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10화.
네빌의 부하가 되고 어언 3개월이 지났다.
생각보다 시간은 금방 가서 벌써 3개월이나 지났나 싶을 정도였다.
[우리 마누라랑 딸내미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내가 사라졌다고 나쁜 마음 먹으면 안 되는데.]
오늘도 한숨을 쉬며 벽에 줄을 그었다.
성문 입구, 바를 정(正)을 잔뜩 써두었다.
하루에 한 줄씩 그은 것이 벌써 18개나 완성됐다.
[열여덟 개네. 18. 오늘은 재수가 없으려나?]
그렇게 한숨을 쉬며 하늘을 보았다.
무던한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3개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먼저, 그동안 나는 하멜 성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망자의 삶에 익숙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망자는 제대로 된 육신이 없다.
당연히 식욕이나 수면욕 등 생리적인 욕구가 필요치 않았고, 전역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말년 병장처럼 시간이 남아돌았다.
그래서 남들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익힐 수 있었는데 무예와 언어 공부가 끝난 후로는 문자 공부에 열중하고있었다.
[벌써 아침인가. 어릴 때 이후로 이렇게까지 공부하는 건 처음이네.]
하멜성 상층, 도서관 창가에 앉아 밝아오는 여명을 보았다.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 덕분에 성 안이 밝아졌다.
추위가 가시고 따스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언데드라 그런 걸 느낄 턱이 없지만, 이렇게 해가 뜨는 것을 보는 건 조금 즐거웠다.
[나중에 읽어야지.]
나는 읽고 있던 소설책을 덮었다.
이쪽 세상에도 책이 있다.
지구의 책처럼 깨끗하고, 글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지도 않지만, 그래도 읽기에불편함이 없는 수준의 책이 상당히 있었다. 그래서 글공부를 마친 후로는 이곳에서 책을 읽으며 문자를 읽는 공부를 했다.
잠도 자지 않고 촛불을 켜놓고 매일 글공부를 한 덕분에 이제 어지간한 글은 다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 하루에 책 한두 권 정도는 우습게 읽을 정도다.
내 머리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영혼이라는 걸 흡수하면 그 사람의 기억을 통해 언어나 문자에 대한 정보도 알 수 있다.
그 덕분에 언어도 문자도 배우는 게 빨랐다.
처음 이쪽에 소환당했을 때 인간의 언어를 이해한 것도 그 영향일 것이다.
[날도 밝았으니, 슬슬 나가볼까?]
책을 놓고 삽을 들었다.
흙이 묻은 삽을 든 후에는 무덤이 가득한 하멜성 뒷마당으로 향했다.
밤에는 책을 읽으며 글공부를 하고, 낮에는 무덤을 만들었다.
각종 무예와 무술 수련이 끝난 후부터 시간이 남아서 무덤을 만들고 있었다.
하멜 성에는 썩고, 삭은 시체가 많다.
죽어서 장례도 못 치른 불쌍한 영혼들이었기에 피아구분 없이 하멜 성에서 죽은 모든 이들의 무덤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여유롭게 무덤을 만들 수 있는 것도 네빌의 생체실험이 끝난 덕분이다.
처음 네빌은 내 이마에마술 각인을 박고 보름 이상 내 신체와 영혼의 비밀을 파헤쳐야 한다며 날 상대로 온갖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검으로 머리를 때리기도 하고, 마법을 사용해 팔다리를 뗐다 붙였다 하는 등 살아있는 사람에게 했다가는 하루를 채 버티지 못할 고문 같은 실험을 해댔다.
이미 죽은 망자도 고통을 느끼는 그지옥같은 실험 후에는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빌은 내게 온갖 무술과 검술 등을 지도했다. 다만, 방식은 좀 달랐다.
그의 가르침은 일반적인 트레이너들처럼 근육트레이닝이나 칼을 휘두르는 방식의 공부가 아니었다.
철저히 실전에 입각한 대련으로만 가르쳤다.
그가 직접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자신이 만들어낸 망자들을 이용해 내게 싸움을 붙였다.
마치 데이터를 모으듯이 데스나이트와 유사한 망자만 소환해서 몰아붙였다.
데스나이트도 수준이 있었다.
내가 처음 상대했던 데스나이트처럼 그저 허우대만 큰 데스나이트가 있는가 하면 더 높은 수준의 검술과 검기라는 기술을 사용하는 데스나이트도 존재했다.
검기(劍氣).
그것은 딸내미가 자주 보는 스타워즈 애니메이션의 제다이처럼 광선검 같은 것을 만드는 기술이다.
능력에 따라서는 두꺼운 바위도 두부 자르듯이 자를 수 있는데, 언데드도 검기에 맞으면 고통을 느끼고 아프다.
네빌의 마법처럼 신체로 모자라 영혼에까지 피해를 충격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네빌은 허우대가 좋은 놈들부터 시작해서 점차 위협적인 검기를 만드는 놈들을 소환해 나와 싸움을 붙였다.
팔다리가 도마 위에 오른 오이처럼 숭컹숭컹 잘려나가는 고된 스파르타식 훈련과 죽인 망자의 기억, 능력, 마력을 흡수하는 타고난 재능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덕분일까?
나는 두 달 만에 검기라는 것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쪽 세상의 기사 소설과 기억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본래 검기를 익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통상적으로 감을 잡는 데만 최소 1~2년 걸리고, 검에 검기를 불어넣고 소드마스터처럼 휘두르는 것은 5년~10년이 걸리는 탓이다.
그런데 나는 이 모든 과정을 불과 1개월 반 만에 해치웠다.
마치 1타 강사의 특급 과외를 받은 것처럼 순식간에 경지에 오른 것이다.
덕분에 지금은 네빌이 아끼는 마룡, 본드래곤과도 맞다이를 뜰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두 마리와 동시에 싸울 수도 있다.
이길 수는 없지만, 발을 묶는 정도는 된다.
아마도 네빌의 부하 중에서는 내가 가장 강하리라.
[이것도 내가 쓰러뜨린 망자의 힘과 영혼을 흡수하는 능력 덕분이겠지? 역시 재능이 곧 금수저라니까.]
내가 타고난 재능은 리치몬드인지 뭔지 하는 망자와 똑같다고 한다.어쩌면 리치몬드의 환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의 재능은 인간을 쓰러뜨려선 쥐뿔도 없지만, 망자의 뚝배기를 깨면 그 힘과 기억을 일정량 훔치는 것.
이런 기억이 수백, 수천 개가 모인덕분에 검술도 처음보다 훨씬 정확하고 강해졌다.
이제는 배우지도 않은 검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으며, 앞서 말했든 언어공부에도 도움이 돼서 배우지 않은 고어도 이해하고 읽을 수 있다.
힘도 강해져서 하멜 성 성문에 있는 철창도 철물점 셔터 올리듯이 가볍게 들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절대 오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커다란 나무도 한 번의 도약으로 꼭대기까지 뛰어오를 수 있다.
옛 표현대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성벽을 오르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수준이 정점에 오르면서 데스나이트 고유의 마법이라는 것도 생겼다.
산 자를 저주해 그 사람의 심신을 약화시키는 마법인 암흑오라와 단순히 검에 검기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검기를 퍼트리며 발사할 수 있는 기술을 체득한 것이다.
강해져서 여러모로 기쁘지만.
[이래도 네빌은 이길 수 없겠지.]
그간 온갖 기술을 배우고 익혔지만, 그래도 네빌의 발끝에는 미치지 못한다.
얼마 전에 한 번 붙어보자고 대차게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기르던 개가 주인을 무는 꼴이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들으며 아주 철저히 짓밟히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본드래곤 두 마리를 겨우 상대하는 나랑 다르게 네빌은 다섯 마리를 모두 상대하고도 남는 실력자이기 때문이다.
데스나이트보다 한 단계 높은 상위종인 마인드 리치인데다가 마인드 리치 중에서도정점에 올라서 나 같은 건 상대도 안 되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네빌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집에 돌아가려면 그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고, 당분간은 따르기로 하고 움직였다.
한편, 네빌은 내 성장이 정체되자 흥미를 잃은 것인지 강압적인 수련을 종료하고, 지구에서 얻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연구실에 박혀 엘리아나의 부활을 위한 마법진과 마법에만 신경 쓰면서 나는 뒷전이 되었다.
항상 시행되던 수련이 잠정 중단된 덕분에 한가해져서 이렇게 하멜 성의 소설 전집을 읽거나 죽은 사람들의 무덤을 만들어 줄 수 있게 되었다.
[힘들지 않으니, 보람도 느껴지지 않네.]
해가 중천에 뜨고 삽을 바닥에 꽂았다.
땀이라도 닦으며고된 노동의 보람을 느끼고 싶지만…, 이 망할 놈의 몸뚱이는 그런 기능을 탑재하지 않아서 보람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갑옷에 묻은 흙을 털며 성 밖에서 저무는 해를 보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평화로운 하루다.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네. 울지 말아야 할 텐데.]
아내와 딸이 그리워졌다.
직장 동료들 걱정과 뒤통수를 맞고 쓰러진 파트너의 안위도염려되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지금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생각을 그만두었다.
네빌을 재촉하고 보챌 수도 있지만, 이미 몇 번 귀찮게 한 후로 가족 이야기만 꺼내면 진짜 죽이겠다고 윽박질러서 말을 꺼내기도 힘들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네빌이 먼저 날 불러주길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래도 약속은 지키는 놈이니까, 분명 알려주겠지. 돌아가서 책이나 읽자.]
나는 미리 찜을 해둔 하멜 성의 소설책을 떠올리며 이가 다 빠진 삽자루를 챙겼다.
그렇게 떠나려는 찰나.
뿌우-! 뿌우-! 뿌우-!
[나팔 소리?]
뿔나팔 소리가 들렸다.
요란하게 울리는 뿔나팔 소리에 나는 숲을 보았다.
몬스터와 괴이가 출몰한다던 하멜 숲 방향이었다.
뿌우-! 뿌우-! 뿌우-!
위기에 처한 시민이 호루라기를 불듯이 다급한 나팔소리가 연거푸 울렸다.
[몬스터나 괴이가 저런 소리를 내지는 않을 것 같고, 역시 사람인가?]
사람이 내는 소리라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확인해 보자.]
나는 나팔 소리가 들리는 하멜 숲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