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4화 〉1부 (64/110)



〈 64화 〉1부

모두들 이번 사태의 유이한 피해자인 윤기정의 회복에 기뻐했는데, 특히 형동생하며 지내던 2팀장은 거의 눈물까지 쏟아가며 다행이라고  번이나 중얼거렸다.
물론 기쁜건 기쁜거고 의혹은 의혹이지.
워낙 촉박하고 다급한 상황이라서 이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내가 새로이 치유이능을 얻게 될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건 감추기 힘들다.
이번에는 은신상태로 다녀왔지만 직전에 윤기정과 함께 모습을 보이며 공식적으로 방문을 했으니 유적지가 뭔가 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유추할 수 있을 것이고.
뜬금없이 괴수를 잡아야한다며 사냥에 합류했으니 여기서도 관계성을 느끼기에 충분하지.

“과연 그렇군. 그러니까 그 제단에 접촉하고서 새로운 이능을 각성했다는거지? 괴수를 죽여야 새로운 이능이 열리는거고. 가만, 그 제단은 사용자가 괴수를 얼마나 죽였는지를 어떻게 측정하는거지? 따라다니면서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결론은, 내가 윤기정과 공유했던 사항을 2팀에도 고스란히 털어놓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전생이라거나 게임, 골드 따위의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런건 말해봐야 의미도 없을 것이고, 객관적으로 내게 일어난 현상을 거의  진술했으니 사실 별로 다를 것도 없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2팀장의 옆에서 팀원들이 신이 나서 떠들어대며 분석을 주고받는다.

“왜, 흔히 살업이 쌓인다고들 표현하잖아요. 그런 기운을 알아보는거 아닐까요?”

“넌 인마, 소설 좀 그만 읽어. 그게 무슨 오컬트같은 소리냐?”

“어... 지금 우리가 바로 그 오컬트의 한가운데에 있는거 아니었어?”

“맞아.  행성의 고대문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영적인 쪽으로 발달을 했던 것 같아.”

“아니, 당연히 뭔가 트릭이 있겠지. 그냥 우리가 아직 파악하지 못했을뿐 나름대로의 과학기술일거라고. 이능에 대해서도 백년, 아니 오십년만 지나면 다 해석이 될거라잖아.”


“해석은 무슨, 어디까지나 과학자들 희망사항이지.”


“예산과 시간이 있으면 못 할게 없거든?”

“그건 대충 방향이라도 잡혀있을때의 얘기고. 아직 감도 제대로 못 잡고 있는데 백년 후라고 다르겠냐? 단서라도 있어야 거북이 발걸음이라도 꾸준히 연구를 하는거 아니겠어?”

윤기정이 외계 박테리아로 인한 질병은 물론이고 어깨의 영구적 부상까지 멀쩡하게 회복한 후 편안하게 잠을 자는동안 2팀장을 포함한 팀원들과 주둔 직원들 전원은 새로 각성한 이능력의 성능  한계 실험이라는 명목 하에 천사의 손길을 한번씩 받았다.
쿨다운 타임이 수호자의 맹약의 10분지 1인 3분밖에 안 되어서 시간도 얼마 안 걸렸지.
일단 한번 시술(?)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입을 모아 ‘이건 다른 치유 이능력자들의 치유하고는 비교 자체가  되는 대단한 이능력이다’라고 동의했다.
대체 아이템 툴팁에 적힌 ‘상태이상’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기에 이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내 이능력은 상태이상 효과가 없는 정상 상태를 ‘질병과 장애, 기타 어떤 외부 침입으로 인한 이상 없이 완전하게 기능하는 신체’라고 정의하는 모양이다.
선천적으로 기형인 평발이나 덧니같은건 그대로였지만 후천적으로 튀어나온 거북목이나 굽은 척추, 나빠진 눈 같은건 모조리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그야말로 기적이지.
정확히 기준점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지금까지 거의 삼십여 명에게 실험한 데이터를 보면 이건 힐러의 힐보다 모든 면에서 상위호환 관계에 있었다.
솔직히 게임에선 체력을 채워주는게 아니라 디버프만 해제하는 스킬이라서 상처치유에선 힐보다 못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이템 이름값을 하는건지 말 그대로 천사의 손길이 따로 없다.
2팀장이 문득 엄한 표정으로  부하들을 훑어보면서 단도리친다.


“어디가서 함부로  놀리지 마라. 다들  정도 눈치는 있지? 물론 상부에 보고는 할거고 연구소에서 분석을 하겠지만 거기서도 보안은 철저하게 유지할거야. 설령 정부에다 정보공유를 하게 되더라도 그 쪽이 우리보다 더 철저하면 철저했지 못하진 않을테니까, 말이 밖으로 새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의심받을거다. 회사기밀, 아니 국가기밀이나 다름없어.”

“예. 그런데 솔직히 말해봐야 믿을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내 말이. 힐러들마다 치유능력의 양상이 다양하다고는 하지만 최지호 씨의 능력같은 경우는 소문으로라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쯧, 결국 회사와 나라에다 숨겨둔 패를 적잖이 까게 되는건가.
상황이 상황이었으니 감수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역시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뭐, 내가 좋든 싫든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니까.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윤기정에게 털어놓았던 것처럼 유적지 끝의 제단이 새로운 이능력의 각성을 촉진하는 것 같다는 추측을 공유하고 여러 가지 편의를 보장받는게 좋겠다.
아직 아이템 창에는 여유가 있다.
총 여섯 칸이 전부 들어차 있기는 한데, 수호자의 맹약과 천사의 단지를 제외하면 상위아이템으로 조합할 일차 재료아이템들이니까 네 칸이나 비어있는거라고 봐야지.
그러니 괴수사냥과 유적지의 제단, 새로운 이능력의 연관성에 대해 설명하고 전폭적인 도움을 받아가며 풀스펙을 갖추는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는게 최선일 것이다.
나는 쏟아지는 호기심가득한 질문에 단지 애매모호하게 뭉뚱그려 대답했다.


“그냥 직감 비스무리한거예요. 사실 그동안 위쪽에다 보고 안 한 것도 확실한게 아니라서 그랬던겁니다.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도 없이 느낌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따로 보고하지 않고 휴가를 얻어 진짜인지 확인하러 왔다는 식의 스토리다.
새로운 이능력을 얻을만큼 충분한 양의 괴수를 잡았는지 어떤지는 유적지에 가서 제단에 접촉하기 전에는 미리 알 수 없다는 설명도 빠뜨리지 않았다.
윤기정이 사경을 헤매는 상황이라 속으로 기도하면서 북부유적으로 달려가 확인해봤더니 다행히도 치유능력을 새로 각성할 수 있었고 돌아와 그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
여기저기 구멍이 많이 뚫린 설명이지만 원래 이능력이라는게 그렇다.
이계개척의 역사와 함께 데이터가 쌓이고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는 있지만 각성자 개인의 경험과 직감, 숙련도 등에 기대는 부분이 더 많은 영역이니까.


“그럼 어떤 능력을 얻게 될지는 미리 알 수 있다는거네?”


“정확한건 아니고 대충 느낌이 옵니다. 그런데 그 제단이 새로운 이능력을 부여하는게 아닐수도 있어요. 유적에서 제단을 발견해 우연히 접촉하기 전에도  다중 능력자였거든요. 은신과 순간이동은 그냥 고블린들하고 싸우다가 자연스럽게 각성한거라서.”

“흠, 그럼 원래 다중 이능 잠재력을 가진 사람의 재능을 자극해서 일깨워 주는건가?”


그러니 이런 식으로 말하면 추후 유적지 제단에 접촉한 다른 각성자들이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저 내 말만 믿고서 ‘재능이 없어 그런가보다’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분간 여기저기서 귀찮게 굴긴 하겠지만 그거야 뭐 감수해야지.
역시  말을 들은 모두가 시간이 나는대로 바로 북부 유적에 가봐야겠다고 야단이다.
아예 회사 차원에서 소속 헌터들 모두에게 기회를 줘야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혹시 자신에게도 다중 능력의 재능이 잠재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넘실거린다.


“아무튼 행운이 겹쳐서 왔어. 아티팩트에 신비한 유적까지. 학자들이나 관심을 가질만한 일인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대박이었잖아? 3팀이 여기로 원정을 안 왔으면 어쩔뻔했어.”

“제 말이요. 다중능력 각성유도 수단을 독점하게 생겼는데.”

“응? 여기가 유일한건 아닌데요. 바로 직전에 홋카이도 게이트 남쪽의 협곡으로 국제의뢰를 받아서 원정나갔었잖아요.  때 분지 안 연구소로 잠입했다가 비슷한 유적을 발견했어요. 절벽에 뚫린 동굴 형태였는데, 똑같은 제단이 있던데요?”


내 말에 2팀장이 마시던 물을 입가로 주륵 흘리면서 눈을 크게 치켜뜨고 날 바라본다.
저마다 희망사항을 떠들어대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말을 멈추었다.
그제야 내 생각이 짧았다는걸 깨달았다.
저 제단이 다른 사람에겐 쓸모없으리란걸 짐작하니까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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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정부에서는 새롭게 발견된 이 생물병기에 대해 굉장히 심각하게 여겼다.
전염성이 낮다고는 해도 전례없이 치명적인 세균이니까.
지속력이 강한 이능력자라면 이능을 발현한채로 버티며 면역시스템이 작동해서 이겨낼 것을 기대라도 할 수 있지만 일반인의 입장에선 일단 감염되면 살아날 길이 없는 것이다.
아니지, 이능력자라도 사실상 힘들다고 봐야지.
B급 신체강화 능력자로 지속력에선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노련한 헌터인 윤기정도 수십여분의 간격으로 탈진할때까지 발현하면서 죽음을 유예하는게 고작이었잖아?
A급이나 S급이라면 의외로 가볍게 떨쳐낼지도 모르지만 그런 각성자가 몇이나 되겠어.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치사율 백퍼센트의 병이라니, 흉흉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북부유적과 제단에 관한 문제는 미루어 두기로 했나봐. 물론 거기 가있는 연구원들은 말 그대로 신이 나서 미쳐 날뛰겠지만 정부 차원에서 예산과 인력을 추가투자하는건 기약이 없을거래.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소독부터 끝낸다는 방침이니까.”


“군인 아저씨들 안 보이는거 보고 대충 짐작했어요. 그 아저씨들이 고생이 많겠네요.”

“형님, 지호가 새로 각성한 치유능력에 대해선 뭐라고 말 없습니까?”

“그것도 마찬가지. 보안등급 올리면서 추가방침 몇 가지 준수해달라고 협조공문 내려온 것 말고는 당장 신경쓸 여유가 없나보더라. 하지만 마음 속으로 준비는 하고 있는게 좋을걸? 정부차원에서나 후순위로 미룬거지 개개인으로 보면 또 이야기가 다르잖아.”

나는 2팀장의 조언을 어렵잖게 이해했다.
만병통치의 기적이라고 해도 그래봐야 각성자 개인의 이능력일 뿐이니까 국가적인 파급력 면에서는 생화학 테러의 위협과 비교 자체가 안 된다.
극단적으로 가정해 내가 병원에 취직해서 하루 열시간씩 꼬박 천사의 손길을 돌린다고 해도 치유를 받을  있는건 고작 하루에 이백명 남짓이고, 동선이나 시간효율같은걸 감안하면 당연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세자릿수나 되면 다행이지.
게다가 이건 내 이능지속력이 사실상 무한이라는 가정하에 나오는 계산이고 다른 사람들은 쿨타임 외에 어떤 소모값도 없다는 사실도 모르니까 추정치는 더욱 줄어든다.
물론 여전히 국가적으로 관리할 가치야 충분한 사안이지만 암만 그래도 치사율 백퍼센트의 생화학무기를 박멸하는게 먼저니 우선순위에선 밀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국가 차원에서의 얘기고.
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높은 사람들 중에 본인 혹은 가까운 사람이 불치병이나 난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눈이 안 뒤집히고 배기겠어?

“크흠. 마침 나도 부탁할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내 조카딸 중에 암투병을 하는 애가 하나 있거든. 다다음주에 수술이 잡혀있는데, 동생 내외가 아주 피가 말라서 반쪽이 되더라고.”


“아, 이런. 안타깝네요. 수술 잘 되길 바랍니다.”

“다행히 종양이 작고 진행이 빠르지 않아서 수술 성공률은 높다고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수술이란게 리스크가 있는건 사실이지. 그래서 말인데, 네 치유능력이 암에도 효과가 있는지 한번 시험해보는게 어때? 어렵게 생각할거 없이 그냥 문병가서 이능 한번 써주고 오면 되는거야. 잘 되면 좋은거고 아니면 예정대로 수술받으면 그만이고. 부담가질  없잖아.”


“나,나도 부탁하자. 우리 아버지가 지금 당뇨로 병원에 다니시는데...”

초기 암투병 중이라는 2팀장의 조카딸부터 시작해서 순식간에 대여섯개의 사연이 쏟아진다.
결핵에 당뇨에 관절염, 치질까지 아주 없는 병이 없다.
이래서야 문병 다니느라 남은 휴가기간을 다 쓰겠는걸.
딱히 의료법같은데 걸릴 건덕지는 없다.
이능의 근본부터 다르긴 하지만 힐러가 지인에게 무료로 이능을 써주는 일은 비일비재하니까.
의료계에서 일하는 힐러들은 응급상황이 아닌 한 헌터들의 의료행위를 규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같지만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규제하겠어?

“이 참에 직업을 바꿔도 되지 않아? 정보만 풀리면 웬만한 병원에서 백지수표를 내밀텐데. 중도퇴직 위약금 다 물어주겠다는 곳도 넘쳐날걸?”


“음, 그것 참 끌리는 얘기긴 한데... 그래도  헌터 하려구요.”

“그래, 헌터 그만두기엔 재능이 너무 아깝지. 너도 알겠지만 한번 헌터는 영원히 헌터거든. 괴수를 사냥하는 스릴과 짜릿함은 다른데 어디 가서도 느끼기 힘들지.”


“그거랑은 좀 다른 이유긴 한데, 아무튼 퇴사는 생각 않고 있습니다.”


만약 처음 센터에 가서 촉진제를 맞고 각성을 했을 때 치유능력을 각성했다면 당연히 위험한 헌터같은건 생각도 않고 의대에 특례입학할 수 있겠다며 좋아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좀 바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행성의 고대문명과 내 이능의 기반으로 추측되는 게임 사이에는 뭔가 관계가 있는 듯 한데, 그걸 한번 파헤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보로 미루어보면  유적들을 남긴 고대문명이 바로 전생에 하던 게임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인 것으로 보이거든.
문득 남부협곡에서 봤던 이종족, 그러니까 일본 애들이 오크라고 명명한  놈들의 외양이 내가 초심자때 즐겨쓰던 전사 캐릭터인 검투사와 무척 비슷했던 것이 떠오른다.
구체적인 종족이름까지 설정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봐도 인간은 아닌듯한 캐릭터는 검투사 외에도 많았는데, 어쩌면 생각보다  다양한 이종족들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인류는 이 행성의 십분지일도 제대로 개척하지 못했으니까 가능성은 무한하게 열려있지.
스스로도 내 안에 이런게 있었나 놀라울 정도의 모험심이 솟는다.


그나저나 스릴이라는 단어 하나로 멋대로 납득을 하다니, 2팀장도 참 어지간하구나.
이쪽 업계가 목숨걸고 괴수잡는 일인데다가 워낙 남초다보니 문화도 마초적이라서 저런 말을 태연하게 하며 자부심을 드러내는 아저씨들이 은근히 많이 보이곤 한다.
사무적인 마인드로 임하던 우리 3팀의 강경호 팀장이 오히려 드문 케이스인 셈이다.
음, 나도 헌터일 계속 하다보면 성격이 저렇게 호전적으로 변하게 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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