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20화.
완전히 미쳤으리라는 내 예상과 달리 성자는 약간의 이성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본래 정의를 위해 싸웠던 용사였던 만큼, 광기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수많은 인명을 학살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손가락질하는 민중들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등 최소한의 속죄라도 하려고 부던히도 노력했다. 허나, 불사자의 힘은 그에게 안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힘을 양도하지 않는 한 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 성자는 자신의 힘을 다른 누군가에게 바치고 싶어했고, 그 바람대로 그의 힘을탐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성자에 밑에서 그를 섬기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자신들이 그 짐을 대신 짊어지겠노라고 간청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탐욕이가득했다.
강한 힘과 불멸의 삶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
힘과 영생을 바라는 그들의 욕심을 알아차린 성자는 이후 자신을 따르는 신자들을 뒤로하고 도망쳤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쳐 속세를 멀리하고 은거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전쟁은 성자를 거부하는 이들의 승리로 돌아갔고, 하나로 뭉쳐졌던 국가는 사분오열되어 여러 왕국과 제국으로 쪼개지게 되었다.
[몇 번의 전쟁과 분쟁을 더 거친 후에 르나르국과 다른 여섯 국가들이차례차례 탄생했지. 그게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전이다. 왕조가 몇 번씩 바뀌긴 했지만, 지금 엘리아나를 노리는 왕국들은 모두 그때 성자가 떠나면서 파생된 국가들이다.]
[500년이라. 생각보다 역사가 깊네.]
[비열한 놈들이 오래도록 해 처먹은 게지.]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됐어? 성자 말이야.]
[성자가 사라지고 복수와 은혜를 갚기 위해 당대 인간들은 성자를 찾는 것에 혈안이 되었다. 자손 대대로 대물림하는 끈질긴 추적 끝에 간신히 성자를 찾아냈지. 하지만 성자를 찾았음에도 그들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
[왜?]
[예상과 달리 성자는 한적한 산골에서 죽어가고 있었거든. 불사자인 성자가 죽음을 앞두고 있던 게지.]
[불사라면서 죽었다고? 그럼….]
[그래. 그들이 성자를 찾기 전에 이미 불사자의 힘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거다.]
네빌이 엘리아나를 보며 말했다.
바로 엘리아나에게 넘어갔다는 말이었다.
네빌은 수정 속에 갇힌 엘리아나를 보며 말했다.
죽어가는 성자를 본 사람들은 생각했다.
누군가 그의 힘을 먼저 가로챘다고.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성자의 죽음 이후 이 세상에는 사라진 불사자의 비밀에 대한 온갖 소문들이 나돌았다.
성자가 그 힘을 잃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는 추측부터 누군가 성자의 힘을 가로챘다.
성자가 새로운 자식을 낳고 그 자손에게 넘겨주었다.
피닉스가 부활했다는 유언비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추측성 소문들이 세상에 퍼졌다.
이것은 후에 불사자의 비밀이라는 전설로 불리게 되었고, 탐욕스러운 자들이 힘과 영생을 얻기 위해 불사자의 힘을 찾아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네빌 앞에 있는 엘리아나를 찾아다닌 것이다.
[그러면 엘리아나가 성자를 죽인 건가?]
내 말에 네빌은 얼음 수정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그래. 엘리아나는 성자가 불태운 왕국의 유일한 생존자의 후손이었지. 선조 대대로 성자를 찾아 복수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녀 역시 복수를 위해 성자를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죄책감에 빠져 타락해가는 성자를 보고 마음이 바꿨다고 하더군.]
[마음을 바꿨다고?]
[용서해줬단 말이다. 그녀의 말로는 소중한 사람의죽음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 대대로 가르침을 받아서 오히려 성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 자신도 그렇게 아끼는 사람들을 계속 잃고 또 잃었더라면 미쳐버리고 말았을것이라고 말이야. 하물며 아끼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한다면 자신이라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성자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했지.]
[하긴, 피해자의 심정은 때때로 날카로운 단죄가 되기도 하지.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도 그 심정을 부정할 수는 없었지.]
학교 폭력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사건을 맡은 기억이 있었다.
학교 폭력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가해자 5년 2명을 손으로 때려죽인 사건이다.
경찰에 붙잡히고 왜 신고를 하지 않았냐고 하니, 아들은 원통하게 죽었는데가해자들은 소년원에서 몇 년 놀다가 나와서 다시 버젓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화를 참을 수 없어서 그랬다고 했다.
이후 가해자 아버지는 구치소에서 자살했으며, 그 유서에는 나머지 3명을 잡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적혀 있었다.
솜방망이 처벌은 경찰들도 알고 있는문제였다.
경찰만이 아니다, 검찰도 사법부도모두 알면서도 고칠 수 없는 문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지만, 솜방망이 처벌을 강화하는 의제는 인기도 없고 뽑히지도 않았다.
이 사실을 잘 알기에 경찰에서도 공론화를 하려고 했으나, 윗선들이 쉬쉬하는 바람에 매스컴에도 알려지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의사건을 통해서 나는 경찰이라는 직업에처음으로 회의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피해자에겐 경찰도 세상도 그저 자기 아들을 해친 악마를 돕는 또 다른 악마처럼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라는 이름 아래, 법이라는 이름 아래, 다수라는 이름 아래.
피해자의 가슴을 한 번 더 잔인하게 후벼 파고, 반성하는 척하면서 다시 같은 짓을 반복하는 사악한 악마 말이다.
[엘리아나는 단순히 그를 용서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를 구원해주었지.]
[구원?]
[불사자의 힘을 받아 성자의 의무를 대신 수행하기로 한 것이다. 성자 역시 서서히 타락하고 있던 터라 그녀를 믿고 힘을 맡겼다고 한다.]
[믿고 맡겼다면… 엘리아나는 힘과 영생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는 뜻인가?]
[그래. 이후 그녀는 요정의 숲으로 떠나 평균 수명이 조금 더 긴 엘프들과 함께 생활했지. 인간을 피해 생활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자 숙명이라 여기면서….]
[의무이자 숙명이라니, 그냥 힘을 포기할 순 없었던 건가?]
[본래 불사자의 힘은 뇌조를 처치했을 때 사라졌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그 힘이 성자와 엘리아나에게 계승되었다. 이게 무슨 뜻이겠나?]
[그, 글쎄?]
[멍청한 놈…. 당연히 그 힘이 다시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겠나?]
[다시 필요하다고? 그, 그럼….]
[그래. 아마도 뇌조는 다시 재림할 것이다. 그게 언제인지 몰라도 뇌조가 완전히 죽지 않았고,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불사자의 힘이 사라지지 않을 거다. 본래 성자가 지닌 의무는 그 뇌조가 다시 부활하면 처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성녀가 힘을 맡긴 것 역시 그래서일 테고 말이야.]
[그, 그렇군.]
[하지만 그전에 당사자가 타락에 빠지고 말았고, 엘리아나에게까지 힘이 넘겨지게 된 거다. 모든 건 뇌조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 말이지.]
[뇌조가 부활할 거라니. 일종의 예언 같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불사자의 힘이 필요한 순간은 반드시 온다. 엘리아나의 의무는 그때까지 사악한 자에게 힘을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지키는 것이지. 엘리아나가이 수정에 갇힌 것도 영조의 힘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지금 쳐들어오는 르나르국의 군대는 영조의 힘을 노리는 사악한 놈들인 거고?]
[그래. 그놈들은 엘리아나의 힘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만 쓸 놈들이니까.]
[이제 무슨 상황인지 좀 알겠네. 근데 한 가지이해가 안 되는 게 있다.]
[그게 뭐냐?]
[그 불사자의 힘이라는 거 강제로 빼앗는 게 가능한 건가?]
[뭐?]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당사자가 그 힘을 양도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군대가 쳐들어오든 말든 그냥 엘리아나가 힘을 주지 않겠다고 못 박으면 될 것 같은데…. 달라고 해도 안 준다고 해버리면 그만 아니야?]
심플한 결론에 네빌은 엘리아나가 갇힌 얼음을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너처럼 같은 말을 그녀에게 했었지. 하지만 간악한 인간 놈들은 늘 비열한 수를 짜내고 말더군.]
[비열한 수?]
[쯧! 생각하니 다시 화가 치미는군! 빌어먹을 놈들!]
나는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을 바랐지만, 네빌은 설명하지 않았다.
도리어 안 좋은 기억만 자극한 것인지 분노만 했다.
네빌이 화난 것을 직감한 나는 한 걸음 물러났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는 미친놈처럼 자제하지 못하고 계속 화를 냈다.
[제길! 엘리아나가 이런 꼴이 된 것은 모두 저들의 탐욕 탓이다! 저 괴물 같은 놈들이 탐욕에 찌들지만 않았더라면! 힘과 권력 따위에 눈이 멀지만 않았더라면! 그녀가이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두영, 나는 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 절대로! 반드시 놈들의 사지를 찢어발길 것이다!]
주위의 공기가 서리가 맺힐 정도로 차갑게 얼어붙으며 성 전체가 흔들렸다.
네빌이 분노를 표출하면서 나온 마력으로 탓이었다.
언데드가 산 자를 증오하는 것은 본능이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분노였다.
언데드식 조울증 같은것인데 그는 간헐적으로 이런 발작 증세를 보였다.
하지만 그 분노 사이사이에는 마치 내가 어머니를 잃었을 때와 비슷한 극도의 원한과 죄책감 같은 것이 엿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한이 있어서 그렇게까지 증오하는 거지?]
[이야기를 해주면 나와 같이 제대로 복수에 가담해 볼 테냐?]
[복수에 가담하라고? 이미 하고 있잖아.]
[어리숙한 놈! 무고한 자들의 목숨까지 빼앗을 각오를 하고, 함께 놈들을 처단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건….]
네빌의 말에 나는 망설였다.
그에겐미안하지만, 무고한 인간을 학살하라는 명령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그건 무리였다.
[크큭! 물러 터진 녀석. 이런 녀석에게 미래를 맡겨야 한다니…. 내 운명도 참 기구하군.]
[미래를 맡긴다고?]
[흥! 지금은 몰라도 되는 일이다. 다만, 앞날을 위해서라도 이것은 확실히 해두고 싶다. 두영, 너는 정말로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 것이냐?]
너무나 당연한 질문.
하지만 그 물음에 담긴 무게는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훨씬 더 무거운 뭔가가 담겨 있음이 분명했다.
[대답해라. 정말로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인지 묻고 있다.]
[…그, 그래.]
[크큭! 미덥지 못하다만, 그렇다면 되었다. 단, 망자 주제에 죄책감을 느끼는 널 위해 한 가지조언을 해두도록 하겠다.]
[조언?]
[전쟁은 무고한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유건 죽이기 위해 벌이는 짓이다. 어설픈 인정은 독이 되어 돌아오고, 그 독은 결국 네 꿈과 바람을 무너뜨리는 초석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딸과 아내만을 생각하고 싸워라. 그 과정에서 많은 생명이 시든 꽃처럼 흐드러지고, 지워지지 않을 죄책감의 멍에를 안게 되더라도 그 또한 네게 내려진 숙명일 테니, 겸허하게 받아들여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무서운 말에 얼른 되물었지만, 말을 마친 네빌은 내 대답을 들을 마음이 없는지 실험실의 중앙에 있던 일검에게 향했다.
[시간이 되었군. 일검이여. 일어나라.]
네빌의 말과 함께 실험실 중앙에 누워 있던 일검의 이마에서 보라색의 빛이 나왔다.
그의 이마에 난 빛을 자세히 보니 네빌이 내 이마에 새긴 각인과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네빌의 명령을받은 일검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자! 계약을 실행할 시간이다. 조건을 말하라.]
“일‥리나의 행‥복.”
[일리나? 화면 속 르나르국에 잡힌 인간 여자 말인가?]
네빌은 일리나가 나무 기둥에 묶인 장면을 클로즈업하며 물었다.
일검은 로봇처럼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그‥렇다.]
[흠…. 죽이지 않기를 잘했군.]
[…방치해 놓고서는.]
[네가 살리러 가지 않았나.]
[뭐야. 그 말은 내가 일리나를 구하러 갈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뜻이냐?]
[언데드 답지 않은 너라면 분명, 그렇게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일검이여! 저 인간 여자를 살리고 싶다면 내게복종하라. 그렇다면 내 친히 저 인간 여자를 구원해주겠다.]
[알‥겠다.]
[누구랑 다르게 대답이 시원시원해서 좋군.]
비아냥거리며 말한 네빌은 일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인간 여자가 죽으면 계약은 깨지고, 너는 자유를찾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여자가 죽지 않는 동안 너는 내의지에 영원히 복종해야 할 것이다. 이해했나?]
일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이 성립되자 두 사람의 발아래에 있던 마법진에서 붉은빛이 올라왔다.
그 빛은 일검의 이마에 새겨진 각인에 스며들었고, 빛이 스며들자 보라색을 띠던 이마의 빛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눈동자에도 붉은색의 빛이 서리자 네빌은 만족한 듯 일리나를 비추고 있는 크리스털을 보았다.
[모처럼 쓸모 있는 부하가 들어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둘 다 준비해라. 놈들을 치러 간다.]
[지금 당장?]
[그렇다.]
[겨우 셋이서? 언데드랑, 본드래곤은?]
[언데드야 싸우다 필요하면 소환하면 그만이다. 지금은 셋이서도 충분하다.]
네빌은 자신만만해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진짜 셋이서 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
나는 이곳 인간들의 강함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른다.
여러 기억을 얻기는 했지만, 그 강함의 척도나 기준에 대해서는 아직 불분명한 편이었다.
그래서 언데드 군대도 없이 고작 셋이서 저 많은 병력을 상대하겠다는 네빌의 말이 만용처럼 느껴졌다.
혹시 지기라도 한다면 나는 영영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레비테이션.]
네빌이 나와 일검에게 부유 마법을 사용했다.
우리들의 몸이 네빌과 함께 떠올랐고, 몸이 충분히 떠오르자 네빌이 다음 마법을 사용했다.
[워프.]
광선 같은 빛과 함께 순식간에 눈앞의 모습이 바뀌었다.
수천 명 아니, 정확히는 9,018명의 르나르국 군대와 나무 기둥에 묶인 일리나가 보였다.
일리나의 모습을 확인한 일검은 네빌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검을 뽑았다.
네빌이 말했다.
[반갑구나. 탐욕에 눈이 먼 왕의 부하들이여.]
자신만만한 목소리.
수많은 적군을 두고도 그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