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206화 (206/209)

< 자랑스러운 김씨 가문 >

"...상두야, 아까 내가 뭐라고 그랬지?"

"감수성이 메말랐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맞는 것 같습니다."

"씨발 맞아 씨발."

재단 산하 시설의 메인 모니터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공동. 그곳에는 수만, 어쩌면 수십 수백 만을 넘는 모니터들이 각기 다른 화면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 화면 속에선 각기 다른 인물들의 삶이 출력되고 있었다. 아니, 녹화되고 있다고 보는 게 정답일 것이다.

"...이게 뭐죠?"

"우리들이 부여받은 거짓된 삶. 아니, 명령받은 대로 연기한 삶이라고 봐야 하나?"

"대체 왜......?"

"그래야 이 게임에 좋답시고 달려든 70억의 멍청이들이 벌이는 멍청한 짓거리를 '재미있게' 연출할 수 있을 테니까."

"누구에게로...아니, 대체 어디로 말인가요?"

산타는 조용히 손을 위로 들어올려 천장을 가리켰다.

"바깥."

동시에 공동 내의 모든 모니터가 일제히 꺼졌다. 두꺼비집이 내려간 것 처럼 단 1초의 어긋남도 없었다.

"오, 아무래도 바깥에서 눈치챈 모양이야. 이제 이 세계에 영원히 갇히기 전에, 바깥에서 '처리' 당하기 직전인 70억 멍청이들을 깨울 시간이 왔군."

"인류 대부분은 이미 전뇌세계로 이주했어요."

"이쯤 되면 슬슬 눈치채야지 아가씨. 그건 낙원이 아니라 감옥이야. 바깥에서 자원만 축내고, 일확천금에 사족을 못 쓰는 70억 개돼지들을 영원히 수용해두기 위한 감옥. 저들이 먼저 게임을 끝내버리면 이 세계의 탈출구는 영영 닫히게 될테니...우리가 한 발 먼저 빠져나가자고."

"모두 해방시키려는 거군요?"

"해방? 그렇고 말고. 우리 모두 '그'가 내뱉은 유언을 듣고 이 게임에 참여한 거야. 이 게임에서 우승한 자는 모든 걸 가질 수 있다는 유언을! 그의 직계 후손 12명과, 방계 후손 1명, 그리고 어쩌면 나도? 하고 위대한 유산을 차지하기 위한 게임에 달려든 멍청한 70억 들러리들이 함께!!"

할 말을 잃어버리고 굳은 일행들에게 산타는 열변을 토하듯 외쳤다.

"우린 이곳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저들이 게임을 '자연스럽게' 진행하기 위한 들러리 였을 뿐이라고! 빌어먹을, 공룡 따윈 없고, 화석은 전부 가짜고, 당연히 신도 없어. 문어 대가리나, 우주를 파괴하고, 재창조 할 수 있는 병신같은 괴물도 없지! ES? 놈들도 우리와 똑같은 들러리야! 인간 역할을 부여받은 우리와는 절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제약 때문에 말 못하는 벙어리 신세가 되어, 명령에 따라 다른 들러리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삶만 살았지. 그리고 재단에 투옥되어 인간들과의 접촉이 극단적으로 제한되었던 거지. 우리보다 더 불쌍한 죄수들이라고! 아니면 지금 여기서 ES들과 대화를 나눠 본 사람이 있나? 그런 광경을 본 놈은 아무도 없을 거야! 놈들은 처음부터 의사소통조차 못 하게끔 조작된 상태로 역할을 부여받았으니까!!"

갑자기 흥분한 그는 비상등만 켜진 컨트롤 타워 내부를 미친듯이 돌아다니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겠는데, 과거, 현재, 미래는 엄밀하게 따지면 ES가 아니야. 위대한 손님들의 게임 진행을 좀 더 매끄럽게 만들어주기 위해 각종 설정과 힌트를 잔뜩 품고 있는 NPC였일 뿐이지. 이 모든...빌어먹을! 병신같은 게임 때문에! 우린 원하지도 않는 삶을 진짜 자신의 삶인양 살아야 했고! 그걸 저 바깥에 있는 놈들에게 보여주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린 거야! 종국에는 다들 낙원으로 가게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가 영원한 전뇌감옥에 갇힐 예정이었다고! 이 세계에선 나 빼고 그 누구도 듣지 못 했던, 뒈져버린 늙은이의 '유언' 때문에!!"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듯, 어린아이처럼 발구르기를 하며 날뛰었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은 때론 끔찍한 거짓보다도 더욱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난...난...작년을 포함해서 무려 80년이나 이 게임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어. 아무것도 얻지 못할 헛짓거리에, 우리는 80년이란 세월 동안 소비되었을 뿐이야!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희생당한 거라면 차라리 숭고한 희생을 기릴 수라도 있지, 하지만 그런 대우도 받지 못 할 만큼 우리는 하찮은 소비재에 불과했다고! 빌어먹을! 씨발!!"

이윽고 발작을 멈춘 그는 멍하니 서있던 일행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 이젠 너희가 날 도와야 할 차례야. 이 빌어먹을 기계들을 만져서, 우릴 이 게임에서 해방 시켜줄 차례라고. 난 이곳에 1분 1초라도 더 있기 싫어. 유산이든 뭐든 다 필요없으니...그냥 진짜 나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마터면 영원히 잃어버릴 뻔 했던 나만의 삶으로!"

-그렇다면 제 도움도 필요하겠군요.

불이 꺼진 컨트롤 타워에서 들려온 익숙한 음성에 산타를 포함한 모두가 깜짝 놀랐다.

모니터에 다시 전원이 들어오고, 거대한 화면 속에 안전모를 쓴 안드로이드 아바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상에 두고온 프롯이었다.

"어떻게......?"

-이 우주정거장은 특이하게도 다른 시설의 시스템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방화벽으로 보호받고 있더군요. 다소 시간이 걸리긴 했습니다만,.어쨌든 침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AI와는 달리 진화에 한계가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 누구든 상관없어! 그냥 이곳에서 내보내주기만 하면 돼!"

"그전에."

산타의 말을 잘라내며 걸어나온 세희가 마지막으로 프롯에게 부탁을 했다.

"마지막으로...오빠와 통화할 수 있을까?"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은 말이 있어."

-다행히 가드-079는 제가 아닌 또 다른 스마트패드를 이미 소유하고 있군요. 이건 바람인 걸까요? 아니면 단순한 불장난인 걸까요?

"장난할 시간 없어."

-후후, 지금 연결하겠습니다.

몇번의 발신음이 간다 싶더니, 곧 Only sound 표시가 나타나며 상대가 전화를 받은 것을 확인했다.

-지금 타이밍에 나한테 전화 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그게 제발 여동생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왜?"

-상전으로 모셔야 할 오빠한테 반말이나 찍찍 내뱉고, 싸가지가 없잖아. 특히 어릴 때는 매일 날 괴롭히고, 내가 학교 숙제 잘 못 한다는 거 뻔히 알면서 용돈이랑 숙제 대리로 거래하고, 라면 끓여오랬더니 지 혼자 돼지처럼 라면 다 먹어버리고 또......

"뒤끝좀 고쳐 김호국. 그거 병이야."

-그럼 넌 양심이 없으니까 양심결핍장애냐? 너 나랑 새뱃돈 봉투 슬쩍 바꾼 거 기억 안 나? 내가 간식 사오면 야금야금 뺏어먹고, 내가 학교에서 괴롭힘 당하고 오면 찐따처럼 울지 말라고 구박이나 했었잖아.

"...그래, 내가 봐도 좀 심하긴 했네. 내가 좀 여동생 답지는 않았지. 인정할게."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세희는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아니, 넌 누구보다 여동생 같았어.

"!"

-싸가지 없고, 대들고, 지 혼자 돼지처럼 다 쳐먹어도, 네가 여동생답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럼 왜......!"

-왜 이제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거냐고? 80년 간 못 했던 말이니, 적어도 이번에는 해야겠다 싶었거든. 이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더라고. 너도, 부모님들에게도.

"......"

"......"

김선열과 이혜령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두 분도 듣고 계시죠? 절 진짜 가족처럼 여기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두 분은 항상 가상 현실에 접속한 척 하고 다른 곳을 돌아다니셨으니까요.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집을 비워두셨잖아요. 저랑 세희만 남겨두고. 그래서 저도 심심해도 집에서 벗어날 수가 없더라고요. 심심하다고 바깥을 돌아다니면, 그 집에는 세희만 혼자 남아 VR 기기에 틀어박혀 있게 되는 거니까요. 멍청했던 시절의 저라도 그건 알 수 있었어요.

"아......"

어째서 김호국은 항상 집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일까?

VR에 접속하지 못하는 그에게 집은 따분하고 정적인 감옥이나 다를 바 없었을 텐데. 바깥을 돌아다니며 맛있는 것도 먹고, 신선한 공기도 쐬고, 여러 사람도 만나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는 어지간하면 집을 떠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동생을 홀로 남겨둘 수 없었으니까.

-절 안 좋게 보시는 것도 알아요. 이제와서 사과한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 적어도 이 말만은 하게 해주세요.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그는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전 김씨 가문의 자식이어서 행복했어요. 당신들이 내 가족이었다는 사실에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지막 한 마디가 이어지기까지는 조금 더 오래 걸렸다.

-그러니 이제 이 게임은 제가 직접 끝내도록 할게요. 물론 당신들이 여기에 갇히게 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동시에 통화가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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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통화가 종료된 스마트패드를 미련없이 박살내서 옆으로 던져버렸다.

"후우, 병신들 잡아죽이기 딱 좋은 날이네."

남극과 북극에 레이저를 쏴서 점멸분쇄기를 유도해 달라는 말은 미처 꺼내지 못 했지만, 미리 메시지를 보내뒀으니 프롯이 그걸 확인했을 것이다.

고문재단의 공동 창립자는 꽤 비참하게, 그리고 자신들이 기대했던 악당답지 못한 결말을 맞이하겠지.

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끝내야 할 놈들이 아직 남았다.

말이 좋아 '친척'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저런 것들을 친척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아직도 그쪽의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저들과 내가 당초 목표로 삼았던 것은 완전히 달랐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직계인 저들은 심플하게 유산만을 원했다. 막대한 부와 영광, 권력을 손에 쥐고 그것을 평생토록 누릴 작정으로 이 게임에 참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이런 건 원하지 않았지.'

정당한 결과를 원했다.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정당한 결과를.

부의 분배 같은 사회주의적 개념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유일하게 잊지 않았던 신념을 말하는 거다.

정당한 노동에는 정당한 대가를. 누군가가 10만큼 일을 했으면 정확히 10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게 바로 공평한 것이고 정당한 결과다.

"다들 충분히 일해줬어요."

"뜬금없는데?"

"20년만 근무해도 충분했을 것을, 저 때문에 60년이나 추가로 근무했잖아요. 제가 죽일 놈이죠."

"어떠한 식으로든, 이번에 끝난다는 걸 다들 알고 있어. 그러니 누구도 네 탓을 하지 않는 거야. 최소한 너는 모두를 위해 그렇게 행동한 것이니까."

"정말로 그럴까요? 사실 저도 유산이 탐나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방계인 저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기회를 마구잡이로 써버린 게 아닐까요?"

"그랬다면 넌 벌써 모두를 파멸로 이끌었겠지. 해방시켜주겠다는 약속 따윈 하지도 않았을 거야. 왜냐하면 넌 고문재단에서 보낸 1년 남짓한 시간으로 노동자의 설움을 깨달았으니까."

"그렇죠."

영원한 노동은 없다. 필요한 만큼의 노동과 필요한 만큼의 대가만 있을 뿐.

나 또한 노동자의 입장이 되어봤기 때문에 그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겨두었다. 이 세계에서 착취당한 70억의 사람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도.

"그럼 이제 욕심쟁이 친척들을 끌어내리러 가죠."

개인을 위한 유산이 아닌, 모두를 위한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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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랑스러운 김씨 가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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