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진실의 파편(1) >
-프롯 온라인. 제가 심연 아래를 걷고 있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가드.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화장실 거울에 머리를 처박고,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빈집털이를 하러 온 좀도둑 새끼들이 저 아래에 있다는 것 말곤 별 일 없어."
-생각보다 피해가 심각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모니터룸을 확인해본 결과 연구원들을 비롯한 가드의 여동생분 또한 안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쪽에도 좀도둑들이 있었어?"
-모두 제압된 상태입니다. 모니터룸 근무자들이 생각보다 유능하다는 것이 증명된 겁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원래 유능해. 그래서 나처럼 머리 나쁜 놈들은 이렇게 몸이라도 열심히 굴리는거고."
호국은 상반신을 흔들흔들 대고 있는 침입자의 품속을 뒤져 그들이 사용하던 구식 스마트패드를 찾아냈다. 아마 최신예 스마트패드를 사용하면 첩보 영화처럼 추적이 귀찮아질까봐 호국처럼 구식 스마트패드를 사용했던 것 같았다.
덕분에 새로운 배터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호국은 무사히 프롯을 접속시켰다.
-그런데 가드. 그 옆에 서있는 것들은 뭡니까?
"좀도둑이었는데, 이젠 6-01 할아버지의 부하."
호국이 표현할 수 있는 매우 한정적인 단어 속에서 가장 어울리는 묘사가 '부하' 라는 단어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호국에게 당해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인간들이 갑자기 송곳니가 하나씩 박히더니 벌떡 일어선 것이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거추장스러운 기동 슈트가 퍽퍽 부서지며, 비대한 근육과 날카로운 손톱, 무시무시한 상어 이빨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6-01 할아버지의 송곳니엔 사슴 녹용 못지 않은 엄청난 효능이 있나봐."
-그런 종류의 효능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지금은 시설 내에 침투한 침입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저 불쌍한 존재들은 나중에 제가 따로 '처리'하겠습니다.
귀찮은 사후 처리를 대신 해준다는 말에 호국은 역시나, 하고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이 유능한 AI 비서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호국은 어떤 멍청한 짓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모든 감시체계를 점검한 결과 시설 방어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드가 임시 고용했던 6-41(플라스틱 병사)은 훌륭하게...어, 6-150와 협력하여 적들을 격퇴하였습니다. 일단 당분간 B56에는 내려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군인이 일을 잘 했으면 마땅히 공치사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은 아닙니다."
프롯은 시설 내부 시스템을 통해 B56의 상황을 확인해본 뒤,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B56의 모든 격벽을 내려버렸다. 식물원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문까지 완전히 닫아버린 후에야 겨우 안심할 수 있겠다는 계산 결과를 내렸다.
설마 제 6 처리 시설의 전력 대부분이 차단되면서 운 나쁘게 프롯의 접속까지 끊어진 상황이 1시간 가량 이어졌을 줄이야. 덕분에 풀려나선 안 될 것들이 풀려났거나, 접근해선 안 될 구역에 침입자들이 접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장 시급한 구역은 B80 입니다. B72와 B79는 신입과 신입 2호가 사수하고 있는 듯 하지만, 둘 또한 B79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으려 합니다.
"이야, 선임이 뭐 빠지게 구르고 있는데 한 곳에 짱박혀서 농땡이를 치고 있다? 이걸 기분 나빠하면 나도 꼰대인 걸까?"
-합리적 꼬장이 인정됩니다.
역시 유능한 AI는 사람 볼 줄 안다며 고개를 끄덕인 호국은 때마침 움직이기 시작한 근육괴물들의 뒤를 따라나섰다.
저위험군으로 먼저 올라온 6-01은 뻥 뚫려있는 엘리베이터 아래를 스윽 내려다보곤, 근육괴물 셋을 차례차례 손으로 집어서 던져버렸다. 안전 없는 쾌감속으로 근육괴물 셋이 사라지자 호국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자신 또한 아래로 던져줄 거라 기대하고 있었던 호국의 예상과는 달리, 6-01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곤 남은 한 손으로 라이프 라인을 잡아 쭈욱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흡사 터미네이터가 쇠사슬 하나에 매달린 채 샷건을 들고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과 비슷했다.
'가만, 이 놈의 엘리베이터는 또 어딜 간 거야?'
B40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엘리베이터는 6-01의 손에 붙들려 내려가는 와중에도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나 괘씸한 좀도둑들이 폭파시켰다고 해도 잔해정도는 남아있어야 정상이건만, 호국의 '눈'에 비치는 음침한 엘리베이터 통로 속에 엘리베이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그 병신같은 엘리베이터는 고물상에 팔아치우고 새 것으로 바꿨어야 했어. 툭하면 고장나고, 있다가도 없고, 제 마음대로 층수를 바꿔버리는 게 무슨 엘리베이터야. 내가 발로 만들어도 그것보단 잘 만들겠다.'
IQ 84도 인정한 수준 낮은 엘리베이터! 다른 복지 혜택은 다 좋아도 엘리베이터 하나는 절대 안 바꿔주는 TF의 사내 정책!
고작 엘리베이터 하나가 사람을 이렇게 열받게 만드는 물건인가 싶다가, 호국은 문득 자신의 귀가 미친듯이 가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으, 흐으으응......!"
-정신을 똑바로 붙들어 주십시오 가드.
"아니, 갑자기 누가 귀에 솜털을 한 웅큼 집어넣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구체적으로는 누군가가 호국의 귀에 대고 매우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숨결을 불어넣은 듯한 감각이었다. 다 큰 사내 새끼가 허공에서 붙들린 채 몸을 꽈배기처럼 꼬아대야 했을 만큼 묘한 쾌감(?)이 있었다.
그 순간, 호국은 지난 1시간 동안 들리지 않았던 먼 곳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음을 눈치챘다.
모니터룸에서 다급히 소리치며 시스템을 안정화하라는 이두근의 목소리, 자신은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는 여동생의 목소리, 그리고 저 아래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고통에 찬 비명소리.
익숙했던 감각이 다시 되돌아온 것은 기뻤으나, 걸러내지 않은 음성이 너무 많아 호국의 귀가 멍해질 만큼 소음 테러가 심각했다.
특히 손전등 불빛도 온전하게 도달하지 않는 가장 아래에서 올라오는 비명소리는 고막을 송곳으로 긁어내는 듯 했다.
"신입이랑 2호, B80으로 부를 수 있겠어?"
-불가능합니다. 둘에게 이미 협조를 요청했으나, B80으로 내려가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해피는?"
-바로 근처에 있습니다.
근처 어디, 라고 물어보려다 B61의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해피가 훌쩍 뛰어올라 호국에게 안겨들었다. 플라스틱 병사들에게 집주인 아줌마의 저택 리모델링을 맡겨두는 동안 그곳의 감독관을 맡겨두었는데, 갑자기 전력이 차단된 뒤에도 여태껏 B61에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헥, 헥 대는 소리만 내지 않았다 싶을 뿐이지, 해피는 호국의 품에 안긴 채 혀를 내밀었다. 기계로 이루어진 해피의 몸에서 얼마 존재하지 않는 살덩어리 중 하나였다.
"어휴, 근데 너 좀 무거워진 것 같다?"
-제 자매에게 무겁다는 말은 자제해주십시오.
"무겁다는 걸 무겁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할까? 깃털보다 무겁다? 내 손으로 다 들기엔 버겁다? 밥 세 그릇 먹을 것 같다?"
-깃털보다 무겁다는 표현이 제일 괜찮은 것 같습니다. 나날이 가드의 어휘력이 늘고 있는 것 같아 저는 기쁩니다. IQ 테스트를 다시 해보시겠습니까?
"여동생이랑 싸우면서 테스트 할 수 있어?"
-그건 외적 요인이 반영되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럼 내 IQ는 영원히 84야."
여동생을 조지는 일이라면 아인슈타인보다 똑똑해질 자신이 있는 호국이었지만, 그 외라면 딱 해피보다 우월한 지능을 만끽하는 게 고작인 신세였다.
중간에 해피까지 합류했음에도 6-01은 전혀 힘에 부치지 않는지, 용케 한 손으로 둘의 무게를 지탱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프롯까지 포함하면 셋이었지만, 프롯은 자신을 '인원'에 포함하는 게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고 곧잘 말하곤 했다.
스마트패드나 모니터룸의 통합 시스템 관리기기도 자신이 현실과 연결될 수 있게 도와주는 매개체에 불과하니, 진짜 자신의 몸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그래도 지금은 함께 있으니까 머릿수에 포함시키는 게 맞지.'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라는 말이 있듯, 호국에게도 79기 경비팀의 명단은 영원불멸했다.
-아, 그러고보니 가드. 혹시 6-41에게 '실전'을 치뤄도 좋다는 통보를 해두셨습니까?
"그런 말 안 했는데?"
-그럼 제가 시설내 방송으로 전달하겠습니다. 6-41은 스스로 모의전과 실전을 구분하기 때문에 화력 차이가 매우 큽니다. 예를 들어 가드의 코딱지만한 총알을 발포하더라도 실전으로 판단할 경우엔 진짜 총알과 같은 파괴력을 자랑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설내 방송 시스템에 접속한 프롯이 매우 기계적인 어조로 '각 부대에게 전달합니다' 라고 운을 띄웠다.
-현재 상황은 실제 상황입니다. 시설 내에 침투한 모든 적은 실제 적대 세력이며, 실전을 경험해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력입니다. 모의전이 아닌 실전을 즐겨주십시오.
일전에 호국과 프롯이 함께 6-41 전용 계약서(노예증명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안했던 조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갑은 을에게 실제 전장을 준비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프롯의 공인하에 실제 전장이 준비되었으니 마음껏 날뛰어도 좋다는 통보가 지금 막 내려진 상황. 호국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다른 수색조들이 어떤 꼴을 맞이하고 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덜컹! 덜컹!
프롯의 통보가 끝나기가 무섭게 해피의 옆구리 적재함에서 무언가가 크게 날뛰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호국의 눈이 자연스레 가늘어지고, 말없이 혀만 내밀고 있던 해피는 고개를 홱 돌렸다.
"내가 살아있는 건 먹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어? 고개를 돌려? 네가 뭘 잘했다고 고개를 돌려."
호국이 해피의 턱을 잡고 씨름을 하는 사이 6-01의 수동 엘리베이터가 B79 앞에 도달했다.
-여기서부턴 직접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긴 어르신도 힘드시겠지."
아무리 깔끔하게 회춘하셨다고는 하나, 본판은 당장 실비 요양원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6-01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6-01의 손에 붙들린 채 40층 가까이 내려온 호국이야말로 진정한 후레자식이었다.
그것도 제 애완동물까지 함께 짊어지게 했으니, 효자 스킬에 불꽃 룬을 있는대로 박아넣은 초 후레자식이었다.
"...이제 스스로 내려갈게요."
6-01의 손길에서 벗어난 호국은 해피와 프롯을 한 팔에 안아든 채 아래로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물컹, 하고 무언가 밟힌 것이 있어 살펴보니 먼저 아래로 떨어졌던 근육괴물들이 쿠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살덩어리가 검게 물든 채, 기분나쁜 기포가 피어오르며 썩어가고 있었다.
근육괴물들 아래에 다른 인간으로 추정되는 시체가 깔려있는 것 같았지만, 호국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TF 경비가 TF에 침입한 좀도둑에게 낙상 사고에 주의하라고 경고해줄 의무는 없었으니까.
그들이 쓰러져 있는 곳 앞에는 이미 누군가가 개박살을 내놓은 B80의 특수 격벽이 반쯤 개방된 상태였다. 아예 각잡고 드릴과 조져놨는지 잠금장치가 있어야 할 장소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군데군데 태워먹은 흔적도 있었으니 절단기까지 동원한 듯 했다.
"진짜 좀도둑 스케일 장난 아니네. 영화에서 이러면 개연성 없다고 평점 테러 받는데."
-그럼 잘 생긴데다 여성을 배려할 줄 알고, 그러면서도 소박한 점을 좋아하기에 아무것도 없는 서민 여성을 무조건 좋아하는 재벌 2세 남자의 로맨스 영화도 개연성 트집이 잡힙니까?
"메소드 연기를 하는 시어머니가 등장하면 모든 개연성에 문제가 없어져."
해피를 바닥에 내려놓은 호국은 프롯과 시답잖은 농을 떠들며, 애매하게 열려있는 격벽을 비틀어 열었다.
끼이이이, 하고 굉장히 거슬리는 금속마찰음이 울려퍼진 것으로 보아, 정기적으로 기름칠도 안 했을 만큼 이곳의 관리가 형편없었다는 걸 의미했다. 아마 이곳에 방문한 사람도 요 근래엔 좀도둑 일당과 호국 뿐이리라.
"난 여기 처음 오는데, 다리가 척척 움직이면 운명적인 느낌에 이끌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운명이라는 키워드가 먹히는 건 삼류 로맨스 뿐입니다.
이곳에는 CCTV도, 전등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격벽 근처에 감지 센서 하나만 설치되어 있다는 프롯의 충고에 호국은 노획한 라이플을 견착했다.
CCTV가 없다는 것은 이곳에 적이 침입했어도, 최종적으로는 적이 어디에 있는지 프롯도 알지 못 한다. '눈'은 제대로 어둠 속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지만, '귀'는 아직 상태가 오락가락 했기에 무작정 믿을 수는 없었다.
다만 '다리'가 이끄는대로, 호국은 어둠 속에서도 살금살금 움직이며 숨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냄새를 못 맡게 연막탄을 터뜨렸어.'
어둠 속에서 연막탄을 터뜨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호국은 침입자들의 잔향이 연기에 묻힌 것을 아쉬워했다.
군에서 배운 추적술의 기본은 적들이 남긴 족적, 증거, 그리고 잔향이었다.
족적은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면 다소 속도가 늦춰지더라도 쉽게 위장할 수 있었지만, 적들이 흘린 증거(흔적)나 잔향은 특별한 환경이 아니라면 좀처럼 없애기 힘들었다.
가령 도주중인 적이 피를 흘리고 있다면? 그가 움직인 길목마다 소량의 피가 흔적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부상입은 자가 내뿜는 특유의 잔향또한 남는다.
온기를 확보하기 위해 불을 피워도 흔적과 잔향이 남고, 생리 활동(소변, 대변)을 해도 흔적과 잔향이 남는다. 그걸 토대로 추적해나가면 결국 도망치는 적의 꼬리를 잡을 수 있다고 배웠다. 행보관에게서.
그런데 이 좀도둑들은 어둠 속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연막탄까지 터뜨린 것이다. 호국은 그들이 꽤 용의주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 클래스인 내 코가 쫓지는 못 해도 경비견 클래스의 코는 쫓을 수 있지.'
호국은 지금껏 해피에게 가르친 대로 등을 탁탁 두 번 두들겨 주었다.
한 번 두들기는 건 공격 신호, 두 번 두들기는 건 추적, 수색 신호였다.
이 어둡고, 쓸데없이 기괴한 문양이 가득 새겨진 '석실' 통로 속에 대체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국은 좀도둑들을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좀도둑들을 추적하기 시작한 해피가 움직이는 방향은 호국의 '다리'가 이끄는 방향과 완전히 같았다.
------
< 경비 업무 일지 : 진실의 파편(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