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1부
“안녕하십니까!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두 손을 들고 웃으면서 외치는 헌터를 보면서 윤기정이 쯧, 혀를 찬다.
“유제이 헌터즈 놈들이네. 일단 찔러나 보는건가? 멍청한 놈들. 페어리들하고 민간교역하는건 아마 우리가 독점을 하게 될텐데. 아무 소득없이 돌아갈게 뻔해.”
유제이그룹은 오닉스 헌터즈의 후원사인 신일그룹과 비슷한 규모로 재계순위를 다투는 라이벌 관계였지만 외계산업에서는 후발주자인 신일그룹보다 훨씬 더 앞서있는 기업집단이었다.
신일에서 투자를 어마어마하게 하고 있어서 그 격차가 빠르게 좁혀지는 중이지만 역사라는게 그리 만만한게 아니라서 아직도 유제이 헌터즈는 오닉스보다 반수 위로 쳐준다더라.
물론 그건 전체적인 수준을 봤을때의 얘기고.
요정의 숲은 우리가 처음 이종족들과 교류하고 중국과 싸워가면서까지 지킨 이권지대였다.
안쪽에 우리 회사 팀만 세 팀이 들어가 있을테니 말하자면 여긴 우리 영역이지.
“오닉스 분들이시죠? 반갑습니다. 유제이 1팀 소속 채현성입니다.”
“오닉스 3팀 윤기정입니다. 유제이 헌터즈에서 이쪽으로 원정을 나오다니, 별 일이군요. 그런데 가던 길 잘 가시면 될걸 어쩐 일로 멈추셨습니까?”
어...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공격적인데, 혹시 개인적인 감정이라도 있나?
내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면서 눈치를 보는 사이에 채현성이라고 자기소개를 한 헌터는 약간 당황해서는 어설프게 웃으면서 뒤쪽의 자기네 팀원들 눈치를 본다.
그래도 하라고 시킨 말은 다 전해야 하는지 그는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숲 진입 직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정비를 하려고 멈췄습니다. 저희와 합류해서 같이 들어가는게 어떻겠습니까? 그 편이 더 안전하기도 하고.”
“걱정은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에이, 사양 마시고. 어차피 같은 길로 갈 거 아닙니까? 뒤에서 매연 맡으면서 따라오시는 것보다는 편안하게 앉아서 가는게 낫지 않겠어요?”
“그러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길이 달라서요. 저희가 왜 차를 안 가져왔겠습니까? 따로 용건이 있어서 아직 길이 나지 않은 곳으로 가야 하니까 그런겁니다.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어... 원정대도 아니고 겨우 두 분이서 미개척 경로를 뚫는다구요?”
이건 나도 처음 듣는 소리다.
아니, 애초에 계획을 내가 세웠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물론 꼭 길로만 가야 하는건 아닌데, 잘 닦인 편한 길 놔두고 왜 사서 고생을 하겠어?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윤기정에 내 옆구리를 손으로 쿡 찌르며 가만 있으라는 눈빛을 보낸다.
그는 아연한 기색의 채현성에게 웃으면서 짐짓 뻐기는 어조로 대답했다.
은근히 상대를 낮추어 보는 듯한 거만한 목소리였다.
“하하하, 지금이야 임시로나마 길을 뚫어놔서 차가 들어가지만, 저희 팀이 처음 진출할때는 차도 다 밖에 세워두고 맨 몸으로 들어가야 했거든요. 저 안을 어찌나 많이 헤집고 다녔는지, 이젠 익숙해져서 눈 감고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크게 위험할 일이 없어요. 아, 재정비를 하신다니, 저희가 먼저 가도 되겠지요?”
“그,그렇군요. 오닉스에서 페어리들과 교류를 텄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저기, 그래도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시는게...”
“아쉽게도 일정이 급해서요. 다음 기회에 인사드리죠. 지호야, 어서 가자.”
와, 이 형님 이거 말하는 것 좀 보게. 허세도 이런 허세가 또 없다.
우리 팀이 저번에 고블린들의 공간왜곡 결계에 걸려서 요정의 숲을 헤매고 다니며 온갖 고생을 한건 맞는데, 저렇게 말하니 무슨 숲에 특화된 역전의 특수군 전사라도 된 것 같다.
심지어 시기상 요정의 숲을 개척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저쪽에서도 허세란걸 다 알텐데.
어이가 없어 윤기정을 쳐다보니, 그는 그저 유제이 헌터즈를 깔아내린게 만족스러운 것 같다.
음, 그냥 단순히 자존심 싸움의 일환으로 그런건가.
머리를 긁으면서 갑자기 빨라진 걸음을 따라잡으려 달음박질치다가 포기하고 쉬프트했다.
차량을 줄지어 세우고 앉아서 레토르트 식품을 데우며 휴식을 취하는 유제이 헌터즈의 헌터들을 지나치는동안 그들의 시선이 우리 두 사람의 몸을 위아래로 훑는다.
딱히 적의가 어린 시선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오히려 감탄과 선망 비스무리한 감정이 섞인 눈빛까지 있었다.
채현성이라고 소개했던 그 헌터가 말을 전할 때 비아냥대는 뉘앙스는 다 빼고 전했나?
하긴, 묘하게 깔아보는 말투를 제외하고 내용만 보면 별 거 없긴 했지.
숲으로 접어들면서 나는 윤기정에게 투덜거렸다.
“나도 모르게 따로 무슨 용건이 있어서요? 편한 길 놔두고 왜 정글을 헤매야 합니까?”
“지도 봤잖아. 길이 지형 때문에 좀 돌아서 가게 뚫려있어. 직선으로 가는게 훨씬 빠르지. 정글을 돌파하는거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보통은 열댓번 쓰고 허우적대는 순간이동 이능을 하루 종일 쓸 정도면 공격이능은 밤낮없이 써도 마르지 않겠더만.”
“그거야 그런데...”
돌아서 가면 뭐 얼마나 돌아서 간다고.
출발할때만 해도 내가 더 재촉하는 입장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의욕을 보이니 당황스럽다.
어깨부상을 회복할 가능성을 언급했으니 윤기정이 나보다 더 의욕넘치는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제 와서 얼마 차이나지도 않는 경로를 단축하겠다고 저럴 이유가 없잖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런 핑계에 속지 않을 것이다.
뭐, 짐작가는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나는 모른척 넘어가기로 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갑자기 왜 이렇게 빨리 걸어요? 탱커 발걸음을 나보고 어떻게 따라잡으라고. 외부인들한테 순간이동 능력을 보여줘서 좋을거 없잖아요. 하물며 라이벌 회사인데.”
“쟤들이 그거 모르겠냐? 우리나 쟤들이나 서로 주요 헌터들 등급이나 이능같은건 다 꿰고 있어. 너 복수이능 각성했다고 기본급 올릴 때 이미 업계에 정보 다 샜을걸.”
“아니, 우리 회사엔 보안이란 개념이 없어요?”
“큭큭큭, 생각해 봐라. 비밀을 지켜봐야 얼마나 오래 지키겠어? 앞으로 같은 업계에서 부대끼면서 같이 일할텐데, 우리 팀끼리 있을때만 쓰고 외부인들이랑 합동작전 할때는 순간이동 봉인하고 공격이능만 쓸거야? 그리고 인마, 소문이 나야 연봉협상도 유리하게 하고, 응? 나중에 혹시 이직할때도 더 높은 몸값을 받고 그러지.”
음, 어쩌면 윤기정이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애사심이 높다는건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그럼 방금 유제이 헌터즈에 보인 적의는 어디서 나온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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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제 집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다는 윤기정의 말은 물론 허세였지만, 따지고 보면 또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익숙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내 이능 유지력이 워낙에 좋았다.
3초마다 발출되는 에테르 블레이드는 15미터나 되는 길이로 뻗어나가며 나무덩굴이며 수풀이며 심지어 웅크리고 있던 작은 괴수들까지 가리지 않고 서걱서걱 잘라냈다.
윤기정은 그저 걸어가는 속도로 잔해를 치우기만 하면 되었다.
“고삐가 풀렸구만. 예전에 여기 원정 왔을때는 답답해서 어떻게 안 나서고 배겼냐?”
“에이, 그땐 확신이 없었죠. 다들 이능 유지력이라는게 한계가 있어서 정도 이상으로 많이 쓰면 방전되어 뻗는게 상식이라고들 하니까 당연히 그런줄 알았지. 제가 S급은 S급인데 위력을 가지고 S급을 받았지 유지력은 딱히 재측정을 받지 않았으니까요.”
“사실 처음 측정이 잘못 되었던거 아냐?”
뭐, 날 검사했던 노원 센터에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내서 좋을게 없으니 2차 각성에 가까운 급격한 성능 향상이라고 기록하긴 했지만 거기 센터장이 나 나가고 난 다음에 일선 직원들을 한차례 닦아세웠다는 소문이 있다.
물론 인터넷에 인증도 없이 올라온 하소연에 불과하니 진위 여부야 아무도 모르지만, 만약 진짜라면 실수없이 정확하게 측정하고도 괜히 들볶인 담당자에겐 좀 미안하게 된 셈이다.
위력 C급, 종합 D플러스 급을 받은 이능력자가 재측정에서 S급을 받은건 세계적으로도 드물고 이례적인 경우라서 잠깐 화제가 되었지만 당연히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업계 내부의 일이니까 관계자 혹은 이능력에 대해 관심이 많인 매니아들이나 주목할 일이지, 일반인들의 관심이 지속되기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능력자를 보는 시각은 복권당첨자 정도다.
헌터가 되어 고위험 고소득 직종에 종사할 수 있다는 진로의 선택권을 차치하고서라도 무병장수는 기본에 계열에 따라 유용한 초능력을 갖게 되니 이만저만한 메리트가 아니니까.
그러니 ‘개중에 알고보니 십억짜리 로또가 아니라 천억짜리 파워볼을 맞은 놈이 있다더라’라고 해봐야 그냥 와, 부럽다, 인생 역전이네, 하는 것 이상의 반응을 기대하긴 힘들지.
“아무렴 어때요. 어차피 제 이능력은 측정이 무의미할텐데. 어? 아이고, 왜 하필 거기서 잠을 자고 있니. 불쌍하게도. 쯧쯧쯧.”
“시체를 주물럭거리면서 할 소리는 아니지 않냐?”
“그럼 이 아까운걸 두고 가요? 불쌍한건 불쌍한거고 돈은 돈이지. 오, 마석 있다. 큭큭큭.”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얽힌 덩굴 틈에서 잠을 청하던 소형 괴수 하나가 비스듬하게 잘렸다.
피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사체 안에서 마석을 꺼낸다.
둘이서 온 길이니 부산물을 전부 실어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마석은 챙겨야지.
이 작은 보석 하나가 얼만데 이걸 그냥 버리고 간다는 말인가.
뭐, 일본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던 마석광산 채굴에 곧 미국과 한국 정부도 한 발을 걸치게 될테니 마석값은 곧 급락하겠지만, 그게 하루아침에 시장에 풀리진 않겠지.
생각이 있으면 당연히 이익 극대화를 위해 출하량을 조절할테니까.
아마 마석 시세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게 될 것이다.
“배낭 좀 열어주세요. 바깥쪽으로 지퍼 달린거 있죠? 그 안에 넣으면 돼요.”
페트병에 담긴 물을 약간 부어 피를 대강 씻어낸 마석을 건네니 받아서 배낭에 던져넣는다.
오는 길에 이런 식으로 무심코 죽인 괴수가 벌써 일곱이지만 마석이 나온건 이게 처음이다.
괴수의 덩치에 따라 마석이 응결될 확률도 다르니 소형 괴수를 일곱 잡아서 마석 하나를 얻었으면 사실 평소의 사냥 원정때와 비교해봐도 딱히 운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 일반적인 광석처럼 마구 캐낼 수 있는 마석광산의 가치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세 나라가 나누더라도 웬만한 금광이나 유전은 비교도 안 될걸.
“슬슬 마을 외곽에 다 온 것 같은데... 아, 저기 경계석이다.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 여기서부터는 지정된 길로 들어가자. 혹시 주변에 부비트랩같은걸 깔아놨을지도 모르잖냐.”
“네. 오, 초소도 보이네요. 어쩐지 조금 전부터 주변 정리가 깔끔하게 되어있더니. 특수군 한 개 여단이 통째로 주둔한다고 했었죠? 와, 그럼 우리나라 각성자 군인들 셋 중 하나는 이 숲 안에 있다는건데... 정부에서 마음을 단단히 먹긴 했나봐요. 게이트 기지에 주둔하는 수비군도 있어야 하고, 특수군 필요한 곳이 한두군데가 아닐텐데.”
“그럴만 하지. 너도 페어리들이 만든 아티팩트를 봤으면 알겠지만, 그게 일본 애들이 발견해서 채굴하고 있는 마석광산보다 못할게 없는 건이잖아. 아니지, 당장 돈은 좀 덜 될지 몰라도 장차 기술적 가치로 따지면 비교도 안 되지. 아무리 중시를 해도 과하지 않아.”
“그러고보니 아티팩트는 어떻게 될까요? 비밀병기로 꽁꽁 숨겨서야 의미가 없을테고.”
“뭐, 아직 교류 시작한지 얼마 안 됐으니까. 당장 나오는 물량은 우리 회사도 그렇고 정부도 그렇고 연구소에 가져다가 뜯어보기 바쁘지 않겠냐. 시장에 나오기까진 한참 기다려야지.”
차가 왕복으로 지나다닐 수 있을만한 넓이의 대로로 들어섰다.
입구에서 만났던 유제이 헌터즈의 원정대는 먼저 들어간건지 아직 오지 못한건지 보이지 않았는데, 윤기정이 말하기를 그 놈들은 아마 이제 막 초입을 지났을거라고 했다.
우리가 일직선으로 질러온데다 정글을 돌파하는것치곤 이동속도도 무척 빨랐다나.
“어떻게 할래? 계획대로 페어리 마을에서 하루 묵을까? 예정보다 좀 이르게 와서 마음만 먹으면 당일치기로 북부 유적지에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곧 어두워질텐데, 쓸데없이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요. 쉬고 내일 가죠. 하루 일찍 다녀와봐야 큰 의미도 없어요. 어차피 한 달 가까이 여기서 지낼건데. 지휘관하고 안면도 터 놔야하고... 우리 회사에서도 몇 팀이 들어와 있다면서요?”
“그러자 그럼. 지구에서 쉬는 것만큼 편할순 없겠지만.”
윤기정은 입맛을 다시며 품에서 사원 신분증과 오닉스 사장 명의로 된 공문을 꺼냈다.
조금 더 가까이 가니 초소에서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정지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차량이었으면 더 빨리 발견했을텐데, 맨 몸인데다 길도 없는 곳에서 불쑥 나타나니 알아차리는게 늦었던 모양이다.
군기가 빠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보초 서는 초병들 사정이 다 그렇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