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5화 〉1부 (75/110)



〈 75화 〉1부

전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속에서 솟아난 쉴롭들은  수가 대여섯에 불과했고, 의외로 움직임도 굼떴다.
나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에테르 필드를 아끼면서도 수 분만에 놈들을 모두 처리할  있었는데, 블레이드로 방어막만 깨면 나머지는 60구경의 철갑탄이 해결했다.
요란한 전투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더 튀어나오는 놈들이 없는걸 보면 이게 전부인 것 같은데?
타타탕, 움직임이 멎은 쉴롭의 대가리에 확인사살을 하면서 윤기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놈들, 이상하게 비실거리는데?”

“바로 옆에 호수가 있잖아요. 물을 싫어하는 놈들이니 뭔가 영향이 있나보죠. 팀장님, 일단 이 놈들이 나온 굴이 있긴 한데... 설마 여기 들어가시겠다는 소린 아니죠?”

“들어갈건데요. 저번엔 너무 좁아서 못 들어갔지만 여긴 그보다 훨씬 넓잖아요?”


경계를 하며 들어가기도 충분하고 최악의 경우 안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도 가능한 크기다.
내 말을 들은 강승호가 울상을 지으면서 엄살을 부린다.
나는 놈들이 기어나온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이고 내려다보았다.
철벅, 쉴롭의 갑각외피 부스러기가 섞인 체액이 단단한 신발 밑창 아래서 짓뭉개졌다.


“전투가 아니라 동굴이 무너져 생매장당하는게 최악 아닙니까? 그건 대비가 안 되잖아요.”

“차 안에 지지대 있으니까 그걸로 받쳐가며 들어가면 됩니다.”


“지지대요?  지지대가... 설마 막대형 바리케이드요? 그거 원래 그런 용도로 쓰라고 있는게 아닙니다. 이름부터가 바리케이드잖아요, 바리케이드.”


애써 설득하려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광량이 높은 플래시를 아래쪽으로 비추어 보았다.
의외로 깊이 자체는 별로 깊지 않다.
대충 사, 오미터 정도의 높이니까 조금씩 붙잡고 내려가다가 중간에 뛰어내려도 되겠네.
바닥과 벽은 촉촉하게 습기를 머금고 있었는데, 아마 저 옆의 호수 때문이겠지.
쉴롭이 힘을 못 쓰고 느릿느릿했던 이유도 아마 이 습기에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확실히 강승호의 말대로 위험하긴 하겠는걸.
자칫 이 습기찬 흙이 좌우에서 무너져내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꼼짝없이 생매장이다.

“좋아요, 들어가진 않고, 일단 내려가서 수색만 해봅시다. 다들 신체강화 능력자 아녜요?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박차고 뛰어나올 수 있잖아요, 이 정도 높이면.”


“안으로  기어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위험이 높진 않죠.”

“나도 그런거 지시할 생각은 없습니다.”

바로 옆이 호수인데 저 각도로 뚫린 굴 안으로 들어가봐야 지하수밖에 더 나오겠나.
 확답에 안심한 강승호가 플래시를 받아들고 안전줄을 결속하더니 훌쩍 아래로 뛰어내린다.
그는 완만한 각도로 비스듬하게 뚫린  안으로 플래시를 비춰보고 주변을 살폈다.
윤기정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난감한 목소리로 묻는다.

“어쩌지? 전문인력없이 우리끼리 뭔가 더 조사하기엔 여건이 마땅치 않은데.”

“기지에 잠수장비가 있지 않겠어요? 바로 뒤에 강이 흐르는데, 안전사고에 대비한 구조용으로라도 몇 세트쯤은 갖춰 놓았을 법도 하잖아요. 돌아가서 찾아봅시다.”

아마도 저 호수 아래 어딘가에 파괴된 억제기의 흔적이 있으리라.
게임 내에서는 한번 파괴된 억제기를 복구하여 강화된 몬스터나 진군로 병력을 도로 약화하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는 억제기에 딸린 배경설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식 사이트에 게재된  지루한 설정집과 재미없는 단편소설을 빠짐없이 읽은건 아니지만 게임 로딩화면에서 소개되는 몇 줄의 설정만으로도 가설을 세우긴 충분했다.
충분한 양의 마석이 있다면 의외로 어렵잖게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석이라면 굳이 추가로 공수받을 필요도 없이 그동안 사냥해서 모은 양도 상당하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탐사하지 않으면 소득이 없겠어요.”

“알았어요. 무리하지 않는게 좋겠죠. 이만 나오세요.”

쿠웅,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고  미터나 뛰어오른 강승호가 가볍게 착지했다.
기지로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와야겠네.
지도에 표시를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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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우리는 다시 한번 어제 발견한 호수까지 달려왔다.
마석을 있는대로 전부 챙기라는 지시에 세 사람은 의문을 감추지 못했는데, 나는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정보를 공유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대뜸 억제기가 어떻고 복구가 어떻고 하는 말을 늘어놓을 수는 없으니 핑계는 유적이었다.
요정의  북부의 유적과 홋카이도 게이트기지 남부에 있는 협곡의 유적.
새로운 형태의 유적지와 마석의 관계는  두 유적지에 있는 제단에 접촉했을  직감적으로 알아낸 불확실한 정보라는게 내 설명이었다.
당연히 명쾌하게 납득을 하지는 못한 눈치였지만 큰 상관은 없다.
어차피 외계행성의 유적지에 대해서는 밝혀진게 전혀 없는데 내가 제단에 접촉했을 때 비언어적인 형태로 어떤 파편적인 정보를 전송받았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반박을 할  있겠어?

기지에는 추측대로 잠수장비가 구비되어 있었는데, 모두 최신식이었다.
원래 헌터들이 쓰는 물건치고 가격대가 만만한게 없다.
특히 실용장비의 경우 옛날 용병들이 자기 무기와 갑옷에 들어가는 돈을 아끼지 않듯 가성비보다 절대적인 성능을 우선시하는 것이 일관적인 분위기였다.
잠수장비는 성능도 성능이지만 무엇보다도 편의성이 놀라우리만치 진보된 제품이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이걸 쓸 헌터들  자기 이능과 전투기법을 갈고 닦기도 바쁜 와중에 수중침투나 잠수교육같은걸 심도있게 받을 여유가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초보자도 간단한 설명서만 읽고서 쓸 수 있도록 만드는게 당연하다.
물론 진짜로 이걸 입고 물 속에 들어가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느냐는건 전혀 다른 문제지만, 안전줄을  연결하고 긴장을 놓지 않은채로 들어가면 어떻게든 될거다.


“뭔가 이상하면 바로 위쪽으로 튀어나갈겁니다. 그러니  잘 보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물이 워낙 맑아서 얕은 곳은 바닥까지 보이니 크게 위험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지하에 있던 쉴롭의 둥지에 지하수가 터져서 만들어진 호수겠죠. 수중 괴수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어쩌면 익사체들이 가라앉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윽... 그런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완전밀폐형이니 맨살에 시체 썩은 물이 닿을 일은 없지만 그래도 찝찝하잖아.
스쿠버 다이빙은 전현생 통틀어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데,  경험을 이계에서 하네.
온 몸을 감싼 잠수복과 단단히 결속된 산소통, 마스크는 제법 믿음직스러웠는데, 질기고 튼튼한 수준을 넘어서 무슨 소재로 만들었는지 일정 수준의 방검성능까지 있단다.


멋들어지게 다이빙을 하고 싶지만 마땅한 발판이 없어 그저 호숫가에서부터 걸어들어갔다.
무릎까지 차오르던 물이 금세 머리맡까지 올라오는가 싶더니 이내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나도 어려서부터 수영장이나 해수욕장에 가면 물개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맥주병 소리는 듣지 않던 사람이라 금세 적응하여 더 깊은 곳으로 헤치고 들어갔다.
아무래도 제대로 배운 사람들에 비해 어설프고 느린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리 넓은 호수가 아닌데다 시간여유도 촉박하지 않게 있으니 별 문제는 안 되겠구나 싶다.
허리춤의 고리에 걸린 생명줄이 돌돌 풀려나간다.


밖에서 볼 때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가장자리에 비해 중심부분은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막상 들어와보니 밖에서 내리쬐는 빛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일이 바닥을 짚어가며 수색하는 것이 아니라 시야가 닿는 넓은 영역을 한번에 둘러보며 목표하는 형상을 찾아나갈  있었다.


“오, 저거같은데? 와, 이렇게 운이 좋나.”


등에 맨 산소통에서 내가 내뿜은 이산화탄소가 방울져서 보글보글 올라가는 와중에 내 혼잣말이 외부와 분리된 폐쇄형 마스크 안쪽에 부딪혀 웅웅 울린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고 또 이렇게 바로 찾을줄은 몰랐다.
최악의 경우 수중동굴이 있어 잔뜩 긴장한채로 들어가서 수색할 각오까지 했는데 말이야.
가까이 접근한 나는 확신을 굳혔다.
이거, 내가 아는 그 억제기가 확실해.
모니터를 통해 인게임으로 보던 모양과는 좀 다르게 생겼지만 저 특징적인 모서리 장식과 깨져나간 은빛의 뚜껑은 도무지 자연적인 구조물이라고는 믿기 힘든 모양새다.
이 안에 마석을 들이붓고, 액화된 에너지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다시 봉인을 해주면 된다.
꼭 저 형태 그대로 맞춰서 복구할 필요는 없겠지?
설정상 억제기의 효과는 안에 있는 마법인형과 그걸 구동할 마력에서 나오는거니까.
 게임에 마석같은건 나오지 않으니까 괴수를 잡고 나오는 마석이 마력을 채워줄 수 있는지는 확신할  없지만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나는 바닥을 박차고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오, 팀장님 나왔네.  발견한거라도 있어요? 아직 산소는 넉넉할텐데.”


“야,  산소  떨어질때까지 계속 일하겠냐. 중간중간 나와서 쉬어가며 해야지.”

세 사람이 달려와서 줄을 잡고 끌어당긴다.
수영을 하기도 귀찮은데다 내가 암만 물장구를 쳐봐야 신체강화능력자 세 명이서 줄을 끌어당기는 속도에 비하면 별다른 영향력도 없을테니 그저 편하게 몸을 맡겼다.
물살을 빠르게 가르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마스크를 벗고 산소통을 잠근 후 나는 저 아래에서 내가 본 것을 설명했다.
다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이다.

“그러니까, 진짜로 그 유적지에서 전달받은 정보가 맞다는거네요?”

“그렇죠. 괴수의 방어막을 억제하는 억제기가  속에 있었던겁니다. 어떤 이유로든, 추측하기론 쉴롭들이 굴을 파고 영역을 넓히다가 지하수맥을 건드린 것 같은데, 아무튼 그 충격으로 억제기가 깨져서 안쪽에 있던 에너지가 흘러나와버린거죠.”


“이것 참, 안 믿을수도 없고...”

“잠깐만요. 그럼 최지호 팀장은 이 땅에 존재하는 고대유적에 담긴 정보를 읽어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이건 굉장한 일입니다. 이능관리부에서 광분하겠어요.”


나는 잠시 이 정보를 숨겨달라고 부탁할까 하다가 어차피 먹히지 않을 것 같아 포기했다.
저 사람 군인이잖아.
이런 중대차한 정보를 제멋대로 숨길 사람 같으면 애초에 군인이 아니라 헌터를 했겠지.
그리고 치유이능만 해도 한바탕 뒤집어 졌을텐데 가치가  올라가봐야 티가 나기나 할까.


“자, 다들 잠수복 입고 산소통 멥시다. 혹시 수중용접은 안 되나?”

“그런 도구가 어딨습니까? 일단 철판이랑 나사는 챙겨왔는데, 그거 금속제인가요? 그럼  박힐텐데. 억지로 메꾸려다가 더 크게 부서질수도 있고...”

“챙길 수 있는건  챙겨서 내려갑시다. 호수바닥에 단단히 고정된거라서 가지고 올라올수는 없고, 애초에 위치를 옮길  있는 유물도 아닐거예요. 아쉬운대로 임시조치라도 해놓고 나중에 전문인력들 끌고 와서 단단하게 보강공사를 하는 수밖에.”

“한 명은 위에 남아서 경계를 해야합니다. 제가 남죠.”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럼  소령님만 믿겠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곧바로 줄을 통해 신호를 주십시오. 받자마자 바로 올라오겠습니다.”


김영찬 소령을 밖에 남겨두고 우리 세 명은 방수천과 철판, 못, 망치, 케이블타이 등의 자질구레한 도구를 챙겨들고 호수로 들어갔다.
날 따라오다가 억제기를 발견한 강승호와 윤기정은  눈에 봐도 인공적인 느낌이 풀풀 나는 억제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면서 여기저기 만지작대기 바쁘다.
안쪽에 플래시를 비추니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동그란 구체가 들어있는게 보인다.
음... 설마 ‘마법인형’이라는게 저걸 말하는건가?
아무리 봐도 그냥 금속으로 된 공이지 인형이라고 할만한게 못 되는데.
아,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나는 방수주머니를 열어 마석을 꺼냈다.
그걸 부서진 억제기의 틈새로 던져넣으니 두 사람도 가까이 와서 흥미진진하게 쳐다본다.
강승호가 눈을 크게 뜨고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소리친다.

“와! 저거 봐요. 마석이 원래 저렇게 녹는거였나?”

물 속에서 폐쇄된 마스크 안으로 말하는거라 내게 들리진 않았지만 대충 이런 말이 아닐까.
놀랍게도 마석은 천천히 흐물흐물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액체가 되어서는 주변의 물과 뒤섞이지만 그 신비한 색채에는 변함이 없다.
동시에 마법인형, 그러니까 문양이 새겨진 금속구가 은은하게 빛을 뿜는다.
우리는 한동안 그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때 윤기정이 내 등을 치면서 급히 손짓한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석이 녹은 액체는 물에 섞여 억제기 바깥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 여기 호수 안이었지 참.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깨어져나간 억제기의 틈새와 우리가 가져온 방수천 및 철판 등을 번갈아 보면서 머리를 굴렸다.
이걸로 바깥과 안을 완전히 차단할  있을까?
강승호 역시 이거 좀 애매하다는 듯한 얼굴로 고민을 하다가 철판을 틈새에 끼워넣는다.
가만있자.
여길 이렇게 끼우고, 방수천을 겹쳐서 교대로 쌓으면 아쉬운대로 임시조치는 될 것도 같은데.
대충 각이 보인다 싶었던 나는 마석을 틈새에 모조리 쏟아 부어넣었다.
그리고 나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두 명도 이번에는 마석이 액화되는 신비로운 광경을 구경할 새도 없이 곧바로 작업에 들어간다.
모로 뉘여서 걸쳐놓은 철판을 중간 기둥으로 삼아서 못을 박아 방수천을 엮고 바닥에서 주워온 돌로 모서리를 팽팽하게 눌러놓으니 일단 액화된 마석들이 바깥으로 흘러나가지는 않는 것 같다.
설령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새더라도 마석의 양이 얼만데, 당분간은 버텨주겠지.
호수에 물고기 한 마리 보이지 않는게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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