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3장. 백씨세가로 돌아오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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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백씨세가로 돌아오다 (2)
백서희를 거처로 데려다준 백강휘는 곧바로 가주인 백연호의 집무실이 있는 전각으로 향했다.
"가주님, 일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알았다."
집무실의 문 앞에서 시녀가 백강휘를 발견하고 안에 보고하자, 곧 안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구나."
"그렇군요."
"잘도 살아남았어."
백강휘가 안으로 들어가자 백연호는 그를 힐끔 보고는 다시 일에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부른 지 한참인데 이제야 왔어."
"서희를 데려다 주어서 말이죠."
"서희라."
백연호와 정실부인인 장문영의 슬하에는 두 명의 자식이 있었다.
바로 백자후와 백성후였는데, 백강휘는 그 둘을 이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않았다.
"어째서 돌아온 것이냐?"
"집으로 돌아왔는데 질책을 들어야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
백연호는 고개를 들어 백강휘를 보았다. 백강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변했구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을 겪었죠."
이전의 백강휘는 그에게 이런 식으로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잔뜩 움츠리고는 '예.'라고만 대답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변했다. 그에게 말대꾸하는 것만으로 변했다는 것이 아니다.
'여유가 있어.'
이전과는 달리 자신감으로부터 기인한 여유가 보였다.
"무공을 배운 것이냐?"
"익혀야 하니까요. 이제 눈치 볼 필요 없지 않습니까?"
"이전에는 눈치를 봤다는 말이구나."
당시에는 세가 내에서 살기 위해서는 잔뜩 움츠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가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것은 가주인 백연호였지만, 그런 백연호조차 부인인 장문영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장문영에게 밉보이지 않으려면 무공을 익히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변검법을 익혔느냐?"
"굳이 익혀야 합니까? 겨우 백변검법인데."
"겨우? 지금 겨우라고 했느냐!"
백가지의 변화를 담았다는 검법. 그리고 백씨세가의 검법.
백연호는 백씨세가의 백변검법이 무림에서 최고의 검법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무시할 수 없는 그런 검법이 될 거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니 검법을 무시하는 백강휘의 말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왜 제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백강휘는 천재였다.
그것은 백연호 역시 인정하는 바였다.
겨우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백변검법의 초식을 전부 외웠고, 검법의 문제점까지 찾아냈다.
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은, 게다가 단순히 백자후가 수련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열 살짜리의 행동이었다.
"그러니 장 부인이 절 그렇게 경계하는 것이지요."
"······."
"그리고 겨우 열 살짜리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검법이라면, 대단한 것은 아니고요."
"감히······."
백연호는 백강휘가 무공을 어떤 무공을 익힌 것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아니, 무공을 익혔다고 백강휘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어쭙잖은 무공을 배웠다고 함부로 입을 여는구나."
그렇기에 백연호는 백강휘가 대단한 무공을 배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절정 고수인 그가 무공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초절정 고수가 되었다는 말이다.
백연호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에 백강휘의 내력이 너무 미천하여 그가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어째서 세가로 돌아온 것이냐? 백변검법도 익히지 않은 자를 후계자로 선정할 것 같으냐?"
세가의 가주라면 모름지기 그 세가의 독문무공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다른 무공을 익혔다는 백강휘에게 가주의 자리를 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자후를 소가주로 임명했다."
백강휘보다 두 살 어린 백자후가 소가주가 된 것은 백강휘가 쫓겨나고 얼마 후였다.
마치 백강휘가 세가에서 쫓겨나길 바랐다는 듯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일이었다.
"그걸 다시 물리면 본가는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세가의 가주 자리에는 미련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가질 생각도 없었고요."
백강휘의 담담한 말에 백연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대체 어째서······."
"그리고 처음부터 제게 가주의 자리를 줄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까?"
백연호는 말을 끊으며 묻는 백강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백강휘는 그에게 대답을 바라고 질문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백강휘의 말처럼 그에게 가주를 물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백강휘가 천재여도, 그리고 그가 엄청난 고수가 되어도 말이다.
"그럼 어째서 돌아온 것이냐?"
백씨세가의 가주란 자리에 욕심도 없으면서 백강휘는 어째서 돌아온 것일까? 백연호는 그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백강휘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말하지 않을 셈이냐?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돌아온 것인지 말하지 않으면 널 다시 내쫓을 수밖에 없다."
"꿍꿍이라.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요."
"계속 장난하자는 것이냐?"
이유를 말하라고 함에도 자꾸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백강휘를 보며 백연호가 결국 소리를 질렀다.
"돌아온 이유는 간단합니다. 왜 세가에서 절 내쫓은 것인지 궁금했거든요. 정확히는 왜 그것을 묵인했는지 말입니다."
백강휘가 세가에서 쫓겨나는 것은 장문영이 계획한 일이지만, 백호대를 움직이는 것은 가주인 백연호의 묵인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어째서 백연호가 자신을 버린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네가 세가에서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다."
백연호는 백씨세가를 오대세가의 반열에 올리고 싶다는 야망이 있었다. 그런데 백강휘는 목숨을 지키겠다고 잔뜩 움츠리고 무공도 익히지 않았다.
백연호는 그렇기에 백강휘가 백씨세가에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웃긴 말이지 않습니까? 제대로 무공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면서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을 제 탓으로 돌리는 것이요."
사실 백강휘의 천재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백연호는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야만 했다.
부인인 장문영을 회유해서, 아니면 협박해서라도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야만 했다.
하지만 백연호는 단 한 번도 무공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무공을 익히지 못하게 교묘하게 방해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제 질문은 그것이 아닙니다. 저를 죽일 필요까지 있었냐는 질문입니다."
"······."
백연호 역시 부인인 장문영과 같은 생각이었다. 백강휘를 살려두면 분명 후환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백씨세가가 백강휘를 품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건 이미 지난 일이니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도 알 것 같고."
자신의 목숨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도 백강휘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궁금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이냐?"
"세가에서 만약 제가 제일 강하다면, 과연 절 다시 버릴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말입니다."
"으음."
백강휘의 말에 백연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처럼 제일 강한 무인을 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후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무엇을 도와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세가가 오대세가가 될 때까지······."
"그렇다면 제게 이런 대우를 하지 말았어야죠."
백강휘의 말처럼 그가 백자후를 도와 백씨세가가 강해지는 것에 일조하는 선택지도 있었을 것이다.
백연호가 그에게 이런 대우를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것은 제가 서자이기 때문입니까?"
"······."
백연호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강휘는 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서자이기에 가주가 될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이는 것을 묵인했으면서 이제 와 도와달라니 참으로 어이가 없군요."
"네놈······."
백강휘의 독설에 백연호는 이를 으득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좋습니다."
"뭐라고? 좋다고?"
하지만 이어지는 백강휘의 말에 백연호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도와드리죠. 어렵지 않으니까요."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꾼 것이냐?"
"어쨌든 이곳은 제가 자란 곳이니까요."
그리고 백강휘를 죽이려고 했던 곳이기도 했다.
백연호는 그런 가문을 위해 도와주겠다는 백강휘의 말을 쉽게 믿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고수가 될 수 있다면······.'
백강휘가 그런 고수가 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백씨세가를 오대세가로 키우고 싶은 욕망 때문에 백연호는 백강휘의 저 말이 퍽 반가웠다.
'물론 녀석이 이미 내가 어쩌지 못할 정도의 고수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 가능성이 무척이나 낮다고 생각했다. 겨우 몇 달이나 지났다고 그런 대단한 고수가 되어서 돌아왔겠는가.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고? 지금 조건을 내걸겠다는 것이냐?"
"목숨을 노린 세가에 다시 돌아와서 도와주겠다는데 그 정도도 들어줄 수 없습니까?"
백연호는 백강휘를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무엇이냐?"
"지금은 백호대 사조 조장에서 물러난 우일향을 주십시오."
"우 조장?"
뭔가 큰 조건을 걸 줄 알았더니, 단순히 우일향을 달라니.
어차피 조장에서 물러난 그를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에게 이놈을 감시하라고 하면 되겠지.'
백연호는 백강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해야지.'
백변검법을 익히지 않는다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나중에 가주 자리에 욕심을 낼 때 그것을 핑계로 막을 수 있었다.
가주가 세가의 검법을 익히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
"이제 더 하실 이야기는 없으신지요."
백연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강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더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알겠다."
백강휘는 자신이 세가로 돌아왔으니 더는 내쫓지 말라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백연호는 백강휘가 집무실을 나갔음에도 계속해서 그가 나간 문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가주인 자신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백강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녀석이 별로라면 다시 내쫓으면 되는 거니까. 아니면······.'
저 정도로 자신만만하니, 무엇인가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과연 녀석이 세가에 도움이 되는지 판단할 것이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지만, 아주 잠깐은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대가 되는군.'
백강휘는 이미 열 살 때 그를 놀라게 했고, 부인인 장문영이 그를 경계하게 했다.
과연 제대로 무공을 배우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백강휘가 세가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녀석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겠어.'
백강휘가 백씨세가의 가주 자리에는 욕심이 생기면 안 되었지만, 세가에 대한 충성심은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백강휘를 다루면 안 되었다.
백연호가 앞으로 백강휘를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백강휘는 하필이면 소가주가 된 백자후와 만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