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비 업무 일지 : 자연스러운 자연재해(3) >
넘버링이 같으면 형제다. 그런 일반화의 오류 같은 말을 들었을 때, 호국은 제 6 연구 시설이 제 6 처리 시설의 형제 시설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랐다.
'관리 상태가 엉망인데?'
이게 사람 사는 곳인지, 아니면 유사 돼지 우리에 연구 시설이라는 이름만 붙였을 뿐인지 햇갈릴 정도였다.
제 6 연구 시설은 대만에 있었기 때문에 장거리 운항이 가능한 헬기를 타고 몇시간에 걸쳐서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힘들게 온 것 치곤 마중을 나와주는 사람도, 형제 시설에서 온 것을 반갑게 여기는 사람도 없었다. 애초에 사람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역시 TF의 시설들이 하나둘씩 낙후화되기 시작했군."
"시설이 낡았으면 보수를 해야죠. 돈 많잖아요?"
"단순히 유지보수만 필요한 문제라면 감찰본부가 나설 이유가 없지."
감찰본부는 조직 내에서 남몰래 일어나는 온갖 비리나 불법적인 일을 파악하고, 외부 조직과 내통하는 스파이나 시설 파괴, 요인 암살등을 행하는 공작원을 처리한다.
그런 감찰본부가 안전점검관들에게나 맡기면 될 문제에 굳이 개입했다는 것은, 바꿔말하자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는 의미였다.
"애초에 난 TF에 입사한지 얼마 안 된 신참이라 자세한 건 모르지만...척 보면 척이잖아?"
처리 시설보다 좀 더 중요하다고 알려진 연구 시설이다. 비록 넘버링은 가장 끝에 해당하는 '6'이지만, 삼엄한 경비와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팩트다.
호국은 시설 입구 근처에 쌓인 눈을 발로 밀어내, 진입로의 흔적을 찾았다.
이곳도 제 6 처리 시설처럼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시설 입구를 은폐하기 위해 포장도로를 깔지 않고 진창으로 질척거리는 비포장도로가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이어 자국이 없는데요."
"대만에는 눈이 잘 안 올텐데...간만에 온 눈때문에 진창이 만들어져서 흔적이 사라진건가?"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호국은 시설을 관리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최근 이 시설에 방문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거대한 시설을 운영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보급 물자가 필요해. 이 시설이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었다면 수송트럭이 몇번이나 오간 흔적이 남았을 거야.'
당장 제 6 처리 시설만 해도 호국이 직접 픽업한 트럭이 10대가 넘는다.
더럽게 더운 여름, 더럽게 추운 겨울에는 시설 유지보수에 신경쓰지 않으면 금세 이것저것 망가진다. 때문에 원자재와 배터리, 장비들을 주기적으로 보급받는 것이다.
호국과 333번이 제 6 연구 시설의 입구 근처를 조사하고 있을 때, 로니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감찰본부측에 연락을 해보니 최근 일주일간 제 6 연구 시설에서 오간 통신내역이 없다고 합니다. 하청업체 측에서도 시설 측에서 딱히 추가 보급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뻔하구만."
도중에 로니의 말을 자른 333번이 굳게 닫혀있는 시설 입구를 주먹으로 통통 두들겼다.
"실적이라곤 거의 없는 연구 시설에서 버티다 못한 연구원들이 단체로 돈될만한 것을 들고 날랐거나, 아니면......"
드드드드드!
ID 카드나 해킹툴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입구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사람도, 통신도, 그 무엇도 이 시설에서 빠져나오지 못 했을 만큼 심각한 일이 있었거나."
'쓸데없이 분위기 잡기는.'
생각해보면 흑백의 세계에서 처음 만났을 당시에도 333번은 과하게 분위기를 잡는 인간이었다.
25년간 혼자 지내다보니 미쳐버린 건가 싶었는데, 이제와서 보니 그냥 천성이 그런 남자인 듯 했다.
호국은 붉은 LED등이 점멸하고 있는 입구 내부 CCTV를 올려다보았다.
예비 전력까지 죽지는 않았는지, 동작감지기가 탑재된 CCTV는 정확히 일행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내부의 누군가가 우리의 방문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준 거라면...우선 왜 청소를 하지 않았냐고 따져봐야겠어.'
시설 관리를 게을리한 자들이 감찰반의 말쑥한 정장차림을 보고서 지레 겁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원래 정장을 입은 남자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남자보다 더 무서워보이는 법이니까.
"연구 시설은 외부에서 들여오는 각종 실험기재와 ES의 운반을 위해 별도의 화물용 엘리베이터도 존재한다는군. 화물용 엘리베이터는 곧장 B40까지 이어지고, 직원용 엘리베이터는 B10까지만 이어진다는 모양이야. 어느 쪽을 고를래?"
"제정신이예요? 시설 전력이 온전한지도 모르는 상황에 엘리베이터를 왜 타요?"
호국이 진심이냐는 어조로 물어보자 되레 당황한 것은 감찰관들이었다.
'이 새끼 IQ 84 아니었나?'
'그런데 왜 이렇게 상식적이야?'
'IQ 84에게 돌직구로 맞는 말을 맞을 줄이야......'
감찰관들이 시선만으로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333번은 킬킬대며 엘리베이터의 문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바퀴벌레는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되면 갑자기 확 똑똑해진다지? 그럼 지금 이 상황이 위험하다는 건가?"
"시설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으니 위험한 건 맞죠. 벽에 곰팡이 핀 것좀 봐요. 솔로 박박 밀어도 한나절은 걸리겠네."
정확히는 호국이 큰일난 게 아니라, 이 시설의 관리자가 큰일난 것이다.
시설의 먼지를 털어내고, 전구 교체 작업을 하다보면 올해가 내년으로 바뀌어있는 마법을 경험하게 될 테니까.
당장 호국만 해도 프롯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올 연말은 일더미 속에 파묻혀 지낼 뻔 했다.
일행은 손전등을 입에 하나씩 물고 엘리베이터 통로의 철제 사다리를 통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통로가 깊으면 깊을수록 엔지니어 전용 비상 사다리는 잘 쓰지 않지만, 이중에 레펠링 장비를 가져왔을 만큼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앞서 내려가던 호국은 모든 시설의 공통 모니터룸인 B5의 입구를 발로 뻥뻥 찼다.
딱 일반인 수준의 각력이 엘리베이터의 문을 두들기다가, 어느 순간 충격파가 터져나와 문을 찢어발겼다.
"역시 사람은 하체 운동을 조져야 한다니까."
하체는 곧 신체의 기둥! 하체가 튼튼해야 상체도 튼튼!
호국은 감찰관들의 황당하기 짝이 없는 표정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먼저 뛰어들었다.
모니터룸은 최소한의 예비 전력만이 공급되고 있었다.
경보를 알리는 붉은 LED등이 눈 아프게 점멸하고 있는 모니터룸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연말 파티를 즐기다 책상을 뒤엎기라도 했는지 기밀 서류들이 여기저기 마구 흩어져 있었다. 또한 평소라면 연구원들이 느긋하게 앉아있었을 작업 공간도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광경이었다.
메인 모니터의 전원은 나간지 오래였고, 인간의 온기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꼴에 엘리트인 양반들이 이렇게 직무유기를 했을리가 없는데......"
"제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상황이 급박해지면 머리가 딱딱하게 굳는 법이야. 그런 놈들을 많이 봤어."
"그럼 그 양반들은 처음부터 잘난 양반들이 아니었나보죠."
엘리트란 위기 대처 능력도 뛰어나야 엘리트다. 또한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종국에는 승리한다. 그래야만 엘리트로 불릴 자격이 있다.
호국은 손전등 불빛을 비춰 엎어진 책상 아래를 비춰보았다.
자신은 알아먹지도 못할 온갖 해괴한 공식이나 글귀가 쓰여있는 서류들은 다 제쳐두고, 그저 사람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하는 마음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흔적은커녕, 자칭 엘리트 양반들이 즐겨입는 흰 가운 조차 찾아내지 못 했다. 정말 333번의 말대로 돈 되는 것들을 챙겨 죄다 날라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이럴 때 프롯이 있었다면 똑똑한 놈만 떠올릴 수 있는 대책이나, 플랜 B 같은 걸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공교롭게도 프롯은 '부재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호국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이 참상을 보고 기분이 좋을 관리자가 있다면 그건 더할나위없는 변태새끼거나, 아니면 호국보다도 훨씬 더 멍청한 호구새끼일 것이다.
'이곳의 관리자가 없다면, 임시파견을 나온 내가 관리를 맡게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으으.'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일을 피해서 온 곳이 더욱 많은 일이 존재하는 지옥이라니.
호국이 진지하게 제 6 처리 시설 복귀를 고민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메인 모니터에 전력이 공급되면서 노이즈 가득한 화면이 출력되었다.
프롯과는 조금 많이 다른, 과거의 제 6 처리 시설 관리봇과 똑같은 목소리의 관리봇이 기계적인 어조로 말했다.
-현재 비상 전력이 가동중이기 때문에 시설 관리 프로토콜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녹화된 영상이 1건, 압축암호파일이 1건 존재합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확인을 원하신다면 관리자 인증을 해주십시오.
333번이 즉시 감찰대장의 ID 카드를 인식기에 제시했으나, 삐빅 하는 경고음과 함께 접속이 거부되었다.
-영상을 녹화한 제 6 연구시설 연구소장이 '감찰관' 과 '조사관', '처형관' 직급의 접속을 차단 설정했습니다. 해당 직급은 접속이 불가능합니다.
감찰관들이 시선이 일제히 호국에게로 향했다.
"거 까다로운 양반이네."
감찰관에게 혼나기 싫다고 저런 설정까지 해둔 사람은 그 연구소장이 세계 최초일 것이다.
그런 시시한 생각을 뇌까린 호국은 이내 자신의 ID 카드를 제출했다. 그러자 경쾌한 알람과 함께 접속이 승인되었다는 메시지가 울려퍼졌다.
멀쩡하게 되돌아 온 메인 모니터에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이어졌다.
-임시 권한 획득자 : 제 6 처리 시설의 가드-079
-직급 : 경비단장
-임시 권한, 시설 종말 프로토콜을 제외한 모든 권한
"녹화된 영상을 재생해줘."
-가드-079의 요청에 따라 녹화된 1건의 영상을 재생합니다.
메인 모니터에서 재생되기 시작한 영상은 기분나쁜 비명과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지옥과도 같은 연말 파티의 광경이었다.
-후우...후우...!
-샨 츠이, 샨 츠이는 어디 있지?!
-달짝지근하고...달콤해. 꺼으으윽.
-제스 소장님, 더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문이 곧 부서질 겁니다!
-버텨! 아직 통신이 회복되지 않았어! 통신이 회복돼야만 이 사태를 바깥에 알릴 수가......!
콰광!
10평 남짓한 개인 연구실에서 두명의 가드가 투명한 방탄유리 문이 열리지 않도록 틀어막고 있었다.
그들 뒤에서 영상을 녹화한 당사자 제스 연구 소장이 불안하게 떨리는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통신이 회복되지 않는다면...하다못해 기록이라도 남겨야 해.
흔히 연구실에서 실험 결과를 촬영하고 증거로 남기기 위해 사용했을 캠코더가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을 터.
그는 투명한 방탄유리 너머에서 더러운 핏물과 진액을 뚝뚝 흘리며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는 아직도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린 그저 상층부에서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다. 이 '프로젝트'에 개인적인 사심이나 불순한 의도 같은 것은 티끌만큼도 넣지 않았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한다. 아마 우리가 실패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상층부에선 어떻게든 모든 기록을 말소하려들겠지. 나는 비록 TF의 연구 소장들 중에선 가장 말석(末席)에 해당하지만, 그들의 방식을 잘 알고 있다. 이 시설, 이 기록, 이 연구 결과들이 세상의 빛을 볼 일은 없을 게 뻔하다. 그러니 다른 시설의 직원이 그들보다 먼저 봐주길 바라면서 이 기록을 남기겠다.
그는 인트라넷으로 시설 내부 관리봇과 연결되어 있는 자신의 노트북을 카메라에 담았다.
-관리봇의 저장장치에 이 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기록을 담아두었다. 우리는...우리는 '그것'에게 B-80에 보관된 조각을 심는 실험을 했다. '그것'은 자신을 '호르몬' 이라고 소개했다. 대체 어디서 솟아났는지도 모를 '그것'에게...상층부는 조각을 심으라며 강압했다. 나는 시설의 안전을 위해 조각을 그런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고 했지만, 끝끝내 프로젝트가 강행되고 말았다. 연구 소장 말석인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빌어먹을, 어쩔 수 없었다고!!
제스는 50을 훌쩍 넘긴 노인이었지만, 카메라에 대고 횡설수설 떠들어 대기 시작했을 땐 이미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고 있었다.
-그 뭔지도 모를 것을 먼저 경계했어야 했어. '그것'이 조각을 삼키자마자 연구원들이 모두 저렇게......!
-으아아아아! 내 팔이?!
-빌어먹을! 제스 소장님! 문이 뚫렸습니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연구실 바깥에서 기분나쁜 비명이나 웃음을 흘리고 있던 것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재액의 파도에 휩쓸리기 직전, 제스는 오만상을 찡그린 얼굴로 마지막 유언을 토해냈다.
-TF는 내부에서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부디 조심......!
-녹화 영상의 재생이 종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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