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1부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수고하세요."
배를 두드리며 식당에서 계산을 하고 나오다가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맛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 돈을 주고 먹을만한 진미도 아니었는데.
나는 생활비 계좌에 남은 돈을 머리로 대강 헤아리면서 방금 저녁으로 초밥집에서 한 접시에 몇천원씩 하는 초밥을 십수접시나 비우는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면 이번 달의 생활이 얼마나 더 여유롭고 윤택했을지를 공연히 상상했다.
남자나이 서른에 연봉이 삼천이면 어림잡아 상위 십퍼센트 안에는 충분히 들어가는 고소득층이지만 대학생때 멋모르고 진 빚을 아직까지도 갚아나가고 있는 입장에서는 외식 한번도 큰 마음 먹고 결정해야 하는 사치의 축에 드는 것이다.
에이, 후회한다고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맛있게 먹었으면 됐지 괜히 구차하게 따지지 말자.
그렇게 자위하면서 고개를 흔든다.
"휴우. 가만있자. 지금이 아홉시 막 넘었으니까 여섯시간 잔다고 치면... 네시간이나 남네?"
시계를 보니 갑자기 몸에 활력이 도는 것 같다.
집도 차도 돈도 없이 회사와 단칸방을 오가며 기계적인 일상을 보내는 청년이 여가를 누린다고 하면 선택지는 많지 않다.
가끔가다 오늘처럼 야근이 없는 날에 컴퓨터로 게임을 하는 정도가 유일한 낙인 것이다.
나는 상가골목을 빠져나와 걸음을 빨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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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과 주방이 붙어있는 원룸은 빨랫대와 책상, 앉은뱅이 소반 등 집기때문에 더 좁아보였다.
게다가 남자 혼자 사는 방이 다 그렇듯 자주 오가는 생활동선을 제외한 곳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어 한결 더 누추하다.
그래도 꼴에 원룸이라고 보증금도 있고 고시원보다 월세도 거의 두배 가까이 비쌌다.
"이것도 언제 한번 바꿔야 하는데..."
낡은 컴퓨터의 전원을 누르니 팬 돌아가는 소리가 우웅하고 요란하게 방 안을 채운다.
나름대로 관리는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너무 오래되어 소음도 심하고 성능도 영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화려한 3D 그래픽으로 무장한 최신게임은 몰라도 수년전에 나온 AOS게임을 즐겨하는 내 입장에선 아직 그럭저럭 쓸만한 편이다.
요즘은 노트북으로도 돌아가는 저사양 게임이니까.
"오랜만에 시간이 넉넉하니까 랭겜 돌려야지."
그리고 나는 이 게임에선 실력이 꽤 괜찮은 편이었다.
프로게이머를 노린다거나 개인방송을 할 실력까지야 안 되지만 그럭저럭 상위권 유저라고 자부할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턱걸이로 중견기업 레벨에는 들어가는 자랑스러운 직장보다도 더 중요한 내 자아의 한 축이다.
아무튼 사람은 어딘가에선 인정을 받아야 삶의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직장에서 온갖 부조리를 묵묵히 참아넘기며 있는듯 없는듯 월급만 바라보고 견디는 나로서는 게임에 과몰입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목숨걸고 몰두하면 정말로 재능이 없는게 아닌 이상 보통은 꽤나 높은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게임에 접속하니 로비창에서 온라인 친구들의 메세지가 잠깐사이에 너댓개나 쏟아진다.
가장 먼저 온 게임초대를 수락했다.
일분이 조금 넘는 대기시간 끝에 큐가 잡히고 보이스톡을 실행해 연동한다.
"아아, 마이크 체크. 다들 들리시죠?"
"오, 보이스톡 프로그램 바꿨어요? 음질이 전보다 더 좋아지신것 같은데?"
"기분탓입니다. 아니면 지금 제가 아주 기분이 좋아서 그럴수도 있구요."
"일찍 퇴근했다고 신나셨구나? 하하하."
육성으로 친근하게 대화하는 모습에 다른 팀원 중 하나가 혹시 듀오랭이냐고 물어본다.
물론 함께 돌리는 듀오게임이 맞았지만 아무래도 이미지가 좋지 않은터라 우연히 같은 게임으로 큐가 잡힌 지인이라고 둘러댔다.
친목질을 하는 사이에 캐릭터 선택이 시작된다.
"오? 웬일로 환영검사 살았네요. 저 자신있는데 첫 픽으로 바로 뽑아도 될까요?"
"그러세요. 믿습니다?"
포텐셜이 높아서 OP로 간주되지만 비숙련자가 잡으면 한 사람 몫은커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난이도 최상의 데미지딜러 캐릭터였다.
사실 나도 실전에서 사용해본 경험이 거의 없어서 그렇게 잘 다루지는 못하지만 플레이하기 참 재밌는 캐릭터라서 패기있게 질렀다.
뭐, 망하면 그때가서 변명하고 사과하면 되지.
내 픽만 마치고 잠깐 주방에 가서 물을 따라오는 사이에 게임이 시작되었다.
라인으로 향하면서 극초반 딜교환을 빠듯하게 하기 위해 에테르 칼날 스킬을 선택한다.
무형의 칼날을 뻗어 15미터 내의 적을 베어낸다는 쿨타임 3초짜리 스킬인데, 기본데미지나 마력계수가 높지는 않아도 노코스트 스킬에다가 나중에 스킬레벨을 올리면 쿨타임도 2초로 줄어들기때문에 거의 평타처럼 쓰이는 스킬이었다.
툴팁에는 15미터라고 되어있지만 인게임에서 막상 사용해보면 거의 근접공격이나 다름없더라.
얘들 키가 한 오륙미터쯤 되는건가.
아, 미국게임을 현지화하는 와중에 피트를 미터로 일괄번역하다보니 생기는 오류라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에테르 칼날에는 적에게 명중시 0.5초간 이동속도가 50퍼센트나 증가하는 옵션도 달려있어서 딜링기라고는 이 스킬 하나뿐인 환검이 캐리라인으로 분류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물몸 딜러가 평타보다 살짝 더 긴 근접거리에서 쿨 짧은 스킬을 난사하며 빠른 이동속도로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하는게 핵심이니 얼마나 다루기 까다롭고 어려운 캐릭터겠는가.
대회에도 나오는 좋은 캐릭터가 솔로랭크 게임에선 괜히 '환검충'이라며 경멸을 받는게 아니다.
-어? 환검님 특성 잘못 선택하신것 같은데요?
-예? 아, 이런.
다급한 채팅이 올라오는것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물을 가져오느라 특성을 안 바꿨네.
환영검사는 강한 초반에 차이를 벌려놓고 압박하는 캐릭터니까 초반에 강한 맞싸움용 특성이나 게임을 빨리 끝낼수 있는 공성용 특성을 들어야 하는데.
주문력을 기반으로 하는 방어스킬도 일단 있기는 한데 계수가 워낙 낮은터라 후반으로 가면 사거리 긴 원딜들의 평타 몇 방에 녹아내리니 암살이고 견제고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다.
-마력응축 그거 좋아요? 한시간 게임 가도 그냥 마공템 하나 더 든 정도밖에 안 되던데.
-전판에 왕귀챔 했거든요. 실수했네요. 죄송.
-뭐, 특성 없다 치고 잘 하시면 되죠.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라 그런가, 훈훈하네.
마력결집 특성은 시간경과에 따라 무한하게 주문력을 증가시켜주는 특성인데 삼십분은 지나야 좀 체감이 되고 실질적으로 게임에 영향력을 미치려면 족히 한시간은 걸리는 대기만성형 특성이었다.
뭐, 하드난이도로 한다고 생각하자.
질질 끌면 보험은 되니 없는것보단 낫겠지.
환영검사도 주문력 기반 캐릭터니까.
-와, 밖에 천둥번개 완전 무섭네요.
-어디 사시는데요?
-저 서울이요.
-엥? 저도 서울인데 비 안오는데요?
채팅을 치기가 무섭게 열어둔 창 밖으로 후두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을 소나기라니, 별일이네.
라인에 도착해 상대팀 화염마법사의 견제를 피하며 달려들 각을 쟀다.
꽈르릉!
"휘유. 천둥소리 한번 요란하네."
가만, 근데 방금 전에 번개가 쳤던가?
뒤늦게 번쩍하고 창밖으로 환한 빛이 지나간다.
뭐야, 왜 천둥이 더 빨라?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신경을 껐다.
먼저 친 번개를 못 봤나보지 뭐.
1레벨부터 빠듯하게 딜 교환을 나누다보니 2레벨이 되기 전에 상대도 나도 너덜너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팀 화염마법사의 실수를 캐치하고 캐릭터를 조작해 달려든다.
2레벨은 찍고 두번째 스킬까지 활용해 승부를 볼 셈이었던것 같은데 그렇게는 안 되지.
오케이, 화염구는 일단 피했고.
강화 패시브가 묻은 평타는 어쩔수 없지만 이렇게 맞싸우면 무조건 내가 이긴다.
아, 에테르 칼날도 빗나갔네.
쿨 짧은 스킬이니까 한두번 못 맞춘다고 이길걸 지진 않겠지만 이러면 자칫하다간 살려보내겠는걸.
경험치가 거의 다 차기는 했는데 싸우는 중간에 레벨업이 될 정도는 아니고...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싸울걸.
뭐, 그랬다면 서로 2레벨이니 변수가 있었겠지.
결국 상대팀 화염마법사를 살려보내고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본진으로 귀환한다.
잠시 후에 있을 2레벨 싸움에서는 꼭 잡자.
첫 아이템으로 마법공격력을 올려주는 지팡이를 살까 하다가 고민끝에 이동속도를 올려주는 부적과 생명력 포션을 몆개 샀다.
이제 라인으로 복귀를... 어? 이거 왜 이래?
마우스 커서가 모래시계 모양으로 바뀐다.
인터넷 문제로 게임에서 튕겼나?
"아, 설마 번개 때문인가... 재접속도 안되네."
초조한 마음으로 몇 번이나 강제종료와 재시작을 계속한 끝에 간신히 로딩화면으로 넘어간다.
회선이 끊긴건 아닌것 같은데 엄청 느리네.
벌써 몇 분이나 지체해서 완전히 말렸을텐데.
그냥 패널티 감안하고 이대로 탈주할까.
"커억! 켁켁. 아이고..."
물을 한모금 마시면서 느리게 올라가는 로딩화면을 바라보는데 꽈릉하는 천둥소리에 흠칫 놀라 그만 사래가 들리고 만다.
고개를 숙이고 켈록이다가 그 서슬에 그만 의자의 바퀴가 빠져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내 모습을 상상하니 슬랩스틱 코미디가 따로 없는 장면이라 웃음이 나온다.
낄낄거리면서 일어나 의자를 다시 세우려는데 번쩍 번개가 치더니 사방이 암흑에 잠겼다.
정전인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마저 게임을 하긴 글렀네.
그런데... 아무리 정전이라도 이렇게 아무것도 안 보이고 빛 한 점도 없이 새까만게 정상인가?
어?
어어?
서랍에서 라이터를 꺼내기 위해 손을 더듬으려던 나는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 공포에 질렸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예 전신의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번개에 맞았나?
밖에서 돌아다니던 것도 아니고 집 안에 들어앉아서? 말이 안 되는데.
뭔지는 몰라도 안 좋은 일이라는건 알겠네.
설상가상으로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기까지 한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의식의 끈을 애써 부여잡아 보지만 마치 일주일은 밤을 샌 것처럼 참을수 없는 졸음이 몰려든다.
이대로 놓아버리면 두번 다시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머리를 채웠지만 더이상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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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게 몸을 감싸는 감촉에 정신이 들었다.
이불과는 다른, 낯설지만 포근하고 안정되는 그 느낌에 '아, 좋다'라는 탄성을 지르려고 했을때, 나는 내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무척이나 신기한 감각이었다.
혀가 느껴지지 않았고 입을 벌리고 있는지 다물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눈도 떠지지 않는다.
여긴 어디지?
난 이제 어떻게 되는걸까?
다시 머리가 띵해지면서 졸음이 몰려온다.
몇 번을 자고 깬 후에야 나는 내가 지금 복중에 들어있는 태아가 아닐까하는 가설을 세웠다.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태아가 통 속의 뇌보다야 훨씬 그럴듯하고 희망적인 처지가 아니겠는가.
단순히 희망섞인 바람만도 아니다.
여러 정황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도 배꼽 부근에서 느껴지는 이거, 이거 탯줄 아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그 날이 왔다.
문자 그대로 세계가 일그러져 나를 압박해 밖으로 밀어내려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
출산이란건 아기에게도 고난이었다.
머리가 으스러지는듯한 고통을 이겨낸 끝에 외부의 공기를 접하고 토해낸 첫 울음을 울때까지, 내가 어떻게 버텨냈는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두번째 삶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