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1부 (24/110)



〈 24화 〉1부

정찰조가 보고한대로 고블린 부락은 어쩌면 인구가 수천단위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광대한 규모였지만, 경계는 전혀 삼엄하지 않았다.
외곽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클리어해 나가면 전멸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물론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질테니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그렇다는거지만.

“이상없습니다. 나오셔도 됩니다.”


“오케이, 자, 다들 몸 낮추고 나와. 음, 식량저장고가 여기면 포로들을 모아놓은 곳은...”


“주술의식이 진행되는 곳의 바로 근처에 있겠죠. 그 편이 편리할테니까. 아무래도 마을 중앙쪽에 있지 않겠습니까? 창고를 빙 둘러놓은 형태일텐데.”

지하 2층까지 파고 내려간 땅굴 하나를 완전히 섬멸하고 밖으로 나오면서 강경호 팀장과 박우진 공격조장이  번째로 진입할 땅굴에 대해 상의한다.
천운이 따랐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만큼 성공적으로 공략을 진행했는지 아직 들키지 않았다.
죽인 고블린의 숫자만 벌써 수십단위인 것 같은데, 이렇게 술술 풀려도 되나 싶을 정도다.
징검다리를 밟고 건너뛰듯 조금씩 마을 중심부로 접근해나가는 것이다.
외부와의 차단이 이뤄지고 있는 이상 남은 길은 이 길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급할 것도 없다.
어쩌면 끝까지 들키지 않고 유령처럼 제사장과 주술사들을 제거할  있을지도 모른다.


“땅굴끼리 이어져있지 않은게 천만다행이야.”

“외부창고라서 그런게 아닐까요? 거주지와 중요구역은 이어져있을  같은데...”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군.  편이 습격하긴 더 편할 것 같아. 자, 들어가자. 선두돌입.”

그리고 그 과정에서 최선두에 서는건 나였다.
뒤에서 윤기정이 여차하면 튀어나와 몸으로 대신 막아주기라도 할 기세로 보호를 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가장 앞서서 들어가는  자체가 심리적으로 부담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위기 상황에서 무섭다고 뺄 수도 없고 말이야.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감상과는 별개로, 나는 놀라우리만치 훌륭하게 잘 해내고 있었다.
가시거리가 십여미터 정도 되는 직선광의 플래쉬를 비추고 뛰어 들어가면서 그 빛을 본 고블린이 무슨 일인가 하고 튀어나올때마다 에테르 칼날로 반듯하게 잘라주면 그만.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덮친다면 뒤에서 따라오는 탱커들과 공격조원들이 부딪혀가며 라인을 이루고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지호 저 녀석, 아무리 봐도 대단한 이능이야. 우리 팀에서 썩기엔 너무 아까운데.”

“아니, 팀장님이 그런 소리를 하면 어쩝니까?”

“왜, 뭐. 스카웃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잡은 물고긴데. 도장 꽝 찍었는데 이제 와서 어디 도망이라도 갈거야? 큭큭큭. 그래도 우리 팀만큼 가족적인... 우측!”

서걱, 반으로 갈라져서 죽는 고블린의 모습이 이젠 낯설기는커녕 너무나 친숙하다.
쏟아진 내장에서 나는 악취때문에 ‘깔끔하게 목만 날릴걸’하고 잠깐 후회를  정도였다.
 놈이 나온 오른쪽 코너의 방으로 들어가보니 원시적인 토기를 모아놓은 곳이었다.
슬쩍 들여다보니 흙으로 빚은 토기들의 안에는 뭔지 모를 잡곡이 가득 담겨있다.
굴은 그 곳에서  안쪽으로 이어지지 않고 막혀있었다.
여기도 식량창고인가.

“젠장, 텄네.”


“이렇게 충실히 식량을 끌어모아 놓은걸 보면 역시 마을 규모가 상상 이상... 엇?”

침을 탁 뱉고 투덜거리는 윤기정과 곡물을 손으로 한움큼 쥐어보며 침울하게 중얼거리던 강경호 팀장이 동시에 몸을 움츠리며 내 앞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호흡 늦었지만 나도 이변을 눈치챘다.
아래로  미터가량 내려와 수평에 가깝게 구부러진 형태의 땅굴이 부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뭐야, 밖에서 폭탄이라도 터진건가?

“무너진다! 밖으로 빠져나가!”

탱커들이 다급하게 공격조원들을 한 명 혹은 두 명씩 들쳐메거나 끌어안고 몸을 날린다.
나는 내 몸을 홱 끌어당겨 안은 윤기정의 품 안에서 겁에 질려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진동이  가시기도 전에 꽤나 단단해 보이던 벽이 무너져내린다.
토사물이 쏟아지는 가운데 신체강화 능력을 잔뜩 끌어올린 탱커들은 가지고 온 방패마저 죄다 내팽개치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불과 십여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저 앞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입구가 보인다.
불행히도 나는 선두였고, 바꿔말하면 탈출하는 입장에선 최후미였다!


“기정아! 더 빨리!”


입구가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벽이 무너져내리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들고 뛰는 윤기정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스피드가 부족하다.
흙이 쏟아져내려 입구를 완전히 막아버리기 직전에, 나는 이를 악물고 이능을 발현했다.
그리고 에테르 쉬프트의 넉넉한 이동거리는 무너지는 토굴에 있던 나를 순식간에 안전한 입구 바깥의 지상으로 데려다주었고, 기뻐하는 대신 나는 급히 몸을 돌렸다.

“야, 인마! 넌 어떻게 날 쏙 버리고 나가냐? 와, 배신감 드네 진짜.”

매달고 있던 짐이 없어져 홀가분한 몸으로 폭발적인 라스트 스프린트를 한 윤기정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농담을 던진다.
와, 진짜 다행이다, 못 나왔으면 파헤쳐도 별로 희망이 없을뻔 했네.
팀원들이 서로를 확인하며 혹시  나온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는 가운데 최후미에서 달려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윤기정은 연신 내게 너무한  아니냐며 타박이다.

“아니, 제가 이거 각성한지가 얼마 안 됐잖아요. 선배님이랑 딱 붙어있었으니까 같이 이동할줄 알았지, 제 몸만  빠져나올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거 의심스러운데.”


“결국 다 살았잖아. 그럼 됐지. 아슬아슬했다 기정아.”


“그러니까요. 최악의 경우에는 제가 못 빠져나가고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막내만큼은 앞으로 던져서 살리려고 했는데, 정작  놈은...”


“몰랐다니까요, 제 몸만 되는건지. 그리고 제가 없어졌으니까 선배님도 빨라진건데. 안 그랬으면 둘 다 저 안에서 흙더미에 깔려 죽었을거라구요.”

윤기정이라고 딱히 진심으로 날 책망하는건 아니었지만, 빈말이나마 내겐 당혹스럽다.
아니, 그럼 그 안에서 둘 다 죽었어야 돼?
에테르 쉬프트가 동반이동이 안 되는걸로 확인된건 아쉽지만, 여차하면 하나라도 살아야지.
죽다 살아난 둘이서 아웅다웅하는 것에 팀원들은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우선은 하늘이 깨져나가는듯한 저 광경, 공간왜곡결계가 해제되는 모습이  번째였지만  중요한건  다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늘을 보십쇼. 결계가 해제되고 있습니다. 이러면 목표달성 아닙니까? 아무래도 고블린 놈들이 주술을 부리다가 뭔가 실수라도 해서 폭발이 일어난 모양...”


“헌터다! 엄폐해. 총기로 무장했어.”

“팀장님, 쏩니까?”

“가만있어봐. 일단 대화를... 젠장, 그럼 그렇지. 대화는 무슨. 대응사격해!”


마을 중앙, 그러니까 우리가 하던 방식대로 땅굴을 클리어하면서 좁혀나갔다면 두어시간 이상은  있어야 도달했을 위치의 땅굴에서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몰려나온 것이다.
작달막한 고블린들이 아니라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라이플을  자루씩 들고 헬멧에 고글, 전술조끼까지 걸친 전형적인 현대군의 모습이었는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양새가  눈에 봐도 전술적 숙련도가 상당해 보였다.
수효는 십수명, 아니 줄줄이 따라나오는 놈들까지 해서 스물 정도.
상황을 보건대 저들이 폭발물을 사용해 고블린의 제단을 파괴하고 나오는 것임에 분명했다.
거기까진 좋은데...
문제는 그들이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대뜸 총질부터 하고 봤다는 점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명중하지 못하고 근처의 땅에 총격이 튀기자 우리는 화들짝 놀라서 엎드렸다.
우리가 저들을 알아본 것처럼 저들도 우리가 고블린이 아니라는 것쯤은 한눈에 알아챘을텐데 대화를 시도할 생각도 없이 곧바로 총격부터 가하다니.
싸우게 될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건 처음부터 협상의 여지가 아예 없었구만.


“젠장. 방패를 가져왔어야 했는데. 유탄발사기, 유탄발사기 가져왔나?”


“장갑차에 두고 왔습니다. 땅굴 소탕에는 쓸모가 많지 않을거라고...”

중국군 내지는 헌터로 추측되는 적군이 튀어나온 마을 중앙부와 우리가 위치한 외곽 식량창고의 거리가 백수십여미터나 되었기에 아직 사상자는 없었지만 이거 너무 불리한데?
말이  미터지, 권총도 아니고 라이플로 쏘아 맞추기엔 충분히 가까운 거리다.
폭파의 여파로 땅굴이 무너져내려 생긴 굴곡진 지형에 엎드려서 엄폐하고 있더라도 총격전이 이어지면 분명 사상자가 나올텐데, 아무래도 숙련도에선 이쪽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저 놈들은 중화기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방금 의식이 치러지고 있는 땅굴을 통째로 폭파해버리고 나오는 길인 것 같은데 말이야.
아, 그러고보니 끌려갔던 페어리 포로들은 죄다 가루가 되었겠네.
길잡이 페어리도 실더의 손에 잡혀 엎드려서 머리를 눌리는 와중에도 그 점을 직감했는지 서럽게 울부짖고 있었는데, 그걸 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끼익! 끼아악!”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엎드려 엄폐한 위치 바로 옆에서 고블린의 기성마저 울린다.
마을에 가득한 토굴은 대부분 폭파의 영향으로 무너졌거나 최소한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바로 옆에서 살아있던 놈들이 기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강경호 팀장이 재빠르게 상황판단을 마치고 지시한다.

“포복해서 최대한 뭉쳐! 내 콜에 따라 동시에 일어서서 최대한 빨리 우리가 들어왔던 길로 빠져나간다. 고블린들은 일단 무시하고, 공격조 먼저, 실더들은 뒤에서 방어하면서 나가는거야.”


신체강화능력을 끌어올렸다고 해서 총에 맞고도 멀쩡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공격력을 제외하고는  훈련된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공격조원들보다는 부상을 덜 입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자가 나오는건 어쩔수 없을텐데 그걸 감수하겠다는 결정이었다.
하긴, 여기서 어물거리는 것보다 빠르게 장갑차까지 돌아가는게 현명하겠지.
그런데 무너진 땅굴의 잔해에서 고블린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며 기어나오는걸 보면서 나는 약간 도박적이지만 더 안전한 방법이 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의 기억은 너무 오래 되어서 뚜렷하지 않고 정확하다고 확신하기도 힘들지만 생명의 위기를 맞아서 그런가, 환영검사의 세 번째 스킬이 뭐였는지 떠오른 것이다.
가만있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팀장님, 저 지금 뭔가 느낌이 왔는데,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뭐?”


“왜, 전에 순간이동 능력을 새로 각성할 때하고 비슷해요. 딱 잘라 설명하긴 힘든데, 뭔가 간질거리는 감각이... 아무튼 카드 한 장 더 까보고 결정합시다. 예?”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혼란에 빠진 팀장 이하 팀원들을 아랑곳않고 나는 우선 에테르 칼날부터 날렸다.
최대 사정거리 근처에서 몸을 간신히 가누던 고블린들이 연신 조각나 무너져내린다.
여기까지 침투하면서 마주친 놈들 대부분을 내가 직접 목을 땄으니까 슬슬 때가 되었을텐데.
게임처럼 경험치 바를 눈으로  수 있는게 아니다보니 초조하고 속이 탄다.
내 예상이 틀렸으면 어쩌지?
지금 기어나온 저 놈들을 다 베었는데도 레벨업을 하지 못하면 거기서 끝인데.
그리고 천운이 닿았는지  네 마리째를 베어넘겼을 때, 나는 레벨업했다.

“됐어. 후우, 좋아. 내 생각이 맞았어.”


활력이 차오르는 특유의 감각을 온전히 즐길 새도 없이 나는 새로운 스킬을 활성화했다.
만약 1레벨에서 2레벨로 올라가는거였다면  개의 스킬 중 뭐가 찍힐지 몰라 반반의 도박이 되었겠지만 다행히 2레벨에서 3레벨로 올라갈 때 찍을 수 있는 스킬은 남은 한가지밖에 없다.
스킬레벨을 올리는건 모든 스킬을 다 찍은 후에야 가능한거니까.
환영검사의 세 번째 스킬인 에테르 폼은 토글형 은신스킬이었다.
활성화한 동안 이동속도 증가가 붙어있지만 다른 기능은 전혀 없는 은신스킬이었는데 그나마 적에게  공격을 가하는 순간 은신이 해제되는 방식이었다.
어차피 은신을 탐지할 수 있는 수단은 많았기에 게임에서는 단순히 순간적으로 타겟팅을 초기화하여 어그로를 분산하고 이동속도 증가효과를 이용하여 탈출 혹은 접근하는 방식으로 주로 쓰였는데, 에테르 칼날의 0.5초 이동속도 증가와 중첩되어 환영검사의 전장 기동력은 파일럿의 손이 따라준다는 전제 하에 무척 빠르고 현란했다.
물론 컨트롤이 좋지 않은 경우에는 단지 자원소모가 없는 이동속도 버프기로 죽고 나서 라인복귀를 빠르게 하는 용도로만 쓰인다고 하여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게임에선 그렇게 제한적으로 쓰이더라도, 현실에서 구현된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않을까.

“지금 뭐하는... 어엇?”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신입이 갑자기 이능을 난사하여 주변의 고블린들을 베어내니 혹시 얘가 패닉에 빠져 이성을 잃었나 싶어서 기어오던 윤기정이 눈을 휘둥그레 뜬다.
내려다보니 내 몸이 희끄무레해지더니 이내 형체가 완전히 사라지는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즉시 몸을 일으켜 앞으로 달려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