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폭풍전야(5) >
"제 6 처리 시설에서 '혼돈'을 모으고 있던 후보 한 명이 '아웃' 당했다더군."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텅 빈 공간.
하지만 그 곳에선 명백하게 누군가가 대화를 나눈 것 처럼 생생한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놀랍군요. 제거 당한 겁니까? TF 따위에게 그정도의 저력이 있다는 사실은 좀처럼 믿을 수 없는데요."
처음 목소리를 낸 자에게 반문한 것은 다소 앳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굳이 이곳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상당히 어리거나, 어린 외형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물론 상대의 목소리에서 앳된 티가 묻어나온다고 한들, 누구도 당사자의 나이에 신경쓰지 않는다. 나이 같은 건 시간이 흐르기만 하면 얼마든지 먹는, 무한을 향해 달려가는 유한의 현재 표기값에 불과하니까.
"TF가 아니었다. 다른 존재가 개입한 것이지."
"TF는 병적으로 자신들의 영역과 비밀을 엄수하는 족속들이라 다른 존재가 시설에 드나드는 건 불가능했을 텐데요."
"하지만 TF의 소속으로 위장한다면 가능하지."
딱!
손가락을 튕기는 명쾌한 소리와 함께 앳된 목소리의 소유자가 살짝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TF의 직원으로 위장해서 경쟁자들을 직접 제거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떠올릴 수 있는 수법이지만, 쉬이 실천할 수 있을 만한 건 아니네요."
"그렇지. 그 친구가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 하고 그 자리에서 아웃 당해버렸으니, 작정하고 사냥을 한 셈이지."
"음, 하지만 우리들에겐 관계없는 이야기네요. 당신이 영역화 선포에 성공한 제 4 연구 시설, 그리고 내가 운 좋게 외부의 도움을 받아 영역화에 성공한 제 1 연구 시설. 이미 다른 경쟁자들은 차이를 좁힐 수 없을 만큼 앞서 나가고 있는 상태예요. 그렇지 않나요?"
제 1 연구 시설은 이번에도 영역화 선포에 실패할 뻔 했지만, 기가막힌 타이밍에 외부 침입자로 인해 시설 전체가 완파. 거의 거저먹기로 영역화 선포를 할 수 있었다.
반면 제 4 연구 시설 담당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외부의 도움이나 행운 한 점 섞이지 않은 순수한 승리를 쟁취해냈다. 무지몽매한 인간들의 혼돈과 절망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죄책감이 그들의 등을 기어오르게 만들었다.
"룰을 잊지는 않았겠지."
"당연하죠."
"다음 '아버지'가 되기 위한 자격을 갖출 것. 그러기 위해 혼돈 속을 기어다닐 것. 비로소 우리 스스로가 혼돈이 되어, 모든 것의 끝에 홀로 서게 된다면 그가 바로 '아버지'다."
"대동할 수 있는 '아버지'의 유품은 단 하나씩. 당신은 '뇌'를 택했고, 저는 '입'을 택했죠. 다른 자들이 무엇을 가져갔는지는 모르지만, 아웃당한 제 6 처리 시설의 담당자는 '다리' 였던 게 확실해요."
"근거가 있나?"
"다리를 집중적으로 이용해서 혼돈을 야기시켰다고 하니까요. 그것을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여긴 것 같으니...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입'을 선택한 자 답게 그럴듯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군. 하지만 일리가 있다."
"그건 '뇌'가 판단한 건가요? 아니면 당신이 판단한 건가요?"
"어느 쪽이든."
순식간에 목소리가 사그라들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빈 공간은 여전히 허무와 냉기에 휩싸인 채 다시 고요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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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게 참한 효능이 있다는 겁니까?"
"아 그렇다니까요. 저 믿고 쭉 들이켜보세요."
이두근이 컵 안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살짝 걸쭉한 검은 액체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보통이라면 절대로 B40 아래로 내려오지 않을 연구원들이 여러 사정이 겹쳐, 최소 인원만을 모니터룸에 남겨두고 모두 B40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다.
첫번째 이유는 호국의 소변과 혈액 검사를 통해 다크다크 레인보우가 '유의미한' 독기 중화 작용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직접 실험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호국이 6-311과 6-41을 풀어놓은 탓에 그에 대한 당사자의 정확한 해명을 듣고, 향후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책의 사전 조율을 하려는 것이었다.
ES가 존재하는 구역은 항상 C 게이지가 미쳐 날뛰기 때문에 일부 연구원들은 C 게이지 측정기를 사용해 초 단위로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은 호국이 6-15에서 직접 제조해준 다크다크 레인보우 시음식을 가졌다.
"이거 진짜 마셔야 합니까? 안 마시는 게 건강에 훨씬 이로울 것 같은데......"
"원래 몸에 좋은 게 맛이 없는 법이잖아요."
세상에 맛있으면서 몸에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츄라이 츄라이, 하고 손짓하는 호국의 권유에 이두근은 마지못해 컵을 입에 가져갔다.
"으, 으으으음!"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맛이 없으면서 미묘하기까지 하다.
아주 역겨우면 차라리 죄다 토해내고 입을 헹궈낼텐데, 토할 만큼 역겨운 건 아니었다. 그냥 더럽게 맛이 없을 뿐이지. 이 미묘하면서도 짜증나는 맛을 뭐라 형용할 단어가 없어 이두근은 일단 '좆같다'고 표현했다.
색도 거무튀튀하고, 식감도 스무디처럼 끈적걸쭉한데다, 목구멍에 들러붙는 것 같은 느낌은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최악이었다.
그래도 일단 억지로 식도 아래에 처박고나면 위장 속으로 흘러들어간 음료가 순식간에 체내로 흡수되는 것 같은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쩐지 텁텁한 공기에, 무언가가 전신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불쾌감이 페X리즈를 뿌린 것 처럼 말끔하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음. 괜찮은 것 같아. 아침에 일어날 때 마다 한 잔씩 하고 싶은 맛이야."
물론 좆같은 맛을 자신만 느낄 수는 없었으므로 이두근은 호국과 함께 츄라이 츄라이를 시전했다.
어서 마시지들 않고 뭐해? 언제까지 내 어깨가 춤을 추게 할 거야?"
"아까 팀장님 표정 봤습니다. 저희는 안 마셔도 될 것 같은......"
"안 마시는 놈은 카지노에 처박아주겠다."
게임 열 판을 지고 신체의 일부를 잃느니, 차라리 잠깐의 미각을 잃는 게 낫다고 생각한 연구원들은 하나둘씩 다크다크 레인보우를 입에 털어넣었다.
곧이어 터져나오는 연구원들의 괴로운 신음성과 기침 소리는 이두근의 묵은 스트레스를 한 번에 날려주었다. 이거지. 이게 바로 권력자가 합법적으로 아랫 것들을 괴롭히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다.
다크다크 레인보우를 마신 이두근의 팀은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의 지위와 책임,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꽤 많이 바뀌었음을 눈치챘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경비들의 치료 기록에 의하면 공통적으로 그들은 항상 몸이 썩어들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딱히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아니고, 피곤하지도 않은데 전신이 무겁게 느껴지는 건 일상다반사요. 볼일을 보면 꼭 피가 섞여나오거나, 가래 섞인 잔기침을 많이 해댔다고 한다. 그 밖에도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거나, 신체의 일부가 괴사를 견디지 못해 떨어져나가 크게 당황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검은 음료 한 잔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연구원으로 위장한 조사관들의 숨겨져 있던 업무 열정이 다시 한 번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연구실에서 실험체들에게 시음시킬 때는 아무런 효과도 볼 수 없었던 다크다크 레인보우. 그러나 죽음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이곳에선 무안단물, 성수, 만병통치약 뺨을 지그재그로 후려갈기는 신의 음료로 거듭났다.
이런 귀물을 상층부에 반납하고, 실적에만 미쳐있는 엘리트 집단의 손에 넘겨주는 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물론 재단 직원들을 언제까지고 ES의 독기에 노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른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이두근은 지금 이 자리에 신입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가드-079에게 다가가 은밀한 뒷거래를 제시했다.
"호국씨, 저와 함께 짭짤한 돈벌이를 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TF에선 겸직도 허가해주던가요?"
"겸직 같은 게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부업 같은 거지요. 그 뭐냐, 저희 연구원들도 마냥 연구 실적만으로 먹고 사는 건 아닙니다. 개인 프로젝트로 개발한 신약이나 무기 따위를 기업에 내다 팔기도 합니다. TF에서도 최종적으로는 그게 재단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판단해서 허가해주는 편이고요."
호국은 그럴 거라면 똑똑한 연구원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으나, 이두근은 기다렸다는 듯이 파리처럼 손을 싹싹 빌면서 사탕발림 가득한 말을 내뱉었다.
"이 6-15에서 호국씨가 제조해낸 다크다크 레인보우가 대단한 효능을 가지고 있다는 건 호국씨만 알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그러니 호국씨에게 최초 발견자로서 소유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습니다. 판매, 유통, 홍보까지 전부 저희가 책임질테니 호국씨는 허가만 해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TF에서 주는 쥐꼬리만한 월급 외에도 딴주머니를 찰 수 있는 겁니다!"
딴주머니! 남자(유부남)들의 로망!
지갑에 돈이 두둑한 남자는 자존감도 높다는 사실이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무엇보다 호국은 돈이 필요했다. 자신의 꼴통에도 딱 들어맞는 최첨단 최고급 VR 기기와 텃밭을 가꿀 수 있는 아담한 전원주택을 살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이.
"불법적인 건 아니죠?"
"어휴, 저희가 언제 호국씨를 등쳐먹은 적 있습니까? 호국씨가 안 돼요, 싫어요, 하지마세요 하면 저희도 안 하는 겁니다. 하지만 호국씨가 돈좀 만져보고 싶으시다면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다 이겁니다."
윤리 문제 OK.
사내 규정 OK.
동업 준비 OK.
호국은 눈썹을 씰룩이면서 이두근의 손을 맞잡았다. 매일 맛대가리 없다고 욕하면서도 왠지 끌리는 맛이 있는 석유 같은 것을 꾸준히 마셔댄 보람이 있었다.
이제 연구원들의 호위 업무를 끝내고 다시 본인의 업무로 복귀하려던 찰나, 호국은 이두근의 손에 어깨를 붙들렸다.
"그럼 사업 얘기는 끝났고. 이제 6-41과 6-311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프롯 찬스 쓸게요."
"어림도 없지. 야! 뭣들 해! 얼른 호국씨 끌고 가!!"
그렇게 호국은 휴게실에 끌려가 장장 3시간 가량 다수의 똑똑이들(연구원)에게 둘러싸여 갈굼을 당했다.
직권을 이용한 합법적인 갈굼이 아닌, TF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베테랑이 사고를 저지른 경비를 일방적으로 갈구는 것에 불과했다.
ES를 풀어줬다면 관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저들이 사고치지 않도록 24시간 관리할 여유와 인력은 충분한가? 만약 호국이 풀어준 ES가 사고를 친다면 그에 대한 사죄와 처벌 및 보상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상층부의 높으신 분들이 이 사실을 알고 추궁했을 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다른 재단 직원들을 납득시킬 자신이 있는가? ES의 업무 보조 능력은 신뢰할 수 있는가? ES가 시설을 탈주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호국을 중심에 두고 연구원들이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팩트로 정신없이 후려갈겼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프롯이 준비해준 로드맵을 호국과 함께 살피면서 일부 안을 수정하거나, '이정도라면 높으신 분들도 이해해주실거다' 라면서 추가 내용을 더하기도 했다.
호국과 함께 ES와 대면해도 더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진 이두근의 팀은 쫄보 기질을 내다버리고, 진짜 연구원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들보다 급이 낮은 경비를 갈구고, TF의 발전 가능성을 다 함께 모색하고, 예전에는 관심조차 주기 싫었던 ES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이다.
정작 단 하루만에 벌어진 그 모든 미친 짓거리들이 폭풍이 다가오기 전의 고요한 한때였음을 누구 하나 알지 못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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