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사내 평가 시즌(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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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그런 아이가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기업을 이끄는 모 중국 재벌가의 유일한 상속자(相續者)로 태어난 아이가.
그 소년은 매우 총명하였기에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고, 스스로의 위치와 신분을 이해할 줄 알았다. 때문에 일반적인 재벌가에서 배출되는 망나니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으며, 종합적으로 보면 '엄친아' 같은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독자(獨子)로 태어난 아이는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탈 수 밖에 없었다. 형제가 없다는 것은 유년기 시절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즐길 수 있는 상대가 적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다음 세대의 기업인이 되기 위해 철저하게 미래를 대비한 교육을 받는 소년에게 또래의 친구를 사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누구에게나 예의바르지만, 오히려 그런 타입이었기에 또래가 쉽게 다가서지 못 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외로움을 달래고자 막강한 부와 권력을 지닌 부모에게 자주 간청했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존재를 돈으로 사달라고.
그 결과, 소년에겐 많은 것들이 주어졌다. 작게는 장난감부터, 크게는 각종 희귀한 애완동물까지.
소년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일을 막고자 그의 부모는 아예 특수한 시설을 따로 만들어 소년에게 선물해주었다. 그곳은 소년만을 위한 놀이터이자 동물원이었고, 마음의 안식처였다.
물론 모든 것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 마찬가지로 인생이란 잘 나가다가도 어처구니 없는 일로 고꾸라지는 일이 허다하다.
잘 나가던 기업이 ES인 정전미로(blackout maze)에 의해 주력 공장이 개박살 나고, 하필 점검차 나왔던 재벌가와 임원진까지 싸그리 몰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홀로 남겨진 아이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쉽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급기야 자신과 함께 성장하고 있던 추억이 담긴 장난감들과 애완동물들까지 모두 처분당하기에 이르렀다.
다들 알다시피, 하수도라는 건 필요없는 것들을 마구 버리는 곳이 아닌가?
더이상 키울 맛이 나지 않는 금붕어도, 다 쓰고 휴지통에 버리기엔 조금 민망한 콘돔도, 먹고 남은 음식물 찌꺼기나, 이제 막 새끼 상태에서 부화한 악어 같은 것도.
다들 그렇게 버려졌고, 기억에서 지워진 것들 뿐이다.
6-321의 본체가 숨어있는 곳에 도달한 호국은 거대한 공동 같은 하수관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지금껏 온갖 신기하고 희귀한 것들을 목격한 호국이지만, 단 한 번도 이토록 거대한 생명체를 목격한 적은 없었다. 목이 아플 만큼 고개가 올라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주 큰 악어네요.
"저게 어딜 봐서 악어야. 크로코사우러스지. 메가샤크 vs 크로코사우러스 못 봤어?"
-왜 자꾸 들어본 적도 없는 옛날 영화나 게임 얘기를 말하는 거예요?
지난 3시간 동안 못 볼 꼴을 많이 봤기 때문에 미운정이라도 든 것일까. 호국이 말을 놓기 시작한 것에 대해 굳이 따지지 않으면서 세희는 호국의 기이한 취향을 지적했다.
"메가샤크 vs 크로코사우러스는 희대의 명작이야. 시간나면 꼭 봐."
-그럴 시간에 로맨스 영화나 한 편 더 보겠어요. VR로.
VR 얘기가 나오자 할 말을 잃어버린 호국은 말없이 숨을 내쉬고 있는 거대 악어를 올려다 보았다.
크로코사우러스니 뭐니 하긴 했지만, 정말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초거대 괴물 악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비쥬얼이었다.
무려 날카로운 이빨 하나가 호국의 얼굴만 했다. 아마 단순 크기만 따져도 집 한채는 우습게 깔아뭉갤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런 하수도에 처박혀서 대체 뭘 하는 거지?'
악어가 하수도에 산다는 괴담은 호국도 들은 적이 있었다. 옛 인터넷 유머나 괴담에서 심심하면 등장하는 도시전설 중 하나였으니까.
특히 민간인이 악어를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호주나 미국에서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의외로 그럴싸한 유머들이 옛 인터넷 시절에 나돌았다.
변기통에서 악어가 튀어나와 주둥이를 탁탁 다물어댄다는 이야기도 그런 쪽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큰 악어여야 말이 되는 것이지. 거대한 공동을 꽉 메우고 있는 거대 악어는 어찌나 비대한지 헤엄은커녕 자력으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주변에 쌓인 오물이나 쓰레기는 또 어찌나 많았는지, 호국 일행이 보트를 타고 지나쳐 오는 길에 만났던 온갖 괴생명체들이 지금은 움직이지 않는 쓰레기 신세로 널부러져 있었다.
마치 이곳이 거대 악어의 보금자리라고 말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찾지 못할 비밀스러운 장소. 동시에 과거의 추억이 담겨 있는 '물건'들과 함께라면 언제까지고 푹 퍼져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요람.
-6-321의 진짜 정체는 거대 악어였네요. 이 하수관에서 만난 유일한 '생명체' 니까요.
"역시 그런가?"
호국도 어렴풋이 이 거대 악어가 6-321의 본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껏 만난 것들 중 가장 멀쩡하면서도 정상적인(?) 생명체였기 때문이다.
오리 인형은 인형이고, 차일드 킬러는 깡통 로봇이며, 플라스틱 크랩도 플라스틱 덩어리다. 콘돔 날치떼는 말할 것도 없고, 산성 달팽이나 똥장어 같은 것들도 모두 생명체의 탈을 뒤집어쓴 쓰레기나 오물 덩어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곳에 축 늘어져, 마치 행복한 꿈을 꾸는 것처럼 숨을 내쉬고 있는 거대 악어는 비록 생김새가 매우 흉악하고 너무 거대할지언정, 그 근간은 일반적인 악어와 다르지 않았다.
-최초로 6-321 현상이 보고되었을 당시, 상하이의 일부 지역 하수관이 완전히 막혀버렸다는 보고가 들어왔었어요. 그걸 막은 건...아마도 저 악어겠죠.
그 점은 호국도 동의했다.
저 거대한 덩치의 악어가-본래 그런 크기가 아니었을지라도- 하수관 하나를 떡하니 막고 있었다면 뭐가 흘러들어왔던 막혀서 배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쌓인 오물, 장난감, 쓰레기가 섭리에 따라 순환되지 못 하고 영원히 이곳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거대 악어와 함께.
물론 호국은 그렇게 복잡한 생각따윈 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악어를 상대로 뚫어뻥을 가져왔더라면 큰일날 뻔 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전부였다.
아무리 화장실 마스터 김호국이라도 뚫어뻥 하나로 이 흉악한 덩치를 뚫어낼 자신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뚫어뻥보다 더 좋은 게 있지.'
호국이 검지와 엄지를 튕겨 소리를 내자 귀신같이 알아들은 신입 1, 2호가 보트의 적재함을 열었다.
모두의 영웅인 멸망 사나이가 더럽게 크고 강한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BFG(Big Fucking Gun)를 사용했듯이, 호국 역시 BFB(Big Fucking Bomb)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6-321은 외부에선 절대로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실험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반대로 내부에선 파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제기된 적이 많아요.
"하지만 한 번도 실험은 안 해봤다는 거잖아. 그걸 나한테 떠넘긴거고."
-탐색이 주요 업무이긴 했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파괴해달라는 요청도 있었으니까요. 제 2 연구 시설 측에서 들어온 협력 요청이라 거부할 수가 없었어요.
'갑질을 하려면 여동생한테만 할 것이지, 왜 나까지 불똥을 맞는 거지?'
어찌됐든 결국엔 B73에 와야 했을 테니 크게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호국은 지난 3시간의 개고생을 보상 받기 위해서라도 이 답답한 하수도를 날려버릴 작정이었다.
이곳의 심장이나 다를 바 없는 저 거대 악어와 함께.
준비된 대량의 플라스틱 폭약에 화력을 더하기 위해서 호국은 남아있는 기관총 탄약까지 일일이 분해했다.
탄약을 분해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는데, 바로 힘이 센 신입 1, 2호가 탄두를 잡아 억지로 뜯어내서 화약을 따로 모으는 것이었다. 호국은 오물 속에서 건져낸 SM 채찍으로 둘을 찰싹찰싹 두들기며 개처럼 부려먹었다.
남은 일은 폭발물을 다룰 줄 아는 호국이, 폭발물의 대략적인 화력이나 폭발 반경을 계산한 세희의 지시에 따라, 신입 1, 2호가 더러운 하수관의 균열에 폭약을 설치하게끔 명령하는 게 전부였다.
점성이 있는 플라스틱 폭약이라 어느 장소에 설치해도 껌처럼 착 달라붙었으며, 탄약에서 빼낸 화약까지 섞어 화력 보강을 했다.
원래 이런 건 테러리스트가 주로 애용하는 IED(급조폭발물)제작 방식이지만, 호국은 행보관이 가르쳐 준대로 최고의 효율을 뽑을 수 있는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이 거대한 공동이나 다를 바 없는 하수관을 내부에서부터 개작살내려면 자그마한 균열에 찰흙같은 플라스틱 폭약을 일일이 발라넣어야 했고, 당연히 연쇄 폭발로 인한 전체적인 화력도 계산해야 했다.
게다가 신관을 연결하는 작업 또한 만만치 않았는지라, 호국은 마지막 작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돼먹지 못한 일거리를 던져준 제 2 처리 시설의 아무개 양반을 속으로 욕했다.
더럽고 힘든 일이라고 해서 딱히 가릴 생각은 없었지만, 단순 탐색과 완전 폭파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임무가 아닌가.
호국은 손으로 직접 주물주물 해서 만든 점착 폭약을 바라보면서, 문득 50년 원조 맛집을 자랑하는 할매표 손수제비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심한 표정의 할매가 손으로 직접 치댄 밀가루 반죽을 아무렇게나 툭툭 뜯어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던져넣어 만든 손수제비. 국밥에 미친 양반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얼큰함과 만족감을 자랑하는 신의 음식이다.
발파기를 손에 쥔 호국이 바깥으로 후퇴하는 보트 위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저녁은 손수제비다."
벌써부터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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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아악!"
화려한 폭염과 함께 시끄러운 폭음을 덮어 씌운 것은 환희에 찬 김세희의 비명이었다.
장장 3시간. 정확히 따지면 3시간 26분 가량 엉덩이에 땀차도록 의자에 앉아있어야 했던 그녀는 드디어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6-321의 하수관이 내부에서부터 완전히 파괴되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숨어 있었는지도 모를 거대 악어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프롯의 보고까지 받았다.
오랜 세월 끝에 6-321의 비밀(정체)이 밝혀진 것은 물론이고, 이제 본격적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어 TF 입장에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공적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TF에선 수많은 기동타격대를 투입하고도 하수관 내부에 대해 이렇다 할 만한 정보를 알아내지 못 했었다. 하물며 연구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엘리트 연구원들이 끈덕지게 매달렸음에도, 결국 포기하다시피 제 6 처리 시설에 처박아버린 게 6-321 아닌가?
그걸 호국이 이끄는 경비팀 79기와 메인 오퍼레이터인 김세희의 힘만으로 해결해버렸다. TF 입장에선 아주 대견하면서도, 엘리트 연구원들 입장에선 배알이 꼬이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김세희였지만, 그녀의 업무용 책상 위에는 각종 계산식이 쓰여있는 종이와 펜이 나뒹굴고 있었다.
머리를 하도 쓰다보니 당이 딸려서 평소라면 절대로 먹지 않았을 초콜릿이나 과자 따위도 엄청나게 먹었다. 가드-079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먹었음에도 과자 봉지의 산이 쌓여 있었다.
오죽하면 평소에는 블랙 커피밖에 마시지 않는 그녀가, 이번에는 연구원들이 측은지심에 가져다 준 설탕 가득 인스턴트 커피를 말없이 받아 마셨을 정도였다.
김세희는 자신이 일터에서 떠나가라 비명을 내질렀다는 사실도 잊은 채, 프롯이 촬영한 B73 은폐 구역의 이미지 파일과 간략화한 결과 보고서를 뽑아 이두근에게 다가갔다.
"팀장님...제가 해냈어요."
"어, 음. 그래. 오늘은 굉장히...수고했다."
얼떨결에 김세희가 내민 결과 보고서를 받아든 이두근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의 공을 치하했다.
사실 무턱대고 제 2 연구 시설 소장이 의뢰한 협력 연구를 받아들인 그녀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하려고 했지만, 가드-079와 함께 보기 좋게 성공해버리고나니 할 말이 없어진 것이다.
여기서 혼을 내자니 공이 너무 큰데다 신입의 기를 죽여버릴 것 같고, 혼을 내지 않자니 이런 일이 또 생길까봐 걱정되었다.
그래도 결국 김세희가 가드-079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이두근은 이번 일을 그냥 넘기기로 했다.
사내 평가 시즌에는 하위 등급의 연구원이나 경비가 상사에게 합리적인 이유로 지적이나 경고를 받으면 감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내 평가는 각 시설의 눈과 귀를 담당하는 관리봇들이 지극히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이두근은 구태여 프롯이 보고 있는 마당에 그녀를 혼내고 싶지 않았다.
'프롯은 가드-079에게도 사내 평가 점수 조작을 권유하지 않았으니까.'
근본이 좀 이상한 AI이긴 해도 결국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는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 프롯의 특징이었다.
자신이 합리적인 이유로 그녀를 혼내지 않았으니, 그녀의 업무 성과에 흠이 생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 사내 평가 시즌은 볼만하겠어.'
사내 평가 시즌이 끝나면 모든 시설의 직원들에 대한 사내 평가 점수가 공개된다.
이는 1급 수석 연구원도 피해갈 수 없는 이벤트라, 보안 등급이 높은 이들일수록 다소 과하게 긴장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상층부를 만족시킬만한 성과와 평가 점수를 냈다면 보안 등급 상승과 더불어 다양한 혜택, 혹은 들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개인적인 소원을 들어주는 일도 있다고 한다.
그밖에도 고위급 인사들과 연줄을 만들 수 있는 '파티'의 초대장이나 매우 특별한 상을 수여받을 수도 있었다.
'나야 가드-079 바짓가랑이만 붙들고 있으면 충분하니까.'
김세희의 결과 보고서에 최종 확인 도장을 쾅! 찍은 이두근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이래서 사람은 줄을 잘 골라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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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비 업무 일지 : 사내 평가 시즌(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