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18화.
일리나가 소리쳤다.
“갑자기 무슨 짓이세요!”
“응? 왜 화를 내는 거지? 설마 이 몬스터를 공격한 것에 화를 내는 것인가?”
그녀가 따지듯 외치자 사각은 이해할 수 없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해줬는데 화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지금 일리나는 그가 만든 모래 송곳에 찔려 죽어가는 늑대를 보살피고 있었다.
인간이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괴물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뭐지? 미친년인가?’
이해하지 못해 당황한 사각은 다음으로 이어진 일리나의 행동에 더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두영님! 괜찮으세요!? 기다리세요! 지금 구해 드릴게요!”
일리나가 가녀린 두 손으로 바닥을 두드리더니 땅을 파헤치며 데스나이트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늑대에 이어 이번엔 데스나이트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미친년인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사각은 그녀가 미쳤다고 판단했다.
인간이 망령을 구조하려고 하다니?
그것도 평범한 망령이 아닌 데스나이트를?!
그의 상식 아니, 온 세상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흑마법사가 아니라면 말이다.
“마력이 없다. 흑마법사는 아닌 것 같고…. 진짜로 미친 인간이겠군.”
사각은 일리나의 행동을 보며 그렇게 확신했다.
그가 가진 상식으로는 그렇게밖에 여길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모래를 파내는 일리나의 행동에 어째서 그녀가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를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설마 망령과 한통속인가? 그렇다면…. 저 여자도 흑마법사 네빌의 수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언데드는 산 자를 증오하는 망령. 살아 있는 인간을 부하나 주인으로 맞이할 리 없다. 그렇다면…. 서, 설마! 이 여자가 성녀 엘리아나?’
여러 가지 추측성 가설을 떠올리던 사각은 일리나의 모습을 보며 그녀를 성녀라 판단했다.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흑마법사 네빌이 차지한 성에서 유일하게 생존이 가능한 존재가 바로 불사자인 성녀 엘리아나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그녀가 성녀라서 생존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네빌에게 있어서 성녀 엘리아나가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생존할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가 성녀 엘리아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간자를 통해 입수한 극비 정보 중 하나였다.
‘설마, 우리들의 공격을 먼저 알아차린 네빌이 데스나이트를 시켜 그녀를 피난시키려 한 것인가?’
일리나를 성녀로 착각한 사각은 지금 상황을 근거로 자신의 가설에 살을 덧대며 소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르나르국의 공격을 알아차린 네빌이 성녀를 피신시켰다는 시나리오였다.
그럴싸한 시나리오였지만, 아무리 치밀하게 각본을 짜도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성녀에게 아무런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지?’
그가 알기로 성녀는 기본적으로 신성력이라 불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성녀를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한눈에 “아! 저 사람이 성녀구나!” 라고 알 수 있는 능력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그녀에게선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도 금방 느낄 수 있는 게 성녀의 신성력이다.
수백 년을 산 괴이인 그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하나겠군. 성녀가 자신의 힘을 잃은 거야!’
사각은 두건 속에 숨겨진 턱에 손을 괴며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갔다.
이번 시나리오는 성녀가 자신의 힘을 잃었다는 전제가 모티브였다. 그러나 다시 시작된 그의 시나리오는 잘 써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알기로 성녀가 가진 신성력은 성녀 당사자가 없애고 싶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불사의 신성을 다음 사람에게 직접 넘겨준 것이 아니라면…. 그걸 없앨 수 없….”
추측을 이어가던 사각은 흠칫했다.
“서, 설마! 모르는 사이에 네빌이 우리보다 빨리 성녀의 봉인을 풀고, 그 힘을 빼내간 것인가!”
뒤늦게 성녀가 이미 불사자의 힘을 잃었다고 여긴 것이다.
[틀림 없다. 그 비열한 놈이 이미 불사자의 비밀을 빼내간 거야! 괘씸한 놈!]
그는 다시 궁리하더니 자신의 추측을 기반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타당하고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지만, 그의 시나리오는 좀처럼 일리나가 성녀라는 어긋난 전제에서 벗어나지를못했다.
두영과 일리나가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 들었더라면, 이런 추측은 하지 않았겠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그는 어느새 자신 만의 생각에 빠져 일리나를 성녀라 확신하고 말았다.
“너는 성녀인가?”
참을성을 잃은 사각이 확인을 위해 일리나에게 직접 물었다.
그가 살의를 보이며 협박하듯이 묻자 일리나는 바닥을 두드리던 행동을 멈추더니 그의 살의에당돌하게 저항하며 외쳤다.
“아니에요! 제가성녀라니!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예요!”
“흠. 그렇다면 어째서 데스나이트가 너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던 것이지?”
“그건….”
다시 이어진 질문에 일리나는 고민에 빠졌다.
두영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힘들거니와 설명하더라도 자신이 아너스 왕국의 반역자라는 것이 들통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반역자라는 사실을 알리면 당연히 좋지 않을일을 겪을 가능성이 높으므로그녀는 답하기가 망설여졌다.
‘저자가 정말로 칠각보전의 사각이라면 르나르국의 사람이야. 르나르국과 아너스 왕국은 동맹국이니까, 내 정체를 알면 잡아갈지 몰라.’
그들에게 잡히면 당연히 동맹국인 아너스 왕국으로 송환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로서 왕에게 다시 붙잡혀 그의 노리개가 될 것이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문의 모든 사람의 희생과 헌신이 수포로 돌아가리라.
‘아, 안 돼!’
막상 추악한 로서 왕에게 붙잡혀 노리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들자 일리나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녀는 죽으면 죽었지, 그 더러운 왕의 노리개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일리나는 모래가 묻은 손을 휘저으며 강하게 말했다.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전 성녀가 아니에요! 평범한 하멜 성의 주민입니다! 그러니 돌아가 주세요!”
사각은 일리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첫 탈환전이 마무리된 것이 벌써 3개월.
긴 시간이 지난 터라 평범한 인간이 하멜 성 인근에 아직 남아 있을 리 없다.
설사 남아 있더라도 해도 데스나이트와 함께 있는 것은 설명되지 않았다.
일리나가 성녀이고, 아니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사각의 입장에서 일리나는 충분히 의심스러운 인간이었다.
“아무래도 경각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군.”
결정을 내린 그는 여전히 모래를 파고 있는 일리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아래에서 모래가 올라왔다.
마치 거대한 지렁이처럼 생긴 모래였다.
꾸물꾸물거리며 올라온 모래가 일라나에게 움직이더니 밧줄처럼 그녀의 몸을 묶어 제압했다.
“자, 잠깐! 무슨 짓이에요! 놓아주세요!”
일리나는 자신을 잡아챈 사각의 모래 밧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평범한 여인의 힘으로는 칠각보전의 힘을 뿌리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정말 평범한 주민이라면 놓아줄 것이니. 그러나 혹 거짓임이 드러날 경우, 감히 내게 거짓을 고한 죄를 물을 것이다.”
“두영님!!”
사각은 모래 밧줄에 묶인 일리나를 잡아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일리나가끌려가며 두영을 애타게 찾았지만, 모래 속에 갇힌 두영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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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겪는 생매장 체험은 최악이었다.
이미 죽은 몸이라 다시 숨이 막혀서 죽을 걱정은 없지만, 얼굴을 덮은 모래 때문에 앞을 볼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없으니 폐소 공포증에 걸릴 것만 같았다.
깜깜한 미로 속에 갇힌 기분..
정말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 몸뚱이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이렇게 내가 지체하는 동안에도 늑돌이는 죽어가고 있다는 것과 일리나 역시 놈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서둘러야 했다.
나는 손과 발을 휘둘렀다.
어서 빨리 지상으로 올라가야 한다는일념으로 손으로 느껴지지도 않은 모래를 휘젓고 차며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래는 물과 같아서 몸을 움직인다고 올라갈 수 없었다.
발이 바닥에 닿으면 그 힘으로 올라가련만 감각이 없으니 발이 바닥에 닿은 것인지 알 수도 없고,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나는마력을 모으며 아까 하멜 숲에서 쓰러뜨린 괴이의 촉수를 떠올렸다.
그런 촉수를 이용해서 모래 위로 다시 올라가는 상상을 했다.
‘네빌이 암흑오라는 내 뜻대로 움직인다고 했지. 한 번 해보자. 암흑오라!’
교육을 받으면서 들었던 네빌의 데스나이트 강좌를 떠올리며 암흑오라를 펼쳤다.
그냥 펼치지 않고 넓적하고 튼튼한 촉수의 이미지를 머리로 그리며 암흑오라를 움직였다.
‘제발. 성공해라.’
암흑오라로 모래를 헤치는 이미지를 그리며 멀쩡한 땅을 짚는 상상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모래 탓에 시각과 청각까지 마비되었지만, 암흑오라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마력 반응에 의존해땅을 헤집으며 위로 솟구쳤다.
집중해서 반복하자 모래가 갈라지면서 빛이 들어오고 시야가 트였다.
몸을 꽉 채우고 있던 모래가 갈비뼈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빠졌다.
나는 다시 딱딱해진 바닥을 손으로 집으며 밖으로 올라왔다.
[사, 살았다! 아니, 산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왔다!]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며 망토에서 나온 암흑오라를 보았다.
촉수는 괴이의촉수처럼 문어 다리 같은 모양이 아니라 커다란 손바닥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도중에 땅바닥을 짚고 올라오는 상상을 해서 모양이 손바닥 모양으로 바뀐 것 같았다.
다시 문어 다리를 상상하자 암흑오라가 문어 다리 모양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것을 상상하면 그 모습으로다시 모양이 바뀌는 것이 이미지가 중요한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응용할 수도 있었구나. 몰랐네.]
새로운 능력을 확인하며 나는 아직 파묻힌 발목을 확인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유사 같던 바닥이 돌처럼 딴딴해져 있었다.
사각이라는 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놈이 떠나면서 다시 단단해진 것 같았다.
‘일리나랑, 늑돌이는!?’
정신을 차리고 일리나와 늑돌이를 찾았다.
일리나는 사각이 데려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고, 늑돌이는 근처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고 있었다.
[사각사각 이 개만도 못한 놈! 감히 늑돌이를 이렇게 만들고 일리나까지납치하다니!]
치미는 분노를 삭이고 우선 늑돌이에게 다가갔다.
“끼잉. 끼잉.”
[119 아니, 네빌! 네빌! 야이! 도촬광 새끼야! 보고 있지!? 빨리 나와!]
죽어가는 늑돌이의 모습에 나는 네빌을 찾았다.
반응이 없었기에 다시 외쳤다.
[야이, 호로새끼야!안 들려?! 어서 나오라고!]
이 정도 욕을 했으면 머리 위에서 마법이 떨어졌을 테지만, 네빌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실험 탓에 지금은 내 상태를 확인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필이면, 이 중요한 타이밍에! 하여간 도움 안 되는 놈!]
나는 급한 대로 흙이 묻어 더러운 망토를 풀어 죽어가는 늑돌이의 상처를 감아준 후 늑돌이를 안아 들었다.
납치된일리나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일리나가어디로 갔는지도, 사각이라는 놈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도 알지 못했다.
쫓을 방법이 없는 셈이다. 하지만 찾을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네빌이라면 가능하다.
그놈은 예전에 내가 구해준 애들의 위치도 실시간으로 알려줬다.
그런 신비한 마법을 쓸 수 있는 놈이니, 일리나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녀석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싫지만,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그 방법뿐이었다.
[괜찮아. 늑돌아. 내가 지금 구해주마! 조금만 견뎌라!]
늑돌이를 꼭 안은 나는 하멜 성으로 달렸다.
어제 일리나를 안고 달린것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였기 때문에 하멜 성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땅을 부수며 달려 하멜 성에 도착한 나는 성벽을 단숨에 뛰어올랐다.
성벽에서 건물의 굴뚝과 지붕을 밟아 성내로 진입했고, 그 뒤에는 네빌의 실험실을 향해 계속 달렸다.
마침내 도착한 실험실 앞.
나는 닫힌 문을 뚫고 실험실의 안으로 들어갔다.
[마법발동 더럽게 늦네! 답답하게 굴지 말고 어차피 일어날 거 좀 더 빨리 일어나란 말이다! 이 느려터진 이 깡통아!]
여전히 빛의 구슬들이 실내를 밝히고 있는 실험실의 안, 네빌과 일검이 있었다.
일검은 기절이라도 한 것인지 다소곳하게 누워 있었지만, 네빌은 그런 일검의 위에 마운트를 하듯이 올라타고 있었다.
성질이 괴팍한 만큼 성미도 급해서 아직 기절 중인 일검의 뺨을 때리며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쓸모없는 깡통! 도움 안 되는 쓰레기 같으니!]
마치 부팅이 느린 컴퓨터를 탓하는 것 같은 말투.
하지만 실험이 실패해서 성질을 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네빌!]
[응? 뭐냐? 바쁘다고 했을 텐데?]
네빌은 심기가 아주 불편하다는 듯 내 쪽을 보며 말했다. 그러나 내 손에 들린 다이어 울프를 보자 화를 내는 것도 잊고 다시 말했다.
[그런데 그건 뭐냐?]
아무래도 또다시 호기심이 생긴 모양.
[늑돌이다!]
[늑돌? 아무리 봐도 다이어 울프 같다만?]
[그래.맞아. 그런데 내가 얘한테 지어준 이름이 늑돌이라고!]
[웃기는 놈. 한낱 몬스터에게 이름은 왜 지어준 거지?]
꼬치꼬치 캐묻는 네빌.
질문도 대답도 길어졌기에 나는 서둘러 늑돌이의 상처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보다 얘 상처를 치료해줘! 너 이상한 마법 특기잖아!]
[이상한 마법? 감히 나의 위대한 마법에 그따위 망발을 하다니, 죽고 싶은 거냐?]
[됐고! 그 위대한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어? 없어?]
[흥!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하다.]
[뭐? 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두영 너의 언행이 마음에 안 든다. 둘째 내가 부하인 너를 도와줘야 할 이유가 없다. 셋째 나는 언데드이기 때문에 망자를 대상으로 한 치료 마법은 가능하지만, 산 자를 대상으로 한 치료 마법은 사용할 수 없다.]
이것저것 말했지만 결국, 치료하지 못한다는 소리다.
힘들게 데려왔는데, 무의미한 노력이 되고 말았다.
[젠장! 늑돌아!]
이미 눈이 반쯤 감긴 늑돌이.
녀석을 살릴 방법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만난 시간이 짧아서 제대로 된 추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죽어가는 늑돌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그 인간 여자를구하러 가더니, 이상한 것을 데리고 나타났군. 혹시 그놈의 배에 인간 여자라도 들어 있는 것인가? 크큭!]
장난 섞인 네빌의 말에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주저앉아 죽어가는 늑돌이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흠…. 분위기 한 번 개같군. 기억을 읽도록 하겠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네빌이 먼저 내 곁에 다가와 머리에 손을 댔다.
그는 내가실험실을 나가 일리나를 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읽었다.
짧은 기억이었기 때문에 기억을 읽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랬군. 그랬어. 크크! 르나르국이 오고 있는 것인가! 사각이라. 어리석은 왕이 이번엔 제법 거물을 보내셨군! 크크크크크!]
기억을 읽은 네빌은 어째서인지 기뻐했다.
음침한 네빌의 목소리가 방 안에 퍼지자 색색 숨을 몰아쉬던 늑돌이의 숨이 완전히 멎었다.
녀석은 완전히 눈을 감았다.
숨이 끊어진 늑돌이의 모습에 나는 슬픔에 잠겼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던 네빌은 죽은 늑돌이를 보며 웃음을 멈추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한심한 놈. 잠깐 만난 늑대이지 않은가. 산 자도 아닌 망자가 겨우 이런 일에 그리도 슬퍼한다는 말이냐.]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으로 늑돌이의 털을 손으로 정성스레 빗겨주었다.
[나약한 놈. 정 원한다면 내 친히 그 늑대를 망자로 되살려 줄 수도 있다. 그래. 네가 내게 완전한 복종을 맹세한다면 말이지.]
[싫다.]
[녀석을 되살려준대도 싫다는 거냐?]
[그래. 어차피 네가되살린다는 건, 나처럼 추한 몰골일 거 아니야. 안 그래?]
[흠….]
[이런 꼴은 사는 게 아니야. 그러니 늑돌이는 내가 나중에 땅에 묻어 줄 거다. 혹시 그런 짓 했다가는 가만 안 둘 테니 명심해!]
[건방진 놈 같으니. 기껏 자비를 베풀어주려고 했더니 아주 배가 불렀군. 원하지 않는다면 되었다! 그보다 네가 기껏 구해준 인간 여자는 지금 묘한 상황에 처한 것 같다만?]
네빌이 거대한 크리스털을 만들어 그 속으로 일리나를 비추었다.
[일리나!]
크리스털 속에 비친 일리나는 억울하게 마녀사냥 당한 중세 여인들처럼 나무 기둥에 몸이 묶인여 있었다.
그 상태로 심문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주위에는 수많은 병사가 함께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군. 사각 그놈은저 쓸모없는 인간여자를 대체 왜 잡아간 거지?]
네빌은 일리나가 잡혀간 이유가 궁금한 듯 평소 버릇대로 턱을 괴었다.
[나도 몰라. 그냥 잡아갔어.]
[음…. 혹시 저 인간 여자가 반역자라는 것을 알고서 잡으러 온 것인가?아니야. 르나르국이 아너스 왕국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 줄 이유도 없고, 그렇게 대단한 외교 카드가 되지도 않아. 그렇다면 대체 왜지? 대체 왜 저 인간 여자를 잡은 거지? 얼굴이 반반해 로나스 왕에게 바칠 제물로 데려간 것인가?]
네빌은 혼잣말을 하며 다양한 추측을 쏟아냈다.
로나스 왕의 성적 취향부터 시작해 로서 왕과의 내연 관계, 일검의 탈취, 불사자의 비밀 등 날카로운 추측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모두 제대로 된 근거가 없어서 제외되었다.
답답해진 네빌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휘휘 젖는 행동에 크리스털에 비치던 일리나의 모습이 점점 줌 아웃이 되며멀어졌다.
헬리 캠을 조종하는 것처럼 크리스털의 화면이 높아지면서 이번엔 일리나를 감싸고 있는 군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검, 활, 창, 방패 등 다양한 병장기로 무장한대규모의 병력이었다.
학교 운동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인원!
나는 불법 시위 현장에서 다져진 안목으로 일리나를 둘러싸고 있는 병력의 규모를 파악했다.
[8천 아니, 9천 정도인가?]
[신기한 녀석.]
[뭐가?]
[정확히 9,018명이다. 어떻게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고 눈대중만으로 정확하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이냐?]
[…짬밥 먹으면 다 알게돼.]
이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경험이 반이라고 실제로 짬밥 차도 어지간한 것은 다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오차범위 18명이라니.
이번 추측은 내가 생각해도 기록적이었다.
[그런데 저놈들은 대체 여기 왜 온 거야? 일리나는 왜 잡아가고.]
[일리나라는 여자를 잡아간 이유는 짐작이 안 간다만, 르나르국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은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처음 네게 마술 각인을 박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내린 명령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는가?]
그것이라면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아내 엘리아나를 지켜야 한다는 명령이었다.
체감 시간으로 무려 10시간 이상 내 아내를 지켜라. 내 아내를 지켜라. 실패하면 뒤진다. 한번 안 뒤지고 계속 뒤질 거다. 라며 사이비 종교처럼 계속해서 세뇌하고 협박했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기억나.]
[그때 너는 내 부하가 되면서 한 가지 조건을 걸었었지. 무고한 자를 해치는 짓을 할 수 없다고….]
[그래.]
[혹시 그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내가 했던 말도 기억나나?]
[몰라! 내가 무슨 천재도 아니고 그런 걸 일일이 다 어떻게 기억하겠어?! 답답하니까, 그냥 좀 말해! 자기 기억력 좋다고 자랑하는 거도 아니고 대체 뭐야?!]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외치고 말았다.
정을 주려던 늑돌이를 잃어서 나도 모르게 짜증이 치밀었다.
평소대로라면 이쯤에서 네빌의 강력한 중력 마법이 날아왔을 테지만, 그는 화내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그때 나는 네게 앞으로 상대해야 할 놈들은 결코 무고한 자들이 아니라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저들이 바로 내가 네게 엘리아나를 지키라고 한 이유다.]
말이 길어졌지만 요컨대.
[저놈들이 성녀를 노리는 적이라는 뜻이야?]
[그렇다.]
이쯤 되니 일리나를 구하기에 앞서 살짝 궁금해졌다.
첫 만남에서 보았던 대량 학살도 그렇게 대체 왜 저런 대규모의 인원들이 네빌을 노리는 것인지가.
내가 알기로 네빌은 성녀를 해칠 마음이 없었다.
내게 내린첫 명령에서 느낄 수 있듯이 오히려 아내라 말하며 그녀를 애지중지 보살폈다.
간혹 그녀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질 때면 그녀가 갇힌 얼음 속에 손을 넣어가면서까지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손가락만 살짝 넣어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면서 말이다.
그 마음을 익히 알기에 지금 모인 르나르국의 군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저들이 엘리아나를 노리는 이유가 뭐야?]
[궁금한가?]
[그래.]
내 말에 네빌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저들이 성녀를 노리는 이유에 대해서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리나도 한 번 언급한적이 있던, 불사자의 비밀에 연관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