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61화. 환수의 섬, 공중도시 미스텔지아
“구리의 몸을 빌린 당신은 누구입니까?”
루시안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심기 불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어린 환수 아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그저, 형체를 취할 힘 하나 없어서 버려진 사념체일 뿐이니까요. 이 아이에게 피해는 없을 겁니다.”
성별을 알 수 없을 만큼, 중성적이었다가, 남성적이었다가 또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가 계속 바뀌었다.
“우리는, 스러진 환수들의 잔존 사념체, 미련의 산물들입니다. 죽어서도 이곳 고향을 떠나지 못한 자들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벨가의 의지와 휘데른의 예지를 받들어, 이곳에 온 금을 먹는 자와 인간분들 다시금 환영합니다.”
구리의 몸을 빌린 그 존재가, 정중하게 인사를 해온다.
“우리를 이곳에 초대한 목적이 있으십니까?”
“이곳은 미스텔지아라 불리는 곳입니다. 과거, 많은 환수가 살았던 터전이었습니다. 공중에 뜬 신비로운 환수들의 낙원이었지요. 어느 환수의 욕심으로 평화는 깨어지고, 그렇게 나타난 악은 흉악한 무기를 꺼내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이렇게 된 것입니까?“
그 존재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곳은 그저, 환수들이 사라져 자연스레 시간에 쇠퇴하였을 뿐이랍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공중섬이자, 공중병기의 최종 제어권을 넘겨드립니다. 다가올 거대한 악에는 이 힘이 꼭 필요하실 겁니다.“
”예? 공중병기요?“
”하, 루나야, 들었지? 이 무기는 앞으로 고생할 너희를 위한 선물이라잖아!“
그 존재가 여전히 옅은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손을 들어 올려, 반딧불 같은 형형색색의 빛 방울을 일으킨다. 그것들이 뭉치더니 루시안의 목으로 날아든다. 그것들이 목걸이 형태를 갖추더니, 서서히 형태가 드러난다. 그저 흔한 은목걸이이지만, 흑색수정이 박힌 독특한 형태였다.
그 존재의 모습이 노이즈가 심하게 낀 듯 형태가 흐트러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한다.
“3번의 기회, 공중도시를 부탁. 그대들, 마지막, 희망, 다가올, 재앙, 대비, 고대의 기억을…….”
일행의 눈을 가득 메우는 빛무리가 퍼져나가더니, 그들의 앞에 고대 전쟁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하얀색 털을 가진 거대한 순록이, 백발의 사내로 변해 벨가와 다투는 모습, 그 옆에 심기 불편한 금빛의 호랑이가 나타나 으르렁거린다.
상처를 입은 순록이 거대한 차원문을 열고, 엄청난 촉수들이 차원문을 강제로 찢으며 등장한다.
순록이 산채로 머리부터 통째로 잡아먹힌다. 차원문에서 희한한 무기들이 튀어나와 주변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엘프, 드워프와 인간들의 모습도 스쳐나간다. 거대한 고래도 보인다. 네오돈의 모습도 나타났다.
황금색 호랑이의 모습이 거대한 구슬이 되었다. 구슬에서 솟아난 쇠사슬이 카라함을 감싸더니, 꽁꽁 묶는다. 그리고는 이내 그 구슬 속으로 카라함의 모습이 사라진다.
공간이 찢어지며, 갈라진 틈으로인간들이 나타난다. 번개가 파지 짓거리는 험상궂은 사내, 부채를 튼 실눈의 안경잡이 사내 등 여러 인물들이 보인다.
그중 한 인물의 모습을 본 루시안이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얼굴이었다.
영상들은 매우 단편적이었다. 앞뒤가 잘린 조각난 기억들, 고대의 전쟁의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거기에 역겨운 얼굴까지 나타났다. 루시안의 기분을 완전히 망쳐버릴 만큼 역겨운 얼굴이.
“예지, 혹은 과거, 이것은, 단서가 될 것입니다. 파멸을 막을, 무거운 짐을, 그대들에게, 미안합니다. 우리는 이제 사라지겠지만, 안녕을 고하며, 선물을.”
존재가 다시금 손을 들어 올리니 미스텔지아 전역에서 형형색색의 기운들이 뭉쳐 든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거대한 크기의 환수 구슬, 그리고 느껴지는 막대한 힘. 그것은 서서히 루시안의 손으로 날아들어 안착했다.
“등록, 각인, 동력원, 작별을 고하며….”
존재가 서서히 흩어지며, 구리의 몸이 서서히 쓰러진다. 루시안이 달려가 안았다. 아무 일도 모른다는 듯 새근새근 잠에 빠진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구리가 서있던 광장의 뒤편, 기계 작동음이 들리며, 벽 일부분이 열리고, 밑으로 향하는 계단이 열렸다.
“와우, 진짜, 별일을 다 겪는다.”
“루시안 오빠, 가봐요. 저희를 초대한 것 같아요.”
발터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잠이든 구리는 타몬트가 업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헤실거린다. 타몬트의 등을 꼬옥 붙잡으며 얼굴을 부빈다.
루나가 라이트 마법을 시전해, 앞을 밝혔다. 다행히도 그들이 통로로 들어서자, 횃불들이 순차적으로 들어오며 불이 켜진다.
통로의 끝, 무언가를 끼우는 동그란 홈이 보인다. 그 주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깜깜한 밤하늘을 보는 듯했다.
“여기에 끼우라는 거 같지?”
발터가 가운데 홈을 가리키며 루시안에게 말했다.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구슬을 그 홈에 맞춰서 놓았다.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기계음이 들린다.
어둡기만 하던, 방안이 서서히 밝아져 온다. 앞에는 거대한 푸른 창이 떠오른다. 스발란의 섬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에는 차원문 이동장치에서 보이던 패널과 버튼들이 보인다.
“와, 이거 진짜 신기하다!”
그때, 구슬이 반짝거리며,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토끼 귀를 가진 12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오랜만에 나타난 적격자이신가요?”
“적격자? 그건 또 뭐냐? 아리따운 토끼 소녀 당신은 누구?”
“어머, 교육이 하나도 되어있질 않으시군요!”
그녀는 귀를 바짝 세우고,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대고 두드리듯이 움직였다. 그걸 본 루시안은 익숙한 문명의 이기를 떠올렸다. 컴퓨터였다. 영락없는 전자제어 무기였다. 저 소녀는 블루투스 키보드를 두드리는 거였다.
‘하,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세상인 거야’
그녀의 조작에 따라, 거대한 창에 의문의 존재가 보여주었던 영상들 몇 개가 재생된다.
“고대의 전쟁은 말입니다….”
벨가와 그간의 자료 조사로 익히 알던 내용이 흘러나온다.
“당시, 아기아스는 차원문을 통해, 카라함을 불러들였고, 그 차원문을 통해 타 차원의 고대의 문명 잔재도 같이 흘러들어왔습니다. 그 새로운 무기는 카라함의 편에서 적들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후, 고대의 무기들은 모두 환수 연합군 아직 배신하기 전의 인류와 드워프 엘프들이 결성한 그 연합에 의해 탈취되어 드워프의 개조를 거쳤다고 한다. 이 섬에 공중병기를 합쳐서 개조시킨 게 바로 미스텔지아라고 하였다.
“당시, 환수들은 그만큼 절실했습니다. 이 섬 자체의 힘을 끌어다가 적을 말살시켜버리고자 했습니다. 결과는 보시다시피 이런 꼴입니다만. 저도 당시의 죽은 환수입니다. 이렇게 망령으로 남아버린, 그런 존재랍니다. 헤헤”
고대의 전쟁으로 심하게 파손되고, 망가진 잔재들은 유적이란 이름으로 다시 대륙 곳곳에 파묻혔다.
“적격자란, 세상에 혼란에 맞서 싸우며, 환수들의 선택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 그들에겐 고대의무기 제어 권한이 주어집니다. 저는 이 고대 공중병기 미스텔지아를 총괄 관리·감독하는 미토라고 합니다.”
윙크하며, 오른손은 눈에 브이 자를 그리고, 왼손은 허리춤에 가져다 댄다. 한발은 뒤로 들어 올렸다. 어디선가 많이 본 자세다. 도대체 어느 문명의 잔재일지 심히 궁금해진다.
“거대한 에너지원을 받아들여, 최대 3번의 사격이 가능하며, 기지를 통한 이동은 불가, 호출에 따라 해당 지점으로 순간 가속 이동은 가능합니다. 호출기는 당신의 목에 그 목걸이 이고요,”
“위력은 얼마나 되지?”
“아마 대륙 절반은 없애버릴 수 있을걸요?”
웃는 얼굴로 밝게 말하지만, 내용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정말, 필요한 때에 써야겠네.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저기, 토끼 소녀! 시간이 됩니까!”
타몬트는 또 저러고 있다.
“컥!”
루나가 완드에 힘을 실어 그대로 타몬트의 목덜미를 가격해 버린다. 발터는 잽싸게 구리를 안아 들었다.
“정말 재밌는 분들이네요!”
“뭐, 당장에 널, 부를 일은 없을 것 같네.”
“망가지지만 않았다면, 이동수단으로도 써먹겠지만….”
발터도 아쉬운 듯 말을 흐렸다.
“어쩌겠어요. 드워프가 와도 고치기 힘들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공격은 자폭공격이 될 것 같네요. 헤헤”
“정말,웃는 얼굴로 저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니 정말 이상하네요.”
“아! 이 스발란 섬이라면 여러분을 밖으로 이동시켜드릴 수 있어요.”
그렇게 그녀의 도움을 받아, 항구로 순간 이동했다.
“위력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나중에 있을 싸움에서 큰 무기가 될 건 확실하네.”
“정말, 신기한 경험이네요. 세상에 이건 마법적으로 이해가 되지가 않아요.”
“그런데, 루나, 타몬트 형 깨어나긴 하는 거야?”
“몰라요. 저런 변태 아저씨는. 흥!”
루나가 점점 라펠라를 닮아간다. 피로 맺어진 친자매보다 더 끈끈할지도 모르겠다. 타몬트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뭐, 알아서 깨어나겠지, 한두 번이야?”
그들은 항구 근처의 신전에서 하루를 묵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들은 엘프 여왕의 무리와 만나게 되었다.
“루시안님 여기서 또 뵙는군요?”
“여왕님은 여기에 어찌한 일로?”
“우리가 인간에게 말할 의무는 없다!”
옆에서 툴툴거리는 네로니아가 자꾸 끼어든다.
“엘란, 저기 대화가 안 통하는 수인족 여왕님은 저리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뭐! 이 건방진 인간이!”
“네로니아,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쳇!”
타니엘이 중재하고 나서자, 털을 바짝 세우며, 밖으로 나가버린다. 별일 아니라는 듯 타니엘이 구슬 2개를 루시안에게 내민다.
“저희가 가진 단서로 찾은 것들입니다. 저희는 마지막으로 이곳을 둘러보고 갈 생각이었으나, 굳이 그럴 필욘 없을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타니엘 여왕님”
루시안이 구슬 두 개를 챙겼다. 보랏빛과 하얀색의 구슬이었다.
“이곳에서 인도를 받으셨다면, 휘데른님을 만나셨겠군요?”
“그렇습니다. 많은 걸 알고 계시는군요.”
“저는 높은 엘프이자, 엘프족의 수장, 세계수 위그드라실과 소통하는 존재이니까요. 일전에 보내주신 영약은 잘 썼다고 감사하다고 하시는군요.”
“다행이군요. 잘 쓰셨다니 기쁩니다.”
“얼굴을 보지 않고 가셔서 서운해하십니다.”
“저기요, 그분은 나중에 제가 직접 말을 하겠습니다. 전달은 그만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타니엘이 싱긋 웃는다. 그리고는 품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꺼내 놓는다. 그러자, 나뭇가지가 공중에 떠오르더니, 작은 소녀로 변해 타니엘의 어깨에 앉는다.
“뭐, 원하는 데로 직접 말하겠습니다. 루시안!”
어이가 없었다. 저런 모습으로 직접 나타날 줄은.
“이 미스텔지아를 찾은 이상, 당신들과의 약속이 필요합니다.”
나무일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조건은 하나입니다. 이 무기는 오직 대륙의 평화를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건 당연히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설마, 제가 위그드라실 님을 미워해서 쏘기야 하겠습니까?”
“짓궂군요. 루시안.”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다. 타니엘이 슬쩍,활을 만졌던 것 같다.
“걱정하지 마시라는 의미입니다.”
“루시안, 카라함과 아기아스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대륙의 위기는 깊은 원한과 해묵은 원인과 결과로 빚어질 겁니다. 모든 일이 끝나기까지, 당신은 시련을 받을 겁니다. 부디 잘 견디어주길 바랍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찝찝함을 가시고 싶었다. 이 불쾌하고 끈적한 기분, 거미줄에 걸린 듯한이 기분을 말이다.
“일전의 예지와 이번에 의문의 존재들이 보여준 그 인물, 전부 연관된 거였습니까? 정말, 그들이 저를 쫓아온다는 겁니까?”
“그건 벌어질 앞으로의 일입니다. 예정대로 벌어질 일이라는 겁니다.”
“하, 정말 시작과 끝을 그들과 함께할 줄 몰랐습니다.”
“매듭을 묶었으면,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이치가 그러합니다.”
“매듭을 잘라버리고 잊어버리고 싶었습니다만….”
“모든 게, 내 뜻대로 흘러가진 않으니까요.”
루시안이 한숨을 깊게 내쉰다.
“타니엘 그걸 건네주세요.”
타니엘이 잎사귀 모양의 귀걸이 하나를 건넨다.
“앞으로, 엘프족과 수인족은 대륙의 아기아스 잔당들의 소탕에 나섭니다. 구슬의 회수는 온전히 당신들의 몫이 될 겁니다. 아스타리안 대륙의 구슬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점은 저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보증합니다.”
“이 귀걸이는 무엇입니까?”
“그대가 우리의 귀인이라는 증표이자, 우리의 동맹이란증거입니다. 엘프족에서 그들의 본거지 수색에 나서면 그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군요.”
“지난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엘프족과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네로니아는 루시안의 귀에 달린 귀걸이를 보더니 볼을 한껏 부풀린다.
“쳇! 저런, 털 모자란 인간들과 함께해야 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