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9화 〉1부 (89/110)



〈 89화 〉1부

나는 플로리다 해상게이트를 넘어 고원기지에 도착해서야 미국이 새로 교류하기 시작한 이종족의 이름을 피엠이라고 붙였다는 사실을 들었다.
파자마 멘의 약자라고 하는데, 과연 사진을 보니 가죽으로 통이 넓은 옷을 만들어 입고 후드까지 눌러쓴 모습이 마치 잠옷을 입은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렇게 장난스럽게 명명해도 될까 싶지만... 뭐, 사실 미국만 그러는 것도 아니긴 하지.
오크에 고블린에 페어리에, 아주 판타지 월드가 되어가고 있는 세계에 이제 와서 괴수가죽 잠옷을 뒤집어쓴 파자마 종족이 있다고 해도 새삼 더 이상할건 없지 않겠는가.

“이것 참, 알고는 있었지만 신기한 감각이네요.”

바다 위에 떠 있는 바지선 바로 옆의 허공에 둥실 떠서 해상 구조물로 둘러싸인 게이트를 통과하니 짭쪼름한 바닷바람 대신 건조한 고원의 바람이 뺨에 부딪힌다.
울릉도 게이트와 홋카이도 게이트를 넘을때도 안팎의 공기가 다르다는건 느꼈지만 이렇게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는 또 처음이라 꽤나 생소하다.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들 그런 말을 합니다. 사실 저도 수없이 드나들었지만 아직도 가끔은 현실감이 멀어지는 느낌을 받곤 해요. 따지고보면 게이트라는게 참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거지 그야말로 신비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걸 나만큼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람도 아마 없을걸.
전생의 관점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이게 무슨 삼류 SF소설이냐고 물을 일이니까.
고원 기지로 날 안내한건 이글 팀 소속의 중견 헌터였다.
일단 사기업은 사기업인데 연방정부의 무제한적인 지원을 받으며 전 세계에서 유망한 헌터들을 흡수하는 헌터회사인 이글 팀은 사실상의 국영기업이나 다름없다고 들었다.
당장 공식 원정의 칠십퍼센트였나, 팔십퍼센트 가까이가 정부 의뢰라고 했으니까.


“환경이 별로 좋진 않습니다만 편히 쉬십시오. 기지 내의 편의설비는  카드를 보여주고 뭐든 무료로 이용하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내일 봅시다.”


막사까지 오면서 본 바에 의하면 웬만한 민간도시의 생활구역 못지않게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었으니 환경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은 그저 말치레임에 분명하다.
아니면 그만큼 미국이 일선 헌터들에게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거나.

“권 차장이 주기로  돈과는 별개로 미국에서도 뭔가 사례를 하겠지?”


명색이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부유한 나라인데, 이런 일에 통이 작지는 않을 것이다.
보장 백 오십억 원에 플러스 알파.
이건 원정 인센티브를 듬뿍 받아 통장이 두둑해졌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당장 내일 은퇴를 하고 남은 평생을 호화롭게 즐기며 살아도 충분한 금액.
물론 이계탐사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은퇴같은건 어림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 구석이 든든해지는건 사실이다.
챙겨온 전투복과 장비를 막사 한 쪽에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으며 생각했다.
외형묘사를 볼 때 내가 아는 종족은 아니고, 신비로운 비석이라.
역시 아이템을 구매할  썼던 제단과 비슷한, 이 행성 고대문명이 남긴 유적지겠지?

“기대되는군.”

설레는 마음으로 부푼 가슴을 달래며 간단히 세수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자기 전에 천사의 포옹을 사용해 피로와 잔부상을 씻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요즘은 이거 없으면 찝찝하고 몸이 영 찌뿌드하단 말이야.
나쁜건 아니지만 마치 중독이 되는  같아 가끔은 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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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시간 정도를 쉬고서 우리는 고원으로 진출한 피엠들의 거주지로 향했다.
아직 금속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기술력에다 바위를 내리쳐 흔적을 남기는 힘자랑으로 서열을 정한다고 해서 동굴이나 움집속에서 사는 원시인들을 상상했는데, 의외로 나무를 가공해서 집을 짓고 돌로 5미터가 좀  되는 성벽까지 쌓아놓은 마을이 우리를 반겼다.

“금속제련을 못 하는 문명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와, 쇠 없이 이게 되나?”


“기술력이라는게 꼭 함께 성장하는건 아니거든요. 지구에서도 석기시대의 문명이 상당한 수준의 천문학을 알고 있었다던가, 거대 피라미드를 지었다던가 하는 사례는 많아요.”


“신기하네요.”

“고원기지의 헌터들 중에는 먹을거리나 생필품을 주고 피엠족 특유의 무술을 배우려는 사람도 있는걸로 압니다. 전사계급의 특권이라서 아직 전수받은건 체조 수준이지만요.”

“무술이요? 이종족들한테 전투법을 배운다는건가요?”“글쎄요, 전투기술이라기보다는 취미생활의 영역에 가깝죠. 신기하고 흥미롭잖습니까.”


“아, 그렇군요.”

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겠지.
인간과 신체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은 영장류인데다 냉병기로 무장한 전사계급이 있으니 나름대로의 무술이 발전했겠지만 그게 실용적인 전투기법인가 하면 완전히 별개다.
지구에서도 전통무술은 어디까지나 옛 선조들의 문화를 복원하고 체험한다는데 수련의 의미가 있는거지, 그걸 실제로 싸움에 써먹으려고 배우는 얼간이는 없잖아.
헌터 팀에서 탱커를 도맡는 현대 실더의 방패술만 해도 중세 유럽의 검술서를 사료로 했다는 소리가 흥미위주의 찌라시로 잠깐 돌았지만 몇 가지 실용적인 기술들을 따왔을뿐 뼈대는 엄연히 스포츠생리학과 과학적 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합리적 기술체계였다.
탱커뿐만 아니라 공격이능의 사정거리가 짧아 백병전에 대비해야하는 근접 공격조의 경우에도 수련하는건 권투의 스텝을 기반으로 한 회피술에다 군용무술 및 종합격투기에서 이것저것 따와 만든 대 괴수용 전투술이었다.
차라리 어느 정도의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있는 격투기 업계라면 모를까, 문자 그대로 자기 목숨이 걸려있는 실전인데 무슨 중국권법이니 일본 고류무술이니 하는걸 배워 응용하겠다는 간덩이 크고 쇼맨십 넘치는 헌터가 나오지 않는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피엠이란 종족의 역사가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그들의 비전 무술이 현대 헌터 전투술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열등하거나 잘 쳐줘야 비슷하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와, 거인족의 마을에  것 같네요.”

“키며 덩치가 거의 우리 두 배니까요. 실제로 보면 위압감이 어마어마하죠. 바깥의 성벽도 저들의 기준에선 사실 야트막한 담벼락 정돕니다. 최초 발견자가 네이밍을  때 피엠과 자이언트 중에서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네요. 큭큭큭.”

아무리 들어도 파자마 맨보다는 자이언트가 훨씬  장난스러워 보이는데 말이지.
마을 입구에서 키가 삼미터를 훌쩍 넘기는 거구의 전사 다섯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체비율이나 생김새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데, 그 비율 그대로 크기만 두  가까이 불어난데다 하나같이 근육질이라 언뜻 보기에도 무척이나 강해보인다.


“안녕하시오. 아메리카의 친구들. 우리 마을에  것을 환영하오.”

“어?”


“전사의 의식에 도전하고 싶다는 의사는 이미 전해들었소. 당신은 저번에 봤던 사람이니 이쪽이 새로운 도전자인가보군. 반갑소. 아메리카 부족의 명예를 위해 최선을 다해보시오.”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악센트가 기묘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유창하다고 해줄만한 영어였다.
발음도 어설픈 것과 별개로 구분이 선명해서 나도 어렵잖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쓰는 단어수준하며, 어쩌면 나보다 더 영어를  하는 것 같은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안내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귓속말을 한다.


“괴수가 아니라 이종족이라고 했잖습니까. 놀라우리만치 영리한 사람들입니다. 기술수준이 낮다고 해서 문명 구성원들이 멍청한건 아니에요.”

“아무리 똑똑해도 그렇지, 교류한지 얼마나 됐다고...”

페어리에 이어 피엠이란 새로운 이종족이 발견되고 교류를 시작했다고 하면 며칠이 뭐야, 주단위로 신문 1면은 맡아놓을 소식인데 그런 뉴스를  기억은 없으니까 당연히 민간에 공개하지 않고 정보를 통제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교류한지 아무리 길게 잡아도 수개월 단위일텐데...
현생에서 6년 이상, 전생까지 합하면 십수년씩 배운 나만큼이나 영어를  하는걸 보니  거대한 근육질의 전사들이 왠지 대단한 인텔리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아메리카 부족이라니,  미국인으로 아네요?”


“그냥 적당히 넘어가 주세요. 어차피 이 고원지대는 인기가 없는 플로리다 해상게이트와 연결되어 있는데다 최근에는 민간인력을 통제까지 하고 있으니 외국인이 피엠들과 접촉할 일은 없을테니까요. 최지호 헌터는 어디까지나 특별케이습니다.”

“그것  영광이네요. 그렇게 꽁꽁 숨길 이유가 있나요? 한국은 페어리들의 존재를 숨김없이 공개하고 교류로 얻는 아티팩트도 시장에 조금씩 풀고 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연방정부의 결정입니다.”


위에서 정한 일인데 뭐 어쩌겠느냐는건데, 미국도 공무원은 어쩔수 없구만.
피엠 전사들은 자기들끼리 잠깐 수군대더니 우리를 마을 안으로 안내했다.
걷는동안 설명하는 바에 의하면 신성한 비석은 부족이 성지로 삼는 동굴 안에 있다고 한다.
고원에 있는  마을은 최근에 새로 진출해 세운 것이니 당연히  동굴은 저들의 본거지에 있을 것인데, 이렇게 걸어서 얼마나 더 가야할지 언뜻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안내인이 차를 끌고오지 않은데다 군말없이 따라가고 있는걸 보면 그리 멀진 않겠지?


“다 왔소.”


“어? 벌써? 아니, 잠깐만요. 아직 마을도 안 벗어났는데?”

“마을위치를 아무렇게나 정한게 아니라오. 신성한 동굴은 일직선이 아니라서 복잡하게 길이 여럿 뚫려있는데,  중 한 갈래로 이어진 입구가 바로 마을 중앙에 있지. 바로 여기요.”


“최지호 헌터, 여기 미리 준비한게 있습니다. 답답하면 다른건 안 입어도 상관없지만 적어도 안전모는 쓰시는게 좋을겁니다. 가끔 작은 자갈같은게 떨어지거든요.”


대체 영어를 가르친게 누구인지 몰라도 귀에  영국식 억양을 구사하는 피엠 전사의 설명에 이어 안내인이 동굴 입구에 쌓은 안전복과 신발, 플라스틱 안전모를 건넨다.
아예 입구에다 갖다놓은걸 보니 다들 들락거릴 때 착용을 하고 다니나본데?
안전화를 신고 플라스틱 헬멧을 쓰니 영락없는 공사장 패션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종족의 신비한 비처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었는데, 이젠 뭔가 일을 하러 가는 듯한 분위기라서 적잖이 김이 샌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모양의 차체가 나를 반긴다.
무척 튼튼해보이는 사각형의 험비 짚차다.
저게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면 동굴 안이 꽤 넓은가보네.
그러고보니  쪽에는 아마도 가솔린인듯한 드럼통이 수십여 통이나 쌓여있다.
차량과 별개로 한쪽에는 아예 강철로 폭이 2미터쯤 되는 선로를 깔고 있었는데,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열차가 배치되어 있지는 않았다.
자기네가 신성시하는 동굴 안에다 저런 공사를 허용해주다니, 의외로 개방적인 종족인걸?
외부인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던가,  그런 금기도 없는건가.


“아메리카에서 제공한 이 기물들에 대해서는 무척 만족하고 있소. 장로들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칭찬하더군. 그런데 대체 그 넓은 땅을 뭐에 쓰려고 그렇게 사들이는거요? 우리야 판 땅에서도 사냥을 허용해준다니 밑질 것 없지만, 궁금해서 그러오.”

“값진 것들이 많이 나는 땅이니까요.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조심히 가시오. 내려가면 다른 형제들이 맞아줄거요.”

와, 다른 전사들은 말을 거의 하지 않는데도  아저씨는 유독 영어수준이 대단하네.
쓰는 단어 수준하며 문법하며 위화감이 전혀 없다.
고개를 치켜들고 봐야 하는 키 3미터짜리 거인이 아니었으면 그냥 영어권 사람인줄 알았겠네.
안내인이 운전대를 잡았다.

“정부에서 땅을 샀나봐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헐값에 샀겠죠. 저 친구들 사는거 보면 공산품  가지만 대량으로 가져다 줘도 못 살게 없을겁니다. 문명의  꿀을 제대로 맛보여주고 있어요. 하하하.”

“교류가 활성화되면 용병으로도 쓸 수 있겠네요. 저 덩치면 힘도 장난 아닐텐데. 저희 팀에도 신체강화 능력자들이 있지만 탱커는 많을수록 좋잖아요.”

“뭐, 나중엔 그러지 말란 법도 없겠죠. 아, 도착한 것 같습니다.”

비스듬히 경사진 길을 얼마쯤 내려가니 낮은 천장이 훌쩍 올라가며 시야가 탁 트인다.
 행성의 자연환경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이만한 크기에 이만한 복잡성을 지닌 동굴이 자연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건가.
그야 차가 다닐  있도록 길을 닦은건 피엠들과 미국이 한거겠지만, 규모도 좀 말이 안 돼.
내가 천장과 벽을 둘러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차에서 내린 안내인은 보초를 서고 있던 또 다른 피엠 전사들에게 다가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말을 걸었다.
아, 하긴 저들만 영어를 익힌게 아니라 우리 쪽에서도 피엠 부족의 언어를 익혔겠군.

“최지호 헌터, 이쪽으로 오세요. 비석이 있는 공동에서 시험을 주관할 감독관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장로   명이 직접 나섰다네요. 아무래도 우리가 본국에서 전사를 데려왔다니까 호기심이 드나봐요. 솔직히 그동안 시도한 헌터들은, 음, 별로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진 못 했거든요. 방어막 때문에 처음부터 완전히 불공평한 내기긴 했지만.”


그래,  덩치 큰 거인 놈들이 우리를 신기한걸 잔뜩 만들어 가져오는 부유하고 영리하지만 나약한 종족으로 보고 있다는 소리는 여기 오기 전에도 들었지.
놀라우리만치 신사적인 태도였지만 한편으로는 미묘하게 우월감을 가지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던가.
아무래도 문명수준이 낮을수록 장인계급보다는 전사계급의 위상이 높을테니 말이다.

뭐, 그 놈의 비석이 얼마나 단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첫 이능각성 이래 시간에 비례하여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는 내 에테르 블레이드의 절삭력 앞에서는 그저 종잇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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