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재단을 위한 산타는 없다(1) >
어느덧 징글벨 송이 울려퍼지는 시기가 왔다.
"으흐흠~ 으흐흠~ 으흠 으흐흠~"
본격적인 강추위가 한반도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는 12월. 호국은 B40의 중간 거점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설치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들 들떠서 입꼬리가 슬슬 말려 올라간다. 아이들은 선물 받을 생각에 기쁘고, 어른들은 연말 보너스 받을 생각에 행복하기 때문이다.
꼭 물질적인 무언가로 충족감을 채울 수 없다고 해도, 느긋하게 평화로운 한때를 즐기려 한다.
서양에선 주로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를 멍하니 바라보며 위스키를 홀짝이듯, 동양에선 가족들과 함께 조촐한 파티를 즐기면서 선물 교환 같은 걸 한다.
-하지만 최근 5년간 인류의 크리스마스 문화는 눈에 띄게 큰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선물보다는 가상 현실의 재화(가상화폐)를 선물하거나, 연말을 즐기는 행위조차 VR 내부에서 해결한다고 합니다.
"그런 진실은 듣고 싶지 않았어!"
프롯의 쓸모없는 한 마디 때문에 홧김에 망치를 세게 내려친 호국은 장식물의 방향이 비뚤어진 것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생각해보니 열받네. 다들 나만 빼고 VR에서 크리스마스를 즐길 거 아냐? 파티도 거기서 하고, 선물 교환도 거기서 하고, 심지어 커플들의 진한 밤놀이도 거기서 하겠지!"
-부러우십니까?
"그럼 안 부럽겠냐? 크리스마스에 야간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도 나보단 더 나을걸."
어쨌든 그런 사람들도 VR에 접속해서 온갖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즐길 수 있을테니까. 호국만 가상 현실의 눈을 맞아보지 못 하고, NPC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받을 수도 없으며, VR 여자친구 대행 아르바이트와 함께 연인인 척 할 수도 없다.
전 세계 모든 인류에게 허락된 달콤한 과실을 딱 호국 한 명만 못 먹는 것이다. 이토록 비참하고 슬픈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후우...역시 그때 6-333을 부수는 게 아니었어."
-가드는 ES 6-333을 소멸시킨 것으로 TF 역사상 전례없는 큰 업적을 세웠습니다. 그건 제 6 처리 시설 단독으로 '특수 임무'를 성공시킨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면 뭐해. 난 여전히 가상 현실에 접속하지도 못 하고, 햇빛 한 점 못 보는 이 지하 시설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하는데."
한숨을 내쉰 호국은 올해로 23년째, 얼마 뒤면 24년째가 되는 자신의 모태솔로 인생을 비관했다.
사실 백번 양보해서 여자친구가 없는 건 참을 수 있었다. 여자친구를 사귀는 게 어디 쉬운 일도 아니고, 원래 커플이 있으면 솔로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게 우주의 균형을 책임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친구마저 없는 건 상상이상으로 비참했다.
연말에 만나서 술 한잔 걸치며 인생 얘기도 하고, 시시콜콜한 군대 얘기나 되도 않는 지식으로 떠들어대는 요즘 경제 이야기, 그러다 얼큰하게 취하면 미친놈마냥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깔끔하게 모임을 쫑낼 수 있는 그런 친구.
23년 인생에 그런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김호국이란 인간의 가치를 설명해주는 듯 했다.
-그렇다면 가족과 함께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우리 가족은 내 생일 빼면 가족 모임 같은 거 안 해. 가끔 명절에 할아버지 만나러 가는 정도?"
-...역으로 가드의 생일은 꾸준히 챙겼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김씨네 가문 특징이야. 우리 집안은 남자고 여자고 다 귀찮은 걸 싫어해."
등산가인 아버지는 효율을 추구해 지름길을 타다가 적잖게 다리를 접질렀던 적이 있으며, 요리를 잘하는 어머니는 어떻게 하면 더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에어프라이어를 구입했다.
여동생조차 식단 관리 하는 게 귀찮아서 이따금 정상적인 식사가 아니라 필요최저한의 영양이 모두 함유된 영양팩을 마시곤 했다.
-김씨네 가문은 다들 그런 겁니까?
"우리 집안이 특이한 거야. 어쨌든 이번 크리스마스는 작년보다 더 시시하겠네."
작년 크리스마스는 군대에서 병장 대우를 받으며 편히, 나름 시끌벅적하게 보냈기 때문에 외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부산에 놀러오면 꼭 풀코스로 대접하겠다던 후임조차 깜깜무소식이다. 제주도와 부산은 꽤 가까우니 한 번쯤 놀러오라고 연락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노예 신세 벗어나면 다 남이라 이거지......"
그렇게나 열심히 선임에게 알랑방귀를 뀌던 놈들도, 나오면 밥 한 번 먹자며 위병소 앞을 당당히 걸어나가던 양반도, 다들 지금쯤 정신없이 VR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여자친구가 없는 건 참을 수 있어도 같이 놀 상대가 없는 건 참을 수 없었던 호국은 즉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호국의 가슴팍에 끼워져 있는 스마트패드 속 프롯이 이번엔 또 뭘 할 생각이냐고 물었지만, 호국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일거리 없습니까?!"
B5의 연구원 전용 모니터룸으로 들이닥친 호국이 다짜고짜 내뱉은 한 마디였다.
연말 휴가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지, 연말 정산이나 보고서 제출 관련으로 바쁘게 회의하고 있던 연구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호국 씨? 이번 연말은 통상 근무를 하면서 보낸다는 공문을 받으셨을 텐데......"
"전 일 못하면 죽습니다. 아니면 제가 미치는 꼴 보고 싶어요?"
쉬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게 해달라니. 그것도 모두가 즐겁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연말에 저 혼자 일을 못 하는 게 불만이라니.
그가 성난 황소처럼 씩씩대며 당장이라도 모니터룸을 뒤집어 엎을 것 같은 기세였기에, 이두근은 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두통과 재회했다.
"그러니까...말이 좋아 통상 근무지, 다들 이 시기에는 개인 연구나 특별한 프로젝트가 없으면 쉬엄쉬엄 일하면서 재충전 하는 편입니다. 매뉴얼로 정해진 휴식 같은 게 아니지만 일종의 관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굳이 일을 하시겠단 말입니까?"
"예. 일 주세요."
일거리 맡겨놨냐고 따지고 싶은 것을 꾹꾹 참으며, 이두근은 호국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가 이번 연말에 그 어떤 스케줄도 잡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VR에 접속할 수도 없는 그가 외박 스케줄도 잡지 않았다? 정상적인 20대 남성의 연말 계획은 아니었다.
'...즉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어서 꼬장부리는거군.'
물론 꼬장이라고 콕 집어 말할 정도로 나쁜 태도는 아니고, 오히려 저렇게 나서서 일을 하겠다는 건 바람직한 자세다.
단지 가드-079가 하는 일은 대부분 정상적인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감시의 눈을 붙여두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감시의 눈을 붙이려면 연구원들이 쉬지 못 할테니, 결국 모두가 불행해지는 미래였다.
'시설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연구원들도 쉬게 할 수 있고, 가드-079가 사고를 칠 염려가 없는 일거리를 맡겨야 한다.'
이왕이면 그가 오랫동안 붙들고 늘어질 수 있는 '대량'의 일거리가 좋다.
같이 놀아준다는 선택지도 있을 법 하지만, 허약한 자신들의 체력으로 가드-079의 텐션에 맞춰주는 건 불가능했다.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던 이두근은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호국에게 다가가 누구도 듣지 못 하도록 귓속말을 건넸다.
"사실 이건 극비라서 다른 연구원들에게도 미처 알리지 못한 일거리입니다만, 혹시 흥미 있으십니까?"
"당연히 있죠. 벌써부터 불끈불끈 하는데요?"
"좋습니다. 그럼 믿고 맡길 수 있는 가드-079에게 이 일의 처리권한을 위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두근의 심각하고 무거운 말투로 미루어보건대 꽤 막중한 임무일 것 같아 호국의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호국 씨는 잘 모르시겠지만, TF는 무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글로벌 대기업으로서 많은 미스터리와 사건사고에 대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마치 수학자들이 오랫동안 난제를 풀기 위해 매달리는 것처럼, TF내에서도 그런 케케묵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우리는 '처리반' 이라고 부르지요."
"처리반......!"
"개미부대와 성질이 비슷하지만, 업무 성격은 완전히 딴판입니다. TF의 잠재적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독립 수사, 탐색, 생포 및 제거! 그들이 워낙 유능하기에 지금껏 처리한 임무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전설로 불리우는 미스터리가 하나 있습니다."
꿀꺽.
저도 모르게 부풀어 오른 기대감을 참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킨 호국은 귀를 쫑긋 세웠다.
"그 미스터리의 이름은 '아닌 밤중의 산타클로스'. 매년 12월마다, 특별한 날짜를 정하지 않고 불시에 TF 산하 시설에 침투하여 직원들에게 선물을 두고가는 기괴한 존재입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요?"
"한 명도 빠짐없이."
"와......"
제 6 처리 시설이 비정상적으로 직원 수가 적은 것이지, 다른 시설은 최소 백 명 단위로 직원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시설에 침투해서 한 명도 빠짐없이 선물을 두고 모습을 감춘다니. 그정도면 괴도 루팡의 할아버지가 와도 상대가 안 될 수준의 미스터리였다.
"호국 씨는 때마침 TF의 경비가 아닙니까? 정확히는 경비 팀장 직급을 달고 계시고, 내년에는 연차와 공적을 합쳐서 경비단장으로 승진하게 되실 겁니다. 그 다음은 경비대장, 그리고 그 다음은? 경비국장이 되는 겁니다. 승진을 하려면 더욱 많은 공적이 필요하단 건 잘 알고 계실테고...게다가 여동생 분께 계급이 따라잡히기라도 하면 큰일 아닙니까?"
이두근이 악마의 속삭임처럼 호국의 콤플렉스를 건드리자 특유의 팔랑귀가 미친듯이 팔랑거렸다.
여동생은 일을 워낙 잘 하는데다, 호국의 전담 오퍼레이터였기 때문에 야금야금 공적을 나눠먹고 있었다. 내년에는 어렵지 않게 3급 선임 연구원으로 진급할 것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저 쥐방울만한 게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지.'
호국은 저 멀리서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여동생을 흘겨보며, 이두근에게 슬쩍 물었다.
"당연히 제 개인 임무니, 공적은 제가 다 가지게 되겠죠?"
"여부야 있겠습니까. 임무 보고서도 제가 직접 높으신 분들께 전달해드릴 예정이니 공적이 분산될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장비 사용이나 직급 권한 사용에도 제한이 없겠죠?"
"두 말하면 입 아픕니다. TF를 위해 연말에도 일해주실 호국 씨를 누가 그런 일로 발목을 잡겠습니까?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제가 직접 쌍코피를 터뜨려주겠습니다."
"혹시 임무 중에 부수입을 얻게 되면......"
"모두 호국 씨가 가지셔도 무방합니다. 서로 좋고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호국과 이두근은 서로를 향해 씨익 웃어보인 뒤, 주먹을 맞부딪쳤다.
호국은 연말이 심심하지 않게 되었고, 이두근을 비롯한 연구원들은 조용한 연말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2050년 12월에 때아닌 산타 사냥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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