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2화 〉수확제 (82/101)



〈 82화 〉수확제

거인은 머리 부근에서 은빛의 폭연에 감싸여 움직임도 없이 무릎을 꿇은채였다.
금방 일어날 수 있을것 같지는 않네.


"흐으으…."

나는 조심스럽게 쟈켓을 받아들어 입고, 가디건은 하의에 둘러서 가렸다.
호박팬티라는건 사실상 여성용 트렁크 팬티이니까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만, 보여지는게 야외라는게 문제다.

그리고 정말 다행인점은, 나오기전에 화장실에 들렀었다는 점이었다.
이번엔 꼴사납게 대소변을 옷에다가 묻히지 않은것이다.
거인의 악력에 쥐어짜이면서도 복부에 힘을 줬었고.

대장이 마치 어릴적 짜먹는 요구르트를 쥐어짜는것마냥 짜이는것 같았는데, 내용물이 별로 없었으므로 괜찮았나보다.
앞으로도 꼭 외출 전에는 화장실에 가야지.
흡혈귀란게 되니까 배변욕이 굉장히 약하게 느껴져 평소 화장실엔 자주 가지 않았거든.
외출전에 할 일이  늘었군.

잠깐, 음식이 아니라 피만 먹었다면 화장실에  필요가 없는게?
그래서 흡혈귀들은 배변욕을  느끼지 않는걸까?
그러면 정말로 미소녀는 화장실따위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있겠다. 이렇게 또 하나 밝혀지는 흡혈귀의 비밀인가!


아니, 그래도 한달에 한번은 꼭 가야하는구나, 제기랄.


어쨌든 내가 겉에 입은것은 녀석의 몸에 꼭 맞는 라이더 자켓이다만, 내 몸에는 상당히 사이즈가 커서 헐렁거린다.
그래도 그게 낫지, 내 가슴이 그리 크지 않더래도 눌리면 아프고 불편하니까.
게다가 지금은 캐미솔도 없는터라, 가슴의 첨단부분이 뻣뻣한 자켓 내부의 거칠한 표면에 쓸려서 문제가 생기겠지.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조금 찝찝하기도 하다.
나, 세찬이가 입을거라고  쟈켓에다가 눈물이랑 위액을 닦아냈던건데, 내가 입고있어야 한다니.
설마 그래서 나한테 입으라고 준거 아니야?

"크으윽."


그래도 여기저기 몸이 엄청나게 쑤신다.
회복력이 돌고는 있지만, 압착프레스기에 꾹 짜였던 내부장기들이 다시 가동하기위해 팽창하며 온몸에 저릿한 고통을 쏘아내고 있었다.
부러지고 금간 뼈가 제자리만 찾았을 뿐이고, 사실상 지금 내 몸을 이루는것은 짜부라진 장기들과 내출혈로 몸속 어딘가에 고여있을 뼛가루와 피 같은것들이 대부분이다.
솔직히 내가 흡혈귀라서 살아있는거지,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죽었을 부상이다.

지금 몸이 움직이는것만도 기적이랄까, 몇달전의 고통에 익숙치 않던 나라면 진작에 기절하고 말았겠지.
옷조차도 겨우 입을 수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해봤지만 고관절이 삐걱거려 제대로 설수가 없어서 등을 나무에 기댄체 숨을 고른다.
한세찬이 내게 물었다.


"괜찮냐? 제대로  수 있겠어?"
"하악, 아니,  서…."

나도 문제지만, 세찬이도 상당히 심각했다.
세찬이 상태가 심각했다기보단, 녀석을 본 내 상태가 심각하다.


온몸에 흐른 땀으로 녀석의 티셔츠가 푹 젖어있었고, 흘러내린 피와 어우러져 뭐가 땀자국이고, 뭐가 핏자국인지 알기 어렵다.
게다가 온 몸에 구석구석 자잘한 상처들에서 배여져나오는 핏방울들이란…. 마치 잘 튀겨낸 베이컨에서 흘러나온 기름과도 같이 맛있어보인….


나는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며 상념을 지워냈다. 몸이 제대로 움직여줬다면 내 뺨이라도 후려갈겼을 텐데.
정신차려라, 미친 김석주 자식아.

피를 많이 흘린건 아니라고해도 흡혈 충동을 참기가 힘들다.
몸에서 외부로 방출되지 않았다 뿐이지, 몸 내부에서는 내출혈로 인해서 내 제어를 벗어나는 혈류가 계속해서 생겨나는 중이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세찬이의 몸에 흐르는 핏방울들을 삼켜버리고 싶었지만…. 인간의 피는 안돼. 세찬이 피라면 더더욱.
게다가 지금 꼴로는 더더더더욱 안돼.
완전히 유혹하는 꼴이 되고 말테니.

나는 머리가 아프게 울리는걸 부여잡고,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가 한다.
아까부터 계속 시야강화, 반응속도 강화를 위해 집중을 하고 있어서 지금같이 피가 모자란 상황이 되니 시야가 흐릿해지고 판단력도 흐려진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 피 냄새는 짙다.
맛있는 냄새가 다가와. 머리가 이상해질것같아.
나는 나를 부축하려는 세찬이를 밀어내고 말했다.

"저리가, 피냄새 나니까."
"아, 그래."

녀석이 문득 깨닫고는 뒤로 몇걸음 물러섰다. 자신의 몸이 지금 흡혈충동에 휩싸인 흡혈귀에게 얼마나 강렬한 유혹인지 깨달은걸까.
마치 일주일간 단식중인 시위대 앞에다 치킨을 가져다놓는 꼴이었다.

그정도로 녀석의 몸에서 나는 체취가 정말이지, 환상적으로 느껴진다.
본래라면 불쾌하게 느껴져야 할 피에 섞인 땀냄새가 새콤달콤하게 다가오는건 내가 흡혈귀라서 그렇겠지.
그리고 그 향은 내가 입은 자켓에도 충분히 묻어있어서 오묘하게 후각과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정말 미칠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쳐있는 것일지도.

"흐읍. 하아…. 후, 하."


그래서 나는 입으로 숨을 쉬는 중이다.
숨을 쉴때마다 폐가 따끔거리고 흉곽이 벌려질때마다 가슴 전체가 울리듯 쓰라린다.
고통을 삼키고, 정신을 부여잡는다. 익숙한 일이잖아?
나는 비틀비틀 자세를 잡고 조금 떨어진 세찬이한테 한숨을 뱉듯이 말했다.

"하아, 어떻게 된거야?"
"글쎄."

해치웠나? 하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생존플래그를 세워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생존플래그는 내가 생각만 하더라도 세워지는걸까?


거인은 무릎을 꿇은채 거대한 몸을 떨었다.
최소한 정신은 잃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멀쩡하단 말인가? 정말 괴물같은놈이다.
제아무리 회복력이 괴물같던 에이샤라고해도 그 폭발이 몸속에서 터졌으면 죽었을텐데.


그러나 역시 멀쩡한건 아닌 모양인지, 은빛의 폭연이 조금 걷히자, 거인의  부분이 훤히 사라져 조그만 아이같던 본체가 드러나있었다.
투구도 거의 박살난 상태였고.
깨어진 투구 사이로 회빛의 머리카락이 길게 흘러나와 있었다.
거인의 몸에 겨우 붙어있을뿐인듯 하다.

결국 거인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흡혈귀가 비틀비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어머니…? 아냐, 아냐, 아니야. 넌 그저 껍데기야. 그런데 대체 어떻게,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낸거지?"

이름? 이름이라고?
알렉스. 그것을 말하는게 분명하다. 알렉스라는건 이 흡혈귀의 이름이었던건가?
알렉스라, 역시 외국이름이구나. 흡혈귀들은 왜 죄다 외국이름인지 모르겠네, 뭐. 이제와서 한국식 이름의 흡혈귀를 생각해보라면 힘들긴 하지만. 내 뱀파이어네임도 '릴리' 이고.
 




"대답해! 대체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낸거냐!"

'알렉스'가 외쳤다.

"후우, 네가 알렉스?"
"그건 네까짓게 불러도 될 이름이 아니다!"

거인의 육체가 앞으로 고꾸라져 녀석을 뱉어냈다.
투구가 녀석의 얼굴에서 떨어지며 민낯을 볼 수 있었는데, 의외로 앳된 목소리에 어울릴 정도로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아니, 소년인가, 소녀인가? 콕 집기엔 잘 모르겠다. 중성적인 외모에 긴 머리카락으로 성별을 한눈에 특정하기가 어렵다.
이라는 확실히 소년다웠는데.

마치 내가 머리를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었을때처럼, 제멋대로 흘러내린 회색빛 머리칼이 망토처럼 몸을 감싸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알렉스의 표정에서 느껴지는건 분노, 슬픔, 원망. 그런게 뒤섞여있는  했다.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란 말이다! 네년의 입에서 듣고싶지 않아!"
"하아,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 머리가 울린다. 또 환청인가.
나는 머리를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휘청거리는 몸을 다시 세웠다.

'알렉스 리데라이트'
"알렉스 리데라이트."


환청과 동시에 입이 벌어져 제멋대로 말이 흘러나온다.
리데라이트, 그게 성인가? 외국식 이름은 성이 뒤로 오니까.

"닥쳐, 닥치라고!"

그, 아니 그녀? 음, 이름이 알렉스이니까 남자애가 맞겠지? 확실한건 다리사이를 확인하는거지만. 나는 더이상 이녀석의 외견을 보고 뭘 판단할수가 없었다.
목소리까지 중성적인데다 전투중에도 몇번씩이나 변신을 하는건지.
변신할때마다 인상이 휙휙 바뀌어버리잖아.

알렉스 리데라이트, 그가 놀란 표정으로 뒷걸음치자, 한세찬이 녀석을 막아섰다.

"알렉스 리데라이트가 이름인가, 흡혈귀."
"저 여자가 더이상 내 이름을 부르는걸 참을수가 없다. 비켜라, 사냥꾼!"
"……."


세찬이는 말없이  앞을 막아섰을 뿐이고, 나는 어쩐지 흐릿한 시야속에서 알렉스 리데라이트만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집착, 이건 좀 무서울 정도로 심각한데.
진짜 내 자식이 아니어서 다행이지.

녀석이 내게 30센티정도의 혈검을 뽑아 겨눈다.
이제 그정도가 한계인가?
 상태가 멀쩡했다면 좋았을텐데, 세찬이 혼자서 상대 할 수 있으려나.
나는 잘 올라가지 않는 어깨를 꾹 부여잡은채 서있는게 고작이었다.

"비키지 않으면 베겠다."
"……."

세찬이는 자세를 낮추며 단검의 모습을 한 말뚝을 꺼내쥔다.
녀석이  손을 앞으로 가볍게 내밀며 전투자세를 취하자, 알렉스는 작은 숨을 내쉬며 달려 들었다, 아니 달려 들려고 했다.

"잠깐, 싸움은 거기까지해라."

갑자기 나타난 음성과 형체에 일촉즉발이던 대치상황이 얼어붙어버린다.


머리에 헬멧을 쓰고 검은 가죽 코트를 입은 형상이 알렉스의 뒤에 나타나있었다.
가죽코트에 헬멧이라, 놀라운 조합이네.
그러나 이곳저곳이 찢겨지고 더럽혀진것이, 한바탕 전투를 치른 흔적처럼 보인다.

"너무 날뛰었다. 돌아가지."
"뭣, 그럴수는 없어, 거의 끝났는데."
"이곳에 '방해꾼'이 있다."
"뭐?"
"그리고…."

헬멧의 남성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끈적한 시선이 훑는게 느껴져서 조금 소름이 돋았다.
나는 변태새끼라며 중얼거렸으나, 그걸 들었는지 어쩐지는 모를 노릇.


"이제는 죽일 필요도 없어 보이는군."


말의 내용은 저렇지만 무감정한 억양이 아니었다.
어쩐지 조금 기뻐보이는  하기도 한데…. 대체 왜지?
내심 이렇게 가련한 여자아이를 죽이는데 회의감이 느껴졌을리는… 없나.


"어이, 그게 무슨 뜻이야?"


내 물음에 답할생각도 시간도 없는지, 급하게 쏘아내듯 말하는 헬멧 코트의 남성. 그러나 그 말투 속에는 약간이지만 긍정적인 감정이 섞여있었다.


"곧 스스로 알게 되실겁니다. 그럼."
"자, 잠깐만!"

코트의 남성이 알렉스의 허리를 부여잡아 당황하는 녀석을 코트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리고 뒤이어 자신마저 코트로 덮자, 어느새 완벽히 모습을 감춰버린 두 흡혈귀.

은신인가, 싶어서 몇분정도 더 자세를 잡고 있었지만, 공격같은게 들어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진짜 갔냐?


"뭐…. 뭐지?"
"글쎄…. 나도 뭐가 뭔지."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러, 이러고 또 뒤통수 때리는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던중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산책을 정말 깊숙하게도 들어왔구나. 밤에 등산을 하면 위험해, 이것들아."
"아빠…!"


그렇구나, 방해꾼이라는건 아빨 말하는거였어!
나는 긴장이 완전히 풀려버려서 다리로 주고있던 힘까지 놓아버리고 말았다.


털썩.

하아, 끝났구나.


끝났다고 생각이 드니까 가까스로 잡고있던 정신줄이 끊어져버렸다.
눈이 감기는 무게에 저항할수가 없어.
눈꺼풀이 너무 무거운걸….

-----------

"김석주?"


한세찬이 갑자기 쓰러진 그녀를 급하게 달려가 부축한다.
바닥에 머리를 처박기 전에 자신의 팔로 받아낸 세찬이 조심스레 그녀를 나무에 기대어 앉혔다.

그의 마음속에 릴리스의 모습에 대한 증오심은 이제 적당히 희석되어버리고 말았다.
릴리스란 것에는 모습따위가 중요한게 아니었던거다.
게다가 녀석 역시 릴리스의 피해자였을 뿐이고, 그 증오심은 결국 엉뚱한 녀석을 상처입힐 뻔 했으니.


숨을 쉬는건가, 싶어서 맥을 짚어보니 단지 기절한것 뿐, 흡혈귀이니 피만 공급된다면 생명에 지장은 없겠지.
다행인건 출혈은 없어서 피를 보충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한세찬이 제 스승에게 말했다.

"하아, 늦었잖아요, 스승님."
"숲이 워낙에 넓어야 말이지. 시간은 겨우 맞춘것 같군."

자신의 손을 들어 살피던 김중구의 시선이 붉은 거인의 잔해에 닿는다.
그리하여 툭 내뱉듯이 묻는다.


"설마 가주는 아닐테고, 혈족이었나?"

혈족, 가주와 같이 고유능력을 사용할  있지만, 자신의 가문에서는 떨어진 존재들을 아우르는 말이다.
그 사정은 정말 여러가지가 있어서 일일히 열거하기 힘들 정도지만, 대부분은 추방, 도망이다.
그들은 가문의 보호를 받을  없기에 서로가 뭉쳐다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가문만큼 위험한 족속들.

다행인건, 그들끼리의 능력차이가 천차만별인데다, 서로의 커넥션이 깊지 않다는 점일까.

한세찬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글쎄요. 일단 기사는 확실해 보이더군요."
"그런가? 어디 소속인지는 알고?"
"석주가 이름을 알아낸것 같더군요. 알렉스 리데라이트. 들어본적 있습니까?"
"리데라이트…. 라고 했다고?"


리데라이트, 리데라이트라. 언젠가 들어본것도 같은데.
릴리스의 정신방호를 세우기 위해 잠가버린 기억중에 있었던 이름인가?
김중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뭐, 기억이 안나는거라면 찾아보면 되겠지.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게 기록이 아니겠는가.

"들어본것도 같아. 찾아보지."

그럼 이 이야기는 이제 끝이다. 여기서 생각해봤자 떠오를리가 없으니까.
정신방호란 본디 정신의 일부분을 재료로 쌓아올린 성벽과도 같다.
성벽에 재료로 쓰인 기억은 떠올릴  없는게 당연하다.
정신방호를 완전히 풀어버리지 않는한, 그리고 기록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게 아닌 한은 절대 머릿속에 남겨놓을 수가 없는 기억이된다.

김중구는 생각을 멈춘채 시선을 제 자식에게 돌렸다.
아들…. 이지만 딸이라니.
참, 잃어버렸던 기억속 그녀와  닮았다.
김중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딸…. 이라고 했나."


김중구는 담배를 한개피 꺼내 물었다.
깨어있었다면 아들이 담배냄새가 난다고 뭐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어쨌든 세상모르고 자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후우, 피울텐가?"
"됐습니다. 금연당하는 중이라."


녀석, 고생이 많다.
흡혈귀에게 이름이 잡힌 사냥꾼의 말로치고는 상당히 귀여운 고문이구만.


"하하하! 좋네, 이참에 확 끊어버려."
"담배냄새 풍기지 마십쇼, 피우고 싶어지니까."

인상을 구기며 제 아들(딸)을 짊어지는 제자를 바라보며 그는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흠, 그런데 그꼴은 대체."
"예? 아, 면목없군요. 제가 준비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래? 흠, 준비라."


스승의 시선이 제 몸을 훑는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찬이, 그 시선에 담긴 끈적한 의미를 파악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부탁인데, 농담하지마요."
"무슨 농담?"

아무리봐도 농담기 많은 제 스승이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꼴이 아니었다.
격렬한 전투를 끝마친 흔적이고,  사실을 김중구 역시 모를리가 없었지만…….
그림만 보면 상당히 미묘한 상황이 그려지지 않는가?
그리고  스승은 그런 상황을 놓칠 인물은….

"딸은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된다."
"뭐, 뭐라고요?"
"하하하, 장난이다 장난.  그리 심각한 표정이냐?"
"소름돋는 장난좀 그만 치세요, 스승님."


김중구는 진심으로 웃었다. 사실은, 한번쯤은 해보고싶은 말이었는데.
딸을 낳아선 안되었으니 이번 팔자엔 말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담배를 깊게 들이쉰 그가 한숨을 뱉듯이 내뱉는다.
연기와 함께 내뱉은 말은 제자의 속을 뒤집어놓기엔 충분했다.

"그래, 사실 너 정도 사윗감은 얘 인생에 없을것 같기는 해."
"스승님!!"
"하하하!!"

농담이지, 농담이야.
이 모든 상황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농담과도 같이 느껴지는 밤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