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화 〉37화. (38/83)



〈 38화 〉37화.

아너스 왕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밤이 깊어졌다.


그 동안 나는 네빌의 기억을 모두 복기했다.

다시 돌아봐도 네빌의 기억은 엄청났다.

아르카디아 대륙에 대한 온갖 것들에 대한 정보가 가득 차 있었다.

한낱 풀뿌리의 이름부터, 마법과 제작에 대한 공정 기술은 물론, 역사와 전설에 대한 온갖 정보와 이웃 국가들에대한 분석까지 다 알았다.

심지어 아주 젊은 시절에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녀 이곳 아록 산맥의 지형뿐 아니라 대륙 전역에 대한 정보와 별자리와 신학에 대한 지식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식의 양이 어찌나 방대한지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같았다.


[고맙다, 네빌. 그리고 오해해서 미안하다.]

나는 죽은 네빌에게 말했다.


 내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판단을 했는지, 처음 힘을 받았을 때는 몰랐지만, 그의 기억을 읽고 이제 그 뜻과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생각에 그는 지쳐있었던  같았다.


내가 그에게 소환되기 전부터, 아들의 죽음과아내 엘리아나 봉인 등의 사건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몰린 것이다.


특히, 자신의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에 상당히 지쳐 있었다.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엘리아나가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언데드가 것을 보고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것과 그때 자신이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스스로 사악한 흑마법사가 되었지만, 마음만이라도 인간으로 남길 원한 것이다.

시시콜콜 7개 국가를 모두 정복한다던 야욕을 이야기하던 그였지만.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살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조언하던 그였지만.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사실  누구보다 언데드인 자신을 부정하고, 본인의 욕심이 덧없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감정도 보였다.

내가 겪은 불행에 대한 약간의 동질감과 행복을 놓친 것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 같은 감정이었다.

누구보다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과.

이미 피로 얼룩진 선택을 해버린 후회와 좌절.

그 좌절로 모든 걸 놓고 싶은 무기력과 자신이 걸어온 삶에 대한 의문.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서 느끼는 깊은 회한과 어쩔  없었던 상황에 대한 억울함.


이 밖에도 정신이 복잡해질 때면 나와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끝없는 고뇌와 번뇌에 빠졌다.


아마도 그 반복된 번민 덕분에 앙심의 칼날처럼 단단히 품고 있던 복수의 심상에도 금이 가고 만 것이리라.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았는지 네빌이 남긴 메시지도 있었다.


정신을 통한 기억 메시지였다.

[두영, 뒤를 이어  후계자가 돼라. 싫어도 해라.]

[나와는 다른 삶을 걸어라, 복수는 덧없다.]

[네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돌아가서 행복을 찾아라.]

[망자 주제에 누구보다 인간을 위하는 놈아, 망자 주제에 누구보다 인간 같은 놈아 때론 자기 자신을 챙길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같잖은 영웅 흉내 내지 말고 그걸 명심해라.]

[반드시성공해 돌아가라, 가서 가족을 지켜라.]

[엘리아나도 꼭 챙겨주고, 이건 명령이다.]

아버지 같은 메시지.

 나이에 없던 아버지가 생긴 기분이라니.


마음이 싱숭생숭했지만, 아무튼, 나는  메시지를 토대로 우선으로  일들을 점검했다.

당장해야  일은 4가지로 추릴 수 있었다.


중요도 순으로 정리하면….

1. 집으로 돌아가는 것.


2. 육체를 되찾는 것.

3. 네빌의 바람대로 엘리아나를 함께 데려가 그녀를 보살펴 주는 것.


4. 네빌의 복수.


대충이랬다.

이중 1번과 2번은 필수지만, 3번과 4번은 선택 사항이었다.

3번의 경우 엘리아나가 지구로 가기를 바라지 않을 수 있으니,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바란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책임져 주는 것이 도리이리라.


4번의 경우는 아직 조금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네빌의 복수 대상에는 일곱 국가 말고도 이 세상 모든 괴이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의 죽음으로 모든 괴이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그래서 일곱 국가에 대한 모든 복수를 마치면 그다음 목표로 이 세상 모든 괴이를 죽이겠다는 디테일한 목표까지 세워두고 있었다.

일곱 국가의 왕들로 모자라 괴이들까지 죽이는  아무래 생각해도 너무 많았다.


게다가 수반하는 위험도 크기 때문에 4번은 일단 보류해야 했다.


남은 건, 1번과 2번.

당연하지만 1번과 2번 중 육체를 찾는 것이 먼저다.

사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네빌이 완성한 마법진이 있기 때문에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의 나는 네빌의 기억으로 지구와아르카디아 대륙을 오갈 수도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방대한 마력이 담긴 매개체가 필요하다.


대표적인 매개체는 드래곤 하트.


드래곤 하트는 말 그대로 드래곤의 심장을 뜻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었다.

이는 드래곤 하트를 대체할 다른 매개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충 현자의 돌이나 대지의 심장 같은 뭔가 엄청난 것들인데, 드래곤 하트를 비롯해 하나같이 구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네빌의 기억에 따르면 이런 방대한 마력을 지닌 매개체는 저주받은 땅, 그림자 숲, 지워진 도시에서 구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높을 뿐 실제 구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어쩌면, 드래곤 하트도 다른 매개체도 존재하지 않아서 집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때는 이걸 써야 하겠지.]

나는 네빌의 기억으로 아공간을 열어서 커다란 보석을 꺼냈다.

철저한 남자 네빌은 경이롭게도 차원이동에 필요한 매개체를 만들었다.

바로 본드래곤 1, 2, 3, 4, 5호의 심장을 짜깁기한 인공심장이었다.


그의 계산을 따르면 이 인공심장으로도 차원이동 마법을 펼치는 것이 가능하다.

대신, 성공 확률이 35%로 낮은 편이었다.

재수 없으면 시공의 미아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걸 쓰려면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손에 들린 인공심장을 보았다.


검은색과 보라색을 띠고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는 보석 같았다.

심장이라고 하면 꿈틀대는 진짜 심장을 떠올릴 테지만, 네빌의 지식에 있는 드래곤은 하나같이 마법 생명체다.

진짜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고대의 존재가 인공적으로 탄생시킨 골렘에 생명을 부여한 존재라서 심장이 이런 보석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동그란 구슬 같은 것이 굳이 비교하자면 네빌의 라이프베슬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인공심장을 보니 차원이동 마법을 사용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바닥에 덮인 눈을 다 날려버리고 마법진을 그리고 싶다.

아내와 딸을 만나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아내도 딸도 지금  꼴을 보면 충격을 받을 것이 훤하다.

35퍼센트라는 불안한 확률도 그렇고, 정상적인 존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역시 마력 매개체를 찾고 본래 내 모습을 되찾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차원이동은 일단 보류, 시간 많으니까. 페이스오프가 먼저다.]


다행이도 차원이동 마법은 타임머신과 비슷하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시간을 설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단! 지구 시간대의 내가 사라진 직후의 시간으로만 이동할  있다.

네빌의 기억에따르면  이유는 어린 시절 교육 방송에서 잠깐 듣고 잊은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복잡한 계산 탓에 설명이 힘들었다.

천재 네빌의 지식은 얻었지만, 실제로 내가 천재가 된 것은 아니니까.

지금  능력은그저 네빌의 기억대로 마법진을 그리는 것 정도다.


변변찮은 능력이지만, 집으로 돌아갈 시도를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네빌….]


나는 다시 인공심장을 보았다.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해골의 몸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답답한 속이 뻥 뚫릴 정도로 울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을 이용했더라면 네빌이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공심장의 마력을 사용했더라면 그는 성기사들을 이기진 못하더라도 뿌리치고 도망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만큼 인공심장에는 강한 마력이 잔뜩 담겨 있었다.


네빌의 능력이라면 이것으로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매개체를 찾지 못할까 봐, 일부로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넘겨주었다.

[네빌…, 네 뜻은 내가 반드시 이뤄주마.]

나는 마음을 바꿔 네빌의 복수를 다짐했다.


그의 뜻대로 엘리아나를 지키고 일곱 왕국의 국왕과 그의 아들을 살해한 괴이를 찾아내 복수를 하겠다고 맹세했다.

또한, 엘리아나를이곳보다 안전한 지구로 데려가겠다고 다짐했다.


[우선 인간으로 돌아간다.]

단, 언데드의 모습으로 그 모든 것을 하기에는 제약이 따르니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외모를 되찾는 방법을 떠올렸다.

마침 적당한 방법이 떠올랐다.

[동쪽 땅, 광명 목탑의 비급이라….]

르나르국 너머에 있는 동쪽 땅에 숨겨진 비밀.


광명 목탑의 비급.

광명 목탑의 비급은 불사자의 비밀과 유사하며 오래전부터 이쪽 세상의 동방에서 내려온 구전설화였다.

광명 목탑 아래에는  번째 삶을 얻을 수 있는 비전이 잠들어 있다는 전설이다.

네빌 역시 엘리아나를 위해 마인드 리치가 되었을 때, 아내를 부활시킨 후 그 비법으로 부활할 욕심을 품었었다.

그러나 네빌은 광명 목탑의 비급은 금세 포기하고 말았다.


시련을 통과하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조건은 그에게 별것 아니지만, 영혼이 타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치명적이었던 탓이다.


이미 마(魔)에 영혼을 팔아버린 네빌은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인 셈.


반면에 나는 영혼이 아닌 육체만 팔았기 때문에 아직 기회가 있었다.


[아무튼, 동쪽 땅에 비급이 있다는 말이로군. 우선 위치부터 확인하자. 헬파이어!]

나는 하늘로 손을 뻗으며외쳤다.


네빌이 남겨준 마법 기억을 더듬어 그의 기술을 사용하니 손 앞으로 마법진이 나타나며 커다란 지옥불들이 날아갔다.


눈보라를 녹이며 날아간 지옥불은 하늘을 가린 구름 속에서 폭발했다.

엄청난 화력에 스스로 감탄하며 걷어진 구름 너머 별자리를 보았다.

은하수처럼 가득 찬 별자리에 눈이 돌아갈 같았지만, 네빌의 기억 덕분에 원하는 별자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기가 뱀자리인가. 그럼. 이쪽 동쪽이겠군.]

아너스 왕국과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엘리아나가 걱정되지만, 요정의 숲이라면 안전하겠지. 게다가 지금 꼴로 요정의 숲에 들어가 봐야 도움을 줄 수도 없으니. 일단, 우선 몸부터 되찾고, 엘리아나를 찾으러 가자.]

계획을 세운 나는 눈 덮인 산맥을 내려갔다.

마법을 써도 되지만, 직접 움직이고 싶었다.


가볍게 땅을 박차자 몸이 수십 미터나 떠오르고, 밟고 있던 땅의 바위가 무너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아래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속도와 움직임이었다.


구멍 난 밤하늘에서 내려온 달빛이  아래를 비췄다.

헬기로 촬영한 것처럼 깔끔하게 반짝이는 아록 산맥의 모습이 보였다.

아름다운 그 경치를 보며 나는 새로운 몸의 성능에 감탄했다.

현재 나는 데스나이트였던 때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이는 내가 네빌의 마력을 흡수하면서 진화한 탓이다.


본래는 데스나이트의 다음 단계인 데몰리션 나이트가 되어야 하겠지만, 현재 나는 그다음 단계인 이블 나이트가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본래 네빌이 가지고 있던 힘의 레벨이 데몰리션 나이트와 같은 마인드 리치였기 때문이다.


데몰리션 나이트와 동등한 힘을 가진 존재의 마력을흡수하면서 데몰리션 나이트가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이블 나이트가 된 것이다.


애초에 네빌이 자신의 보주를 깨라고 한 이유 중에는  더 강한 존재인 이블 나이트로 바꾸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네빌. 내세가 있다면  은혜 꼭 갚는다.]


나는 속으로 네빌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며 산맥을 가로질러 바닥으로 내려갔다.


무려 300미터도 넘는 높이였지만, 두렵지 않았다.


이제 나는 누굴 두려워할 정도로 약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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