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1부
"이렇게 급속도로 성장하는 이능도 있습니까?"
"워낙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이능의 성장속도는 사람마다 전부 다르니까요. 국내에서는 특급 신체강화 초능력자 박형배 씨의 경우에도 성장폭이 말도 안되게 크고 성장속도도 빨랐죠. 초창기에는 그냥 힘이 좀 세지는 수준에 불과했다네요."
"교관님은 제 이능이 그에 비견될만하다고 생각하세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전문가들이 알아서 판단하겠죠. 일반적으로 이능은 성장이 빠를수록 반대급부로 초기 성능이 안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문이 드는거예요. 최지호 훈련생의 이능은 당장 일선에서 활약할 특급의 수준이니까 말입니다."
"금방 여기서 더 강해질수도 있다는거네요."
"위력이 더 늘어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맘모스의 방어막을 일격에 뚫을 정도라면 이미 위력은 의미가 없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중요한건 활용능력이죠."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네요."
괴수의 방어막이 없는거나 다름없는 수준이지만 에테르 칼날의 크기는 정해져 있으니까.
말보다 약간 큰 유니콘 정도는 두쪽낼수도 있는 크기니 부족하지는 않지만 거대괴수를 해치우려면 급소를 베어낼 정확도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수십의 헌터가 둘러싸고 한참동안 이능을 퍼부어 방어막을 깎아낸 후에야 본체에 타격을 입히는 일반적인 사냥법을 생각해보면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사치스러운 단점이지만.
아니, 생각해보니까 굳이 일격을 고집하지 않더라도 한방 맞춰 방어막을 상쇄한 후 열병기로 총탄을 쏟아부으면 그만이잖아.
"정리가 끝난것 같군요. 조금 이르지만 전리품을 실을 짐칸이 다 찼으니 복귀합시다."
"실습평가는 당연히 최고점으로 주시겠죠?"
"글쎄, 어떨까요. 이능의 위력이 예상외로 너무 강했을뿐 거대괴수를 사냥하는 과정에서 평가해야할 요소들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아, 물론 농담입니다."
의뭉을 떨던 교관은 내가 짜증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니 씩 웃으면서 말을 바꾼다.
거의 필터부분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땅에 던지고 돌아서는 그를 따라 일행에 복귀하니 어느새 장갑차는 시동을 걸고 요란하게 공회전 중이었다.
"교관하고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 한거야?"
"그냥 이런저런 조언을 들었어요. 아무래도 측정이 잘못된것 같다고 하던데."
"그거야 당연하지. 맘모스를 일격에 잡다니, 그건 내로라하는 상위헌터라도 쉽지 않을걸? 그런 이능이 겨우 D등급이라니, 측정과정에서 분명히 뭔가 실수가 있었던거야. 공무원 놈들이 다 그렇지 뭐."
내 이능등급을 측정했던 노원센터의 담당관이 괜히 욕을 먹는 것에 대해 속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며 웃었다.
장갑차는 올때보다 더 묵직하게 땅을 파고들어 깊은 궤도자국을 남기며 기동했다.
안에 담긴 전리품의 무게가 상당할 것이다.
자리가 좁아서 괴수 사체를 실을 공간도 부족해 훈련생들은 밖으로 내몰려 터덜터덜 걸었다.
물론 억지로 끼어앉으려면 들어갈수야 있겠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걷는다.
나름대로 현장에서 피를 빼고 방부처리를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피와 체액이 묻어나고 고약한 방부제 냄새도 나는 사체더미 사이에서 편히 앉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울릉도 게이트와 연결된 전진기지로 복귀하는 길은 아무 일 없이 순탄했다.
행군을 하는 셈이니 그리 편하지는 않았지만 짐을 모두 차에 싣고 홀가분한 몸으로 걸으니 크게 힘든줄은 몰랐고 무엇보다도 기지에 복귀해 따뜻한 물로 샤워할 생각을 하니 마음부터가 편하다.
"오늘은 모두 수고많으셨습니다. 숙소 복귀하시면 자유시간 드리겠지만 내일도 아침부터 사냥을 위해 나갈 예정이니 되도록 일찍 쉬시길 바랍니다."
"예!"
"교관님, 혹시 저녁에 점호같은건 따로 없나요?"
"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복귀하세요. 기지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마시구요. 이곳 전체가 군사구역이나 다름없으니 볼거리도 없을텐데."
"알겠습니다. 산책만 할겁니다."
좋았어, 역시 관광할 여유를 주는구만.
물론 이 삭막한 군사기지에서 뭘 볼게 있느냐고 하면 딱히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처음으로 발을 디뎌본 외계행성이 아닌가!
"넌 역시 십대라 그런가, 팔팔하구나. 난 온몸이 쑤시는게 아주 죽겠는데."
강호찬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투덜거린다.
그러고보니 짐이 없다고는 해도 꽤 오래 행군을 했으니 노련한 헌터출신인 교관들이라면 모를까, 훈련생들은 지치는게 정상이다.
내가 제일 어린 것은 맞지만 체력은 그냥 다른 고등학생들보다 약간 나은 정도인데.
역시 훈련과정에서 부지런이 뛰며 운동한 보람이 있구만.
숙소에서 옷을 갈아입고 간편한 차림으로 나왔다.
허리에 찬 리볼버 권총의 느낌이 낯설다.
아침에 들어왔을때는 원정준비로 바빠서 몰랐는데 의외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 헌터처럼 보이는 사람의 비율은 높지 않았다.
평상복 차림으로 나다닐수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고작 이할에서 삼할정도?
이능이 없는 일반인이 게이트 안에 진입하려면 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걸 다 감수하고라도 들어올 정도로 이 안에 돈이 흘러넘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안녕하세요. 아직 장사하시죠?"
"어서오세요. 아, 헌터훈련소 생도시군요?"
술이나 한잔 할까해서 들어간 펍인지 식당인지 애매한 가게의 점원은 훈련소에서 지급받은 내 유니폼을 보고 환하게 웃으면서 반겨준다.
훈련생도는 돈 잘 버는 현직 헌터들보다 지갑이야 더 가볍지만 첫 전투를 나와 흥분해 있을테니 돈 쓰는데 거리낌이 없어 환영받는 고객이다.
동기 중 각성 이전에 게이트 부근에서 술장사를 하던 형이 말해준 사실이다.
물론 나처럼 첫날부터 피로 그런거 모른다는듯 나와서 돌아다니는게 정상은 아니겠지만.
젊고 예쁘장한 점원이 건네주는 메뉴판을 펼치며 술을 주문하던 나는 그만 혀를 깨물고 말았다.
"생맥주 오백 한잔 주시고... 어? 가격표 이거 뭔가 잘못된거 아닌가요?"
"게이트 이용료만 해도 얼만데, 설마 바깥세상과 물가가 비슷할거라고 생각하신건 아니시죠?"
"아니, 그야 그런데..."
그래도 정도가 있는거지 이 아가씨야.
맥주 한 잔에 삼만원 돈을 받으면 이건 뭐 거의 열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는 소리 아닌가!
메뉴판을 넘겨 요리메뉴를 보니 그 부분은 술보다 더 가관이다.
육포 한 접시에 오만원이라니, 괴수 고기로 만들기라도 한건가.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 맥주 한 잔하고 과자나 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참, 계산은 선불입니다."
"하아. 여기요."
가장 싼걸로 골라 시켰는데도 지갑 속의 현금이 절반 이상 뭉텅이로 빠져나간다.
게이트 안에서는 외부와 인터넷선이나 전화선이 연결되어있지 않으니 당연히 카드는 무용지물이다.
"부근에서 못 보던 얼굴인데, 새내기 헌터신가?"
옆 테이블에서 요리를 몇 접시나 시켜놓고 부어라 마셔라하던 무리 중 한 명이 말을 걸어온다.
"실습나온 훈련생입니다."
"그럴줄 알았다니까! 야, 인마. 내가 뭐랬어?"
"찍어맞춘거지 뭘 내가 뭐랬어야? 한달에도 여기 오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석 달 가량 있던 놈이 고참행세라도 하게?"
"야, 내가 다 추리한 거라니까. 지금이 딱 헌터 훈련소들 실습나올 시기잖아."
"훈련소 하나에서 일년에 서너번이나 신규 기수를 모집하는데, 무슨 놈의 시기 타령이야."
"아 됐고, 찍어서 맞춘것도 맞춘거지. 내놔."
아무래도 내게 말을 건 아저씨가 동료들과 나를 가지고 내기를 했던 모양이다.
기분나쁘게 생각할수도 있는 일이지만 한눈에 봐도 노련한 중견 헌터들인것 같아서 웃어넘겼다.
현직 헌터에 대한 존중과 별개로 훈련생 신분으로 시비가 붙으면 유리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우리 훈련생도께선 첫 실전을 겪은 기분이 어때요? 아, 맞나? 오늘 사냥하고 온거 맞죠?"
"예. 오늘이 첫날입니다. 낮에 유니콘 몇 마리와 맘모스 한 마리를 잡고 왔죠."
"오, 맘모스를 사냥했어? 어느 훈련소라고 했죠? 교관들 수준이 대단하네요."
"교관개입없이 사냥 성공했는데요."
"와, 진짜요? 대단하시네."
말로는 대단하다고 하면서도 훈련생들의 힘만으로 맘모스를 사냥했다는걸 믿는 눈치는 아니다.
마치 귀여운 허세를 보는듯한 시선이었다.
일단 대처법을 배우는 과정이 커리큘럼에 있기는 하지만 중형 이상의 괴수를 순수 훈련생들끼리 잡아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듣기는 했다.
난 그게 실습중에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인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다른 의미였던것 같다.
"맥주 나왔습니다."
"아, 고마워요."
점원이 거품이 보글보글 이는 생맥주 한 잔과 과자접시를 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걸 보고 처음에 내게 말을 걸었던 헌터가 혀를 차면서 손을 든다.
"여기 생도분한테 과일세트랑 소시지세트 하나씩 갖다줘요. 내가 사지."
"안 그러셔도 되는데. 이거 고마워서 어쩌죠?"
"뭘. 자네 덕분에 내깃돈으로 삼백만원도 넘게 벌었는데, 이 정도는 사줘야지."
"하하하... 내기를 참 크게 하셨나봐요."
옆자리 앉은 낯선 사람 정체를 맞추는 가벼운 내기에 삼백만원이나 걸리다니.
누가 헌터 아니랄까봐 통 한번 크네.
"그럼 내일도 원정 나가겠네? 잘 하면 필드에서 만날수도 있겠구만. 어느 쪽으로 나가시나?"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유니콘 서식지 쪽으로 한번 더 간다고 하더라구요."
시원한 맥주를 단숨에 몇 모금이나 들이키고 목을 찔러오는 탄산의 자극을 음미하면서 대답하니 내깃돈을 잃었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이름모를 연갈색의 술만 홀짝이던 헌터가 내게 충고한다.
"이봐, 요새 훈련소에서는 함부로 원정계획을 누설하면 안된다는 기본적인 원칙도 안 가르치나? 우리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쩌려고?"
"야, 훈련소 실습이잖아. 인원효율 생각 안 하고 수십명씩 몰려다닐텐데 어떤 바보가 뭐 뺏어먹을게 있다고 건드리겠어?"
"잘못 버릇이 들면 안되니까 그러는거지."
"언제부터 남의 일에 그렇게 신경을 썼다고."
"충고 감사합니다. 주의할게요."
십수만원이나 나가는 비싼 안주를 사준 고마운 사람들이 날 두고 싸우는걸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기는 곤란해서 나서서 감사인사를 했지만 내게 신경쓰는 사람 없이 떠들썩한 소란이 이어진다.
"내버려 둬. 벌써 한참 마셨거든. 취해서 그런거니까 마음쓰지 마."
두서없고 이미 주제도 한참 벗어났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논쟁이 끝없이 이어지는동안 테이블 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청년이 잔을 들고 내 테이블로 와서 마주앉아 말을 건넨다.
"아, 네. 근데 형은 멀쩡하네요?"
"난 신체강화계열이거든. 같이 마시면 항상 나 혼자 남아. 하하하."
"오, 그럼 형이 파티탱커네요?"
"아니. 나도 일단 위치상 전위에 서기는 하는데 메인탱커는 아냐. 저기 저 누나 보이지? 저 누나 초능력이 방어막이거든. 발동거리만 좀 길었으면 안정적으로 서포팅을 할텐데, 자기 피부 위 삼센치라니 별수있나. 자기가 나서서 맞아야지."
가장 떡대좋은 아저씨는 원거리 공격수로 빠지고 가녀린 청년 남녀가 전위에서 고생을 하는군.
생긴거랑 초능력은 전혀 상관없지만 이들이 괴수를 사냥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그 언밸런스한 광경에 나도모르게 낄낄 웃음이 나온다.
"전 원거리 방출형이에요. 눈에 안 보이는 칼날을 뻗어 베어내는 능력이고 사거리는 십오미터쯤?"
"그것 참 멋있는 이능이네."
"교관은 유효타격거리가 너무 짧아서 애매하다고 하던데요. 절 근접전 조에 넣으려고 하던데."
"하하하, 근접전 조에 섞더라도 정말로 괴수와 붙어서 싸우게 두지는 않았을거야. 근거리 화력지원 정도로 썼겠지. 음, 혹시 그것때문에 미래가 불안하니? 사냥팀 구하기 힘들까봐?"
"아뇨. 전혀 걱정 안 해요. 위력 하나는 발군이거든요. 제가 오늘 실습때 유니콘을 일격에 쪼개버렸다고 말 안 했나요?"
"처음 듣는데. 잠깐만, 방어막을 한번에 다 깎고 본체를 타격했다고? 진짜 한번에?"
"그렇다니까요. 교관들이랑 제 동기들이 다 봤으니 증인도 넘쳐나요."
맘모스도 일격에 해치웠다는 말을 하면 대번에 허풍쟁이로 몰리겠지만 유니콘까지는 그래도 이능의 종류에 따라 그럭저럭 있을법한 일인지 믿는 기색이다.
한편 옆 테이블에서는 취기가 점점 더 오르는지 목소리가 커진다.
어쩌다가 이야기가 그리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내게 말을 걸었던 덩치 큰 아저씨는 어느새 자기 이능이 내게 충고를 했던 청년보다 얼마나 더 유용한지에 대해 강변하고 있었다.
"그래봐야 내 에너지 미사일보다 위력이 한참이나 떨어지잖아요. 등급이 괜히 낮은게 아니라니까?"
"그렇게 단순하게만 보면 안 돼. 화염속성이 얼마나 유용한지 몰라? 당장 어제만해도 야영할때 불 붙인게 누구야?"
"아저씨 아니었어도 라이터로 붙이면 그만인거 아녜요? 너무 구차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좀 억지긴 했어.
아무래도 센터에서 더 낮은 등급을 판정받은 쪽이 일방적으로 불리한 싸움이다.
물론 처음부터 술주정이 목적이지 뭔가 그럴듯한 결론을 내자고 시작한 말싸움이 아니었으므로 누가 이기고 누가 졌다고 말하긴 애매하지만.
"모듬과일이랑 소시지세트 나왔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아저씨, 잘 먹을게요."
그는 내 치사를 한 귀로 흘렸지만 나는 즐거운 기분으로 맥주를 즐기며 이 유쾌한 헌터 팀이 벌이는 소란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이 사람들, 어느 기업 소속일까?
그걸 안 물어봤네.
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는 청년에게 물어보려고 시선을 돌렸지만 그는 신체강화형 이능을 각성해서 술이 강하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어느새 의자에 뒤로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아니, 안 취해서 매번 혼자 남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종업원이 새로 가져온 접시 위에 놓인 이름모를 열대과일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는데 혀가 아릿할 정도의 단 맛이 올라온다.
뭐야, 이거. 생과일이 아니라 설탕절임이잖아?
게이트 통과비용이 비싸다더니 보존식을 한번에 잔뜩 들여와 쟁여놓고 파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