 세상에 나가는 것도 매우 힘든지라 사실 좀이 쑤십니다. 그 콘스탄틴만 아니었더라면 저도 지금쯤......!"
"여기서 나가려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전 엘리베이터 타고 왔는데."
"......"
그는 앞서 걷다 말고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얼굴로 돌아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엘리베이터도 모르는 촌 양반인가?'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 만큼 호국은 그러려니 했다. 돌아가기 전에 '아아, 이건 [엘리베이터]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알려주면 분명 좋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