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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해피 고문재단-113화 (113/209)

< 경비 업무 일지 : 종양 제거(1) >

솔직히 말하자면 호국도 어린 시절에 불장난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호국의 아버지는 전자담배가 아니라 진짜 담배를 피우는 클래식 흡연자였기에 항상 집 안에 라이터가 존재했다. 덕분에 가족들이 가상 현실에 접속해있는 동안 놀거리를 찾던 호국이 우연찮게도 라이터를 습득할 수 있었다.

버튼만 누르면 불이 나오는 구조였는지라 어린 호국은 불이 확확 피어오르는 것을 몇번이고 반복하면서 놀았었다. 그걸 들고 놀이터에 가서 화단을 다 태워먹은 게 문제였을 뿐.

그 일로 엉덩이 스팽킹을 당한 호국은 두 번 다시 라이터를 가지고 놀지 말라는 엄포를 들었으나, 지금 호국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라이터가 아니었다.

'내 안의 방화 본능이 다시 깨어나고 있어.'

333번이 건네준 성냥갑에는 정확히 20개의 성냥이 들어있었다. 크기는 꽤 작았지만, 끝부분이 검은 것이 일반 성냥과는 조금 달랐다.

의외로 바벨탑에서 빠져나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환풍구를 타고 쭉 가다보면 바벨탑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건물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벨탑의 동쪽 건물에서 빠져나온 호국은 미리 가져온 검은 골판지 박스를 뒤집어 썼다.

조금의 혼탁함도 섞여있지 않은 완벽한 검은색이라, 마찬가지로 바깥의 검은 배경 속에 몸을 숨기면 감쪽 같이 은폐할 수 있었다.

박스를 뒤집어 쓰고 슬금슬금 기어가던 호국은 저 멀리서 보이는 백색의 불빛과 맛 좋은 냄새를 감지했다.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지는 그곳은 호국이 마주쳤던 장소와는 또 다른 야시장인 듯 했다.

'최대한 이목을 끌어모으려면 소란스러운 편이 좋겠지.'

333번은 백색의 인간들은 이미 감정과 색을 빼앗기고 영혼밖에 남지 않은 불쌍한 망령들이라고 언급했으며, 흑색의 인간들은 그런 망령들에게서 영혼의 편린(백)을 착취하는 사악한 것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모인 것들을 바벨탑의 재료로 쓴다고 하니, 결과적으로 바벨탑을 무너뜨려야 망령들을 구원하면서도, 사악한 것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런 복잡한 것보다 당장 불장난을 하는 게 중요한 호국은 야시장 근처의 건물 벽에 바짝 붙었다.

야시장은 점포 형태로 건물 앞에 다닥다닥 붙어있었기 때문에, 길가에서 방문하는 손님들을 바깥에 두고, 주인들은 점포 안쪽에 있는 구조였다. 쉽게 말하자면 반쯤 포장마차나 다름없었다.

"우선 첫발."

치이익!

성냥갑 측면에 대고 성냥을 긋자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것을 건물 외벽에 갖다대니 마치 기름 먹은 나무처럼 순식간에 불길이 번져나갔다.

요리를 하는 소리, 식기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 의자를 넣었다 뻈다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던 야시장에서 어느 순간 소음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각 점포에서 여러 음식들을 장만하는 탓에 피어오르는 열기와 타는 냄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건물이 타오르기 시작한 순간 착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길가와 가까운 백색의 망령들은 검은 불길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앞다투어 어디론가 향했다. 자신의 영혼을 깎아내면서까지 음식을 사먹고 있던 자들이, 당장 눈앞에 닥친 죽음을 견디지 못 하는 모습이었다.

'좋아, 흰 인간들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어.'

음식을 먹는 것 만큼이나 도망치는 것도 빨랐던 백색의 망령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흑색의 인간들은 갑작스럽게 치솟은 불길을 보고 도망치기는커녕 우왕좌왕 하기만 했다.

그야 가게의 가재도구나 식재료 같은 것들이 몽땅 다 타버리면 아깝기야 하겠지만, 백색의 망령들과는 대조적으로 대부분 자신들의 가게를 챙기기 바빴다.

'여긴 이제 됐고.'

사람들이 다수 도망치기도 했고, 검은 하늘 아래에서 검은 불길이 치솟았으니 상당히 이질적으로 보일 만큼 대소동이 벌어졌으리라.

슬그머니 박스 속으로 모습을 감춘 호국은 건물 사이에 존재하는 미로 같은 골목길로 몸을 던졌다.

백색의 가로등 불빛도 없어서 오직 휘엉청 밝은 달빛에만 의존해야 간신히 앞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건물이 지나치게 높거나, 골목길 위를 덮는 구조물이 있다면 희미한 달빛조차 새어들어오지 못할 만큼 어두컴컴한 공간도 존재했다.

도저히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선 무턱대고 벽을 찾아서 손으로 짚어가며 움직였다.

'꽤 멀리 왔네.'

민감한 귀가 건물이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를 감지하지 못 할 만큼 멀리 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마찬가지로 코 역시 매연을 맡을 수 없었다.

'대충 1km는 걸었나?'

호국은 건물 외벽의 수도관을 기어올라가서 자신의 현 위치를 확인했다.

저 멀리, 여전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벨탑이 보였다. 백색의 달빛이 비춘 밤의 바벨탑은 그 위용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대단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호국은 이윽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포착했다.

두번째 타겟을 정하자마자 고양이처럼 날래게 건물 옥상을 뛰어 넘었다. 제 3자의 시선으로 보면 골판지 박스를 뒤집어 쓴 미친놈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당사자는 딱히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전 세계 모든 남자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허가받은 불장난'을 하고 있는데 부끄러울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마침내 연기의 근원지에 도착한 호국은 건물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음?"

첫 방화지와 별 다를 것 없는 그저 그런 야시장인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호국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죄다 흑색의 인간들 뿐이었다.

'외부에서 따로 점포를 낸 것도 아니야. 거대한 건물 안에서 다 같이 뭔가를 하고 있어.'

마치 공장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건물에서 피어오르는 대량의 연기는 마치 안개처럼 시야를 덮었지만, 호국은 자랑하는 눈썰미로 이곳에 백색의 망령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음식 만드는 냄새가 풍겨오지도 않아. 이건...진짜 공장에서나 맡을 수 있는 냄새인데?'

실제로 공장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호국은 특유의 냄새를 알고 있었다. 화학 약품 냄새, 쇠 냄새 같은 것들. 특히 현장을 검사할 때는 따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코가 아릴 정도로 지독했다.

뻥 뚫려있는-아마도 창문이겠지만-공장의 외벽으로 바짝 붙어선 호국은 그들이 안에서 뭘 다루고 있는지 살폈다.

"......"

백색의 덩어리들이다.

검은 용광로에 녹여지고 있는 흑색의 덩어리는 백색으로 서서히 변했으며, 그렇게 나온 백색의 덩어리는 검은 인간들이 기계를 이용해 다시 불순물을 걷어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눈이 부실만큼 순수한 백색의 덩어리들은 컨베이어 벨트로 옮겨지면서 백색의 약물을 뒤집어 쓰고, 열기가 식혀질 즈음 검은색 골판지 상자 속으로 던져졌다.

호국이 뒤집어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상자였다.

공장의 뒤편으로 돌아간 호국은 수송 차량에 수많은 박스들이 실리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정제된 백색의 덩어리들이 한가득 들어있는 박스들이 차곡차곡 쌓이자 수송 차량이 검은 매연을 토해내며 움직였다.

차량이 향하는 길목의 끝에 위치한 것은 고고하게 서있는 바벨탑이었다.

-흑은 바벨탑의 외벽을 만드는 재료야. 일종의 그릇인 셈이지. 백은 그릇 속에 담겨지는 내용물, 즉 바벨탑의 구성 요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어. 수많은 인간들의 염원이 내용물에 뒤섞인 채 바벨탑의 일부가 되는 거지.

사람으로 치면 싱싱한 살점과 뼈를 녹인 뒤 그것을 정제해서 건물의 시공 재료로 사용하는 셈이다. 망령과 인간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만, 호국의 단순한 사고방식은 그 또한 별 차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호국은 말없이 공장 주위를 돌아다니며 모든 문을 닫았다. 대충 굴러다니는 수도관 파이프를 문 손잡이에 끼워 걸어잠근 뒤, 공장 외벽에 검은 성냥불을 갖다 댔다.

말없이 활활 타오르는 공장을 바라보는 호국의 얼굴은 조금의 재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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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해주고 있구만. 설마 이정도로 잘 해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만난지 얼마 안 된 얼빵한 애송이가 대뜸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에 스스로 나서겠다고 했을 때는 333번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당장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심리야 뻔한 것 아닌가. 자신들이 나서기만 하면 어떻게든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을 보인 인간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물론 그들은 모두 실패했고, 333번은 그 애송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좁아터진 환풍구를 기어다니며 열심히 '재료'를 모았다.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그 역겨운 것들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겠지 하는 일념으로 25년을 꿋꿋하게 버텨왔다.

천 년 가까이 살아온 자신에게 25년이란 건 그리 대단한 시간도 아니었지만, 지구에서 보내는 천 년과 이곳에서 보내는 25년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더럽게 재미없었지.'

즐길 거리도, 먹을 거리도 없는 이곳에서 용케 미치지 않고 25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천 년 가까이 단련된 정신력 덕분이었다. 일반인이었다면 몇 년을 보내기도 전에 미쳤으리라.

조금만 더 있었다면 정말 미쳤을지도 몰랐을 텐데, 대체 어디서 저런 비상한 재주를 가진 놈이 이런 곳으로 말려들어왔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왔다느니 어쩌니 헛소리를 해댈 때는 박장대소 할 뻔 했다.

'차원의 벽을 깨부수는 엘리베이터가 세상에 어디 있어. 고대 문물이라면 모를까, 현대 문물에 그런 힘은 없다고.'

기원전 인간들이 컴퓨터를 사용했다는 말이 차라리 더 신빙성 있을 것이다.

룬 술식으로 방 안에 쌓여있던 검은 박스, 즉 폭탄들을 모조리 허공으로 띄운 333번은 선두에 서서 그것들을 이끌었다.

폭탄을 옮기고, 설치하고, 터뜨리는 거라면 혼자서도 할 수 있다. 다만 그 역겨운 것들이 상시 이 탑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껏 실행하지 못 했던 것 뿐이다.

'자신있다는 말이 아주 허투는 아니었어.'

상시 탑에 거주하는 놈이 두 명, 반전 세계 바깥으로 나가서 살아있는 인간을 생포해오는 놈이 한 명, 그리고 도시 전역을 돌아다니며 감시하는 놈이 한 명.

총 네 명으로 구성된 괴물 집단이 한시도 방심하는 법이 없었는데, 그 애송이가 나서자마자 빈틈을 보였다. 심지어 아직도 잡지 못 했다!

'그런 똘똘한 놈을 콘스탄틴으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참 아쉽다니까.'

현대인을 고대의 룬 마술이나 써재끼는 병신 집단의 일원으로 만드는 건 좀 너무한 일이지만, 만성적인 인력 부족을 해결하려면 항상 새로운 물이 들어와야 한다.

이내 상자들을 이끌고 탑의 최중심부로 진입한 333번은 25년 간 아끼고 아꼈던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불을 만들어내자 그리웠던 니코틴이 체내로 흘러들어왔다.

"그래서 왜 네가 여기에 있냐?"

탑의 최중심부. 가장 처음 세워진 초석, 바벨탑의 모든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는 시작점.

그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선 것은 깃털 달린 삼각모를 쓴 한 남성이었다. 한 손에는 피리를, 다른 한 손에는 단검을 들고 있는 광대 같은 존재.

"방해꾼 사냥이라면 슬렌더 맨과 불가사리가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군요. 당신이 처리했습니까?"

"나 바쁜 거 안 보여? 이것들 옮기는 것만 해도 허덕일 만큼 힘들어 죽겠는데 그 년을 처리할 여유가 어디 있겠어? 우물을 통해서 죄없는 인간들 잡아오려고 밖으로 나갔겠지."

"우리는 항상 소통하고, 서로를 느낍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에 '그녀'와의 모든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그 인간이 이 곳에 도착하기 조금 전이었군요."

움찔.

독일식 억양의 말하는 상대에게서 묘한 감각을 느낀 333번은 부유의 술식을 해제했다.

검은 상자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지며 쿵, 쿵 소리를 자아냈다.

"우리가 당신에 대해 알고있듯, 당신 역시 우리에 대해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우리와는 달리 현대 문물을 통해 인간들과 접촉합니다. TV, 엘리베이터, 전화기 같은 것들 말이죠."

"세 살 먹은 애새끼도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알려주는 이유는?"

"당신이 양동 작전에 미끼로 던진 그 인간...정말 인간이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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