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40일째(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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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D 최고 위원회 일원중 가장 젊은 제임스 마커스는 노친네들과는 달리 현실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했다.
오랜 육신이 닳고 닳아, 가상현실에 접속하지 않으면 제정신을 붙들어두기도 힘든 그들과는 달리, 제임스는 현실의 육체를 꾸준히 움직여주고 뇌를 활용해야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그는 매일같이 최고 위원회로 올라오는 각종 보고서와 기밀 문서를 누구보다도 먼저 살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TF내에선 상당히 민감한 주제로 다뤄지는 인사 발령 정보부터, 감찰관과 조사관들에게서 올라오는 감시 보고서, TF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특별한 인물이나 단체 등에 대한 정보까지.
이 귀중한 자료들을 먼저 맛볼 수 있는 것은 TF 최초 창립자와 최고 수석 연구원을 제외하면 제임스가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평소였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ES에 대한 보고서들이 줄을 이었겠지만, 오늘은 특이하게도 각종 인사 발령 보고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아, 제 1 연구시설이 폐쇄됐지."
시간과 돈을 들인다면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하필 제 1 연구시설에서 근무하던 고급 인력들이 대부분 죽어버리고 말았다.
요한을 제외한 모든 인력이 탈출을 감행한 ES의 공격에 사망했거나, 불시에 침입한 점멸분쇄기에게 당해버렸으니 재기불능 판정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제 1 연구시설에 저장되어있는 모든 기밀 자료를 외부로 빼낸 뒤, 본부 회의를 통해 최종적으로 시설 폐쇄 절차를 밟았다. 원격으로 시설 종말 프로토콜을 작동시킨 것이다.
"설마 이렇게나 빨리 연구시설을 두 개나 날려먹을 줄이야."
제 1 연구 시설과 제 4 연구 시설을 날려먹은 탓에 남아도는 인력을 타 시설로 보내거나, 임시로 직급을 바꾸는 등 인사에 관련된 업무가 늘어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한 명 있었으니, 제임스는 매번 보던 인물들의 프로필 파일을 싹 치워버리고 신입 연구원의 프로필 파일을 꺼내들었다.
-이름 : 김세희
-나이 : 22세
-출신지 : 대한민국
-특이사항 : 가드-079의 혈연관계(여동생), TF 입사를 위해 XX대학교 생명과학부 중퇴, 연구원 교육 훈련 수석.
-관찰 기록 : 40일간의 교육 기간 동안 전분야에 걸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음. 또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성과를 내 주변을 놀라게 했으며, 대인관계 또한 원만했음. 특별한 '이능력'은 감지되지 않았으며, 외부 세력의 첩자로 추정되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음. 정밀 신체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으로 나왔음.
"그 가드-079의 여동생인가......"
가드-079의 여동생에 대한 보고를 처음 받은 건 약 한달 전이었다.
TF에 입사하자마자 사고를 친 가드-079의 뒷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같은 시기에 TF의 연구원 교육 과정에 들어간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김세희였던 것이다.
둘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추가 감시 인력을 붙여가며 면밀한 조사와 관찰, 교차 검증을 이어나갔지만 별 다른 연관성은 찾아내지 못 했다.
그저 두 사람이 한 살 차이의 남매 사이이며, 유치원, 초, 중, 고 모두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게 전부였다. 그걸 제외하면 타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접점이나 연관성이 없었다.
"본인이 직접 원한 것도 아닌데 하필 첫 발령지가 제 6 처리시설이라......"
교육 훈련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할 정도의 인재라면 보통 제 2 연구시설이나 제 3 연구시설이 받아간다. 이런 인재를 피 냄새가 진동하는 처리 시설에 보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인사팀에선 이미 그러기로 결정한 듯 했다. 아마 가드-079에 대해 알고 있는 TF 최초 창립자와 최고 수석 연구원의 입김이 들어갔으리라.
-사내 규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가족 관계끼리는 같은 시설에 두지 않습니다. 자칫 감정이 우선시되어 사고를 초래할 수도 있고, 사고로 가족을 잃게 될 경우 그 피해가 더 크기 때문이죠.
테이블의 홀로그램 투영기 위에서 등장한 것은 제임스의 AI 비서였다. 제임스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그녀 역시 알고 있다.
"맞아. 하지만 이제와서 인사팀의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지. 그걸 의도한 양반들이 불쾌하게 여길테니까."
-가드-079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반면 김세희 신입 연구원은 너무나도 틀에 박힌 듯한 인간이라 예측하기 쉽죠. 서로 다른 두 사람을 한 장소에 둔다면 분명 큰 사고가 벌어지지 않을까요?
"마치 사고가 일어나길 바라는 듯한 말투군."
-설마요. 제 1 연구시설과 제 4 연구시설에서 일하던 제 자매들을 잃었던 것처럼, 제 6 처리시설에서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하는 것 뿐이예요.
"잘 하겠지. 거기엔 이미 유능한 조사관들을 파견해두었고, 곧 추가 인력도 보낼 예정이야. 가드-079의 통통 튀는 성향을 억제하는 건 힘들어도 큰 사고가 터지는 건 예방할 수 있겠지."
제임스는 프로필 파일 속, 사진을 찍기 위해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김세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진 속에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였지만, 숱하게 인간 관찰을 해온 제임스는 그녀가 조금도 진심으로 웃고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누구도, 영원히 모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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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길을 따라 쭉 올라가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TF 기동타격대 복장을 차려입은 사내에게 커다란 캐리어를 건네받은 김세희는 어렵지 않게 비탈길을 올라갔다.
헬기로 데려다주는 것은 제 6 처리시설 입구와 그리 멀지 않은 산 초입까지. 시설 입구 근처는 차량 및 비행체의 접근을 일체 금지하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도 예외없이 걸어야 했다.
방에 처박혀서 스탠드등 하나만 두고 코피가 터지도록 공부하는 범생이들은 원체 약골들뿐이라 이런 비탈길에도 금방 퍼지지만, 김세희는 잠을 줄이면서까지 운동과 공부를 병행했다.
덕분에 만성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만 빼면 그녀의 신체는 운동 선수와 거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격투기로 다져진 매끄럽고 슬렌더한 실전형 근육은 건강미가 느껴졌으며, 매일같이 빼먹지 않는 달리기 덕분에 폐활량과 지구력은 또래의 남성들보다도 대단했다.
그밖에도 실제 상황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의학적 지식이나 응급 처치 기술, 범죄자를 제압하거나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는 호신술 등등, 그녀는 문무겸비를 두루 갖춘 초인에 가까웠다.
"후우, 아직 덥네."
새로운 인재가 왔음에도 마중 하나 나오지 않는 변방의 덜떨어진 시설 직원들하며, 규정이라며 산 초입에 사람을 내려두고 홀랑 떠나버린 군인들하며.
40일간의 훈련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비행기와 헬기를 번갈아타면서 제주도로 날아온 것 치곤 시작부터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슬슬 더위가 한풀 꺾일거라 생각해 가벼운 옷차림으로 왔는데, 여전히 한국의 여름 햇볕은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대단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자랑 팔 토시에, 선크림은 기본으로 준비했을 텐데.'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시베리아 벌판에 있었던지라 거기까지 준비할 여력은 없었다.
근무 첫날부터 기분은 다운됐고, 근무지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는 이미 바닥을 뚫고 내려간 상황. 그래도 김세희는 이보다 더 최악일 순 없겠지,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연구원이 된 이상 이곳에서 폭.풍.진.급을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 만약 자신이 TF에서 최고가 된다면...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15년. 아니. 10년이면 충분해.'
마침내 시설 입구에 도착한 그녀는 대기중인 경비 안드로이드에게 자신의 ID 카드를 제시한 뒤, 개방된 입구로 걸어들어갔다.
바깥과는 차원이 다른 서늘함에 부글부글 끓던 스트레스가 절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엘리베이터를 조작해 모든 시설의 고정 메인 모니터룸 위치인 B5로 향했다.
"어?"
잘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B5에서 멈추지 않고 쭉쭉 내려가더니, 무려 B40에서 멈추고 말았다.
교육을 통해 연구원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 시설의 중간 거점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배웠던 그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버튼을 연타하던 김세희의 바람과는 반대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걸어들어왔다.
마치 청소부를 연상케하는 매끄러운 흑색 작업복에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는 남성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가 들고 있는 건 청소도구가 아니라 살얼음이 둥둥 떠있는 수정과 음료컵과 반쯤 까진 맥반석 계란이었다.
'뭐지? 대체 뭐지?!'
왜 제 6 처리시설의 B40에서 걸어나온 인간이 무기나 청소도구가 아닌 음료와 계란을 들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왜 그가 연구원을 앞에 두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마스크 아래로 빨대를 끼워넣어, '호바바바밧!'하고 소리가 울려퍼질 정도로 격하게 음료를 마시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이 대체 왜 자신과 같이 B5로 올라가고 있는건지, 김세희는 영문도 모른 채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참다못한 그녀가 예의없는 남자를 상대로 한마디 했다. 그 모습이 꼭 집안의 누구를 연상시키는 듯 해서 한층 더 발끈한 것이다.
"저기요. 혹시 시설내에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서 음식을 섭취하라고 교육 받으셨나요?"
"아뇨. 교육 안 받았는데요."
"......예?"
"그리고 엘리베이터 이용하면서 뭐 먹지 말라는 규정도 없는데요."
확실히 그런 규정은 없었다. 다만 사회생활을 해봤다면 누구라도 다함께 이용하는 엘리베이터에서 음식을 섭취하면 안 된다는 걸 배운다. 에티켓에 맞지 않으니까.
"매너라는 게 있잖아요. 이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음식 냄새 풍기면서, 그렇게 큰 소리까지 내면 주변에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생각 안 하는데요."
"......"
김세희는 지끈거리를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참으면서 다시 한 번 이성적인 대화를 시도했다. 이성적이지 않은 육체의 대화보단 그게 나으니까.
"그냥, 엘리베이터에서 음식 섭취는 자제해주시고, 내려서 드시면 안 될까요? 주변 사람들이 음식 냄새가 밴 엘리베이터를 탈 때 불평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신경써달라는 의미예요."
"싫은데요. 그리고 공기 순환 시스템도 있어서 어차피 냄새도 금방 빠져요."
뚝.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등산을 좋아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부모님들에게서 예의범절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던 그녀는 이런 유형의 인간을 굉장히 싫어했다.
자신과는 달리 항상 자유롭게 방목되고 있던 오빠를 보는 듯 해서 괜히 짜증이 치밀었다. 인내심이 뛰어난 그녀가 무심코 이성을 잃을 만큼.
띠잉.
엘리베이터가 B5에 도착한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아마도 김세희를 기다리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연구원 무리들이 엘리베이터 앞을 빽빽이 채우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주먹부터 날렸을 것이다.
'차라리 잘 됐어. 폭력적인 방법보단...갑질 같긴 해도 이런식으로 망신을 주는 게 더 효과적이야.'
마침 자신을 마중나온 연구원들도 있겠다, 최소한의 에티켓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벌을 주기 위햅을 입을 연 순간이었다.
"아이고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냉커피 드릴까요? 아니면 아이스티?"
"인마 그건 너무 싼티나잖아. 쌍화차 한 그릇 시원하게 말아와라!"
연구원들이 격하게 반겨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청소부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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