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7장. 녹가장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7장. 녹가장 (2)
백씨세가를 방문한 녹가장주는 오십여 명의 무인들을 대동한 상태였다.
"어서오시오."
"반갑소. 녹가장주인 녹지극이라 하오."
녹가장주는 백연호에게 인사를 한 후 곧바로 팽정운을 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로님."
"그렇구려. 그보다 용케 받아들이셨소."
"후후.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녹가장주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 지경까지 왔는데 굳이 숨기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가주께서는 오지 않으셨나 보오."
"제가 직접 움직이니 가문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구려."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백자후와 달리 녹가장의 소가주는 맡고 있는 업무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에게는 관심도 없더니.'
직접 녹가장의 소가주를 언급하는 팽정운을 보며 백자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크흠!"
"미안하게 되었소. 장로님을 오랜만에 뵈어서 이야기가 길어졌소."
백연호의 불쾌감 가득 담긴 헛기침에 녹가장주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 말을 길게 하여 좋을 사이가 아니니 바로 이동하시겠소?"
"그러시오."
"무인들이 쉴 수 있도록 부탁드리오."
녹가장주가 뒤에 서 있는 오십여 명의 무인들을 보며 말하자 백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을 대동했다는 것은 백씨세가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은연중에 표현한 것이다.
"후후. 그럼 가시지요."
팽정운은 제집 마냥 녹가장주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바로 백연호의 개인 연무장이었다.
"어차피 장로님께서 있으니 많은 사람이 필요 없겠지요."
"물론이오."
공증인인 팽정운이 있었기에 굳이 보는 눈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연무장에 도착한 사람은 여섯 명뿐이었다.
백씨세가에서는 백강휘와 백연호, 백자후가 있었고, 녹가장주와 한 명의 무인, 그리고 팽정운이 전부였다.
'작은 문파의 대결이니 공증인도 한 명뿐이고.'
만약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같은 곳의 대결이었다면 공증인이 더 많았을 것이다.
녹가장주는 그 사실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이번에 식객으로 모신 거력패도(巨力覇刀) 장룡 대협이십니다."
"오호. 거력패도라니."
녹가장주가 데려온 자를 보며 팽정운이 감탄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거력패도일 줄이야.
'으음. 거력패도라.'
백연호 역시 놀람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거력패도의 이름은 가볍지 않았다.
그는 호북이 아니라 절강에서 유명한 자였다.
'역시 식객을 데려오는 군.'
백씨세가나 녹가장 정도의 세가라면 식객이 한 둘 정도 있는 것이 당연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세가에서 돈을 받으며 머무는 손님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끔 세가를 위해 나서주기 때문에 되도록 고수를 많이 받으려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본가에는 괜찮은 사람이 없었거늘.'
그의 성에 차는 사람이 아직 온 적이 없기에 백연호는 식객을 따로 받지 않았다.
'좋은 세가에는 좋은 식객이 모이는 법.'
세가의 위세를 보기 위해서는 식객을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솔직히 부럽군.'
거력패도 정도의 사내라면 그도 세가의 문을 열고 흔쾌히 받아들였으리라.
"거력패도 장룡이오."
장룡이 비무대에 오르며 당당하게 외쳤고, 백강휘는 거대한 덩치의 사내를 보며 감회에 젖었다.
'거력패도, 얼마만에 보는 자인지.'
전생에서 백강휘는 거력패도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죽였지만.'
간단히 말해서 그에게 죽은 자였다. 그것도 그가 무림에 출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거만하고, 돈과 술을 밝혔지.'
그리고 여자까지.
어쨌든 녀석은 낭인이었던 백강휘와 우연히 만났고, 낭인이란 말에 그를 놀리다가 머리가 터져 죽었다.
'지금은 녹가장에 있었나?'
전생에도 그가 녹가장에 있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백강휘라고 하오."
"······."
장룡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백강휘가 올라오는 것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이런 어린 아이가 대표라는 것이오?"
"그렇소."
거력패도가 백강휘에게 삿대질을 하며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녹가장주를 보았다.
"죽을 수도 있는 일인데?"
"상관없소."
"하!"
백가장주의 무덤덤한 대답에 거력패도가 짧게 코웃음을 쳤다.
'하필이면 저놈이.'
백자후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백강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조 대주도 있건만.'
백자후가 저 자리에 서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주인 백연호가 서는 것도 웃긴 일이다.
그렇다면 세가에서 가주 다음으로 강한 조광이 저 자리에 서야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까도 잠깐 본 것이 전부지만.'
팽정운 역시 백강휘를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전혀 감이 안 잡히는군. 무공은 익혔을 텐데.'
절정의 수준인 그가 초절정인 백강휘의 무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팽정운은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었다.
'특수한 무공을 익힌 것인가?'
세상은 넓고 무공은 많다.
무위를 알아보지 못하게 숨기는 무공도 있을 것이다.
"그럼 시작하시오!"
그렇기에 팽정운은 생각을 끝내고 곧바로 외쳤다.
"날 원망하지 말고 네 부모를 원망해라!"
장룡은 조소를 지은 채, 백강휘와 크기가 비슷한 크기의 대도를 한 손으로 휘둘렀다.
그가 어째서 거력이란 별호가 붙어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깡!
"깡?"
사람을 베는 소리가 아니라 맑은 소리가 들려오자 장룡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백강휘가 너무나 간단하게 그의 도를 한손으로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장룡은 절정의 수준이었기에 그의 도에는 푸르스름한 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을 백강휘가 맨손으로 잡았으니 당황한 것이다.
"뭣?"
팽정운마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그렇다고 그의 손에 강기가 어려있는 것도 아니었다.
백강휘는 단순히 손을 감싼 투명한 실의 힘만으로 장룡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으아아앗!"
장룡은 도를 다시 회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백강휘의 손아귀 힘이 워낙 강해 도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끄으윽!"
장룡의 얼굴레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건가?'
백강휘가 단순한 후기지수 정도라고 생각했던 팽정운은 경악어린 눈이 되었다.
같은 절정이라 하더라도 무위가 같은 것은 아니다.
거력패도 정도라면 이미 후기지수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백강휘는 마치 그를 어린애 다루듯이 하고 있었다.
-쾅!
백강휘는 곧바로 왼손으로 일권을 뻗었다.
팽정운은 그 거대한 소리가 진각을 밟을 때 나는 소리인지, 아니면 장룡이 얻어맞으며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일격······."
중요한 것은 거력패도가 더는 대결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후우. 죽지는 않았나."
"죽여야 끝나는 것이면 죽이겠소."
"아니오. 이 대결은 백씨세가의 승리요."
만약 이대로 더 기다리겠다고 하면 백강휘는 단숨에 거력패도를 죽일 기세였다.
'이것 참.'
팽정운은 얼굴이 일그러진 녹가장주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후후."
그리고 백연호는 웃음이 새어나오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역시 녀석의 말을 듣기를 잘했어.'
만약 함녕의 지배권 때문에 백강휘의 말을 거절했다면 그는 녹가장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녹가장은 다시 악주로 돌아가시면 될 것 같소."
"패배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십 년은 함녕을 넘보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이어지는 팽정운과 녹가장주의 대화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이것은 서로의 세가를 걸고······."
"가주께서 착각하신 것 아니오? 물론 백씨세가는 함녕의 지배권을 걸었지만, 녹가장은 그것이 아니라오."
오히려 팽정운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백연호를 보고 있었다.
"이 대결에 서로 모든 것을 건 것도 아니고, 단순히 백씨세가가 빼앗긴 이권을 돌려받기 위함이었소."
"그렇소. 그러기 위해 녹가장은······."
"녹가장은 함녕의 이권을 건 것이고, 굳이 대결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으니 백씨세가는 지배권을 건 것이라오."
팽정운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백연호는 자신이 크게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녕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녹가장 역시 그 정도를 건 것이라고 착각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정말 잘 되었구려. 이대로라면 백씨세가에 사람들이 몰리겠소."
팽정운의 그 말에 굳어있던 백연호의 얼굴이 펴졌다.
비록 녹가장은 차지하지 못했지만, 백강휘의 이름은 곧 널리 퍼질 것이다.
"형문채를 단독으로 처리했는데, 거력패도까지 일격에 쓰러뜨린 후기지수라."
그 위명을 듣고 이제 사람들이 백씨세가로 몰릴 일만 남았다.
여기서 거력패도 같은 강자를 식객으로 받아들이면 세가는 더욱더 커질 것이다.
"아쉽지만, 결과에 승복하겠소."
녹가장주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백연호는 전혀 분한 기색이 없는 녹가장주를 보며 오히려 이 대결에 조마조마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얻을 것은 많이 얻었지만.'
하지만 그런 모습과 달리 녹가장주 역시 굉장히 심경이 불편했다.
그저 백연호보다 표정관리를 잘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필이면 저 인간이······.'
녹가장주는 슬쩍 팽정운을 노려보았다.
그가 서신으로 백강휘의 무위를 후기지수 정도라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저것이 무슨 후기지수 정도란 말인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신룡(新龍)들도 거력패도를 한수에 기절시킬 수는 없다. 승패를 장담하지조차 못할 것인다.
"왜 그렇게 보시는 것이오?"
"아무 것도 아니오!"
녹가장주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팽정운의 얼굴이 굳었다.
'저놈이 저 정도로 강할 거라고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나.'
팽정운도 백강휘의 무위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백강휘를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니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 직접 봤어도 무위를 가늠하지 못했으리라.
'돈이란 돈은 다 받아놓고.'
하지만 그런 사정까지 알지 못하는 녹가장주는 팽정운이 원망스러웠다.
팽정운은 녹가장주에게 많은 돈을 받아놓고도 녹가장에 유리한 정보도 주지 못했다.
'그래도 내 덕에 녹가장이 잡아먹히는 것도 피했거늘.'
팽정운 역시 받은 돈이 있어 녹가장에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애썼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노려보는 녹가장주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대단하구려."
"별 말씀을."
팽정운은 녹가장주의 따가운 시선에 한숨을 내쉬면서 백강휘에게 다가갔다.
"설마 백씨세가에 이런 대단한 젊은 고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소. 반갑소. 팽가의 장로인 팽정운이오."
"백강휘라고 합니다."
"앞으로 백씨세가가 위세를 떨치겠구려."
"고맙소."
갑작스럽게 사근거리는 팽정운을 보며 백연호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백 공자께서는······."
팽정운은 백자후에게 대했던 태도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무림에서 이름을 떨칠 것이 확실한 백강휘와 친분을 쌓아두고 싶은 것이리라.
'저놈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같이 가자니 백강휘의 속셈을 모르겠고, 버리자니 그의 무위가 아깝다.
백연호는 팽정운과 대화하는 백강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놈. 대체 어떻게 저런 힘을 가진 것이지?'
그리고 백씨세가의 소가주인 백자후 역시 이를 갈며 백강휘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