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17화.
나는 일리나를 어깨에 메고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찾아 이동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멀쩡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든 방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빠르고, 너무 높고, 또 너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을 스무 번도 밟기도 전에 젊은 처자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왔다.
“오로로로로록!”
그녀가 뱉어낸 토사물이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며 지상에 쏟아졌다.
결국, 멀미를 참지 못하고 오바이트를 하고야 만 것이다.
[취객이 순찰차에 구토했을 때가 생각나는구만.]
순경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는 야간 순찰을 나갈 때마다 취객들의 오물받이를 당연한 일과처럼 했었다. 그래서 오바이트에 면역이 생겨서 막 심각하게 찝찝하거나 더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마침 냄새를 맡을 수도없는 몸이기도 해서 직접적인 충격도 덜하다. 그래도 생명의 은인의 망토에 구토하는 것은 조금 괘씸했다.
“으으으…. 자, 잠깐만요. 두영님. 죽을 것 같아요. 저 좀내려주세요.”
구토를 한 것으로 부족했는지 일리나가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얌전히 바닥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공작가의 따님이 체면도 없이 치마를 까뒤집은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입가에 토사물을 묻힌 채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문득 예전에 경찰서로 쳐들어온 아가씨들이 기억났다.
만취한 젊은 처자들이었다.
그녀들은 신발과 웃옷을 경찰서와 경찰차로 던져대며 엄청난 양의 오바이트로 모자라 실금까지 하며 경찰서를 재앙 직전의 화장실처럼 만들었다.
어찌나 많이 마셨는지, 오바이트를 뱉기가 무섭게 그 위로 쓰러지고 지금 일리나처럼 데굴데굴 굴렀다.
술병을 앓으며 살려달라고 난리를 친 것이다.
너무 위급해 보여서 그때는 직접 구급차까지 불러 젊은 아가씨들을 응급실까지 모셨다.
[그때진짜 힘들었지.]
온몸에 오바이트와 오줌이 묻은 여자들이 힘은 또 넘쳤다.
자꾸만 발버둥치는 통에 그녀들을 병원까지 에스코트한 나도, 구급대원도 혈압을 재러 온 간호사도, 진료를 보러 온 의사도 지독한 악취로 난감했던 기억이 있었다.
아무튼, 그 사건 이후로 나는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었다.
그건 아무리 대단한 선비여도 술과 멀미 앞에서는 멀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육질 마초남도 속병에는 쭈구리가 되듯이 속이 아프면 사람이 추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일리나처럼.
[생긴 건 천사처럼 귀엽고 예쁘면서, 하는 짓은 민폐도 이런 민폐가 따로 없다. 진짜.]
왕국에 데려다 준다고 해도 싫다.
마을에 데려다 준다고 해도 싫다.
이제는 내 망토에 오바이트까지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바닥과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땅바닥에 껌처럼 붙어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저 하는 말이라곤….
“주, 죽을 것 같아요. 저 그냥 안 가면 안 돼요? 저 그냥 일검님이랑 같이 있으면 안 돼요? 하멜성으로 보내주세요. 네?”
이렇게 꼬장을 부리는 말뿐이었다.
마치 집도 좁은데 피아노 갖고 싶다고 피아노 사달라고 떼쓰던 우리 어린 딸을 보는 것 같았다.
[자꾸그러면 그냥 버리고 간다?]
나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일리나에게 강하게 말했다.
딸내미가 그렇게 떼를 썼을 때도 그냥 버리고 간다고 윽박질러서 무마했던 경험이있기 때문이다.
열에 아홉은 포기하고 쫓아오기 마련이다.
“죄, 죄송해요. 하지만 진짜 더 못 가겠어요. 더 움직였다간 위장까지 토할 것 같아요. 우욱!”
[승차감 좋게 살살 이동할 테니까. 그냥 업혀서 심호흡만 해. 후후-하! 알지? 자. 업혀.]
“죄송해요.망토 냄새가 지독해서 도저히 못 업히겠어요. 우욱! 우웨엑!”
[…그거 네가 뱉은 오바이트 냄새거든?]
일리나는 자기가 뱉은 오바이트 냄새가 지독해서 못 가겠다며 다시 떼를 썼다.
억지를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아파서 괴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심증은 억지에 쏠리는데, 물증이 없으니 강제로 데려가기가 좀 껄끄러웠다.
[어휴! 뉘 집 자식인지. 진짜! 내가 민중의 지팡이 출신만 아니었으면 일리나. 넌 진짜 나한테 한 대 맞았어. 알아?]
“네…. 죄, 죄송해요.”
[어휴! 나도 모르겠다. 그래. 쉬어라. 쉬어. 좀 쉬었다가 이동하든지 하자.]
“가, 감사합니다.”
하는 수 없이 바닥에 앉아 휴식 시간을 갖기로 한 그때.
꼬르륵.
“죄송합니다. 종일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가….”
이번엔 배가 고프다고 한다.
이년이 진짜?
[그냥 자! 내일 아침에 걸어서 이동해 줄 테니까. 제발, 엄살 그만 떨고 자.]
“추운데요. 얼어 죽을 것 같아요.”
[아오! 불 피워줄게! 주워 있어!]
“감사합니다.”
나는 일리나를 재우기 위해 나뭇가지를 챙겨와 모닥불을 피웠다.
근처에 마른 풀과 가지가 많아서 원시인처럼 나뭇가지를 비비니 금방 불이 붙었다.
[이게 되네. 나 서바이벌에 재능 있나?]
의외로 쉽게 붙은 모닥불.
다시 생각하니 재능은 아닌 것 같고, 체력과 힘이 좋아져서 그런 것 같았다.
아무튼, 그렇게 불을 지펴 일리나의 근처에 모닥불을 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아름답네.]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흙으로 구토가 묻은 망토를 닦은 후 새근새근 자는 일리나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밤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에는 두 개의 달과 아름다운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별똥별도 막 지나갔다.
나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망자가 되고 난 후부터는 잠을 잘 수 없다. 그래서 잠이 자고 싶어질 때면 이렇게 멍하니 하늘을 보는 습관을 들였다.
이렇게 하늘을 보고 있으면 가족 생각도 나고, 행복했던 기억도 떠올라서 시간이 금방 갔기 때문이다.
본래 즐거운 순간이 빨리 지나가듯이.
달이 사라지고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순식간에 아침이 찾아왔다.
야속할 만큼 빠른 시간을 아쉬워하며 나는 일리나를 깨웠다.
[일리나. 아침이야. 일어나.]
조심조심 몸을 흔들었지만, 체력이 다한 일리나는 아무리 깨워도 금방 일어나지 못했다.
어디 아픈가 싶어 걱정했지만, 숨소리가 일정한 것을 보면 아파서 못 깨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그래. 좀 더 자라. 앞으로는 더 힘들 테니.]
하멜 숲에서 그녀가 고생한 것을 알았기에 나는 좀 더 시간을 주었다. 그렇게 점점 더 높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기다리는 그때.
“낑. 낑.”
어제 일리나를 노린 다이어 울프가 저 멀리에서 ‘헥헥!’ 대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지간한 성인 남자들보다 커다란 덩치에 궁예처럼 왼쪽 눈이 애꾸인 다이어 울프였다.
[또 일리나를 공격하려는 건가?]
나는 늑대를 주시했다.
눈치를 보며 어슬렁어슬렁 내 쪽으로 다가온 놈은 조금씩 거리를 좁히더니 내 앞에 섰다.
나는 놈의 모습을 살폈다.
어제의 씩씩함은 어디로 갔는지 쫑긋 솟아 있던 귀가 옆으로 축 늘어져 있었으며, 입에는 토끼 같은 것을 물고 있었다.
내가 빤히 보자 늑대가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내 앞에 내려놓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사람 머리통보다도 더 큰 토끼.
듬직하고 튼실한 토끼가 혓바닥을 내밀고 눈을 까뒤집은 채 죽어 있었다.
아무래도 선물을 하는 것 같았다.
먹지도 못할 선물을 받은 것은 둘째 치고.
[얘가 왜 이래?]
나는 내 앞에서 꼬리까지 살랑살랑 흔드는 늑대를 보았다.
이 녀석 태도를 보니 일리나처럼 정신줄을 살짝 놓은 것 같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어제 읽은 소설에 다이어 울프는 자신보다 강한 개체를 주인으로 섬기는 경향이 있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혹시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이놈을 길들인 건가?]
백작가 로미와 후작가 줄리의 은밀한 치정이라는 소설이다.
그 소설에서도 다이어 울프가 나왔다.
근육질 마초인 백작가 로미가 줄리를 다이어 울프로부터 구해주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때 맨손으로 뚜까팬 다이어 울프가 로미를 따르게 된다.
나중에줄리를 구하러 갈 때 녀석을 말처럼 타고 이동했다. 그리고 겨우 구한 줄리와 오순도순 행복해지려는 순간.
두 사람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나타나서 ‘너희는 사실 피가 섞인 친남매다!’ 라며 쇼킹한 전개와 속편을 예고하는 소설이었다.
하멜 성에 있는 소설 대부분은 이렇게 뒤통수 제대로 후리는 스펙타클한 반전이 있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나중에 마누라한테 추천하고 싶을 정도다.
[혹시 어제 내가 주둥이를 너무 꽉 쥐고 안 놓아줘서 길이 든 건가?]
그렇게 의심하며 나는 다이어 울프를 보았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다이어 울프는 어느새 강아지처럼 온순해진 모습으로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낑낑대는 녀석의 애교를 보고 있자니 살짝 미안해졌다.
따지고 보면 얘도 먹고살려고 그랬던 것뿐인데 내가 너무 했지 싶었다.
[그래. 늑돌아.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미안했다.]
이름을 붙여주자 늑돌이는 주위를 맴돌더니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강아지 같은 그 행동에 나는 뼈만 남은 손으로 아프지 않게 녀석의 목과 턱을 긁어주었다.
싫지 않은 것인지 늑돌이는 혓바닥을 내민 채 숨을 골랐다.
영락없는 강아지의 모습.
[고기는 저 철없는 아가씨랑 나눠 먹도록 하자.]
나는 토끼의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늑돌이에게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꼬챙이에 끼워 모닥불에 구웠다.
그동안 늑돌이는 내장을 먹으며 일리나를 보았다.
햇볕을 받은 일리나는 이제 좀 괜찮아졌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깨는 일리나를 보자 늑돌이가 내밀었던 혓바닥을 도로 넣고, 살랑대던 꼬리도 멈추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것이 당장에라도 일리나의 목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나 말고 다른 인간은 경계하는군. 역시 눈에 흉터 때문에 그런가?]
나는 늑돌이의 눈을확인했다.
녀석의 눈에 난 흉터는 칼에 베인 상처였다.
발톱으로 했다기엔 너무 선명한 상처.
사람이 칼로 벤 상처가 분명했다.
인간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으리라.
고로 지금 이 반응도 일리나가 자신을 공격할 것을 우려해서 취하는 행동이 분명했다.
나는 흥분하는 늑돌이를 진정시키며 일리나를 불렀다.
[깼어?]
“네. 안녕히 주무…. 히익!! 느, 느, 늑대!!”
정말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그 늑대는 대체 왜? 아! 호, 혹시 제 아침밥인 가요? 어제 말했던 대로….”
[…아니야.]
“아침밥도 아닌데 몬스터는 왜 안고 계신 건가요?”
[늑돌이야.]
“네? 그거 늑대잖….”
[늑돌이라고.]
“아. 네….”
겨우 이해한 일리나를 뒤로하고 나는 뛰쳐나갈 것 같은 늑돌이를 제지했다.
으르렁대며 이빨을 드러내는 늑돌이의 모습에 일리나는 겁이 났는지 뒷걸음질을 치며 내게 눈치를 주었다.
아무래도 정말 키울 생각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예전에 딸이랑 동물목장 자주 봐서. 강아지 길들일 줄 알아.]
“동물목장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건 강아지가 아니라. 늑대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지. 잘 봐. 앉아!]
늑돌이는내 명령을 알아듣지 못하고 일리나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실패다. 하지만 첫 명령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일어나려는 늑돌이의 엉덩이를 손으로 누르며 다시 명령했다.
[자. 이게 앉아야. 내가 앉아 했을 때 또 일어나면, 널 복날에 팔아버릴 거야.]
“!?”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계속 앉아를 강조하며 늑돌이의 엉덩이를손으로 눌렀다.
살기를 동반한 스파르타식 교육에 눈치 빠른 늑돌이가 앉은 상태에서 가만히 있었다.
[봐. 금방 따르지?]
“…네. 그런데 얘는 왜 잡으신 건가요? 혹시 심심하셨던 건가요?”
[아니야. 심심하기는 했지만, 그건 아니야. 그냥 아침 되니까. 알아서 얘가 왔어.]
“알아서 왔다고요? 아! 혹시 인정받으신 건가요?”
[인정을 받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예전에 읽은 책에 다이어 울프들은 자신이 인정한 강자를 따른다고 나와 있었거든요. 자기보다 강한데도 관용을 베풀고 살려주면 충성스러운 부하가 된다는 거죠.”
[무슨 책인데?]
“네? 아, 저, 제, 제목은 말 못해요.”
아무래도 일리나도 백작가 로미와 후작가 줄리의 은밀한 치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두영님을 따르는 걸 보니 그 책 내용이 사실이었나 봐요.”
[그런가 봐. 근데, 혹시 나 말고도 늑대를 길들인 사람이 많이 있어?]
“잘은 모르지만, 용병들이 늑대들을 테이밍하는 일이 간혹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대부분은 새끼 때부터 길들여요. 이렇게 다 성장한 성체 야생 다이어 울프가 사람을 따르는 경우는 보기 드물죠. 하물며, 사람도 아닌 언데드를….”
[그래? 뭐. 아무렴 어때. 이렇게 주인을 잘 따르는데. 그치? 늑돌아.]
“크릉! 크릉!”
내 말에 늑돌이가 갑옷 아래 드러난 정강이뼈를 핥고 깨물었다.
열심히 애교를 부리는 늑돌이를 보니 일리나 때문에 우울했던 기분이 나아졌다.
[녀석. 애교 부리기는.]
“애교가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몸 상태도 좋아진 거 같으니 다시 출발하자. 여기 토끼고기는 적당히 익은 것 같으니까. 가면서 먹도록 하고.]
“네….”
[네빌이 도중에 나 부르면 큰일 나니까. 서두르자.]
“아…. 저기 두영님.”
[왜?]
“두영님께서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건 감사해요. 하지만 전 역시 일검님 곁에 있고 싶어요.”
[…또야? 내가 어제 안 된다고 했지!]
“부, 부탁해요. 두영님! 제발. 돌아가게 해주세요!”
[안 돼! 안 되는 건 안 돼! 일리나 네가 아직 네빌 그 녀석이 얼마나 미친놈인지 몰라서 감이 안 잡히나 본데, 성으로 돌아갔다간 넌 그놈한테 온갖 이상한 짓을 다 당해서 비참하게 죽을 거야! 그놈이 죽인 사람들 숫자만 해도 저 산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라고! 완전 사이코패스라고!]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이제 달리 돌아갈 곳도 없는 걸요.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절 도와준 일검님 곁에서 눈을 감고 싶어요.”
[무슨 소리야! 가족이랑 가문 사람들이 널 위해 희생했다면서! 이렇게 쉽게 포기해도 괜찮아? 너 이대로 돌아가면 그 사람들 희생이 물거품이 되는 거야!]
“저도 알아요. 하지만 이제 더는 저 때문에 누군가 희생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제가 살기 위해서 누가 희생해야 한다면, 가족이 구해준 목숨이라 한들 구차하게 연명하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절 위해준 사람과 함께 눈을 감고 싶어요. 같은 자리에서 그분들께 사죄하고 싶어요.”
미련 없이 진지하기 짝이 없는 일리나의 모습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네빌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녀를 성으로 데려가는 것은 자살행위와도 같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 마을로 데려가야 옳다.
그러나 당사자인 일리나의 의사가 너무 확고하고 완강했다.
이만큼 완강하면 설사 내가 일리나를 마을까지 데려다 준다고 해도, 자기 발로 돌아오거나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허튼 생각을 할 것 같았다.
일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종종 봤기 때문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대체 이 대책 없는 아가씨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부탁해요. 두영님.”
[…지금 네가 가더라도 일검을 구할 순 없어. 그래도 진짜 돌아가고 싶어?]
“네, 저 혼자만 살아남고 싶지 않아요.”
[널 살리는 게 일검의 뜻이라 해도?]
“네.”
쇠심줄 같은 고집이었다.
이래서야 술병 걸린 아가씨 셋을 상대하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
[젠장. 나도 모르겠다. 어차피 내 인생도 아니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감사합니다. 이제 와서 하기엔 너무 이상한 말이지만, 두영님은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내 허락에 태양을 등진 일리나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 찬란해 눈이 부실 정도라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좋은 사람은 무슨. 그래 봐야 해골인데.]
“지금도 좋은 사람 같으세요. 분명, 언데드가 되기 전에도 좋은 일을 많이 하시던 분이시겠죠.”
[좋은 일이라…. 그랬을지도 모르지.]
“헤헤헤.”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뭐 좋다고 그리 웃어?]
“고마워서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신 게.”
[너 때문에 미치겠다. 진짜.]
나는 일리나의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어떻게 해야 네빌의 손에서 이 여성을 살릴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 이제 갈까요?”
고민하는 사이 일리나가 토끼고기를 들고 일어났다.
고기를 한입 먹은 그녀는 하멜 성 방향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나는 먼저 가는 일리나의 모습에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뒤따랐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뭐랄까, 몸이 점점 가라앉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 두영님! 발밑이!?”
[응?]
모래늪에 빠진 것처럼 갑자기 하반신이 아래로 푹 꺼졌다.
상체만 빼꼼히 나온 몰골이 되었다.
[이, 이게 뭐야! 바닥이 왜이래?!]
“컹! 컹!”
땅으로 가라앉는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늑돌이가 갑자기 한 쪽을 보며 짖기 시작했다.
녀석을 따라 시선이 옮기니 그곳엔 노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마른 체형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마에는 뾰족한 뿔이 나 있었다.
상반신은 선명한 빨래판 복근이 있었으며, 그 아래 하반신은 회오리치는 모래로 이뤄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아마도 네빌 같은 마법사이리라.
“인간과 대화하는 데스나이트라…. 망령치고는 이상한 녀석이로군.”
남자는 어느새 머리 빼고 온몸이 다 모래에 가라앉은 날 보았다. 그리곤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뭐냐. 넌.]
“나 말인가? 내 이름은 사각(沙角)이라고 한다. 르나르국을 수호하는 칠각보전의 일원이지.”
[사각, 사각이라…. 그것참 싱싱한 이름이군. 그런데 칠각보전은 뭐냐. 새로 나온 한약방 이름이냐?]
“한약방? 어이가 없군. 한낱 망령 주제에 감히 우리 칠각보전을 능멸하려는 것이냐?”
[속이 좁은 녀석이군. 그냥 궁금해서 질문했을 뿐인데.]
“닥쳐라! 육체에 이어 영혼마저 소멸하고 싶은 것이더냐!”
[말도 안 통하는 놈이구나. 됐고, 이거 네가 한 짓이지? 곱게 말할 때, 나 꺼내라. 혼나기 전에.]
나는 오른팔을 꺼내 늪처럼 가라앉는 모래를 가리켰다.
마법에 대한 문외한인 나도 분위기로 앞에 있는 사각사각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망령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 그대로 지옥으로 돌아가거라.”
[어?]
그 말을 끝으로 모래가 점점 날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누가 발목을 잡고 아래로 잡아 당기는 느낌이었다.
나는 얼른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올라갔다. 하지만 올라가는 것보다 몸이 빠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런!]
“두영님!”
“컹! 컹!”
내가 모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일리나와 늑돌이가 나왔다.
일리나는 날 꺼내주기 위해 손을 뻗었고, 늑돌이는 사각에게 이빨을 보였다.
늑돌이를 본 사각은 콧방귀를 뀌더니 손을 뻗었다.
“한낱 개새끼 따위가. 누구 앞이라고 이빨을 세우느냐. 네 더러운 주인과 함께 사라져라!”
[자, 잠깐! 그만둬!]
사각이 늑돌이에게 손을 뻗자 바닥의 모래가 날카로운 송곳처럼 뭉치더니 솟구쳐 올라 늑돌이의 몸을 꿰뚫었다.
배부터 꿰뚫린 늑돌이는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부들부들 떨던 녀석은 하나뿐인 눈으로 날 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느, 늑돌아!! 너 이 개새…!]
늑돌이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몸이 아래로 빠졌다.
모래가 머리를 덮으면서 사방이어두워졌다. 그렇게 나는 한 치 앞도 볼수 없는 어둠 속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