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하루살이와 병문안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미용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직 들어가진 않은 상태다.
"어서오세요~"
저 말이 없으면 못 들어가니까.
"우와, 외국인이세요? 자연인거같으신데? 너무 곱다."
"네, 감사합니다."
상투적인 칭찬을 적당히 받아친다.
사실 외국인 아닙니다. 자연이라고 하기도 좀 그래요.
술먹고 자고일어났더니 흡혈귀가 되면서 변했습니다….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렇게 긴데 아깝지 않아요? 머릿결도 곱고 이쁘신데."
"요즘 더워서요. 짧게 쳐주세요."
"흐으음…. 알겠어요."
왜 내 머리인데 자기가 아쉬워하는지 모르겠다.
마르면서 한참을 탄식하길래 나도 그냥 냅둘까 순간 생각해버렸다.
하지만 이제 귀찮아! 한두달 달고보니까 긴머리는 남이 하는거 보는게 좋은거같다.
물론 나는 목욕할때마다 내것도 보긴 했지만….
머리는 앞머리는 살짝 눈썹을 덮을정도로, 뒷머리를 남자머리 하듯이 짧게 쳤다.
원래 앞머리도 너무 길어서 뒤로 넘겼었는데, 이렇게 하니까 좀 익숙한 듯 낯설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 긴 머리가 한달여 동안 익숙해진 머리라서.
아무튼 짧게 머리를 자르고나니, 머리도 가벼워진것 같고, 미용사가 드라이하면서 작게 넣어준 펌도 맘에 들었다.
그리고 귀에 걸린 '아이기스'랑 봉인목걸이같은 악세서리가 더욱 눈에 띄는것 같다.
사실 내심 보이쉬하게 자르면 남자다우려나 생각했는데 쥐뿔도 없었다.
어쩌면 이 얼굴이면 머리를 빡빡밀어도 미소녀일걸.
그러면 이쁠지는 몰라도 확실히 웃기긴 하겠다.
하지만 웃음거리가 되고싶은 마음은 없으니 빡빡이는 절대 안할거다.
"이라야 어떠냐?"
"ㅇ,예뻐요."
"그럼 됐지 뭐."
나는 거울에 대고 조금 더 고개를 돌려본뒤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머, 사촌동생분이신가요?"
"뭐, 그렇죠. 얼만가요?"
"컷트, 샴푸, 드라이 하셨죠? 8만원 입니다."
으음… 8만원이라. 많이 자르긴 했으니까….
맨날 1만원 2만원으로 컷트만 하면서 돈을 아끼던 나로썬 조금 의외의 가격이다.
근데 내가 이제 돈이 없는것도 아니고, 8만원정도는 플렉스 가능하다.
...그치만 내가 내민것은 아빠카드였다.
의뢰금 받으면 아빠한테 다 드려야겠구만.
"또 오세요~"
머리가 짧아지니 목에 바람도 들어오고 머리속까지 바람이 들어온다.
오, 확실히 시원하다!
세찬이보면 머리좀 잘라보라고 해야겠다.
그 더벅머리만 잘라도 엄청 시원할걸.
나는 다시 이라의 손을 잡고 양산을 펼쳤다.
생각보다 미용실에서 시간을 써버려서 이미 2시이지만, 시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한 20분정도 걸어가야하는데, 이라랑 분위기가 어색해서 좀 그렇다.
머리 자르고나서 애가 나를 기피하는것 같은데.
"왜그래?"
"아니, 그…. 좋아보여서…."
"응, 좋지. 시원하거든."
"저도 자를걸 그랬나요?"
"음…."
아, 그런걸 신경쓰고 있었던건가?
꼬맹이도 머리카락이 좀 길긴 했었네.
이걸 생각하질 못했다.
나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잠깐 만졌다.
으음… 머리카락을 자르면 이 감촉이 변할텐데.
이왕 만져줘야하는거 난 안잘랐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건 너무 이기적이지.
"혹시 덥니? 땀나?"
"아뇨. 덥진않아요. 땀도 안나고요."
땀은 사실 내가 다 내고있었다.
더위도 타는데 햇빛은 더 타니까 아주…. 이래서 낮에는 돌아다니기가 힘들다니까.
하지만 한밤중에 병문안을 간다는 발상은 더 이상하지.
환자는 제대로 밤에 자야하지 않겠어?
나는 손바닥 땀을 티셔츠에 닦고서 이라의 이마를 만져봤다 .
확실히 땀은 안나긴 하네.
"진짜? 더운데 참는거 아니야?"
"네. 이정도 더위는 끄떡없어요."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그럼 안자르는게 좋겠다. 난 네 머리가 길었으면 좋겠어."
"네! 그럼 기를게요!"
"대답이 좋구만."
자기가 괜찮다면 내가 좋은대로 해야지 뭐.
그런데 궁금하네.
"머리카락 자르면 개로 변해도 잘려있나?"
"그건 저도 잘 몰라요. 개로 변하는게 제 맘대로 되는게 아니라…."
"그렇네. 개로 변하면 어때? 느낌이 달라?"
"그게… 머리가 좀더 단순해져요. 그, 생각하는대로 행동하게되고…."
좀더 본능적으로 변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쓰다듬을때 그렇게 신나게 꼬리를 흔든건가?
짜식, 남자였구만. 여자손길에 그렇게 기뻐했다니.
"그럼 꼬리같은건 직접 움직이는거야?"
"아뇨! 그건 그냥 저절로 움직이는 거에요!"
"그래? 감정에 따라서?"
"네!"
흐으음, 본능이라.
나는 이라의 머리를 빠르게 헝클었다.
"흐흐. 그럼 이런건 라이칸슬로프라서 좋아하는건가?"
"으… 몰라요…"
"그럼 이런걸 한세찬이 하면 어떨거같아?"
"아, 그건 좀."
이라는 바로 정색했다.
역시 여자가 만져주는게 좋은거잖아?
그 모습이 좀 웃겨서 웃어버렸다.
"하하! 너 그냥 여자를 좋아하는거 아니냐?"
"……."
나는 빨개진 녀석의 코를 툭 쳤다.
나도 그냥 평범한 여자는 아니라고.
"어린녀석이 벌써부터 밝히기는. 이해가 안가는건 아니지만."
나같아도 남자가 내 몸 만지면 기분나쁠것 같다.
남자를 딱히 만지기도 싫고.
이라는 예외다.
이건 남자가 아니라 애완동물에 더 가깝거든.
한참 어린 꼬맹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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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도착했다.
웃긴 일이지만 병실은 거의 지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맨날 병원신세를 지는게 웃기기도 하지만, 반대로 병원을 자주 오게 된다는게 사냥꾼 입장에선 그렇게까지 끔찍한 일은 아니라고한다.
보통은 병원에 오기도 전에 죽으니 말이다.
안 다치는게 베스트지만, 세상일이 언제나 그렇겠는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세찬의 병실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나야. 들어간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세찬은 사지에 깁스를 한걸로도 모자라 목에까지 깁스를 하고 있었다.
목도 못 가눠서 녀석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볼 수도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이 무슨 타이어 마스코트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아핰하! 아, 뭔꼴이냐 이게?"
"하. 그러게다. 의뢰금은?"
"네 통장으로 넣어주겠대. 나는 아직 사냥꾼이 아니니까."
얼마나 들어왔는지 정말 궁금하네.
나는 세찬이 내 모습을 볼 수 있게 옆으로 다가가서 손을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스팅레이는 옆 병실이고, 하루살이는 화장실."
"그으래? 아빠는?"
"아직."
그러고보니 아빠는 오랜만인것같네. 한달만인가?
"여! 나 바뀐거 없냐?"
내말에 그제서야 TV에서 눈동자를 돌린 한세찬.
"어…. 머리잘랐네?"
"응, 더워서. 그보다."
아, 그건 뭐 당연한거고.
나는 양손을 흔들었다.
"뭐야, 빈손으로 왔다고 자랑하냐?"
"우리사이에 병문안 선물은 무슨."
세상은 기브앤 테이크인데, 네가 나한테 한짓이나 생각해보길 바란다 세찬아.
"엊그제 자고 일어나니까 자라있더라고. 쩔지?"
"그래. 이제야 그 수발 안들어도 되겠구나."
"크큭, 이제는 네가 수발 받게 생겼는데?"
저꼴로 화장실은 제대로 가겠냐?
내가볼땐 목욕은 커녕, 식사도 제대로 못할걸.
나는 다리가 다쳤을땐 손이라도 멀쩡했고, 손이 다쳤을땐 다리라도 멀쩡했다.
이놈은 지금 무슨 봉인된 엑조디아마냥 사지가 깁스로 묶여있는 상태.
"낫는데 얼마나 걸린대?"
"팔다리 정도는 일주일이면 될걸."
"뭐? 그렇게 빨리 낫는다고? 혹시 너도 흡혈귀인거 아니냐?"
"그럴리가."
설명하기 좋아하는 한세찬답게, 녀석은 그 비정상적인 회복속도에 대해 귀찮지만 알려준다는 모습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인간에게는 흡혈귀같은 초능력이나 육체능력이 없는 대신, 각 인간에게 맞는 고유한 마력식이 존재해서 그걸 사용한다는 설명.
그런 마력식은 태어날때부터 몸에 깃드는 경우도 있고, 직접 누군가에게 전수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내 팔다리엔 정상상태로 더욱 빨리 돌아가게 하는 마력식이 새겨져있으니까. 내 마력식인 고정의 마력식의 응용이지."
"왜 온 몸에 안 새기고? 너 얼굴에도 새겼으면 예전에 내가 얼굴 때렸을때도 금방 나았을거아냐?"
"아무리 그래도 얼굴에 문신하는건 좀 그렇지 않냐?"
"아하."
그 팔다리에 빼곡한 문신이 마력식이었구나.
"그런데 그 마력식 나한테도 있었다매? 근데 난 문신같은거 한적 없는데."
융합의 마력식인가 뭔가하는게 나한테도 있기는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내 몸에 문신을 새긴적이 없었다.
"넌 선천적인거였으니까. 나는 새겨넣은거고."
이것도 수저빨이란건가.
그럼 아빠는 대체 무슨 마력식을 쓰길래 '검은사신'같은 이상한 별명이 붙은걸까. 뭐, 어둠의 마력식이라도 쓰냐?
그런거면 나같아도 쪽팔려서 말 못하겠네.
사실 애초에 마력식이니 뭐니 하는것도 중2병 같아서 좀 그렇긴한데.
나만 그런가?
"그래서 그 꼬마가 라이칸슬로프였다고?"
내가 잡생각을 하고 있을때 세찬이 물었다.
그러고보니 얘도 이제 같이 살아야할 것 같은데, 세찬이한테 말해주는걸 잊었다.
"응. 이름도 내가 지었는데, 이름은 김이라야."
"그래, 이라? 그래서 얘는 어쩔거냐?"
"으음, 일단은 키워 보려구. 악마사냥꾼도 그러는게 좋다고 했고."
"그 여자가? 키워서 어쩌려고?"
"글쎄….? 그러고보니 그건 안 물어봤네."
키워서 뭐 잡아먹기라도 하려고.
아무리 우리나라가 개고기도 먹는다지만, 라이칸슬로프고기는 좀 아니지. 게다가 그 여자가 한국인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한국어를 잘 쓰긴 하지만, 머리도 빨갛고말이다.
얼굴은 머리카락이랑 후드에 가려져서 잘 안 보이고.
게다가 기계음이라 억양 같은건 전혀 모르겠다.
"아무튼 그 여자가 그런다면야…. 이유가 있겠지…. 근데 너 개 무서워하지 않았나?"
"괜찮아. 얜 안물잖아. 그치?"
"ㄴ,네! 저는 안 물어요!"
그럼, 다른 개들은 몰라도 이라는 늑대인간.
즉,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다는 말이다.
사람말 알아듣는 개라니, 애견대회같은데 나가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이겠네.
그럴 이유는 없겠지만.
"김이라? 왜 하필 김씨냐?"
"김씨가 제일 흔하잖아. 안그래?"
"너도 김씨잖아."
"우리집에서 키울거니까 김씨지."
김뽀삐라던가, 이호두, 뭐 그런식으로 부르기도 하지않나?
뭐, 애완동물은 처음이지만 말이다.
"됐다. 알아서 하겠지."
룸메이트인 세찬의 허가가 떨어졌다.
사실 얘가 싫다고하면 어쩔 수 없이 악마사냥꾼한테 맡겨야 했을텐데. 그리고 밥 대신 흡혈귀 피를 먹고 있겠지.
으, 그딴게 어린애 성장에 좋을리가 없다.
그리고 나름 재밌을것 같기도 하다.
같은 괴물이라 그런가? 약간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비슷한 냄새가 어쩌구 하던게 혹시 이런걸까?
"들었지? 괜찮대!"
"감사합니다!"
이라는 이제야 내 뒤에서 나와서 꾸벅, 인사를 했다.
둘다 머리가 더벅머리라서 그런가, 조금은 형제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니까, 세찬이 머리는 개털같다는 말 비슷한거 같다.
이라는 내가 만질거니까 자를 필요없지만, 세찬이는 보는 내가 다 더워서.
"세찬아 너도 머리좀 어떻게 잘라봐라."
"머리를? 갑자기 왜?"
"그러고 안덥냐? 팔다리 나으면 미용실 가는게 어때?"
"후우, 그래. 그러지…."
바로 내 말도 듣고, 왠일이래?
그럼 그렇지, 세찬이도 더웠던게 분명하다.
내색은 안했지만 누가 머리좀 자르라고 해주길 바랬을수도 있다.
나도 자른김에 이왕이면 얘도 자르는게 낫겠지.
그때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사형! 저게 누구야! 여친이야?!"
"아아, 제기랄. 화장실에서 자빠져 뒤졌으면 좋았을걸."
"에헤헤, 미안. 스승님한테 돈 받기 전에는 못돌아가지. 오늘은 치킨이다! 고마워, 어제의 나!"
그렇다. 세찬과 아빠는 하루살이라고 부르는데, 참 어울리는 말인듯 하다.
하루만 산다는 말에 정확히 들어맞는 사람이니까.
그때 이라가 쪼르르 걸어가서 허리를 숙였다.
녀석, 세찬이한테는 인사 안했으면서 조금 예쁜 여자한테는 저러는게 순수하다고 해야할지, 속보인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네.
"안녕하세요, 누나."
"어, 어어. 우리가 언제 봤었니? 귀여운 꼬마네."
"예? 어… 어제 봤잖아요?"
"아, 아! 네가 그 라이칸슬로프? 개로 변해줄 수 있어?!"
"그건 저도 못 하는데요…."
"으흠, 그래? 아쉽다. 엄청 귀여웠다는데."
매일 일기를 쓴다더니, 대체 어떤 식으로 쓴 일기일지 참 궁금해졌다.
무슨 그림일기마냥 '오늘은 흡혈귀를 잡았다. 재밌었다.' 이딴 식으로 쓰지는 않을것 아닌가.
근데 라이칸 슬로프가 귀여웠다라고는 쓴모양이다.
이라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걸 무시하고, 나에게 시선을 되돌린 하루살이가 나를 뚫어져라 보다가 내 귀에 걸린 '아이기스'에 눈을 고정했다.
"어, 지금보니까…. 아니? 이거 '아이기스'아냐?"
그녀는 내 귀걸이를 보고는 펄쩍 뛰었다.
확실히 비싸보이는 귀걸이이기는 했는데, 저정도로?
특수요인 보호용이라고 했으니, 내가 특수요인이나 그에 준하는 중요인물이라고 생각한걸까?
아니, 이 여자에게 그런 판단력이 있을지부터 의문이긴 한데.
"죄송합니다! 스승님이 재혼하셨을줄은…! 저, 저는 김중구 스승님의 2번째 제자, 하루살이 한야라고 합니다!"
"에?"
나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뭐?
아빠랑 내가?
만약 그렇게되면 그건 그냥 근친도 아니고, 완전히 정신나간 개족보가 되어버린다.
딸도 아니라 아들이랑 재혼이라….
이미 딸도 충분히 아웃인데?
대체 어디서 재혼이라는 키워드가 나올 수 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나의 혼란은, 세찬의 혼신의 힘을 다한 머리끄댕이 잡기로 잠깐 멈췄다.
"에라이, 미친년아!"
"악! 무슨 환자가 왜이렇게 쌩쌩해! 아악! 죽는다!"
세찬은 깁스한 팔로도 충분히 사람을 고문할 수 있다는 듯이, 그녀의 포니테일을 붙잡고 붕붕 휘두르며 소리쳤다.
"설명을 해라!"
"악! 아니, 세찬이 오빠도 들었잖아! 이거는 자기 아내만 할 수 있다고…!"
아.
그러니까 이건 어머니 유품같은거구나.
나는 본적도 없는 어머니지만, 아빠는 정말 사랑해서 결혼하셨겠지.
아마 그래서 저런 말을 하셨을거다.
"히잉, 내가 한번만 껴보면 안되냐고 물어볼때는 그렇게 말씀하셨는걸."
유품인데 그런말을 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결과가 이 모양이다.
으음….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이 사람은 정말 재앙이다.
순간 아빠랑 재혼한 남자가 될 뻔한 나는 사라진 뇌와 정신과 영혼을 간신히 붙잡고 겨우 말했다.
"아, 그러니까 이게 어머니 유품이라는 거지?"
"그래. 일단은."
"왜 안 말해줬어?"
"굳이 말해줄 필요가 있었나?"
뭐, 좀더 아련하게 간직할 수도 있잖아.
추억이고 뭐고 없긴 하지만.
사실 내 추억은 오히려 초등학생때 자주 놀러가던 세찬이네 부모님이 더 많았다.
아빠는 맨날 출장이다 뭐다 해서 바빴으니.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흡혈귀 사냥이었다.
거, 참.
"그래서 무슨 관계야? 혹시 숨겨둔 딸…?"
"하, 그러니까…. 됐다. 그런걸로 하자. 매번 설명하기 너무 복잡해."
"아 뭔데! 오빠~ 한번만 제대로 설명해줘!"
"진짜, 오빠라고 하지마.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엥? 나는 영원한 19살인데. 오빠는 이제……. 24살인가?"
"…."
세찬은 입을 다물었다.
"나한테는 저렇게 된지 꽤 됐다고 했는데…. 저거 몇살이야?"
"외부시간으로따지면 벌써 28살이지…."
뭐야! 저렇게된지 벌써 거의 10년이란 소리잖아?! 어쩐지 집안이 되게 체계가 잡혀있다 했네!
"숙녀의 나이를 묻다니! 매너가 없으시네! 그래도! 신체, 정신, 기억상으로 19살이니까 19살!"
"그렇긴 하지…."
신체적, 정신적, 기억상으로 19살이면 뭐….
그냥 19살 맞네.
그렇게 생각해주도록 하자.
"아, 그런데 이름이 한야? 외자에요?"
"음, 어…. 맞아."
그거참 특이한 이름이네.
이름만 부르면 이름을 부른지도 모르겠다.
야!하고 부르면 되나?
한야.
붙여놓고보면 예쁜 이름 같기도 하고.
그런데 세찬이랑 성이 같네.
"하아…. 모르겠다."
"또 저런다. 왜 그러는데?"
"됐다. 결국 이녀석 이름도 들어버렸네."
"뭐가 문제야?"
음, 그야 문제가 되긴 하지.
흡혈귀에게 이름을 알려져선 안되는 사냥꾼이 나한테 이름을 '직접' 말해줬고.
내가 가주급 흡혈귀라는 사실이.
그치만 그렇게 경계안해도 이름으로 뭘 할수가 없다고 자꾸 설명을 해도, 세찬이는 그냥 안된다고 한다.
뭐, 불안하면 어쩔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나도 억지로 알아내고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됐다니까. 몰라도 돼. 알아봤자 좋을거 없을걸."
"뭐가 문제래? 얘가 흡혈귀도 아니고."
"…… 사실 그게 맞다, 멍청아. 넌 오늘 집에가서 '흡혈귀한테 자기소개함'이라고 냉장고에 써서 붙여라."
"…어? 어?? 진짜? 여기 흡혈귀가 왜 있어?"
나는 그녀가 새하얘진 모습으로 내게 손가락질 하는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제가 흡혈귀긴 한데요…. 원래 세찬이 친구였거든요. 그리고 이름 가지고 뭘 할줄도 모르구요."
"아….뭐…? 오빠, 흡혈귀랑 친구먹었어?! 흡혈귀가 이름도 막 부르네!? 그리고 그런 중요한걸 왜 이제 말해주는 거야아아악!!"
갑자기 발광하기 시작하는 한야.
아니, 잠깐!
아무리 세찬이 몸이 튼튼해도, 지금은 환자다!
몸 위에 올라타서 저렇게 목을 흔들어대면 전치 1주가 2주, 3주가 되고 말거야!
"잠깐만, 떨어져봐요!"
나는 힘주어 세찬이한테서 그녀를 떼어냈다.
"억!"
슈욱! 파각!
"…어?"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들려 날아간 사냥꾼 한야의 몸뚱이가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벽으로 날아가 섬찟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그리고 드러난 참상은, 참혹하게도 박살난 그녀의 척추와 머리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나를 더욱 당혹스럽게한다.
"주, 죽었…."
죽었다.
이건 100% 즉사했다.
그러고보니 내 몸을 언제나 구속하던 물리력저해가 지금은 없는 상태였지.
꽤나 진심으로 떼어내고자 했으니 어쩌면 예견된 결과였을지도….
"하, 조용하면 됐다. 쟤는 어차피 내일되면 또 아무렇지 않게 살아나니까 잊어버려."
아니 이걸 어떻게 잊어버려.
달콤한 피의 향이 내 코를 간질이고있을 때, 병실의 문이 열렸다.
"아들아. 이게 또 무슨일이냐?"
언제나 타이밍이 나빠요,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