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40일째(4) >
그 광경을 보고서 김세희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오빠라는 놈이 어느 날 갑자기 집안에서 시도때도 없이 떠들어대던 유행어였다.
-와! 개꿀잼 몰카!
'진짜 몰카인가?'
동기로부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시설이든 연차가 쌓인 선임들은 기본적으로 실전에 익숙해진 베테랑들이기 때문에 부려먹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때문에 파릇파릇한 신입이 들어올때면 크게 골탕을 먹이거나, 반대로 불같은 성격으로 군기를 잡는다는 경우도 있다고.
지금 김세희가 보고 있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은 명백하게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직급 낮은 사람을 경력 높다며 추켜세워주면서 신입인 나더러 깎듯이 대하라고 하는 전개겠지.'
안봐도 비디오였다. 김세희는 노력과 열정, 피와 땀이 흐르는 10대 청춘을 보냈기 때문에 땀내나는 남자들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여자들이 기선제압을 하는 방법은 치밀한 심리전이었는데, 주로 날카롭게 분위기를 잡아 상대를 주늑들게 만드는 방식을 선호했다. 반면 남자들은 일부러 허세를 부리거나 과장된 반응을 보여서 상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서 허점을 노출시킨 뒤, 마구 찔러대는 전술을 사용한다.
방식의 차이라고 할까, 어느 쪽이든 유치한 방식인 건 똑같았지만 김세희는 매사에 진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여자 그룹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더 나았다. 그랬다면 자신이 역으로 기선을 제압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오늘은 어쩐 일로 모니터룸까지 올라오신 겁니까? 아직 피곤하실테니 좀 더 쉬시는 게......?"
"아 사우나도 다녀왔으니까 충분해요. 역시 때빼고 광내니까 사람이 확 달라져 보이더라니까요?"
"캬! 어쩐지 이 향긋한 냄새! 설마 남자 목욕탕의 상징인 '그거' 쓰셨습니까?"
이두근이 통통한 자신의 볼살을 손뼉으로 찰싹찰싹 두들겨 보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캐리어를 들고 서있는 김세희는 안중에도 없다는 눈치였다.
"저도 어릴 땐 어른들이 왜 쓰는지 몰랐는데, 직접 써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이게 은은하게 풍겨오는 냄새나 촉촉한 수분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게 참 좋다니까요?"
어색한 말투로 연구원들의 놀이에 어울려주고 있는 청소부 역시 자신의 뺨을 손으로 두들겨 보이며 말했다.
여자가 남자 목욕탕에 대해 모르는 건 당연하지만, 김세희는 그들이 뭘 말하는지 대충 감을 잡았다. 등산 중독자인 아버지가 목욕탕에 다녀오면 풍기는 익숙한 냄새. 남자들은 '그걸' 뿌려서 찰싹찰싹 피부에 두들겨 바른다고 들었다.
"후우......"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쉰 김세희는 주변의 남성진을 노려보았다.
솔직히 자신같은 노력가가 제 6 처리시설에 발령받은 것도 억울한 마당에, 신입을 열렬하게 환영해주기는커녕 되도 않는 장난질이나 하고 있으니 한심할 지경이었다.
기분이 좋았다면 맞장구라도 쳐줬을텐데, 지금의 김세희는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구체적으로는 명절에 멍청한 오빠가 고작 한 살 더 많다고 용돈을 더 받는 걸 봤을 때 만큼이나 짜증났다.
"제가 신입이라 주제넘게 보일까봐 이런 말은 안하려고 했는데요, 저는 대체 언제쯤 환영해주실 생각이세요?"
살짝 날이 선 목소리로 톤을 높여 쏘아붙이자 그제야 몇몇 이들의 시선이 김세희에게 향했다.
"쟤 누구야?"
"차림새를 보아하니 신입 연구원 같은데?"
"아, 최근 연구시설 두 개나 날아갔죠. 그래서 우리쪽에도 보충 인력 보내준 건가? 팀장님은 연락 받았어요?"
"아직 메일 확인 안 했는데? 근데 달랑 한 명밖에 안 보내주네. 여기가 어떤 곳인지 뻔히 알면서...인사팀 이 새끼들 진짜."
"그래도 태도가 똑 부러진 거 보니까 전형적인 틀에 박힌 엘리트네요. 잡무 맡겨놓으면 잘 하겠는데요?"
"내가 봐도 그래보여."
쑥덕쑥덕. 다 들리는 내용을 굳이 저렇게 대놓고 떠들어야겠느냐마는.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조금 줄어든 것 같아 다행이었다.
저런 담배와 커피에 찌들어 사는 인간들의 장단에 어울려주면 분위기 읽을 줄 안다면서 근무 환경이 한층 편해지겠지만, 부작용으로 끝도 없이 들러붙을 가능성이 있었다.
시도때도 없는 아재개그, 회식 강요, 인적사항 조사를 빙자한 성희롱이나 은근한 추파. 모든 악영향을 사전에 차단해두지 않으면 필히 뒷처리가 곤란하리라.
이제 다들 웃기지도 않는 장난은 그만두고 업무 안내나 자리 배정, 자기소개 시간을 가질거라 생각한 그 순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청소부가 대뜸 폭언을 던졌다.
"저 사람이 연구원이라고요? 시설 규정도 모르는 사람이?"
"...뭐라구요?"
조용히 넘어가려던 김세희는 도를 넘은 듯한 청소부의 발언에 눈을 치켜떴다.
직급이 낮아서 그런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낄데 안낄데를 구분 못하고 무리수를 둔 게 분명했다. 본인은 아마도 주변 연구원들이 맞장구 쳐줄 것이라 생각하며 화두를 던진 것이겠지.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저는 같은 말 두 번 하는 거 안 좋아하는데요."
지끈지끈.
밀려오는 두통,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기, 피부 위로 울긋불긋 돋아난 핏줄!
딱 여기까지다. 더는 참아줄 수 없다. 김세희는 눈 앞의 청소부가 한 번만 더 선을 넘긴다면 갑질이고 뭐고 빈틈투성이인 명치에 한 방 먹여주겠노라 다짐했다.
"후우...당신 어느 부서 소속이예요?"
김세희는 일부러 팔짱을 껴서 목 위에 걸린 ID 카드를 부각시켰다. 눈이 있다면 지금쯤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터.
그러나 상대는 주제파악을 하는 대신 2절 3절을 넘어 뇌절을 하고 말았다. 정말로 개꿀잼 몰카인가 의심 하게 될만큼 너무나도 당당하게.
"와 직장 동료의 부서도 몰라. 관심이 없네, 관심이 없어."
이렇게까지 당당하면 오히려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정당한(?) 폭력을 휘두르기 전에 한 마디는 더 해두고 싶었다.
"아, 생각해보니 청소부따위의 소속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네요. 그도 그럴 게 '소속'이 없잖아요?"
동시에 비스듬한 각도로 아래에서 위로 주먹을 쳐올렸다. 정직한 정권지르기보단 이렇게 스윙 하는 형태로 주먹을 날리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겁도 없이 입만 나불대는 놈이 상대라면 특히 그랬다.
"아우, 근데 사우나를 해도 허리가 땡기는 건 잘 안 풀리네."
'어?!'
아주 자연스럽게 허리를 뒤로 젖힌 상대는 김세희의 어퍼컷 같은 명치후려치기를 피해냈다. 그게 우연의 일치인지 아닌지 파악하기도 전에 그는 도수체조를 이어나갔다.
"역시 업무 피로라는 게 조금 쉰다고 쉽게 사라지지는 않나봐요. 다들 알다시피 저는 '청소부따위' 라서 시설 전체를 직접 청소하고 있잖아요? 이거 안마기라도 사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이걸 피해?'
김세희는 혹시 몰라 페이크를 섞어가며 속사포에 가까운 빠른 잽과 훅을 날렸다. 각잡고 훈련한다면 프로 대회에서도 충분히 먹힐 실력이 있는 그녀의 공격은 꽤 매서웠다.
인간이 눈을 뜨고 감을 만큼 찰나의 순간이 몇 번 정도 이어졌을까, 그녀가 내지른 주먹은 모두 허무하게 공기를 갈랐다. 짜증이 확 치밀어 아예 무릎 꿇릴 작정으로 로우킥까지 날렸는데,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역시 군대식 도수체조만한 게 없어."
상대가 마스크 너머로 자신을 비웃고 있는 착각마저 들게 할 정도로 깔끔한 회피 능력이었다.
남녀 듀엣 댄스를 지켜보고 있던 이두근은 슬쩍 자신의 오른팔인 상두를 쿡쿡 찔렀다.
"상두야."
"아 진짜. 전 쌍화차 말아왔잖아요."
명령대로 시원하게 쌍화차 한그릇 말아왔더니 이젠 고문관까지 떠넘기려 해 상두는 인상을 썼다.
"그래도 네가 해야지. 아니면 오늘 여기서 다 같이 쌍둥이 세포에 융합돼볼래?"
"...아오."
저 아래에 있는 쌍둥이 세포가 언제 기어 올라올지 몰라 두려운 건 상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짧게 깎은 스포츠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내다가, 이두근에게 쌍화차 그릇을 떠넘기곤 벙찐 얼굴로 서있는 김세희를 잡아 끌었다.
대충 화장실과 가까운 구석으로 그녀를 끌고간 상두는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야 신입. 넌 제 6 처리시설의 권력서열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줄 알아?"
"갑자기 그건 왜......?"
"1위가 가드-079고, 2위가 79기 경비팀이고, 외부에 계신 FCD 꼰대들은 3위에 불과해."
"......"
어느새 정신을 차린 그녀는 그게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냐는 얼굴로 상두를 바라보았다. 그 반응으로 역시나 그녀가 제 6 처리시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안 믿기지? 네가 듣고도 진짜 어이없지? 나처럼 담배와 커피에 절은 아저씨가 이런 곳으로 끌고와서 괜히 분위기 잡는 것 처럼 보이지?"
"...솔직히 그래보여요. 하지만 저 청소부는 좀 이상하긴 하네요. 정말 청소부 맞아요?"
"너 혹시 삶이 힘들고, 앞길은 막막하고, 괜히 우울해지고 그러냐?"
"선배님도 좀 이상하시네요. 왜 자꾸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는......"
"죽고 싶으면 계속 청소부라고 불러."
뒤늦게 상두의 어조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김세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조금 전까지 청소부따위니 뭐니 떠들고, 겁도 없이 주먹부터 휘둘러댄 사람이 가드-079야. TF 신입 연구원 교육 훈련에서 안 가르쳐주던?"
"...제 6 처리시설에 특별한 감시대상이 있다고는 들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저 사람일 줄은 몰랐다?"
끄덕끄덕.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게 상두는 깊은 한숨과 함께 스마트패드를 꺼내들었다. 거기엔 약 한 달간 조사관들이 가드-079를 집중적으로 분석해서 정리한 자료가 있었다.
그 이름도 무려 '가드-079 공략집 0.01.ver'
"이게 뭐죠?"
"오늘부터 넌 무조건 그것만 보고 달달 외워. 이유는 묻지마. 궁금해 하지도 마. 살고싶으면 그냥 외워!"
-공략집 1장
-가드-079의 '주변 환경'에 휘말리지 않는 법 완벽 정리!(by 이두근)
-가드-079는 적절한 노동과 적절한 보상을 좋아한다!(by 이두근)
-가드-079의 '주변 환경'에 휘말렸을 때 살아남는 법(by 이두근)
-가드-079의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법(by 이두근)
"진짜 이걸 외워요?"
"그래, 외워. 무조건 외워. 가드-079만 보면 네가 스스로 친필 사인을 원해서 참을 수 없게 될 때 까지 달달 외워. 그럼 너도 가드-079 팬클럽 회원이 되는 거야."
김세희는 뜨악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드-079가 예의 청소부로 위장한 특별한 감시대상이라는 건 잘 알겠다. TF 내에서도 여러번 거론될 만큼 시끌시끌한 인물이니 조금 전 김세희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팬클럽이라니?
"하지만...가드-079는 ES가 아니잖아요? 인간 맞죠?"
"인간 맞아. 그러니까 더 무서운 거야"
"예?"
"네가 한달만 더 빨리 여기에 들어왔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았을텐데. 그렇다고 직접 체험시켜줄 수도 없고......"
김세희는 차라리 속시원하게 직접 체험시켜줬으면 싶었다.
이제 막 교육 훈련을 끝마친 신입이라 그런지 주어진 정보는 너무 한정적이었고, 이곳에서 대체 얼마나 구른 건지 삶에 찌들어있는 선배들은 하나같이 진지한 얼굴로 '가드-079 팬클럽'을 논하고 있었다.
조금 전 그들이 보인 태도가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다고 생각하면 담력이 센 김세희조차 절로 소름이 돋았다.
"나도 네가 무슨 기분인지 알아. 막 답답하고 짜증나지? 저거 사실 별 것 아닌 것 처럼 보이는데, 기껏해야 청소부처럼 보이는 인간이 왜 연구원인 우리랑 맞먹고 있나 싶지?"
"......"
"그렇게 생각한 놈들 지금 다 어떻게 됐게?"
상두는 김세희의 스마트패드에 파일을 직접 전송해주며 진심어린 마지막 충고를 건넸다.
"최소한 여기엔 없어."
------
호국이 엘리베이터를 탄 이유는 단순히 모니터룸에 들러서 이두근과 새로운 업무에 대한 얘기도 나눌겸 가볍게 차라도 한 잔 하려는 생각이었는데, 설마 거기서 여동생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프롯이 뒤늦게 이어셋을 통해 속삭이듯이 인사 발령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는 거라고 착각할 뻔 했다.
'그래, 식탁 앞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기업에 입사할거다 뭐다 실컷 자랑질해대더니, 너도 결국 여기로 왔단 말이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기업은 정말 많았지만, 압도적으로 모두에게 선망받는 대기업이라면 역시 TF밖에 없다.
경비 초봉 1억대! 복리후생 빵빵! 심지어 화장실도 증축해달라고 하면 바로 증축해주는 기업이다. 이게 바로 넘버원 기업이지 어디가 달리 넘버원이겠나?
호국은 엘리베이터의 벽면에 바짝 붙어선채 아니꼬운 시선으로 자신을 흘겨보는 여동생을 보고 속으로 낄낄댔다.
여동생은 철저하게 식단관리를 하는데다 주변에 방해되는 뭔가가 있으면 굉장히 짜증을 내는 타입이었다. 당연히 성깔이 더럽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호국이 군대가기 전까지만 해도 제 오빠를 힘으로 이겨먹던 지지배였다.
하지만 여동생의 건방진 반란도 오늘로써 종말을 맞이했다.
'마구 괴롭혀주고 싶다. 스트레스성 탈모가 올 때 까지 괴롭혀주고 싶다!'
벌써부터 직장 생활이 즐거워지는 것 같아 사우나에서 들고나온 수정과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힘차게 빨아마셨다.
바로 그때였다.
"저기요. 혹시 시설내에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서 음식을 섭취하라고 교육 받으셨나요?"
한 번 슥 보고 메뉴얼을 모두 외워버린 호국에게 대뜸 교육 운운을 하기 시작한 여동생. 옛날부터 좀 똑똑하다고 으레 호국을 무시하던 그 말투와 판박이였다.
"아뇨. 교육 안 받았는데요."
"......예?"
"그리고 엘리베이터 이용하면서 뭐 먹지 말라는 규정도 없는데요."
하지만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메뉴얼을 모두 숙지하고 있는 호국 앞에선 어림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려다 되레 역공을 당하자 표정이 확 일그러지는 게 아주 가관이었다.
"매너라는 게 있잖아요. 이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음식 냄새 풍기면서, 그렇게 큰 소리까지 내면 주변에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생각 안 하는데요."
"......"
호국은 인정하기로 했다. 용돈까지 부쳐줄 줄 만큼 남매 사이란 건 뗄래야 뗄 수 없는 소중한 혈연관계이지만, 동시에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난 원수지간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