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실버와 유디라
유디라가 나에게 행한 옷갈아입히기는 장장 4시간동안 지속됐다.
실버가 모는 고급세단의 트렁크도 모자라 뒷좌석까지 전부 옷으로 차버려서 더이상 쇼핑을 지속할 수 없자 그만두기로 한 것이기에, 실버가 suv라도 끌고다녔다면 아마 4시간도 부족했을거라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진다.
겨우 집안에서 있는옷 좀 편하게 입었다고 당하기엔 너무 가혹한 벌이 아닌가?
그럼에도 내 강인한 흡혈귀의 신체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지친건 순수한 내 정신, 김석주의 영혼이 극심한 부상을 입었다.
현재 나는 분홍색 소매가 약간 짧은 실크블라우스를 하얀 숏팬츠, 하얀 스타킹을 신은 채로 검은 리본장식 고무줄로 앞 머리를 정리해 뒤로넘겨 묶었다.
고딕풍의 드레스보다야 퍽 캐주얼한 복장이긴 하지만, 이렇게 입으니 내 귀를 장식한 사냥도구 '아이기스'와 인식저해봉인 목걸이, 물리력저해 팔찌, 의수를 가리기위해 끼고있는 검은 가죽장갑이 더욱 부각되고 만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차려입고 들어온 장소가 조금 더 골때리는데…
"베이컨토마토, 모짜렐라치즈, 더블디럭스 세트로 2개씩이요."
"…하하."
햄버거가게에 왔다.
유디라도 흡혈귀라서 마늘의 냄새가 끔찍하게 느껴질테니, 아마 유디라가 고르는것은 나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일거라고 생각한 나는 점심 메뉴를 그녀에게 정하게 했더니 햄버거가게로 데려왔다.
뭐, 햄버거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방금까지 광란의 쇼핑을 즐기며 거의 천만원넘게 소비한 인물이 선택하기엔 조금 비범하지 않나.
"한국은 흡혈귀가 살기엔 너무 지옥같은 나라야. 고기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아주 짜증이 난다니까."
"그렇긴 하죠…"
"마늘 안 들어간 음식을 찾기도 어렵지."
"맞아요."
"교회도 무슨 편의점마냥 수도없이 많아."
"그렇죠."
"게다가 엄청나게 더워."
유디라의 한국불평은 나도 이제 공감한다.
마늘은 먹지만 않으면 되는게 아니라, 아예 길거리에서도 마늘 굽는 냄새가 당연할 정도로 마늘을 사랑하는 민족이 살아가는 나라인걸.
교회는 대부분 제대로된 교회가 아니긴 해도, 흡혈귀라면 꺼림칙할것이다. 흡혈귀를 사냥하는 도구를 '교회'에서 제작하니까.
그리고 한국이 여름에 더운것은 인간일때부터 공감하던 사실이지.
그렇게 유디라와 한동안 잡담을 떤다.
그러다 소재가 고갈되어 떠들던 말이 잠시 멈추고, 그때를 노려서 실버가 슬며시 말을 건넸다.
"그럼, 릴리양. 앞으로의 훈련계획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지금요? 상관은 없지만…"
햄버거 가게에서 할만한 얘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못할것도 없겠지 싶다.
"릴리양은 밤10시 이후, 제가 만들어낼 이면차원에 유디라와 함께 들어갈 것입니다. 이면차원이라고 해도 현실과 거의 똑같으니 안심하시길. 그리고 유디라는 릴리양과 1대1로 지도를 할 계획입니다.
아마, 흡혈귀가 어떻게 힘을 운용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난 자세한 설명은 이면차원에서 할테니 패스야."
유디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어느정도 힘을 운용할 수 있게되시면, 저나 목수의 사냥터에 따라가게 되실 겁니다."
"그렇군요. 별거없네요. 훈련해보고, 잘되면 현장실습하고."
별 얘기는 아니었다.
일단 싹을 본다는 얘기겠지.
바로 돼도 그만이고 안돼도 그것대로 상관없긴하다.
오히려 즉시 현장에 투입되는 편이 더 문제일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살인을 할 수 있을것 같지가 않다.
흡혈귀라고 해도 유디라씨를 보면 거의 사람이랑 똑같은것 같은데…
"뭘 걱정하시는지 알겠습니다만, 릴리양의 의사가 중요한 일이니까요. 사냥꾼이 되지 않겠다 하셔도 훈련은 해드릴겁니다. 이건 릴리양의 아버지가 내리신 명령이기도 하니까요."
생각해보세요.라고 하며 이야기가 끝날때쯤, 마침 진동벨이 울렸다.
내가 받아오겠다고 하려했는데, 이미 유디라가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그렇게 햄버거가 좋은가.
그나저나 햄버거 세트 6개면 꽤 많은 양이다.
흡혈귀라서 상관없는걸까?
똑같이 시켜달라고해서 절반은 나의 몫이긴 하지만…
잘 모르겠다. 먹어보면 알겠지.
"와, 진짜 두명이서 다 먹었네요."
"당연하지. 이정도쯤은 간식거리잖아?"
"그렇군요."
정말 다 먹어버렸다.
실버씨는 아예 음식을 먹지 않았으므로, 확실히 두명이서 조진것이다.
오히려 조금 더 먹을수도 있겠는데.
대체 이 작은 몸 어디로 음식이 사라진거지?
확실한건 내가 남자일때보다 더 많이 먹은것 같다.
흡혈귀들은 위장에 이차원 주머니를 달고 살아가는 걸까?
나중에 사냥꾼 관두고 먹방이나 찍어볼까 하는 생각이 스칠 정도였다.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니, 그냥 스쳐갔을 뿐이지만.
"릴리양, 입에 또 소스가."
"아, 감사합니다."
"너, 얼굴에 엄청 묻히고 먹네."
"하하…"
입이 작아져서 어쩔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입을 크게 벌리고 조심히 먹어도, 이 커다란 햄버거를 내 조그만 입에 넣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묻힐 수 밖에 없지.
실버씨가 수시로 내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냈지만, 거의 한입 먹을때마다 한번씩 묻혀서, 미안해졌다.
다 먹고나서 내가 닦으면 될텐데.
그렇게 말해도 실버씨는 그저 웃기만 했다.
쪽팔리니까 그러지 말아줬으면 좋겠네.
"이정도 식사량은 흡혈을 하지 않으면 당연한거야. 릴리스."
"그래요?"
"흡혈귀의 영양공급은 피가 아니면 매우 비효율적이라, 많이 먹을 수밖에 없거든. 위장도 튼튼하니까."
"아하, 그래서…"
전에 민석이가 사줬던 떡볶이를 기억해냈다.
나 혼자서 거의 3~4인분을 먹어치웠던일. 역시 그래서 그랬나.
공복은 느껴지지 않아도, 영양섭취는 필요한 행위다.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낼 수 있는 흡혈귀는, 역시 많은 식사를 필요로 하는 걸까?
아무튼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해가 슬슬 지려고 하고있어서, 옷을 옮기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집앞 공터에서 보기로했다.
나는 실버와 유디라의 손까지 빌려서 구매한 옷 상자를 겨우겨우 집 현관에 쏟아냈다.
"뭐냐, 이게 다?"
"내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
세찬은 산더미같은 옷상자를 보고 질린표정을 지었다.
이 만한 양을 보니 나도 솔직히 질린다.
유디라는 조금이라도 내 몸에 어울린다 싶으면 일단 긁어버렸다.
그리고 그걸 긁어댄 카드의 주인은 알고보니 무려 우리 아빠였다.
나의 호위를 맡기며 필요한 것을 구매하라고 카드를 맡긴것 같다.
유디라, 아빠카드로 생색낸거였나 하고 배신감이 든다.
우리 아빠 돈벌어야 빚도 갚을텐데!
흑흑, 불효자는 웁니다.
돈벌이에 보탬은 되지 못할망정 옷쪼가리 사는데 천만원을 넘게 써버렸어요…….
"그 꼴은 또 뭐야?"
"다, 닥쳐."
옷상자에 가려져있던 내 모습을 보고 세찬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보니 지금 내 옷은 완전 여자옷이었다.
세찬이한테 보이니까 부끄럽네.
지금 내가 아무리 이 옷에 어울리는 미소녀로 변했다고 해도, 내가 석주라는걸 아는 이 새끼 눈에는 175센티의 건장한 23살 남정네가 이런 분홍분홍한 옷을 입고 있는걸로 보일것 아닌가?
갑자기 쪽팔려서 죽고싶어졌다.
그렇게 자살충동을 부채질하고 있을때, 실버씨가 말했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릴리양. 내일부터 10시입니다."
"네. 실버씨."
"내일 봐!"
실버와 유디라가 떠난 후, 집에는 나와 세찬, 그리고 산더미같은 옷만이 남았다.
이걸 언제 다 정리하냐…
"좀 도와줄래?"
"내가 왜?"
세찬은 단칼에 거절하고 방에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저 인정머리 없는 새끼…….
나는 어떻게 저새끼를 조질까, 생각하며 옷을 정리했다.
오늘 끝나긴 하는걸까?
한 시간정도 지랄을 한 끝에, 나는 포기했다.
"한세찬님, 한번만 도와주세요. 이거 정리하다가 밤 새겠어요."
"…"
"혹시 밥 먹었어? 안먹었음 내가 사줄테니까 도와줘!"
"나 치과갔다왔거든, 밥 못 먹는다."
"앗!"
젠장, 오늘 안보인다 싶더니 치과 갔던거였나.
하긴, 슬슬 붓기도 빠졌으니 부러진 어금니 치료를 해야했겠지.
살짝 미안하네.
"그, 그 어금니땜에 간거냐?"
"당연하지. 오늘 때웠어, 은으로. 어때, 한번 물려볼래?"
"뭐? 임마?"
은이빨이라, 그런걸로 물리면 흡혈귀는 어떻게 되는거야?
어떻게 되기는, 존나 아프겠지.
나는 살짝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이놈한테는 걱정을 하면 안된다. 맨날 내가 손해를 본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어쩔 수 없이 옷가지 정리를 재개했다.
한참 정리중일때, 세찬이 티셔츠 밑으로 배를 긁으며 나왔다.
낑낑대며 정리중이던 나는 이새끼 또 놀리러 왔구나, 하고 생각하며 놀림의 강도에 따라 때릴 부위를 머릿속으로 채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찬이 문득 말했다.
"아. 너 돈가스 만들 수 있냐?"
"왠 돈가스? 만들 수는 있지."
"아니, 치과에서 먹지말라니까 먹고 싶어지잖아. 지금 돈가스 집은 하필 쉬는날이고."
"하. 그럼 이거 좀 도와, 재료도 사러가야되니까. 빨리 끝내야지."
"아, 그래."
결국 도와줄거면서 왜 튕기는거래?
하여튼 솔직하지 못한 놈이다.
"어우, 오늘 백화점 털었냐? 이게 다뭐야. 겨울옷을 벌써 샀어?"
"유디라씨가 다 골랐어. 이만큼 샀으면 내년까지 입겠지. 아니, 10년도 입겠다."
하루에 한번씩만 입어도 이거 다입으려면 며칠을 입으려나.
"와, 이건 뭐야? 이런걸 니가 입었어?"
"그, 그건… 냅둬."
한세찬이 든것은 검은 오프숄더 드레스.
살짝 정신이 아득해진다.
괜히 도와달라고했나?
세찬은 도움마저 거부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새끼였다.
"와, 진짜 완전 짧아. 이거를 어케 입냐?"
"야! 너 도와주려는거 맞지?"
세찬은 숏팬츠를 집어들고 감탄을 표했다.
솔직히 나도 좀 감탄하긴 했다.
누가 입은건 봤어도 내 손에 쥐어졌을때의 느낌은 좀 많이 달랐으니까.
근데 이건 뭐 수치플레이도 아니고…
"호우, 이건…"
"제발 닥치고 정리나 해!"
속옷은 제일먼저 정리해서 너무 다행이다.
저새끼 눈에 가터벨트가 들어갔으면…….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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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차를 안사는거야."
"바이크가 취향이라."
"그래……."
동네마트는 문을 이미 닫았기에 좀 멀리 있는 대형마트까지 나와서 재료를 사야하는데,
이새낀 차가 없다.
바이크는 3대나 있으면서…
나는 헬멧을 쓰고 세찬의 뒷자리에 앉아서 좌석 아래를 꽉 잡았다.
지금의 나는 면허는 커녕 신분증조차 없으니까 내가 바이크를 운전할 수는 없다.
그나저나 남자일땐 상관없었는데 이거, 성별이 바뀌니까 좀 그림이 이상한데.
"음……."
"꽉 잡아라. 진심으로 몰거니까."
"뭐야, 너. 지금 여자애가 뒤에서 안느으으은……!?"
부아아앙! 하는 엔진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관성력에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결국은 한세찬의 말대로, 나는 놈의 허리를 꽉 잡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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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찬의 노력덕에 대형마트가 문을 닫는 시간엔 꽤나 여유가 있었지만…….
"웨에에엑! 미친놈, 그렇게 타다가 너 진짜 죽어 새끼야!"
"아니, 이정도 속도는 원래 기본인데."
"웨에엑, 과속카메라는 욱. 어쩌고 그렇게 밟는데?"
"그야, 인식저해로 씹는거지."
아아, 마치 도로위의 무법자, 무슨 오토바이 레이싱 게임처럼 쓰로틀을 제끼던 세찬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신 이새끼 뒷좌석에 타지 않으리라.
인식저해끼고 도로를 미친놈마냥 질주하는 사냥꾼이라니.
미친놈한테 능력이랑 명분을 주면 안되는데.
누가 얘를 사냥꾼으로 만든건지…….
생각해보니 우리아빠였다.
누워서 침뱉기네 제기랄.
속을 진정시킨 나는 돌아갈때는 좀 천천히 가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뒤에서 껴안는것도 거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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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정도는 칼 쓸 일도 거의 없으니 금방 만들어주었다.
소스는 조금 탔지만, 나름 먹을만 했으니까 됐고.
사는김에 딸기도 몇팩 샀다.
흐흐, 이제 딸기밀크셰이크를 만들 수 있겠군.
"괜찮네. 잘 만들어졌다."
"다행이네."
솔직히 만들기 시작하면 별거 없었다.
고기 다지고 밀가루묻히고, 계란묻히고, 빵가루발라서 튀기면 끝이다.
자세히 설명하기엔 중간중간 과정이 있기는 하지만, 할짓은 별게 없다.
넣을 거 넣고, 빼야할때 빼고.
나는 이왕 만드는거, 내것도 왕창 튀겨내서 먹고있다.
내가 먹는 걸 보던 세찬이 돈가스를 먹던걸 멈추고 바라보고 있다.
시선이 신경쓰여. 나는 입으로 가져가던 조각을 잠깐 내려놓고 물었다.
"왜?"
"음, 많이도 먹네. 병원에서는 어떻게 참았냐."
"배고파서 먹는건 아냐. 유디라씨가 피를 안 마시는 흡혈귀는 많이 먹어야 한대서 먹는거지."
"그래?"
세찬은 궁금증이 해결됐는지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이 녀석도 사실 흡혈귀의 생태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이런건 흡혈귀 죽이는데엔 별로 필요없는 정보니까…
윽,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소름이 돋네.
한세찬은 이렇게 보여도, 인간처럼 보이고 인간의 말을 하는 생물을 거릴것 없이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정리는 니가 하도록. 나는 딸기 밀크셰이크나 만들어 먹기로 하지."
"그래. 음식이 안남아서 편하네."
만들어본 딸기밀크셰이크는 생각했던 느낌은 아니었다.
음, 딸기를 얼렸어야했나.
그런건 다음에 해보기로 하고, 나는 이미 까버린 딸기 한팩을 모조리 먹어치우고 침실로 들어갔다.
으음… 그냥 딸기가 맛있던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