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0화 〉1부 (90/110)



〈 90화 〉1부

감독관을 맡은게 부족의 장로라고 하더니, 과연 차림새부터 뭔가 달랐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건 매한가지였지만 푸른 색에 자줏빛까지 은은하게 감도는 염료로 화려하게 물들인데다 윗부분에 해골이 달린 커다란 지팡이까지.
크기를 보니 저 해골은 피엠의 유골인 것 같은데...
부족들끼리 전쟁이 있는건가, 아니면 그냥 장례문화가 달라 죽은 동족들의 뼈인건가.


“환영한답니다. 바로 시험을 치르겠냐는데요?”


우리를 동굴 입구까지 안내했던 전사와 달리 장로는 아직 영어를 배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보통 나이 많은 사람들이 새로 뭘 배우긴 까다롭지.
그래도 자기네 성지를 개방하고 신성하게 여기는 의식을 외부인에게 허용한데다 심지어 충분한 기준점을 넘겨 통과한다면 전사계급까지 부여한다고 하잖아?
그 정도면 고대나 중세 기준으로도 굉장히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태도인데 하물며 이제  석기시대를 지나는 이들의 수준에선 최고 수준의 호의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국가가 형성되지 않고 부족단위라서 더욱 개방적인건가?

“더 시간 끌 필요 있나요. 빨리 하고 갑시다. 저도  양반들한테 물어볼게 좀 있어서.”


“예? 물어볼거라뇨?”


“아, 모르셨습니까? 전 최근 조금씩 흔적이 드러나고 있는 이 행성의 고대 문명에 대해 관심이 아주 많아요. 예의 ‘그 사건’ 이후로도 오닉스를 떠나지 않기로 한 이유도 탐험을 위한 독립팀 운영을 약속받았기 때문이죠.”


“오, 요정의 숲에서 발견했다는 그 유적지 말이군요. 저도 들어봤습니다.”

안내인과 잡담을 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가는 우리를 장로가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본다.
나는 뒤늦게  시선을 눈치채고 헛기침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저들에겐 중요한 의식이니 조금 더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와, 생각했던 것보다  큰데?  문양은 무슨 뜻인가요?”


“글쎄요.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게 아닐까요? 저기 흠집이 많이 난 곳이 보이죠? 2미터 정도 되는 높이에요. 거기다가 공격을 가하시면 됩니다. 얕보지 마십시오. 방어막이 생각 이상으로 강력해서 웬만한 공격으론 방어막조차 뚫지 못할겁니다.”

“못 뚫으면  뚫는거죠. 최선을 다하겠다고만 했지 결과를 장담한 적은 없잖아요?”

은근슬쩍 내게 책임감을 지우려는 안내인의 수작에  끊어 답하고 비석을 올려다보았다.
방 안의 중앙에는 집 한 채는 들어갈법한 크기의 기둥이 하나 있었고  기둥 주위를 높이 5미터 가량의 직사각형 비석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걸 찬찬히 둘러보고 있자니 나까지 거리감각과 크기감각이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장로가 가리킨 비석은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었는데, 살펴보니 시험에 사용된 흔적이 있는 비석보다 말끔한 비석이 훨씬 더 많았다.
이들이 이런 방식으로 전사계급을 선발한 역사가 그리 길지 않거나, 아니면 저 비석유물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부서진 부분을 수복하는 기능이 달려있는게 분명하다.

“좋아, 그럼 얼마나 단단한지 한번 볼까? 지금 바로 치면 되죠?”


나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 에테르 블레이드를 장로가 가리킨 위치를 향해 날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안내인이 반사적으로  붙들고 뒤로 몸을 날린다.
신체강화능력자다운 빠른 움직임이었다.


변명하자면 내가 아무 생각도 대책도 없이 다짜고짜 칼질을 한건 아니었다.
아무리 시험용 샌드백이니 마음껏 치라고 허가를 했어도 어쨌든 저들이 종교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성지에 있는 유물, 그 이름도 신성한 비석이라잖아.
정말로 두 쪽을 냈다간 곤란해질지도 모른다는건 당연히 추측할 수 있지.
애초에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왜 조준하기 전에 뒤로 물러나 거리를 조절했겠는가!

문제는, 내 거리감각이 오차를 감안했던 것보다도 더 정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야 기계처럼 정교한 조절까진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동안 수없이 사용한 스킬이니 감으로 재어도 어느 정도는 맞아떨어질줄 알았는데.

“아,아니, 이게 대체...”

“어? 새,생각보다 좀 더 길었네.”


그 결과 이런 일이 벌어졌다.
반으로 잘린 비석이 힘없이 미끄러져 내리더니, 이내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동굴 안에서 메아리치며 울린다.
창백하게 질린 안내인이 날 내려놓고 숨을 몰아쉰다.
뭐, 사실 그가 반사적으로 날 뒤로 대피시키지 않았더라도  돌에 깔릴 위치는 아니었지.
해골이 달린 지팡이로 비석을 가리키던 장로는 경악한 얼굴로 입을 딱 벌린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고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던 피엠전사들 중에는 그만 주저앉은 놈도 있었다.

“저기, 통역 좀 해주세요. 맹세코 고의는 아니었다고 빨리 전해주십쇼.”

“예? 아니, 그,그게...”


“아 말 한 마디로 끝날 상황 아닌건 나도 대충 알겠는데, 그래도 제 잘못은 아니잖습니까. 분명히 최대 출력으로 공격을 날리라고 했으니까요.”


방 안의 모두가 공황상태에 빠져있는데  홀로 현실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책임 면피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자니  답답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이 안내인은 미국에서 정부 소속의 노련한 헌터라고 붙여줬는데 지금 뭐가 중요한지 모르나.
잘못하면 지금껏 잘 쌓아온  거인 종족들과의 관계가 파탄날 수도 있는 일이라고.
나보다 당신이 더 급해야 하는거 아닌가?


“그,그렇죠. 분명히 저쪽에서도 그런 말을 했으니까. 예, 지금 잘 설명을...”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그는 다급하게 장로를 향해 달려가 피엠의 언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몇 마디를 채 떼기도 전에 피엠들은 행동에 나섰다.
장로라는 양반은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흘리고, 전사들은 하나같이 날 잡아먹을듯한 기세로 달려들어 무기를 휘두르...지는 않고 무릎을 꿇네?
아니,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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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흥분한 피엠들이 간신히 진정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당황한 와중에도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가만보니까 일단 내게 뭔가 위해를 가하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아.
설마 무릎을 꿇는게 추진력을 위함도 아닐거고, 솔직히  친구들이  작정하고 죽이려 들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덤벼들어 사람 몸뚱이만한 도끼를 내리치는걸로 충분할거다.
나도 아직 보여주지 않은 스킬이 여럿 있으니 얌전히 앉아서 당하진 않겠지만.


“그래서,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랍니까? 얘들 왜 이래요?”


“쉿. 말씀 좀 조심해 주세요. 혹시 어설프게나마 영어를 알아들을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끄응, 그러니까 그게...”


장로와 한참동안 이야기를 주고받던 안내인은 무척 난감한 표정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전달하는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머리를 긁적였다.


피엠들이 신성시하는 이 동굴은, 사실 먼 옛날 전쟁에서 활약하던 선조 전사들이 잠든 무덤에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고원에서 저지대까지 산맥을 뚫고 이어진 지하동굴이지만 그 시절엔 평지였다고.
그런 지질학적인 변화가 일어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던 나는 ‘아무튼 엄청 오랜 옛날’이라는 결론만 내고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 행성에선 어떨지 모르지만 지구에선 수만년 단위로도 부족할걸.

“그럼 저 비석들은 그 선조를 기리는 묘비인가보네요? 것 참, 저 친구들은 선조의 묘비를 도끼로 내리찍으면서 힘자랑을 하는 전통이 있는 셈인데...”

문화상대주의야 나도 알지만 우리 감각으론 영락없는 패륜인데 그거.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는 내게 안내인이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으면서 설명을 계속한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닌  같습니다. 저들의 신화에 의하면 저 비석들은 단순한 묘비가 아니라 선조들을 봉인하고 있는 봉인구라고 해요.”

“봉인구요? 아, 그러고보니 비석들 배치가 좀 기묘하긴 하네요.”


“아주 오래전 피엠들의 전설적인 지도자가 전사의식에서 비석 하나를 부수고 선조를 봉인에서 구출하는데 성공했다는 전설도 같이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증거라곤 전혀 없어서 별로 신빙성있는 얘긴 아닙니다만, 어쨌든 저들이 그렇게 믿는다는게 중요하죠.”

피엠들이 처음 고원지대에서 미국과 접촉했을 때, 그들은 기지와 도로를 건설하는 공병대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가장 먼저 폭파용 화약의 제공부터 요청했다고 한다.
폭약으로 이 비석들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구에서 가져온 폭약들은 방어막에 가로막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고.

“전설대로라면 저 잔해에서 뭐라도 나와야 하는거 아닙니까?”


“저들도 그렇게 여기고 기다린겁니다. 장로가 이야기하기로는 그동안 봉인이 더 강해져서 비석들을 전부 부숴야 선조들이 한꺼번에 오랜 잠에서 깨어날거라는군요.”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논리인데...”


옛날에 조상 중에 한 명이 비석 하나 부수고 한 명 구했다며?
그럼 지금 똑같이 하나 두 쪽 냈으니까  명이 튀어나와야 하는거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전형적인 합리화다.
몇날 며칠에 종말이 올거라고 했다가 세상이 멀쩡하면 ‘사실 잘못 해석한거고, 몇  뒤의 언제다’라고 수정을 한다던가, ‘우리가 기도해서 종말이 늦춰졌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야.

“다 부쉈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면 그땐 어쩝니까? 혹시 우리한테 원망을 돌릴수도...”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광신도들한테 논리같은건 안 통하는거 몰라요? 휴우, 일단 부수라니까 부수긴 부수겠습니다만, 플랜 비를 생각해 두시는게 좋을겁니다.”


“자,잠깐만요. 그럼 일을 좀 뒤로 미루죠. 방금의 공격 때문에 지쳐서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얼마든지 기다려  것 같은데요.”


“그거 좋은 생각이... 아, 잠깐만요.”

맞장구를 치려던 나는 문득 위화감을 자각하고 멈칫,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중앙에 굵직한 기둥 하나를 두고 둘러싸며 늘어선 문양이 새겨진 직사각기둥 모양의 비석들.
내가 이걸 어디서 봤더라...
아, 그래, 이제 보니 로딩화면에서 몇  스쳐지나갔던 그림 중 하나야.
그냥 신성한 비석, 그러니까  수 없는 유적지라고 여기고 봤을때와 달리 ‘봉인구’라는 말을 들으니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 살살 짚히는 구석이 있는 것도 같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지금 바로 작업 들어갈겁니다.”

“예? 아니, 갑자기 왜...”


“뭐 대단한거 했다고 지칩니까 지치긴. 그런 우는 소리를 했다간  놈들이 절 얕잡아볼거 아녜요? 자존심 상해서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그게 지금...”


말이나 되는 소리냐, 라고 말하려다가 꾹 눌러 참는 안내인을 외면했다.
나도 알아, 말도 안 되는 소리인거.
한숨을 푹 내쉰 안내인이 장로에게 가서 뭐라고 말하니 우렁찬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어디서 봤는지 간신히 기억해냈지.
초창기 플레이어블 캐릭터  하나인 에스메랄다의 배경설정에서 봤어.
워낙에 성능이  좋아 인기가 없던 초기 캐릭터 중 하나였다.

“거인이라는 설정은  봤던 것 같은데... 크기는 따로 설정이 안 돼있었나보지 뭐.”

고대의 전쟁과 최후의 결사대, 종족의 숙적과 동귀어진, 희생적인 봉인...
솔직히 별로 잘 쓴 스토리도 아니고 색다른 설정도 아니지만, 일단은 안심이다.
에스메랄다는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인게임 보이스로 유명한데, 마찬가지로 성격도 상냥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여전사다.
그런 성격의 캐릭터치고는 배경 스토리가 너무 살벌한 감이 있지만.
아무튼 지금 봉인을 풀고 깨운다고 해도 우리에게, 자기 후손들에게, 그리고 인간이라는 새로운 이웃에게 뭔가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비석들을 전부 쪼개준다면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리고 일어나지 않든 절대로 책임을 묻지 않겠답니다. 음, 전부 믿을수는 없지만, 이들이 이성적이기를 바라죠.”

“문제없을겁니다.”


전설 속의 선조들이 시간을 건너뛰어 깨어나면 이성을 유지하기는 좀 힘들지 않을까.
나는 기둥과 비석들을 보면서 에테르 필드를 펼칠 공간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대강의 견적이 나오자마자 에테르 필드를 전개했다.
이동속도 버프를 활용해 빠르게 움직이며 비석당 두 발에서 많으면 대여섯발까지의 블레이드를 난사하니 여러조각으로 변해 우르르 무너져내리는 돌덩이와 함께 가슴도 뻥 뚫린다.
앗 하는 사이에 벌써 마지막 비석이다.
에테르 필드의 지속시간 6초는 아직 2초 가량이나 남아있었다.
마지막으로 블레이드를 면에 가깝게 뿜어내니 금이 가는 듯 하던 최후의 비석이  그대로 자갈무더기가 되어 내게 쏟아져 내리지만, 다음 순간 나는 뒤쪽으로 쉬프트했다.
좋아, 완벽해.
그냥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쐈어도  분 이내에 가능했겠지만 그건 임팩트가 너무 약해.
피엠들에게 확실한 인상을 주는게 앞으로 협조를 얻어내기 편할테니까.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돌아보는데, 모두들 엉뚱하게  쪽을 바라보고 있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니 천장을 떠받치고 있던 굵은 중앙기둥에서 은은하게 푸른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게 보였다.
그래,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저거 로딩화면에서 여러번 봤다니까.
동굴 안이 워낙 어둡고 전체적으로 크기가 커서 위화감이 심해 바로 못 알아본거지.


“그,그게 진짜였어? 이게 무슨 판타지 영화도 아니고...”

“아까 말했잖습니까, 이 행성, 완전 판타지 월드라고. 큭큭큭.”

가만있자, 에스메랄다는 셀프 공격력 버프와 피해경감 액티브를 가진 브루저였지?
내가 그녀를 봉인에서 풀어준 은인인 셈인데...
팀에 합류해서 일해달라고 하면 들어줄까?
게임에 등장했던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만나는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기대감에 차서 점점 더 강해지는 빛무리를 응시했다.


“어...?”

뭐야, 저 놈들은.
왜 나오라는 미녀 전사는  나오고 웬 시커먼 사내놈들만 줄줄이 나오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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