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54화 (154/209)

< 경비 업무 일지 : 사내 평가 시즌(1) >

"집도 좋지만 사람은 역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해. 집구석에만 박혀 지내면 사람이 썩어들어가는 기분이야."

-제가 피크닉을 권유하지 않았더라면 남은 휴가 기간내내 집에 박혀 계셨을 것 아닙니까?

"나는 가상 현실에 접속할 수 없으니까 그건 솔직히 인정해줘야지."

-현실에서도 즐길 수 있는 일은 아직 많습니다.

'아직' 이라는 말이 붙었다는 것은 그마저도 머지않아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 똑똑하지 않은 호국이라도 앞으로 빠르게 사회가 변하리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지금도 인류의 절반 이상이 가상 현실을 자유롭게 즐기는 실정인데, 지금 남아있는 전문직이나 노동자들까지 모두 가상 현실로 들어가버린다면? 현실에서 도피해버린다면?

그때는 정말로 먼 옛날의 명작 SF 영화인 매트릭스처럼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AI와 기계들에 의해 관리받게 될 것이다. 현실에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도 서둘러 준비해야겠지.'

큰 집에 결혼까지 하겠다는 미래를 꿈꾸긴 했지만, 세상이 변하는 속도보다 자신이 이상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릴 것은 당연했다.

아무렴 어떤가. 비싼 VR 기기를 구입하고, 결혼이나 즐거운 노후 생활은 꿈 같은 가상 현실에서 즐기면 그만이다. 그 전까지는 한 명의 어엿한 노동자로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오늘 오전, 제 6 처리 시설로 무사히 복귀환 호국은 자신의 개인 사무실에 준비된 검은 작업복을 챙겨 입었다.

빳빳한 옷의 질감, 향긋한 세제 냄새, 그리고 익숙한 그립감의 충격 진압봉이 호국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병원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어린 시절부터 호국에게 이렇다 할 만한 장래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건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렇다 할 만한 비전도 없고, 그저 기억력과 눈썰미가 좋다는 것 밖에 장점이 없었던 호국이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이라니.

어린 시절의 호국을 알던 사람들이라면 하나같이 세상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한 마디씩 할 것이다.

-휴가에서 복귀하자마자 업무에 투입되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해피의 몸에서 벗어나 다시 스마트패드로 돌아온 프롯이 그렇게 물었다. 호국은 네가 그런 소릴 하냐며 피식 웃었다.

사실 프롯은 호국과 함께 휴가를 즐기면서도 원격 통신으로 제 6 처리 시설의 관리까지 겸하고 있었다. 때문에 정말 휴식이 필요한 것은 호국이 아니라 프롯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AI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 아니라 하드웨어의 유지 보수 뿐이라고 밝혔을 때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내가 얼른 업무에 복귀해야 다른 사람들도 한숨 돌릴 거 아냐."

그 말대로, 호국이 휴가에서 복귀하기가 무섭게 일부 연구원 측에서 다음 휴가 신청자가 나왔다고 한다.

김세희는 아직 신입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호국과는 달리 사회성이 높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번 달의 휴가는 이월시킬 심산인 듯 했다.

덕분에 김세희에게 일부 업무가 인계되었고, 그녀는 호국을 비롯한 경비팀 79기를 중점적으로 감시하면서 무전으로 오퍼레이팅을 해주는 전담 직원이 되었다.

신입 연구원이면서 이례없을 만큼 빠르게 자신만의 보직을 획득한 것이다. 호국이 워낙 특이 케이스라 그런 것이지, TF내에선 상당히 드문 경우였다.

"그리고 사실 여동생이 일을 얼마나 잘 하는지 오빠된 입장에서 궁금하기도 해."

-제가 여동생분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전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원래 이런 건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야 하는 법이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프롯은 스마트패드를 조작해 김세희의 프로필과 평가 내용을 보여주었다.

호국은 김세희의 직속 상사가 아닌데다 부서도 다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그녀의 프로필을 확인할 권한도 없다.

하지만 제 6 처리 시설에서 그 여부를 판단하는 건 관리봇의 재량이었고, 프롯은 호국이 원한다면 모든 정보를 기꺼이 내줄 자신이 있었다.

-우선 평가 기준은 등급으로 매깁니다. A+ 등급이 가장 높은 등급이며, F-가 가장 낮은 등급입니다. 대학교를 다녔던 그녀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재단 직원들에게 상당히 익숙한 기준입니다.

"난 고졸인데."

가만히 있다가 범위 타격을 얻어 맞은 호국이 씁쓸하게 중얼거렸지만, 프롯은 아랑곳하지 않고 관리봇의 시선에서 본 김세희에 대해 말했다.

-우선 업무 태도는 A- 입니다. 여동생분은 가드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FM을 따지는 성향이 돋보였습니다. 선임이 맡긴 업무는 빠른 시간내에 정확히 수행하며,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근무 시간에는 일만 하고, 휴식 시간에는 휴식만 취하는 타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잖아. 그런데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왜 A+가 아닌 거야?"

-자신이 맡은 업무를 모두 끝냈지만, 근무 시간이 끝나지 않았을 경우, 스스로 일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일만 하는 기계는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지."

-신입 연구원의 보안 등급으로는 접속할 수 없는 정보를 열람하려는 시도도 포착되었습니다.

"당장 감봉 처리를 했어야지!"

그래도 꼴에 여동생이라고, 김세희를 쉴드 쳐주려던 호국은 프롯의 이어지는 설명에 즉시 태세를 바꿔서 쉴드로 쳐버렸다.

"아주 건방진 녀석이야! 생각해보면 고것이 옛날부터 내 개인용 PC나 노트북을 건드려서 보면 안 될 것까지 몰래몰래 보곤 했었단 말이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만......"

-여동생분께서 열람하고자 했던 정보들은 주로 'ES를 활용한 가상 현실 연구 자료' 였습니다. 왜 그런 자료를 열람하려 했던 건지는 대충 짐작이 갑니다만, 심각한 사안은 아니라 따로 주의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나였으면 바로 모가지였지! 그런 건 아주 혼구멍을 내줘야 하는데!"

주먹을 불끈 쥐어보인 호국은 프롯이 여동생에게 모가지를 선물하지 않은 것을 굉장히 안타까워 했다.

-어쨌든 가끔씩 보이는 특이한 행동만 아니라면 그녀의 업무 태도는 완벽합니다. 실로 이상적인 노예, 아니. 노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렴, 누구 동생인데."

칭찬을 하라는 건지 모가지를 치라는 건지 하나만 해줬으면 싶었지만, 프롯은 호국의 장단에 맞춰주기보다 다음 평가를 이어나갔다.

-개인 능력 평가 역시 A- 입니다. 그녀는 매우 수준 높은 생명 공학 지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장에서 뛰는 생명 공학자들 못지 않은 태크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신만의 장점을 살려 벌써 ES를 활용한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프로젝트 내용은 ES 6-30(트릭없는 마술사)의 능력을 이용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연구입니다.

"하나도 모르겠는데?"

-지금껏 숱한 재단 직원들이 실험해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ES 6-30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술처럼' 즉시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여동생분은 그것을 이용해서 어떤 물건을 만들어내고자 하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ES 6-30은 그녀의 실험 협조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러 여동생분이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내서 골탕을 먹이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내가 지금 변비가 아닌 게 이렇게 안타까울 줄이야......"

변비에 걸렸다면 10년 묵은 체중이 쑥 내려갔을 것을. 한탄을 내뱉은 호국은 그 뒤로도 여동생을 칭찬하거나, 실컷 까면서 시설내 구역 이동 시간을 알차게 즐겼다.

B73에 도착했을 무렵, 김세희가 받은 종합 평가 등급은 A-.

업무 태도 완벽, 개인 능력 우수, 소통 능력 나쁘지 않음, 환경 적응 능력 뛰어남 이라는 칭찬일색에 의거해 꽤 후한 점수를 받은 것이다.

물론 호국은 말도 안 된다며 재평가를 요구했지만, 당장 프롯이 평가해야 할 인물은 따로 있었다.

-사실 꽤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가드 역시 사내 평가에 포함됩니다.

"아."

-3급 미만의 일반 직원이라면 모를까, 3급 이상의 팀장급, 지휘관급, 소장급은 모두 특별한 사내 평가 기준이 정해져 있습니다. 3급 부터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사내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 하면 보안 등급이 강등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월급도?"

-등급 강등과 함께 감봉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자신의 이마를 탁 친 호국은 신음성을 흘렸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일을 잘 했다고 생각하지만, 높으신 분들이 정한 기준과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이 다를 수도 있었다.

"내 점수를 조작해주는 건 안 되지?"

-가능합니다만, 정말 그렇게 하고 싶으십니까?

"...안 되지."

호국은 부모님의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그중에도 가장 크게 와닿는 것은 역시 '거짓말하지 말라' 였다.

프롯을 이용한 점수 조작으로 인사고과에서 크게 이기고 들어간다면 그건 거짓말 수준을 넘어서 사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까지 추해지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여동생 평가는 조작해서라도 낮추고 싶다.'

자신이 부모님의 말을 잘 따르는 효자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재벌가 막내 수준의 망나니였다면 즉시 여동생의 사내평가를 F- 까지 처박았으리라.

-게다가 3급 이상부터는 사내 평가 등급과 실적에 따라 FCD 회의를 거쳐 다른 시설로 발령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때문에 올해 하반기부터 시작되는 사내 평가에 다들 크게 신경쓰고 있습니다. 특히 고평가를 받은 재단 직원들은 상층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도 참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시설 발령도, 상류층이나 즐길 법한 파티도 호국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게 미래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일이라면 더욱 성실하게 임할 생각이었다.

"그래, 그건 됐고. 오늘 일하게 될 구역은?"

-보시는대로 B73 입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

엘리베이터의 문이 느릿느릿 열리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신입과 농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하게 될 업무는 조금 특수한 업무라 둘의 손을 빌리기로 했습니다.

"해피는?"

-해피는 '정비'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업무에는 함께 하지 못 합니다. 덧붙여서 예정대로 메인 오퍼레이터는 여동생분께서 맡게 되실 겁니다.

평소에는 프롯이 직접 오퍼레이터를 맡아주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별도의 관리봇 업무 때문에 오퍼레이터 업무까지 병행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엘리베이터에서 걸어나온 호국은 말없이 늠름한 신입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녀석은 그새 또 뭘 그렇게 쳐먹었는지 전체적으로 살집이 불었다. 구체적으로는 가슴쪽으로.

그리고 농사왕에게선 대뜸 밀짚모자를 빼앗았다.

"네가 쓰고 있으면 폼이 안 살아."

자신이 대신 써서 폼을 살려주겠다는 호국의 괴랄한 논리에는 농사왕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 경비의 준비가 끝난 것 같자 프롯이 무선 채널을 김세희 쪽으로 돌려주었다. 그녀는 여지껏 CCTV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무선 채널이 바뀌기가 무섭게 입을 열었다.

-남자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쫑알쫑알쫑알, 입이 아주 쉬지를 않네.

'이 싸가지를 대체 누가 데려갈까. 누구든 도시락 싸서 쫓아다니며 말려야지.'

옅게 한숨을 내쉰 호국은 일부러 이어셋을 툭툭 두들겨 시끄러운 잡음을 만들어냈다.

"앗, 아아...! 지하라 그런지 연결 상태가 안 좋네요! 아무튼 제 잘못은 아닌 것 같구요~."

-요즘은 통신 잡음 처리 기술이 크게 발전해서 헛짓거리 해도 소용없어요. 일단 업무는 업무니까 구역 설명부터 들으시죠?

"쯧."

-어! 지금 혀 차셨어요? 가드님 저 마음에 안 드시죠?

"에이, 그럴리가요......!"

-전 마음에 안 들어요. 헤헤.

호국은 휴가를 나가서 여동생의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두지 않고 온 것을 크게 후회했다.

< 경비 업무 일지 : 사내 평가 시즌(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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