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일상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송지혜의 메세지가 있었다.
-야 김석주
-민석이한테 얘기 들었어
-갑자기 휴학하기로 했다면서?
-섭섭하다
-왜 연락이 안돼?
송지혜, 나와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 알게된 여자인 친구였다.
같은 대학교에 고등학교 동창이 둘이나 있으니까, 무슨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 같다면서 민석이만큼은 아니지만 자주 접점을 갖기는 했다.
보통은 가끔 과제를 도와주고 커피를 받아낼뿐인 관계였지만.
그래도 과가 달라서 자주 만날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교양이나 부전공이 많이 겹치는 바람에 꽤나 많이 마주쳤었던 친구다.
"그러고보니, 얘한텐 말을 안했었구나."
메세지가 불가능했던 일주일, 지혜는 내가 휴학한지 모르고 있었던 듯하다.
일주일동안 얼굴을 안 비췄다보니, 이상을 느꼈는지 민석이한테 내 얘기를 물었던 모양이다.
나는 '별일 없었어 그냥 휴학하는거야'하고 답장을 보내고서는, 침대에 엎어졌다.
한여름 밤 특유의 어수선한 소음탓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으니까.
피곤해ㅡ.
-뚜르르르르….
전화까지, 뭐야.
나는 무심코 그것을 받아버렸다.
"여보세요?"
-아, 죄송합니다. 전화를 잘못 걸었나봐요.
"어?"
뚝.
잠깐의 정적, 그리고 나는 내 실수를 알아채고 말았다.
"아, 깜빡했다."
내 목소리, 완전히 비뀌었잖아.
그러니 나인걸 못 알아채는게 당연할텐데.
-뚜르르르르르….
역시나 곧바로 다시 연락이 왔다.
나는 거의 패닉상태가 되면서, 피곤이 싹 달아나는걸 느꼈다.
"어, 어쩌지?"
다시 전화를 받고, 나를 김석주라고 설명해볼까?
아니, 웬 이상한 소리나 하는 미친년이라고 상상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갑자기 내가 여자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되었다고 해봐?
아니, 이것도 말이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두뇌를 풀가동해 핑계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모, 모르겠다…."
나는, 다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 전화번호, 김석주 전화번호 아닌가요?
쏘아붙이는 송지혜의 말투에, 나는…….
"아, 제가 휴대폰을 주워서요. 하하…."
이딴 소리나 했다.
-아, 아아……! 죄송합니다. 휴대폰을 주우셨다고요?
지혜의 목소리가 확연히 풀어지면서, 내게 호의가 묻어나오는 듯한 억양으로 변했다.
"네,네에……."
흠, 내가 휴대폰 도둑인줄 알았던 모양이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혹시, 폰 주인분이랑은 통화 했나요?
"ㄴ,네. 돌려 드린다고 했어요~ 하하."
-다행이네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뚝.
"하, 하아…."
나는 한숨을 쉬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 당장은, 내가 남자였단걸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얼마나 이런 상태가 지속될 지 모르는 일이고, 곧 되돌아간다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면 되겠지.
언제 되돌아갈 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뭔가, 이제 내 몸에 대한걸 연구하고 있으니 곧 알게되지 않으려나?
이윽고 메세지가 도착했다.
-야
-휴대폰 잃어버렸었니?
나는 그에 답장했다.
--맞아
--이건 PC로 보내는거야
-그럼 진작 그렇게 말할것이지
-괜히 딴사람한테 전화했잖아
-그래도 주운사람이 착한사람이라 다행이네
그 휴대폰, 사실은 이미 주인손에 들려있다만.
"한 고비는 넘긴건가…."
아니었다.
-우리 내일 만나기로 한거
-혹시 안 잊었나 해서 연락했어
-9시 괜찮지?
"어?"
우리가 만나기로 했다고?
나는 곰곰히 생각해봤다.
지혜랑 단둘이 만날만한 일은 없었을 텐ㄷ…….
아, 생각해보니 있었던 것도 같다.
그건 바야흐로 몇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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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삼인방은 평소처럼 학식을 먹고 카페에 죽치고 앉았다.
나는 과제를 하러, 지혜는 그냥 커피를 마시러, 도민석은 그냥 따라온거다.
잠깐 눈치를 보던 도민석이 입을 연다.
"나, 학점이 딸려서 듣는 교양 있잖아."
학점이 딸려서 듣는거라, 아마……. 역사 뭐시기였던걸로 기억한다.
뭐, 내가 듣는 과목도 아니니까 별로 관심도 없다.
"그게 왜."
"박물관 같은데 가서, 감상문을 써내랜다. 사진 찍어오라던데."
"음, 그거 귀찮겠네."
나는 그런 식으로 대충 대답하면서 노트북으로 과제를 작업하던중이었다.
옆에서 그냥 식후 커피를 마시던 지혜가 문득 말했다.
"아, 그 과제 나도 있어. 이왕 이렇게된거, 다 같이 갈까?"
지혜도 역사를 듣는가보네, 하긴. 얘는 나랑 달리 인문계열이니까, 그런게 전공필수에 있을법도 하다.
"귀찮은데-."
내가 칭얼거리자, 도민석이 내게 말했었다.
"그래서 내가 몇주나 일찍 말하는거야, 일주일 남았을때 말하면 안 한다고 할거 뻔히 아니까."
"하."
이녀석, 나를 너무 잘 알잖아.
"알았어, 대신, 밥은 네가 사는걸로 하면 갈게."
"당……연하지…!"
도민석은 살짝 굳은 표정으로 지혜를 바라보았다.
지혜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싱긋 웃었고, 그 시선에 도민석은 고개를 툭 떨구고 말았다.
뭐, 쟤 밥까지 사줘야해서 그러는걸까?
"난 그날 소고기 먹어야겠다."
"에바야."
내 농담에 도민석이 질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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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식으로 정해진 약속이, 지금 내 발목을 잡았다.
-취소할까
이 꼴로 나갈 수 있을리가 없다.
--왜?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그냥
대답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럼 왜?
-귀찮아서
귀찮다기보단, 어려운 일이었다.
--장난해?
--(토끼가 흘겨보는 이모티콘)
--(토끼가 협박하는 이모티콘)
--안나오면 찾아간다
"뭐?"
나는 그 단어에 잠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안나오면 찾아간다'라니!?
지혜가 우리집에 찾아온다면, 나는……. 없는척을 해야하나?
하지만 그것도 한두번이다. 계속 그렇게 피해다니면, 송지혜는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할까.
과제한번 도와주기 귀찮다고 잠적한 나쁜놈이 되는거 아니야, 그것도 내 입으로 도와주겠다고 해 놓고선.
그랬다간 절교당할지도 모른다.
몇 안되는 친구를 이런 식으로 잃고싶지는 않았다.
-아 ㅈㅅ
-나갈게
-9시라고? ㅇㅋ
그래서 일단은 그냥 질러버리고 말았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동아줄을 잡는 오누이 심정으로 외친다.
"세찬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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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찬은 정말 천만다행히도,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내가 잡은건 썩은 동아줄이 아니었어!
"내가 네 연기를 하면 일단은 될거다."
"내 연기를 한다고? 어떻게?"
당장 어디 나가서, 한세찬 사진이랑 내 사진을 번갈아보여주면 닮은곳이라곤 하나도 없네요 하는 소리 듣기 딱좋을 정도로 우린 생김새가 달랐다.
그런데 어떻게 내 연기를 한단 말인가?
답은 간단했다.
"인식간섭의 도구."
사냥꾼의 도구였다.
한세찬은 아까 아빠가 두고간 검은 상자속에서, 조그만 브로치를 꺼내들었다.
"이 도구로, 나를 '김석주'라고 인식되도록 할 수 있어."
나는 뭔가 이상해서 물었다.
"그걸 내가 쓰면 안돼?"
그럼 그냥 내가 나가면 되잖아.
네가 연기따위를 할 필요 없이.
"너는 성별…. 아니, 종족부터 다르잖아. 흡혈귀 여자가, 인간 남성으로 인식을 개찬하려면, 뇌를 상식레벨로 갈아치우는 암시가 필요해."
"근데 나는 인식이 바뀐게 아니라 실제로 변했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한세찬이 나를 향해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고.
"그럼, 지금 네가 내 연기를 해봐."
"어떻게?"
"아무렇게나? 이제부터 넌 김석주인거야."
"……."
세찬은 뭔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내가 송지혜라고 쳐. 인사해봐. 안녕!"
"안녕."
"안녕…. 이 뭐야, 너무 힘이 없잖아. 다시해."
"너 원래 그랬어."
"아냐, 안 그랬어. 내 안녕,은 이런 느낌이었다고. 안녕."
"지랄한다."
그렇게 몇번의 옥신각신끝에, 안녕을 마스터 할 수 있게된 한세찬.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안녕을 말했다.
"안녕!"
"……."
세찬은 내 인사를 받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세찬은 밖에서 한참 있다가 돌아왔다.
"왜 이렇게 밖에 오래있다가 들어와?"
"…담배 땡겼다."
"…"
녀석이 현타가 온거같다.
내 연기가 쉽지 않은 모양.
"토요일이 약속이라고?"
"어."
"시발, 그냥 너도 따라와라. 그 편이 낫겠군."
"ㅡ어?"
나를 데려가려고?
뭐, 상관은 없는데….
오히려 그 편이 나도 더 안심되기는 하지.
혹시 얘가 이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감시할 수도 있을거고.
"그래, 그럼."
"그럼, 내가 너랑은 무슨 사이라고 둘러대야하냐."
"어, 그러게."
지혜 입장에선 갑자기 들이닥치는 제3자다.
적절한 핑곗거리가 있어야할테지.
한세찬이 적당한 인간관계의 유형을 뱉었다.
"뭐, 숨겨진 여동생이라든가, 여친이라든가, 아는동생이라든가..."
"여동생은 좀 오바 아니냐?"
이 모습은, 나랑 닮은곳이 별로 없었다.
억지로 닮은것을 찾자면 눈매정도랄까. 하여튼, 여동생이라 하기엔 하얀 머리색과 붉은 눈동자, 외국인같은 얼굴형이 너무나 걸렸다.
"음, 지금 외모를 보고 여동생이라고 하면 더 꼬이겠군."
"그렇겠지?"
"여친….은, 제외한다."
"왜? 나는 이런 애랑 못 사귄다는 말이냐?"
"시발, 내가 네 모습을 연기해야되는걸 떠올려라. 네가 내 여친행세를 하겠다고?"
"앗."
씹, 그게 그렇게 되네.
바로 보류한다.
"그럼 아는동생? 그건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는동생인데?"
한세찬이 잠깐 생각한 뒤에 말했다.
"그럼, 해외에서 놀러온 사촌동생."
"조금 억지스럽지만…. 후보엔 넣자."
우리는 아침에 뜬금없이 내 앞으로의 신분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꽤나 열띈 토론이 이어졌다.
"아니, 이웃사촌은 무슨 개잡소리야?"
"과외봐주던 학생? 니가 과외를 언제 했는데."
"친구 동생은 괜찮나?"
"입양된 동생은 진짜 개 말도 안되는거 알지?"
"고등학교 후배? 후배가 거기를 왜 따라가는데."
등등 여러가지 설정이 튀어나왔고…
"해외에서 온 사촌동생, 친구 동생, 아빠 친구 딸. 이중에서 고르자."
"하나같이 쟁쟁한 후보들이네…"
우리는 약 1시간을 들여 인터넷, 드라마, 각종 매체와 망상의 힘을 빌어 최대한 설득력있는 '석주'와 연결고리를 잇는게 가능한 관계후보를 추려낼 수 있었다.
"해외에서 온 사촌동생은… 생각해보니 아빠 친척이 없잖아."
그렇다. 아빠는 동생도 형도 없는 외동이었다.
어머니쪽도 비슷하고. 뭔가 구멍이 숭숭 뚫린 설정이다. 가정사에 조금 관심가지면 큰일 날것이다.
"친구 동생도. 좀 그렇네."
그것도 그렇다.
당췌 친구란놈이 친구랑 놀러나올때 여동생을 왜 끌고 오겠는가.
"아빠친구 딸은…"
"…그건 솔직히 괜찮군. 적당히 나랑 거리감도 주고."
"그럼 아빠친구 딸로!"
음. 솔직히 아빠친구딸은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어보인다.
집 안에 혼자 둘 수가 없었다는 식으로 대충 말하면 되겠지.
좋다. 이렇게 하자.
잠깐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한세찬의 말에 굳어버렸다.
"오늘은 옷 사러가야겠네."
"옷? 옷은왜?"
"…너 설마 그꼴로 그 친구들 앞에 나갈거냐?"
아. 맞다.
절대 이렇게 입고 나가면 안되겠지…?
세찬은 의외로 머리가 좋은게 아닐까?
"너 진짜 빡대가리구나."
……사실은 내가 빡대가리인거같다.
"아, 그리고 적어도 여성스러운 옷을 입어야할거다. 설정에 맞추기 위해선."
"제기라아알…"
나는 인터넷에 여성의류를 검색했다.
아니 시발 내가 이런걸 입는다고?
아.
좆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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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세찬은 의류매장에 와있다.
편의점에서 구매한 속옷과 티셔츠로 인간다움을 충전하고, 이젠 여성의류까지 처 입어서 여성스러움도 충전하려 하고있다.
이런 패션은 천천히 한걸음씩 시도해보려고 했는데.
첫걸음이 이렇게 빠르게 다가올줄 몰랐다.
"손님 너무 이쁘신데, 이건 어떠세요?"
종업원은 이옷저옷 내 몸 위에 대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색 원피스를 내 몸에 대며 종업원이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어머어머, 너무 잘어울린다. 남친분은 이거 어때요?"
"나, 남친이요?"
미친, 세찬이가 남친? 진짜 토할거같아.
아까 가짜관계를 정립할때도, '여친'이라는건 바로 보류했다.
결코 나는 게이가 아니니까.
앞으로도 남자는 절대 이성으로 볼 수 있을것 같지가 않다.
그냥 몸이 생리적으로 거부하는 중이다.
방금도 역류한 위산이 거의 목젖이랑 하이파이브하기 직전이었어.
"아 예. 괜찮네요. 그거로 주세요."
세찬은 차라리 빨리 사고 나가자는 듯, 골라준 의상을 가차없이 구매해버리고 도망치듯 나왔다.
가격은 듣지도 않고 '일시불이요' 하며 카드를 긁어버리는 모습은 일견 다급하기까지 했다.
"원피스니까 위아래 다 구매한셈치고 빨리 신발사서 여길뜨자."
"좋은 생각이야. 아주 훌륭해."
나는 맞장구치며 근처에 신발매장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신발도 대충 검은색으로 맞추는게 무난하겠지.
검은색의 리본달린 플랫슈즈 한켤레를 구매했다.
어제 밤새 검색한게 아니면 이거 이름이 플랫슈즈인것도 몰랐을거다.
화장실에서 대충 입어보니, 다행히 원피스는 몸에 맞았다.
살때 입어볼걸, 안맞았으면 좆될뻔했다.
신발도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갈아신었다.
음. 신발은 직접 신어보고 고른터라 발에 맞는다.
좋아. 전투준비 완료다.
이건 원피스가 아니라 전투복이라고 암시를 건다.
"근데 이건 빨래 어떻게 하는거야."
태그를 읽어보니, 그냥 세탁기에 넣으면 되는 모양이다.
손빨래는 아니어서 다행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