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7장. 녹가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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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녹가장 (1)
백씨세가의 가주인 백연호는 굳은 얼굴로 호북상회의 회주 이정웅의 서신을 읽고 있었다.
'거절이라.'
서신에는 백강휘와 자신의 손녀를 혼인시키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는데, 백강휘가 그것을 거절했다.
'녹가장 때문이라도 받아들였어야 하는 것 아닌가?'
호북상회의 힘이라면 역으로 녹가장을 압박할 수 있었으니, 더욱더 아쉽게 느껴졌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고, 공증인 요청을 해야겠군.'
백강휘도 돌아왔으니, 굳이 녹가장과의 전쟁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장문영의 집안 덕분에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녹가장도 정의맹에 소속되어 있으니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의맹에 속한 백씨세가와 녹가장이었지만, 오대세가 같은 곳이 아니었기에 정의맹에서 중재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공증까지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거절하면 군소문파는 차별하냐는 말을 듣겠지.'
정의맹은 공명정대한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그들을 따르겠는가.
생각을 정리한 백연호는 빠르게 서신을 써내려가기 시작했고, 그 서신은 곧바로 정의맹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정의맹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하북팽가의 장로인 팽정운이라 하오."
"반갑소. 백씨세가의 가주인 백연호요."
팽정운은 얼굴을 구겼다가, 빠르게 표정을 관리했다.
백연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다.
'버선발로 나와도 모자랄 터인데.'
집무실에 앉아서 자신을 맞이하는 백연호가 고깝게 느껴졌다.
'겨우 백씨세가 주제에.'
오대세가도 아니고 겨우 백씨세가다. 하북을 지배하는 팽가와 달리 겨우 호북에서 조금 영향력이 있는.
"지금은 가주께서 요청하신 대로 정의맹의 공증인으로 왔소이다."
"으음."
하지만 팽정운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가 원해서 공증인으로 온 것이 아니던가.
"어째서 장로께서 직접 오셨소?"
백연호의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첫 번째, 왜 이런 작은 중소문파의 이권 다툼에 공증인으로 온 것이 오대세가의 장로인가.
"게다가 굳이 하북에서······."
두 번째로는 왜 굳이 멀리 떨어져있는 하북에서 호북까지 왔냐는 의미도 있었다.
호북에는 구파일방 중 하나인 무당파가 있었고, 오대세가인 제갈세가도 있었다.
"본인이 직접 오고 싶다고 자원했소이다."
"음. 장로께서 굳이?"
"요즘 호북에서 위세를 떨치는 백씨세가와 녹가장이니 한 번 보고 싶었소이다."
팽정운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 수준하고는.'
백씨세가의 접견실은 말 그대로 휘황찬란했다. 팽정운은 그것이 너무 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풍스러운 것도 아니고 단순히 화려하기만 하니 마치 졸부처럼 보이는군.'
팽정운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녹가장에 둘렀다가 왔소."
"으음."
"녹가장에서는 전쟁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했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미 녹가장과 백씨세가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가주께서는 어쩌고 싶으시오?"
"당연히 전쟁······."
말을 내뱉던 백연호는 팽정운의 날카로운 눈빛에 급히 입을 다물었다.
"굳이 같은 정의맹 소속인데 전쟁까지 해야겠소?"
"하지만 이것은 세가의 명운이 달린······."
"그래봤자 작은 다툼일 뿐이잖소."
이것이 바로 오대세가와 군소문파의 차이였다.
이런 이권 다툼이 군소문파에게는 명운으로 다가왔지만, 오대세가에게는 작은 다툼으로 보일 뿐이었다.
'사천당가도 제갈세가에 힘을 빌렸었거늘.'
물론 아미파와 청성파는 당가를 이렇게까지 압박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비슷한 일이 있었음에도 팽정운은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천을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소."
"그렇소."
백연호가 부정하지 않자, 팽정운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당가가 아미나 청성과 싸운 것은 아니라오."
"들었소."
"직접적으로 칼을 든 것도 아니오. 대화로 서로 잘 풀었지."
정의맹의 중재로 인하여 세 문파가 한 발씩 양보하였기에 망정이지 대표를 뽑아서 서로 대결을 할 순간까지 갔었다.
"하지만 가주께서는 물러날 생각이 없으시고?"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소."
"흐음. 하지만 같은 정의맹 소속인데 전쟁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도 없고."
공증인으로 오긴 했지만, 막을 수 있으면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백연호를 보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해야 할지."
팽정운은 턱을 긁적이며 고민에 잠겼다.
녹가장은 굳이 전쟁을 할 생각이 없는데, 백씨세가는 전쟁을 하고 싶어하니 문제였다.
"가주께서도 아시겠지만, 녹가장에서 받아들일 이유가 없소."
"······."
녹가장은 이대로 야금야금 백씨세가의 힘만 줄여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정의맹은 녹가장이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것을 승인할 수 없었다.
"그래도 억지로 한다면?"
"어쩌겠소? 막아야지. 정의맹의 힘을 써서라도."
공증인으로 왔다는 팽정운이었지만, 백연호는 그가 중재를 위해 온 것처럼 보였다.
"후우. 그럼 함녕은 어떻소?"
"그 말은?"
"본가가 지면 이곳을 떠나겠소."
팽정운이 눈을 빛내며 백연호를 보았다.
"만약 지게 되면 백씨세가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 같은데, 정말 괜찮겠소?"
"···그렇소."
백씨세가가 지면 녹가장은 함녕을 차지하고, 그것을 토대로 차근차근 영향력을 늘려갈 것이다.
'정말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인가?'
말을 한 백연호는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
이 조건을 생각한 사람은 백연호가 아니라 백강휘였기 때문이었다.
'팽 장로를 보니 이 정도가 아니면 될 것 같지도 않고.'
지금 녹가장에서 백씨세가에 욕심낼 만한 것은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럼 녹가장에 말해보리다."
"알겠소. 그럼 쉴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소."
녹가장의 의견을 들어봐야했기에 팽정운이 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팽정운도, 그리고 백연호도 녹가장이 이 조건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결은 한 명의 대표를 뽑아서 대결할 생각이오."
"음."
시녀를 따라 움직이려던 팽정운이 말했다.
'그런 수준 낮은 대결을 계속 보는 것도 귀찮으니까.'
작은 세가끼리의 싸움인데 얼마나 대단한 고수들이 싸우겠는가. 하지만 싸우지 않을 수는 없으니 팽정운은 단 한 명만 대표로 뽑으라고 말한 것이다.
"알겠소."
"가주께서 직접 움직일 것이오?"
"아니오."
"그럼 백호대주?"
팽정운의 질문에 백연호가 고개를 저었다.
"본가의 일공자요."
"아! 알겠소."
백씨세가의 일공자에 대한 것은 팽정운도 들었다.
형문채를 단독으로 처리했다고 하지?
'단순히 부풀려진 소문이겠지만, 그놈들 정도는 된다는 거겠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후기지수들의 수준 정도는 될 것이다.
'아마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하지만 백씨세가에서 정말 그 정도의 후기지수를 키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팽정운이 단순하게 그 정도의 무위라고 상정했을 뿐이다.
"그럼 녹가장에서 답이 오면 다시 뵙겠소."
"좋은 대답 기다리겠소."
시녀를 따라 준비된 객실로 향한 팽정운은 곧바로 녹가장에 보낼 서신을 적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알아서 잘 준비하겠지.'
서신에는 백씨세가의 조건은 물론이고, 대표가 백강휘가 될 것이란 내용도 적혀 있었다.
"이것을 녹가장에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같이 온 수하에게 서신을 맡긴 팽정운은 미소를 지으며 침상에 누웠다.
이제 녹가장에서 답이 올 때까지 편히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백씨세가에서 대접을 받으면서 말이다.
"백씨세가의 소가주인 백자후라고 합니다! 장로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팽정운의 그 계획은 며칠 후, 갑작스럽게 객실을 찾아온 백자후로 인해 틀어져버렸다.
"···만나서 반갑소, 소가주."
"예! 잘 부탁드립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팽정운이 얼굴을 구겼지만, 잔뜩 긴장한 백자후는 그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남기겠다는 생각으로 팽정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작 팽정운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도 모른채 말이다.
'그 인간하고는 너무 다르군.'
팽정운은 자신을 찾아온 소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대세가에 들지도 못하는 세가의 가주 주제에 억지로 동등한 입장을 보이려고 한 가주와는 너무나 달랐다.
"가주의 부인인 장문영이라 합니다."
"백호대의 대주인 조광입니다!"
아무리 집주인이라 하지만, 연통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와서 인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게다가 부인과 백호대주는 왜 온 것인지.'
장문영이라 밝힌 부인이 어째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분명 백자후라 밝힌 소가주처럼 자신에게 잘보이고 싶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저놈은 예의도 없고, 욕심만 가득하군.'
감히 소가주와 가주의 부인이 손님을 맞이하는데 갑자기 끼어들고 있었다.
"음. 미안하지만 지금 중한 일이 있으니······."
팽정운은 애써 상한 기분을 숨기며 세 사람에게 말했다.
그의 축객령에 백자후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사다망하신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이 일이 끝나면 꼭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시오. 미안하게 되었소."
팽정운은 전혀 미안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지만, 그러겠노라는 그 말에 백자후는 기쁜 얼굴로 돌아갔다.
'그래도 모친쪽은 눈치가 있군.'
그가 굳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듯, 장문영은 표정이 굳은 채로 돌아갔다.
'갑자기 찾아와서 귀찮게 하다니.'
팽정운은 백자후의 등장으로 읽지 못한 녹가장의 회신을 꺼내 굳은 얼굴로 그것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녹가장에서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모양이로군.'
녹가장주의 회신이 마음에 들었기에 팽정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나저나 백강휘라.'
이곳에 있으면서 한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의 실력을 미리 파악하고 싶었기에 그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상당히 강한 후기지수로 예상되는데, 그런 놈이 소가주가 아니라는 것이지?'
단순히 서자라서 후계자에서 밀려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씩 유명해지고 있는 백강휘가 방금 본 소가주보다 무능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재미있겠어.'
욕심 많은 백씨세가와 녹가장의 대결이니만큼 기대가 되었다.
백씨세가도, 녹가장도 서로를 흡수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대세가를 넘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인가?'
백씨세가와 녹가장이 하나가 된다고 넘볼 수 있을 정도로 오대세가는 만만하지 않았다.
그 정도라면 계속해서 오대세가의 자리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럼 이 좋은 소식을 어서 가주에게 알려주러 가야겠군.'
팽정운은 들고 있던 서신을 품속에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백씨세가의 가주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며칠 후, 녹가장의 사람들이 백씨세가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