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19화.
붙잡힌 일리나는 곧바로 파이로 대신에게 넘겨졌다.
파이로 대신은 모래에 묶여 꼼짝 못하는 일리나를 보더니 진군을 멈추고 그녀의 심문에 나섰다.
사각이나 되는 영웅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민간인을 납치했을 리 없으니 분명, 캐낼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리나에게 이름과 출신 그리고 데스나이트에 대한 것을 차례차례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된 파이로 대신의 질문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입을 열지 않는 그녀의 불성실한 태도에 파이로 대신은 직감적으로 그녀에게 어떤 비밀이 있음을 느꼈다.
그는 고문을 위해 독약을 꺼내 일리나를 압박했다.
“말하라. 네가 누구인지, 뭣 때문에 데스나이트와 함께 있었던 것인지. 말하지 않으면 이 화충환을 강제로 먹일 것이다.”
화충환(華蟲丸)은 르나르국에서 쓰는 독약으로 복용하면 단시간에 온몸에 벌레가 들끓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약이다.
실력이 좋다고 정평이 난 기사들도 반나절을 채 버티지 못하고 백치가 될 만큼 독한 약이었다.
“마, 말할 수 없어요.”
“하는 수 없군.”
파이로 대신은 일리나의 입을 강제로 벌리더니 화충환을 먹이려 했다. 그러나 그가 손을 쓰려는 찰나 사각이 경각과 진각을 데리고 나타났다.
“번거롭게 사람을 왜 자꾸 귀찮게 하시는 거시와요? 그냥 고문하면 되는 일 아니어요?”
“네 힘을 쓰면 바로 알 수 있지 않나. 한시가 급한데 괜히 고문한다고 시간 끄는 것보단 네가 나서는 게 빠르다.”
귀찮아하는 경각을 사각이 달래며 말했다.
“칫! 귀찮은데.”
사각의 말에 경각은 새침한 걸음으로 파이로 대신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침으로마른 입술을 적시더니 그의 팔을 당겨 자신의 가슴에 밀착시켰다.
“그러지 말고 파이로 대신이 제게 부탁해주면 좋을 것 같사와요.”
“경각님….”
다시 음기를 뿌리는 경각의 행동에 파이로 대신은 평정심을 유지하며 자꾸만 달라붙는 경각을 떼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경각의 미모는 아름답다.
적당히 굴곡진 몸매와매혹적인 행동 역시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범부라면 감히 거부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절세미녀이기 때문에 그녀의 유혹은 파이로 대신을 비롯한 모든 남자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런 탓에 파이로 대신 역시 때때로 그녀의 유혹에 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의무와 경각의 정체를 생각하며 참았다.
경각의 정체는 괴이다.
그것도 양기를 빨아먹는 음산(陰山)의 요물이다.
한 번 그녀와 잠자리를 하게 되면 정기가 다 빨려서 폐인이 되거나, 정낭 주머니가 터져 고자가 되기 때문에 평생 다른 여자를 안을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거부해야 했다.
“경각님. 부하들 앞입니다. 체면을 차릴 수 있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파이로 대신은 정녕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와요?”
“그건….”
파이로 대신이 곤란한 듯 답을 피하자 우장과 좌장이 앞으로 나왔다.
“경각님. 대의를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그쯤 하시지요.”
“그렇습니다. 본국의 칠각보전으로써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뭐라? 체통? 감히 한낱 인간 따위가 날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경각은 갑자기 들어온 방해에 표정을 구겼다.
흥이 깨진 것인지 자주 사용하던 어미도 잊은 채 살의를 뿌리며 두 장군을 압박했다.
강한 살의에 공포심을 느낀 우장과 좌장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죄송합니다. 경각님. 부하들이 아직 뭘 몰라 실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괴로워하는 두 부하의 모습에 파이로 대신이 손을 모아 용서를 구했다.
거사를 앞둔 지금 유능한 충신들을 잃을 순 없었다.
“흥! 이번만 특별히 봐주는 것이와요.”
제멋대로인 경각은 파이로 대신을 한 번 흘겨보는 것으로 그와 부하들을 용서해주더니 일리나를 보았다.
경각이 칠각보전임을 안 일리나는 겁을 먹고 몸을 떨었다.
“역시 뭔가 있군. 경각. 이제 장난 그만 치고 얼른 환술이나 걸어라. 시간 아깝다.”
“쳇! 알았사와요. 자! 추녀야. 내 눈을 바라보아라.”
“시, 싫어!”
일리나는 경각의 눈을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경각이 턱을 잡고그녀의 고개를 돌렸다.
일리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경각이 숨을 불자 그녀의의지와는 관계없이 두 눈이 저절로 뜨였다.
그녀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경각의 아름다운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평범했던 경각의 눈동자가 마치 악어의 눈처럼 바뀌었다.
홍채가 세로로 길어지고, 파충류에게나 있을 눈동자의 피막이 움직였다.
일리나는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넋을 놓았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멍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예…. 들립니다.”
“됐사와요. 최면술 걸었사와요. 이제 알아서 하시와요.”
최면술을 건 경각은 흥미를 잃고 물러나 파이로 대신의 옆으로 다가갔다.
또다시 찰싹 붙는 경각의 모습에 우장과 좌장이 나서려 했지만, 파이로 대신은 괜찮다는 듯 두 장군을 만류하더니 경각에게 팔을 내주고 일리나에게 물었다.
“출신과 이름을 소상히 밝혀라.”
“저는 아너스 왕국 제2공작 일로드 프라이드의 딸 일리나 프라이드입니다.”
“아너스 왕국의 제2공작? 이해할 수 없군. 하멜 성 근방에서 발견되었다던데 대체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왕국 기사들을 피해서 하멜 성으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도망을 쳤다? 혹시 아너스 왕국의 기사들로부터 도망을 쳤단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어째서 쫓기게 된 것인지부터 상세히 말해보아라.”
파이로 대신은 하나씩 차근차근 물어보았고, 머지않아 로서 왕의 아내들이 맞은 비참한 최후와 일리나가 반역죄로 몰려 쫓기게 된 그 배경까지 다 확인했다.
더불어 두영을 만난 것과 두영이 자신을 구해준 것, 네빌이 아너스 왕국의 영웅 일검을 잡아갔다는 사실과 일검이 그녀의 조상이라는 내막까지도 알아냈다.
파이로 대신은 일리나에 대한 것은 차치하고 일검이 잡혔다는 부분에 집중했다.
“네빌이 아너스 왕국의 영웅을 잡아갔다고? 그 이유가 뭐지? 설마 네빌 놈 일검을 언데드로 만들어 부하로 삼을 속셈인가?”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가능성이 높다? 이런…. 곤란하구나. 곤란해.”
파이로 대신은 충격에 빠졌다.
칠각보전 3명이 합류해 겨우비등비등한 상태가 되었다고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아너스 왕국의 영웅을 부하로 삼아 대항한다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언제냐! 대체 언제 일검이 잡혀간 것이냐!”
“어제 초저녁 무렵입니다.”
“초저녁이라면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군! 아직 시간은 있다는건가.”
파이로 대신은 아무리 네빌이라도 일국의 영웅을 하루 만에 수하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빌의 수족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이기에 속히 칠각보전에게 일렀다.
“진군을 서둘러야겠습니다! 지금 당장 진군해 기습을 가하지 않으면 네빌이 일검을….”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사와요.”
“예?”
파이로 대신의 말에 경각이 그의 앞을 막아서더니 턱짓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진각과 사각 역시 긴장한 채 경각을 따라서 허공을 보았다.
그곳에는 데스나이트 두영과 일검을 대동한 네빌이공중에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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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전, 네빌은 불사자의 비밀에 대해서 설명했다.
불사자의 비밀.
그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바로 괴이들이 처음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인간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인 강함을 지닌 괴이들은 ‘뇌조’라는 이름을 가진 괴이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뇌조는 인간과 몬스터들이 양립하던 이 땅을 집어삼키기 위해 괴이들을 이용해 침공을 개시했다.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괴이들의 갑작스러운 침공에 인류는 혼란에 빠졌고, 끝을 알 수 없는 전란에 휘말리게 되었다.
힘이 부족했던 인간들은 대륙의 평화를 위해 하나로 뭉쳤다. 그리고 모든 군대와 무기를 동원해 괴이의 침략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괴이의 힘은 인간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누구든 앞을 막으면 처참한 최후를 맞을 뿐이었고, 훈련조차 되지 않은 병사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그저 고깃덩어리로 전락할 뿐이었다.
필사적인 저항에도 인류는 파죽지세로 밀리기만 하자인간들은 절망했다.
삶을 비관하고 두려움에 빠져 괴이들이 없는 바다너머로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달아나면서 전열은 금세 무너졌고, 결국 대륙의 반 이상이 괴이들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인류는 희망을 잃은 채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허나, 모든 인간의 전의가 꺾인 바로 그날.
이 세상에 성녀가 내려왔다.
영조(靈鳥) 피닉스가 괴이에게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신들의 세계를 벗어나 직접 하계로 내려와 성녀의 몸에 깃들었다.
[엘리아나 말이지?]
[아니, 최초의 성녀는 엘리아나가 아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인간이었지.]
내 추측에 네빌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계속 설명했다.
[인간을 가엾이 여긴 영조 피닉스는 고통받는 인간들을 돕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용감한 여성의 몸에 직접 깃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서 자신의 힘을 빌려주는 것으로 세상을 멸망에서 구원할 기적을 선보였다고 한다.]
[기적?]
[괴이들의 청소 말이다.]
네빌이 주먹을 쥐며 말했다.
영조의 힘을 얻은 성녀는 그 힘을 자유자재로 펼치며 괴이들을 몰아냈다. 아니, 몰아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네빌의 말대로 청소를 한 수준이었다.
영조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특히, 타락한 괴이들에게는 치명적이어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성녀는 바로 그 힘을 이용해 위기에 처한 인간들을 구원했다.
괴이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희망을 얻은 인간들은 성녀의 밑에서 뭉쳐 괴이들에 맞섰다.
당대 최고의 영웅들뿐만 아니라 뇌조의 지배를 거부하고 인간의 편에 서준 괴이들도 연합해 뇌조의 군대에 대항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이 전쟁은 이후 불사 전쟁이라 이름 붙여졌고, 인류사 이래 가장 위대한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긴 전쟁이 끝자락.
인류는 마침내 뇌조를 물리쳤다.
뇌조의 지배는 완전히 사라졌고, 뇌조라는 구심점을 잃어버린 엄청난수의 괴이드은 성녀와 그녀의 군대를 두려워하며 대륙과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뇌조를 처치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성녀는 평안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의무를 마치고서 그 힘을 한 젊은 인간에게 양도하고 소멸을 맞이했다고 한다.
남겨진 인간들은 성녀의 힘을 받은 인간을 성자라 부르며 그를 중심으로 뭉쳐서 엉망이 된 땅을 재건했다.
평화로운 시대가 오고200년이 지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성녀로부터 피닉스의 힘을 받은 성자가 늙지도, 죽지도 않은 채 계속 생존한다는 사실이었다.
[죽지도 늙지도 않았다는 뜻이야?]
[그래.]
[과연, 그래서 불사자의 비밀이라고 한 거구만.]
[본래 영조 피닉스는 부활과 불멸의 상징이 되는 신이었다. 그런 영조의 힘을 물려받았으니 성자가 늙지도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지.]
[언데드처럼?]
[언데드와는 다르지.]
[뭐가 다른 데?]
[우리는 고작해야 시각과 청각만존재하지만, 성자는 모든 감각을 지니고 있으니까. 자손을 낳아 번성할 수도 있으니, 엄연히 차이가 있다. 말 그대로 불로불사인 것이지.]
[요컨대 죽은 불사자는 언데드, 살아 있는 불사자는 성녀나 성자라는 거구만.]
[아무튼, 이 영원한 축복을 사람들은 불사자의 힘이라 부르며 성자를 축복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축복을 받은 성자의 상태는 좋지 않았지.]
[왜?]
[분에 넘치는 수명을 받게 된 그는 자신의 아이와 그 아이에 아이의 죽음까지 보면서 점점 더 미치기 시작한 거지. 애초에 불사자의 힘을 받을 정신력이 없었던 거야. 영조 피닉스가 직접 선택한 성녀도 아니고, 성녀가 임의로 선택한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몸은 멀쩡해도 마음과 정신은 썩어들어간 것이지.]
[겉은 멀쩡한데 속은 곯았다는 거군.]
[그래.]
네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그 설명에 따르면 당시 인간들의 평균 수명은 불과 50년에 불과했다고 한다.
먹을 것도 별로 없고, 전쟁으로 오염된 땅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보다 몇 배나 많은 삶을 자기 혼자만 살게 된다면?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가족들이 그리워 미칠 지경인데, 이런 고통을 영원토록 계속 떠안고 살아야 한다면….
감정에 문제가 있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에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가벼운 불안증세를 보이던 그는 점차 괴팍해졌고, 이윽고 아끼던 후손이 타국과의 마찰에서 희생당하자 그 분노가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었다고 한다.]
[극단적으로?]
[복수에 눈이 먼 성자가 자신이 가진 영조 피닉스의 힘을 마구잡이로 휘두른 거지. 그 엄청난 힘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불태웠고, 왕국 전체가 겁화에 휩싸여 사라지고야 말았다고 전해진다. 사망자는 공식 기록으로만 내가 지금까지 죽인 인간의 10배는 족히 넘는 수준이지. 비공식으로 따지면 더 많을 테고.]
[…10배라고?]
10배라는 말에 충격에 빠졌다.
나는 네빌이 죽인 사람들의 무덤을 직접 만들어서 시신이 얼마나 되는지 안다.
신체가 멀쩡히 남은 사람의 시신만 해도 최소 1만이다. 그런데,그 10배라면 미니멈으로 잡아도 10만 이상이라는 의미였다.
사상자도 아니고 사망자가 말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재해가 아닐 수 없다.
[끔찍하구만.]
[수십 만 명이나 디는 인류를 한 번에멸한 그날의비극은 대륙각지에 퍼졌다. 사람들은 정신이 불안정한 성자를 과거 뇌조처럼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를 괴이처럼 여기기 시작했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걸어다니는 핵무기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결국, 성자를 믿는 신자들과 그의 무자비한 폭력에 반발한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 힘들게 일군 세계가자신 탓에 다시 망가지는 것을 본 성자는 큰 슬픔에 빠졌지.]
네빌이담담히 말했다.
조용히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평소처럼 거칠지 않았다.
뭔가 후회와 미련에 젖은 것처럼 부드러웠다.
네빌은 이어서 성자가 대학살을 일으킨 후를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