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1부
나는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누가 봐도 켕기는 구석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게이트 관리국?”
“맞군요? 세상에. 감사인사를 드려야겠네요. 네바다 게이트에 관련된 테러음모를 제보해 주셨다면서요? 정말 고결한 선택이에요. 쉽지 않으셨을텐데. 명령 복종의무보다 인류의 보편적 도덕을 더 우위에 두시는거죠? 모든 사람이 당신같다면 세상에 전쟁범죄는 없을거예요.”
“저기, 밀러 양. 혹시 기자라는건 위장신분이고 비밀요원이나 뭐 그런겁니까?”
최소한의 경계조차 사라진 채 호의가 가득 담긴 눈빛을 뿜어내는건 좋은데,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관리국 내부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알기 힘든 정보였다.
햄버거집을 털러 들어왔다가 만난 기자가 하필 이렇게 깊게 관계되어 있는 사람이라니.
내겐 당혹스러운걸 넘어서 황당하기까지한 일이다.
“베티라고 불러주세요. 전 거짓말한게 하나도 없어요. 다만 게이트 관리국에 친한 친구가 하나 있을 뿐이에요. 그가 함부로 기사로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들려준 이야기죠.”
연방 게이트 관리국, 정말 괜찮은건가?
직원들에게 보안의식이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데?
호텔에서 뉴스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살펴본 바로는 일단 언론에 숨기기로 방침을 정한 것 같은데 그런 주제에 이렇게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외부로 마구 흘려대다니.
험악하게 일그러진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베티는 조심스럽게 나를 달랜다.
“물론 당신을 봤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하지 않을거예요. 미스터 초이는 어떻게 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은인이잖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끄응. 믿겠습니다. 아, 저도 그냥 지호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얼음을 담지 않아 약간 미지근해진 콜라를 한모금 마시고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보았다.
메이저 언론에 입사하는게 목표인 프리랜서 기자라며?
그런 사람이 자그마치 연방 게이트 관리국 안에 정보원을 심어두고 있다는게 참 말이 안 되긴 하는데... 그렇다고 아주 있을 수 없는 일은 또 아니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관리국에서 건물을 봉쇄하고 특수군까지 불러서 수색했지만 결국 찾지 못한 침입자가 자기 눈 앞에 있는데 마치 영웅이라도 보는 것처럼 저렇게 눈을 반짝이는건 말이 되나?
아, 말하는걸 보니 진술서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입수했나본데 그럼 충분히 그럴 수도 있...나?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투명화나 공간계열 이능력자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헌터가 관리국에 침투해서 진술서를 남겨놓고 갔는데, 거기에 한국 게이트 남부에서 벌어진 사고에 대한 진실과 똑같은 참사를 네바다 게이트기지에 불러일으키려는 음모가 적혀있었다는게 전부예요. 제이크는 제게 숨김없이 아는걸 전부 말한 것 같은데, 별로 높은 직위가 아니라서 그 이상은 모르더라구요.”
“그 정도면 관리국에서 아는걸 전부 다 안다고 봐야겠는데...?”
“제이크는 내 하이스쿨 동창이에요. 그는 내게 숨기는게 없죠.”
귀에 익은 이름이 나와서 잠깐 생각한 끝에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냈다.
내가 일을 마친 직후에 상사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오던 청년의 이름이 제이크라고 했어.
젊은 나이로 보였지만 그래도 관리국 내의 직위가 꽤나 높은 것 같던데, 그런 사람이 외부인에게 미주알고주알 조직 내 정보를 가져다 바친단 말인가?
나는 베티의 곡선 선명한 몸매와 아름다운 얼굴을 힐끔거리면서 애써 납득했다.
내 표정을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베티는 손사래를 치면서 제 풀에 항변한다.
“그냥 친구 사이의 잡담이었을 뿐이에요. 내가 먼저 직장 일은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꼴이잖아요? 프롬에서 제이크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난 분명한 표현으로 딱 잘라 거절했다구요. 그 후로 우린 좋은 친구로 잘 지내고 있죠.”
“누가 뭐랍니까? 묻지도 않은 연애사를 굳이...”
“연애사가 아니라니까요?”
제이크라는 관리국 친구가 심각하게 보안의식이 없는건지 아니면 이 기자 아가씨가 강철도 녹이는 팜므파탈인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사정은 이해했다.
거 참, 토끼처럼 큼지막한 눈과 청록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 마치 강아지처럼 순박해보이는 눈매와 입가, 화장을 잘 한건지 딱 보기 좋을 정도로 홍조를 띤 볼과 웃을때마다 보일 듯 말 듯 살짝 들어갔다 나오는 보조개까지, 그야말로 매력적인 여자인건 확실하지만, 그 정도인가?
무엇보다 남자를 이용해가면서 제 욕심을 차릴만한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하긴, 꽃뱀사건 용의자들을 보면 흔히 생각하는 독랄한 여우 스타일의 미녀보다 언뜻 순박해보이는 겉모습을 지닌 여자들이 더 많다는 소리를 어디서 듣긴 들었지.
속으로 상대에게 무척이나 실례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찌 되었든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군요. 맞습니다. 제가 오늘 낮에 관리국 안에 들어가서 자필 진술서를 제출하고 왔지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대로 접수가 된 것 같군요.”
“아, 그거 알아요? 게이트 관리국 건물 전체를 봉쇄하고 샅샅이 전수조사를 했다고 해요.”
“없어진건 연필 한 자루 종이 한 장도 없을겁니다.”
“킥킥. 그래도 게이트 관리국은 연방 기관 중에서도 워낙에 중요하고 민감한 일들을 많이 다루는 곳이니까 마음편히 넘어갈수가 없는거예요. 이해해야죠.”
내가 불쾌하다는 듯 대꾸하니 그녀는 소리죽여 웃으면서 달래는 어조로 말을 받는다.
그녀의 정보에 의하면 진술서의 내용은 즉시 백악관으로 보고되었다고 한다.
연방 게이트 관리국은 조직법상 국토안보부의 산하 기관이었지만 사실상 대통령 직속의 독립기관으로 분리되는 수순을 밟고 있었는데, 일례로 국장이 국토안보부의 보고체계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게 되어있었다.
보고를 받은 백악관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만간 한국 정부와 오닉스 헌터즈에 평지풍파가 들이닥치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처럼 보인다.
진술이 워낙 구체적이라 신빙성이야 있겠지만 아직 물증이 없으니 대놓고 제재는 못 하려나?
“지호, 이제부터 어떻게 할건가요? 갈 곳은 있어요?”
“예?”
“없다면 내가 소개해줄수도 있어요. 텔레포터는 헌터업계에선 별 게 아닐지 몰라도 다양한 업종에서 환영받죠. 고액연봉을 받으며 부유하게 살 수 있을거예요. 아, 혹시 증인보호 프로그램이라고 알아요? 아마 제이크를 통해서 요청할 수 있을텐데.”
“아니, 잠깐만요. 난 한국의 헌텁니다. 앞으로도 그럴거구요. 내일 아침 비행기로 귀국할겁니다. 오갈 곳 없이 버려진 길고양이가 아니라구요.”
대체 무슨 오해를 하면 저런 제안을 저렇게 호의 가득한 얼굴로 할 수 있는거야?
아무래도 날 양심이 시키는대로 조직을 배반할 굳은 각오를 하고 사악한 악의 조직을 탈출한 내부고발자 정도로 보는 모양인데, 내가 미쳤다고 이 좋은 직장을 버리겠어?
설령 오닉스 헌터즈에서 기밀이 새어나가 일이 틀어진 것을 알게 되더라도 이렇다할 증거조차 없이 S급 이능력자인 내게 책임을 물어 숙청하거나 하지는 못 할걸.
내 항변에 멈칫한 베티는 애매하게 웃었다.
“아, 미안해요. 내가 너무 앞서나갔네요. 음, 하지만 개인적으로 별로 좋은 생각같지는 않아요. 정부에서 조치를 하면 한국에서도 정보가 샌걸 금세 알아챌거라구요.”
“그래도 제가 했다는건 모를겁니다. 비행기에 숨어서 밀항을 했거든요. 뭐, 의심이야 하겠지만 어쩌겠어요? 증거가 없는데.”
“너무 순진하네요. 이런 사안에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리라고 믿어요?”
“사안 가려가면서 작동하는겁니까 그게?”
물론 나는 우리 나라 정부의 원칙을 믿는게 아니라 나 스스로의 가치를 믿는거지만, 내가 S급의, 그것도 복합 능력자라는 것을 모르는 베티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다.
겁도 없이 동맹국을 테러할 생각을 한 놈들의 양심을 믿는다니, 그야 넌센스지.
그리고 솔직히 난 이게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도 잘 확신이 안 간다.
무슨 중동 탈레반도 아니고 대한민국 정부 일각에서 자그마치 미국을 테러한다는 발상이 나왔으니 현실감이 없는데, 아마 중간에 어떤 또라이가 있어 제 멋대로 짠 계획이 아닐까?
그 또라이가 꽤나 그럴듯한 직위에 있어서 우리 사장도 혹한거고 말이야.
베티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 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아까보다도 더욱 호의적이고 존경심마저 느껴지는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휴우, 지호의 선택을 존중할게요. 한국에 돌아갈때도 비행기 짐칸에 숨어들어 탈건가요?”
“그래야겠죠.”
“필요한게 있으면 뭐든 말해요. 아, 당장 쓸 현금이 부족한가요?”
“아니아니, 됐습니다. 말했잖아요, 골탕먹이려고 들어온거지 진짜 돈을 훔치려던건... 크흠.”
계산대 안의 지폐뭉치를 싹 긁어서 주머니에 넣다 걸린 입장에서 할만한 변명은 아니군.
나는 두 모금가량 남은 콜라를 단숨에 꿀꺽꿀꺽 들이키고 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베티가 따라 일어서서 사무실 문을 직접 열어준다.
한 밤중에 도둑질을 하다가 들켰는데 오히려 환송을 받으며 나서게 된 셈이니 좀 우습다.
“오늘은 실례가 참 많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신고하지 않아줘서 고맙구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직원이 먼저 잘못을 한건데요 뭘. 저야말로 고맙죠. 당신은 네바다 게이트 기지에서 일하는 수많은 미국인들을 살린겁니다. 미국이 이렇게 연달아 공격을 받다니, 사람들이 알면 전쟁이라도 부르짖을 일이에요.”
“연달아?”
“아, 모르셨어요? 뉴스에서 종일 떠들어대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 비행기로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밀반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어요. 말하자면 생물학 테러죠. 제이크의 말에 의하면, 오늘 적발된 그 바이러스가 다름아닌 외계기원이라고 해요. 당연히 아직 백신도 없고 통제도 불가능한거죠. 그걸 운반하던 사람이 마약으로 착각하고 자수를 하지 않았다면 유출이 되어 엄청난 사태가 생겼을지도 몰라요. 천만 다행이지 않아요?”
공항에서 시내로 오는 택시 안에서 뉴스를 듣긴 들었지만 외계 바이러스라니.
문득 요정의 숲에 중국 특수군이 남기고 간 기지를 발견했던 일이 떠오른다.
그 기지에 비축되어있던 세균병기들은 전부 폐기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남겨둔게 있었나?
그나저나 대체 무슨 생각들인거야.
진짜로 혈맹인 미국과 한 판 어떻게 벌여볼 생각이라도 하는건가? 아니, 뜬금없이 왜?
차라리 중국이 다시금 벌어지는 격차에 조급함이 들어 일을 벌였다면 믿겠네.
아, 진짜 그럴지도 모르겠다.
대명상사가 한국의 무역회사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균테러 모의까지 꼭 한국발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니까.
어쩌면 전택영 사장의 제안도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그가 내게 정부와도 다 이야기가 된 사안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알 게 뭐야?
순진하게 그 말을 의심도 없이 턱 믿어버린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베티, 당신 생각에 이번 일의 파장이 어디까지 갈 것 같아요?”
“뭐가요? 세균테러? 아니면 네바다 기지의 억제기?”
“둘 다요. 시기가 공교롭잖아요.”
“글쎄요. 일단 한미관계가 급격히 악화하는건 기정사실이고... 하지만 의외로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은 아닐지도 몰라요. 지호의 말대로 시기도 공교롭고 무엇보다 음모의 냄새가 짙게 나잖아요? 연방정부는 멍청하지 않아요. 단순하게 반응하는 기계가 아니라구요.”
뭐, 확실히 눈에 보이는게 전부는 아닌 것 같군.
국가단위의 음모에 끼어들게 된 내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에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의외로 간단하고 명쾌한 일이잖아?
나는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을 걱정하는걸 그만두기로 하고 새로운 관심사로 생각을 돌린다.
“잘 풀렸으면 좋겠네요. 그나저나 베티, 혹시 세균을 밀반입하려던 범인들에 대해 아는게 있나요? 아무래도 나도 관련이 된 이야기같아서 마음편히 넘기기 어려운데.”
“뭐라구요?”
“두 명이죠? 대명상사. 그 중 젊은 쪽이 자수를 했고.”
“맞아요. 어떻게 알았죠? 용의자들의 신상에 대해선 언론에도 나가지 않은걸로 아는데.”
“그걸 발견한게 바로 저니까요. 비행기 화물칸에 숨어서 밀항했다는건 아까 말했죠? 처음에는 마약을 밀매하는건줄 알았어요. 젊은 쪽은 밀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기에 공항에 착륙하자마자 신고를 하라고 충고했죠. 잘못하면 덤터기를 쓰고 이역만리 미국땅에서 옥살이를 할지도 모른다고 겁을 줬어요.”
“오...”
“그저 회사에서 바이어에게 보내는 인형 샘플을 옮기는줄 알고 한 일이니 잠깐 조사만 받다가 별 탈없이 나올거라고 생각하고 한 충고였는데, 일이 이렇게 되면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않을거 아녜요? 그럼 신고를 권한 내가 너무 미안해지는겁니다.”
“확실히 그렇죠. 마약밀매과 생물학적 테러는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니까요. 지호도 알겠지만 우리 나라는 뭐라고 할까, 테러에 대해서는 트라우마가 좀 있거든요. 테러문제에 있어서는 법적 절차나 피의자 보호같은 인도적 조치가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겠지. 그럴거라고 생각했어.
이성욱 대리라고 했었나, 그 아저씨는 단지 취직할 회사를 잘못 골라서 재수없게 휘말린 것 뿐인데 테러리스트로서 심문을 받도록 두는건 역시 마음에 걸렸다.
잠깐 고민하던 베티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는지 배시시 웃으면서 손바닥을 짝 부딪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