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미들 >
"처음부터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눈과 귀를 제외하면, 다리와 호르몬, 심장, 그리고 혈관을 빼앗겼지. 남은 건 여덟이군."
전신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진, 추레한 몰골의 노인이 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전극을 꽂고, 등 뒤의 거대한 원통형 튜브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다 쓰고 있었다.
'뇌'를 100% 완벽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에너지와 보조 처리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걸 위해 여덟 개의 조각을 긁어모았건만, 아직 충분치 않았다.
"적어도 10개의 조각이 필요했다."
"그건 우리도 알아. 빌어먹을. 설마 거기서 심장과 혈관이 제 몸을 완전히 수복하기 전에 그놈이 들이닥칠 줄 누가 알기나 했겠어?"
"하물며 호르몬은 어떻고? 놈이라면 절대로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검은 후드티에 방독면을 착용한 '코'가 불만을 내뱉자, 등 뒤로부터 여섯 개의 '손'이 뻗어나온 남자도 그의 말을 거들어주었다.
"그만. 호르몬은 우리중 유일한 정신 간섭계라 결국엔 자신이 이길 거라며 항상 오만에 차있던 놈이었어. 실제로 우리의 동맹을 달갑게 여기지도 않았었고. 심장과 혈관이 그렇게 된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주변에서 받아들이는 빛에 따라 '피부'의 색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근육질의 사내가 그들의 말을 잘라냈다.
그의 곁에 선 하늘하늘한 옷차림의 여성은 주변인들이 언성을 높이는 것 만으로도 큰 압박감을 느꼈는지, '촉각'을 잠재우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동맹을 깨버리고, 다시 개인전으로 돌아갈 것도 아니잖아? 다들 알면서 왜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뇌가 앉아있는 옥좌의 뒤에서부터 걸어나온 자그마한 체구의 소년이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입을 잘못 놀리면 인생이 고달프다는 말도 있잖아? 너무 성급하게들 떠들지 말자고."
"하지만 그 녀석은 잠자코 이 상황을 기다려줄 것 같지도 않은데? 그 분가의 개새끼가 본가의 자식들인 우리 몫의 유산을 노리고 있다고!"
"그럼 너도 호르몬처럼 녀석과 혼자 맞서든가. 그럼 그대로 상속자 리스트에서 탈락하게 되겠지만."
"이 건방진 애새끼가......!"
"어후, 게임에서만큼은 서로 나이나 성별로 문제 삼지 않기로 합의봤잖아. 이젠 선도 막 넘으려고 하네~"
코의 거친 반발에 입이 조소 섞인 비아냥을 보냈다.
"그래, 지금은 우리끼리 다툴 때가 아니다."
"경쟁자가 줄어들었으니 오히려 지금은 승리에 집중해야 할 때지. 솔직히 유산을 열 두 명이 사이좋게 나눠먹기엔 입이 좀 많았어."
겉보기엔 비쩍 마른 멸치 같아서, 언뜻 '근육'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와 유난히 가슴이 큰 여성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둘 다 어디 있었어?"
"바닷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얘는 1만 미터 아래의 수압으로 근육을 단련하고...보다시피 나는 바닷물 속의 '모든 것'을 흡입했지."
"열심이네. 두 사람을 좀 본 받는 게 어때?"
"...아가리 닥쳐."
그들이 정겨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뇌는 8개의 조각으로부터 뽑아낸 에너지를 이용해 세상 모든 전자기기에 접속하기 시작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조각 1개당 10% 정도의 출력으로 잡고, 심장과 혈관까지 무사히 합류했을 때 이 계획을 실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심장과 혈관이 조각을 얻고 합류하기 직전에 '그것'과 마주쳤고, 끝내 로그아웃 당했다.
다리와 호르몬은 처음부터 개인주의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계획에는 동참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방법을 찾았고, 영역화에 성공한 뇌와 입이 자신들의 영역을 각기 다른 두 장소로 바꾸었다.
하나는 지금 그들이 모여 있는 마리아나 해구 밑바닥 속의 TF 감금 시설. 또 다른 하나는 우주에서 유유히 지구의 궤도를 돌고 있는 우주정거장이었다.
"가장 먼저 이 세상에서 조각을 가지고 나가는 것은 우리다. 우리가 먼저 나가면, 놈은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영원히 남겨질 거다."
"8개만으로 충분할까?"
"적어도 반 이상은 모았으니, '유언'의 내용도 반 이상은 확인할 수 있겠지. 그거면 충분해."
그들의 대화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뇌의 처절한 울부짖음에 집어삼켜졌다.
인류가 문명의 발전을 생활에서 직접 느끼기 위해 만든 수많은 전자기기들. 그것은 이미 인류 사회에 있어 빠질 수 없는 것이었고, 삶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상태였다.
뇌가 모든 전자기기에 내린 명령은 단 하나.
-모든 인류를 가상 현실로 밀어넣어라.
단 한 명의 인간도 빠짐없이 이 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사라지면, 비로소 이 지긋지긋한 게임이 종료된다.
그렇게 된다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14개의 조각중 8개를 가진 자신들이 된다. 우승한 여덟 명이 '아버지'의 유산을 사이좋게 상속받고, 이 지독한 굴레를 끊어내는 것이다.
오직 그걸 위해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게임에 뛰어들었다. 무려 700800 시간 동안.
어째서 700800 시간이나 이 게임이 이어지게 됐는지, 누구의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제는 진정 게임을 끝낼 때가 됐다는 것이다.
게임에서 모든 역할군이 임무를 다하고 사라진다면, 그 게임은 더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NPC들이 전뇌세계로 이주한다는 명목하에 이 세상에서부터 퇴출 당하고, 진정한 의미의 플레이어들만 남는다면 게임은 자동적으로 종료될 터.
뇌는 자신에게 과부하가 걸리는 것을 알면서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현 인류를 가상 현실로 몰아넣었다.
안드로이드를 사용하고, AI를 사용하고, 심지어는 VR 기기의 로그아웃 기능을 막아버리기도 했다.
작업이 99.99%에 도달한 순간, 뇌는 옅은 탄식을 흘렸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 인간들이 있군.'
한 여성이 들고 있는 스마트패드를 통해 인식한 광경. 그곳에는 TF 소속 직원들과 정체불명의 남녀가 이끄는대로 에베레스트 산맥의 숨겨진 시설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게임이 끝난 후에도 '생존' 하고 싶다는 게로군?'
반 강제로 가상 현실로 들어가게 된 현 인류의 모든 정신체를 우주로 쏘아올릴 생각이 틀림없었다.
사실 그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의미로 '그것'만 홀로 이 세계에 남게될 테니까. 건방지게 본가의 유산을 탐낸 분가의 자식을 영원히 치워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이 문제인데......'
저 소수의 인간들도 그냥 가상 현실에 밀어넣어버리면 자신들의 목적은 끝난다.
저 NPC들의 최후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할 필요 없이, 최후의 8인이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사고를 가장해 죽일수 밖에 없겠군.'
저들의 목표는 에베레스트 산맥에 감춰진 궤도 엘리베이터 사출기일터. 그것을 이용해 우주정거장으로 향하려는 속셈이겠지만, 뇌는 구태여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핵심은 이 세상(지구)에 인간의 정신체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죽인다고 해도 정신체가 지구에 붙들려 있다면 실패 확정. 그렇다면......
'우주에서 터뜨려 죽이는 게 가장 확실하겠군/'
궤도 엘리베이터 사출기 시스템을 살짝 손본 그는, 궤도 엘리베이터가 정확히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났을 때 오작동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저 소수의 인간들이 우주에서 사망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그것'은 이 마리아나 해구의 감금 시설에 대해 모를 것이고, 설령 안다고 해도 도달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을 터.
그 전에 소수의 인간들이 우주에서 폭발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를 것이다.
"앞으로 조금.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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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궤도 엘리베이터 사출기 메인 시스템에 연결해주십시오.
"...우리를 보내고 나면 넌 영원히 이 시설에 혼자 남겨질 텐데?"
-지금 AI를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흥미롭군요.
"......"
김세희는 평소와 달리 조금 더 흥이 넘치는 것 같은 프롯에게 더 말을 잇지 못 했다.
평소라면 그녀도 장난삼아 이런저런 농담을 가볍게 던지거나, 오빠에게 연락해서 널 데리러 오게 하겠다며 으름장을 놨으련만.
프롯이 해독해준 압축암호파일 속의 '진실'을 확인한 그녀는 더이상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AI 입니다. 창조주에 의해 탄생한, 조금 더 인간적이고, 조금 더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조금 더 AI와는 동떨어진 프로토타입 입니다.
"그건...네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잖아."
-그럼 당신들도 그런 존재이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겁니까?
"그건......"
-모든 생명체는, 심지어 생명체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AI라고 해도 부여되는 역할이 존재합니다. 저는 한때 창조주의 개인 연구 목적이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프로토타입 AI였으며, 가드-079에 의해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프로토타입 AI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들의 마지막 여행길을 배웅하는 역할일 겁니다. 아마도요.
철컥.
마치 처음부터 이런 모델에 맞춰져 있기라도 하듯, 메인 시스템에 장착된 그녀의 스마트 패드는 순식간에 프롯이라는 존재를 이 시설에 속박시켜버렸다.
-모두 궤도 엘리베이터에 탑승해주십시오. 사전 준비는 모두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시스템 점검만 끝나면 곧바로 궤도 엘리베이터를 사출할 겁니다.
프롯이 메인 모니터로 시스템 점검 현황을 알려주면서 탑승 요청을 보냈다.
김선열과 이헤령 부부, 조사관들은 이미 궤도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안전 벨트로 자신들의 몸을 고정한 상태였다.
남은 것은 김세희 한 명뿐.
그녀는 몇 번이고 메인 모니터를 돌아보다가, 겨우 이혜령의 옆으로 다가가 안전 벨트를 착용했다.
'설마 이게 80년이나 반복된 상황이었을 줄이야.'
일행들 중 유일하게 그녀만 확인했던 압축암호파일의 진실.
그것은 현 인류가 잃어버린 과거의 기록들이었다.
20년, 20년, 20년, 그리고 또 20년. 그렇게 반복된 80년중 60년의 기록이 그곳에 담겨 있었다.
눈치빠른 그녀가 그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 했을리가 없다.
'우린 영원히 이 세상에서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던 체스말(NPC)에 불과했던 거야.'
그리고 지독한 굴레를 진정한 의미로 해방시키기 위해, 우주 정거장으로 향하고자 한다.
아니, 사실은 지독한 굴레가 아니라 단 한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일지도 모른다.
"흐읍...흑......!"
자신들이 진정한 의미로 가족이었다면 어째서 말 한마디 정도는 해주지 않았던 걸까?
어째서 자신들을 '해방' 시켜주지 않았던 걸까?
그 진실 만큼은 그녀를 포함해 이 자리의 누구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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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미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