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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해피 고문재단-124화 (124/209)

< 경비 업무 일지 : 귀부인(3) >

"후우, 그 새끼 진짜......"

김세희는 화장실에서 입을 헹궈내며 짜증을 토해냈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면 가벼운 스트레칭과 조깅으로 굳었던 근육을 풀어주는 것을 하루의 시작으로 정했다. 아침부터 전신에 피가 돌게 해서 혈액순환을 유도하고나면 머리가 한층 맑아졌던 것이다.

그러고나면 아침 식사는 가볍게 토스트와 샐러드, 그리고 커피 한 잔으로 여유를 한껏 만끽한다. 밤 사이에 굳어있던 위장에게 갑작스럽게 자극적이거나 대량의 음식물을 밀어넣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멍청한 오빠를 포함해서 모두가 아침부터 자극적인 찌개와 구운 햄, 밥과 김치등을 흡입했지만, 김세희 만큼은 그런 미친 식단을 고집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은 게 벌써 2년 째였다.

그런데! 설마 기분 좋은 아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커피에 괘씸하게도 누가 소금을 퍼부어놨다.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

챙겨온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낸 김세희는 분노로 입가가 씰룩였다.

자신의 신성한 커피에 손을 댄 게 누군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자신의 숙련된 격투 기술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넘기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던 작자.

청소부라고 말실수좀 한 것 가지고 찐따마냥 계속해서 물고 늘어지던 가드-079. 모니터룸에도 자유롭게 들락날락할 수 있는 그가 커피에 장난을 친 게 분명했다.

"진짜 할 짓이 있고 못 할 짓이 있지. 어떻게 사람 먹는 거에 장난을...어휴!"

마음 같아선 규정이고 나발이고 무기 보관고로 달려가 권총이라도 가져오고 싶었지만, 김세희는 초월적인 인내심으로 자신의 돌발 행동을 억눌렀다.

더러워도 버티는 게 결국 승리하는 법이라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 자신의 부모가 충고해주지 않았던가. 이게 다 그 멍청한 오빠 때문이었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가상 현실에 접속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연히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도 있고, 주변 환경이나 종교, 문화적 문제로 태어나서 가상 현실에 한 번도 접속해본 적 없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다만 그들은 일단 접속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접속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생아들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상 현실 접속 자격이 테스트되고 있으니, 결국 가상 현실에 접속할 수 없는 것은 김세희의 오빠가 유일했다.

집에 들어가면 항상 '나만 가상 현실 못해!'를 외치며 투덜대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가족들이 가상 현실에 접속할 때마다 부러운 눈길로 훔쳐보곤 했던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 아쉬운 내가 참아야지."

잡념을 떨쳐낸 그녀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모니터룸으로 돌아왔다.

이미 업무를 시작한 선임 연구원들은 아침부터 쓴 커피와 담배를 입에 문 채 모니터를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 유형은 주로 실시간 모니터링 요원이었다.

반면 바쁘게 스마트패드를 두들기면서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내뱉고 있는 유형들은 관리봇을 도와 시설의 상태를 점검, 관리하는 이들이었다.

시스템상으로 표시되는 오류들은 반드시 문제가 터져야만 나타나는 것들이기에 모니터룸에선 항상 대처가 늦을 수 밖에 없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가드가 현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사전 안전 점검을 하는 것이다.

시설이 워낙 거대한데다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해있다보니 시도때도 없이 작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지열을 막는 단열재가 손상됐다던가, 낡은 전선이나 구조물이 말썽을 일으킨다던가, 그밖에도 시스템에 어떻게든 간섭해서 탈주하려는 ES들의 공작까지.

김세희는 자신이 비로소 TF의 '현장'에 발을 들였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때, 그녀를 발견한 이두근 연구 팀장이 사람 좋은 미소로 김세희를 반겨주었다.

"아, 신입 왔냐? 근무 첫날이라고 너무 긴장하지는 말고. 아무도 너한테 못 하는 거 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우선 모니터링부터 하면서 작업 요령을 배워봐."

"스마트패드를 시설 내부 시스템에 연동시키면 되는 거였죠?"

"그래. 근데 이 시설 관리봇이 좀 특이하니까 갑자기 놀랄 일이 일어나도 너무 당황하지는 말고."

"...무슨 뜻이죠?"

"겪어보면 알게 돼. 그리고 이 시설에선 사실 집중적으로 모니터링 해야 할 만한 개체가 그리 많진 않아. 예전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최근 한달 간은 시설 내의 ES들이 탈주하려는 낌새를 거의 보이지 않게 됐으니까."

스마트패드를 조작하다말고 김세희는 고개를 갸웃 했다.

"보통 2급 이상의 ES들은 굉장히 흉폭하고 호전적이어서 시도때도 없이 탈주 시도를 한다고 들었는데요."

"다른 시설은 그렇겠지. 하지만 여긴 아니야. 적어도 B70 위쪽으로는 그런 움직임이 드문 편이지."

"왜......"

"모니터링 시스템 연동했으면 직접 확인해보는 게 편해. 상두야 지금 가드-079가 순찰 업무 중이지?"

"예. 신입한테 화면 공유하겠습니다."

상두라고 불린 짧은 스포츠 머리의 사내가 스마트패드를 몇번 두들겨주자 김세희의 스마트패드에 실시간으로 녹화중인 CCTV 화면이 잡혔다.

엘리베이터 내부를 비추고 있는 CCTV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가드-079를 화면에 잡았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조금 많이 다른 스마트패드를 들고 있는 그는 B61에 도착함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러자 즉시 화면의 시점이 바뀌었다.

고정된 CCTV와는 달리 바뀐 화면은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가드-079를 적당한 거리에서 뒤쫓고 있었다.

"플라이 캠(Fly cam) 입니다. 일반적인 직원이 도저히 진입할 수 없는 구역에만 투입하는 초소형 동작 감시카메라인데, 소음도 없고 크기도 작아서 아주 편리합니다."

"아, 새끼 조종 드럽게 못 하네."

"아무래도 드론보다는 크기가 작아서 조금만 움직여도 시점이 휙휙 돌아가더라고요. 저 같은 놈들이 이런 고급 장비를 자주 써봤겠습니까?"

이두근의 구박에 투덜대면서도 상두는 최대한 세심하게 플라이 캠을 조종했다.

"업무는 항상 이런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나요?"

김세희가 다소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분명 굉장히 위험한 ES가 은폐되어 있는 구역임에도 불구하고 가드-079는 거리낌없이 척척 걸어들어갔다. 그게 얼마나 자연스러워보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었다면 그가 놀이공원에 가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준이었다.

"맞아. 허구한날 떼거지로 죽어가는 경비팀 수십 명 보다 가드-079 한 사람이 더 효율적이거든. 우리가 추한 꼴 보이면서 매달리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저러고도 지금까지 용케 살아있었으니 확실히 특별하다면 특별한 사람이네요."

교육 훈련 당시, 신참 연구원들이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비위 강화 훈련의 일환으로 김세희는 어마어마한 수의 교육(?) 영상들을 반 강제로 시청해야 했다.

그 영상들은 모두 ES가 은폐된 구역에 들어선 경비팀이나, 탈주를 시도하는 ES를 제압하기 위해 직접 나선 기동타격대 대원들이 어떻게 죽어나가는지, 끔찍한 고통을 받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거기서 제법 많은 탈락자들이 발생했고, 실감나게 전해져오는 공포와 절망을 극복한 사람들은 무사히 훈련을 통과했다. 김세희는 후자에 해당했다.

영상 속의 가드-079는 저위험군을 빠르게 통과해 고위험군으로 진입했다. 고위험군은 교육에서 배웠던대로 전혀 예상치 못 했던 장소가 나왔는데, 거대한 저택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넓은 정원이었다.

각 ES마다 특별한 환경이 준비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단 하나의 개체를 가두기 위해 지하에 이런 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라곤 김세희도 예상치 못 했던 일이었다.

"신입도 교육에서 배웠으니까 알고 있겠지만, ES들이 최대한 원하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놈들의 탈주 욕구가 현저히 줄어들어. 최고 수석 연구원 양반이 알아낸 사실이지."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설마 진짜 바깥 세상과 같은 환경을 조성했을 줄은......"

따스한 햇살과 푸른 하늘은 홀로그램과 조명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지만, 그 외엔 전부 진짜였다. 괜히 TF가 시설 하나에 쏟아붓는 비용이 천문학적인 게 아니었다.

"근데 1년 365일 저렇게 돈을 쏟아부어도 놈들의 탈주를 완벽하게 억제하는 건 불가능해. 실제로 TF에선 그것 때문에 골머리 썩고 있어. 그런데 우리만 탈주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니까 다들 의아해하고 있는 거라고."

"그게 저 가드-079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가요?"

"우리도 왜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는데, 당사자는 해내더라고. 카지노에서 ES랑 게임도 하고, 라면도 같이 끓여먹더라니까."

"......"

거짓말 하지 말라는 김세희의 따가운 시선에 이두근은 코웃음 쳤다.

"거짓말 같지? 내 얘기 들은 사람들은 다들 그런 반응 보이더라."

"저희도 처음엔 안 믿었잖습니까."

"근데 지금은 믿잖아. 왜냐고? 직접 봤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건 신입 놀리기인 것 같아 김세희는 반쯤 신경을 꺼버렸다.

그 대신 플라이 캠이 보여주고 있는 영상을 예의주시하며, 가드-079가 어떤 행동을 보여주는지 기록해나갔다.

"윽!"

가드-079가 거대한 철문을 열어젖히고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을 즈음, 저택과 가까운 화단에서 땅을 파헤치며 뭔가가 일어났다.

여러 인간의 썩은 살점과 거죽을 얼기설기 엮은 백골들이 기사라도 되는 양 오와 열을 맞춰 정원으로 걸어나왔다. 곧 분수대를 중심으로 나뉜 그것들은 가드-079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신 오염 필터 켜져 있는 거 맞냐?"

"켜져 있습니다."

첫 근무부터 이런 광경을 보게 된 탓에 인상을 찡그린 김세희는 이두근과 상두가 말하는 것을 듣고 교육 내용을 떠올렸다.

정신 오염 필터링. 다른 말로는 마인드 프로텍트 시스템이라고도 하는데, 시설을 관리하는 AI가 CCTV를 통해 들어오는 ES의 '간섭'을 일부 걸어내주는 필터링 효과를 지칭했다.

이는 과거에 필터링 없이 ES를, 혹은 ES가 일으킨 특이한 현상을 직접 관찰한 모니터링 요원들이 극심한 PTSD에 시달리게 된 것을 계기로 도입된 기술이었다.

정신 오염 필터링이 작동되지 않는 상태로 검열, 편집 하나 없는 감시 영상을 봤다간 높은 확률로 미치거나, 돌발 행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필터링이 켜져 있는데도 저정도라니......'

고된 교육으로 어느정도 각오를 다지고 있었던 김세희조차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끔찍한 광경이었다.

정작 저것들이 기사 흉내를 내면서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가드-079는 별로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자신의 ID 카드를 내밀었다.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저런 것들을 상대로 ID 카드를 내밀 생각따윈 하지 않는다.

"가드-079는...어째서 영향을 받지 않는 거죠?"

"모르지. 우린 가드-079가 매일매일 뭘 하는지 감시하고 있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야. 저 사람의 눈으로 뭘 보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요만큼도 모르겠다고."

그래도 일이니까. 시설을 관리한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다들 묵묵히 모니터링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저 끔찍한 것들이 가드-079에게 달려들지 않을까 걱정되었는데, 불길한 예상과는 달리 가드-079는 그들을 지나쳐 저택 현관에 도달했다. 거기서 모습을 드러낸 건 모든 입과 눈이 바느질되어 있는 초췌한 몰골의 노집사였다.

"B61의 ES 6-199는 바늘과 짚인형을 다룬다는 정보가 있었지?"

"예. 자세히보면 곳곳에 바느질된 것들 투성이입니다."

토가 쏠리는 광경에도 태연하게 대화를 주고받은 이두근과 상두는 플라이 캠의 화면을 클로즈 업 해보면서 '맞네 맞아'를 연발했다.

저택, 정원, 분수대, 벽, 문, 그리고 괴상한 것들. 그 모든 것들을 아주 자세히 들여다본 플라이 캠은 하나같이 '바느질'이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상하네. 왜 지금까진 몰랐지?"

"과거 기록 살펴보니 죄다 드론으로 높은 곳에서 잠깐 훑어본 게 전부였던데요 뭘. 가끔 가드나 목격자 집어넣어서 액션캠으로 녹화한 것도 있었는데...이렇다 할만한 정보를 얻기도 전에 저것들에게 처리당했습니다."

무시무시한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 영상 속의 가드-079는 거대한 누더기 저택 속에 발을 들였다. 마치 그의 눈에는 거미줄처럼 바느질된 주변 환경이 보이지 않는 것 처럼.

"플라이캠은 안으로 못 들어가겠는데요. 정신 오염이 특기인 ES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간은 필터링으로도 못 막습니다."

"창가로 돌려봐. 바깥에서 보는 것 정도라면 가능하겠지."

"저쪽에서 프롯이 생체 신호를 대신 전달해주고 있으니 그걸 이용해서 저택 내부 구조를 3D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상두의 능숙한 손놀림은 모니터룸의 거대한 화면 속에 3D 입체 구조도를 만들어냈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구체가 가드-079였으며, 붉은색으로 빛나는 점이 ES 6-199 였다.

"가드-079와 ES 접촉합니다."

"화면에 잡아. 한 순간도 놓치면 안 돼."

모두가 침 삼키는 것까지 참아가며 숨 죽인 상황, 마침내 커튼이 반쯤 쳐져 있는 창문 너머로 방 안의 문이 열리며 가드-079가 들어왔다.

단순히 ES가 은폐된 구역에 들어서는 것과, ES와 직접 접촉하는 것에 정신 오염의 정도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제발 무사히 넘겨라. 그래야 팬클럽도 오래오래 가니까......!"

이두근의 걱정 섞인 혼잣말과 함께 등을 보이고 있는 ES 6-199의 앞에 가드-079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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