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43화.
해가 중천에 떠오른 오후.
파랗던 동명의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며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태양이 먹구름에 완전히 가려지자, 검게 변한 하늘의 아래에서 거대한 크기의 뱀이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검은 비늘이 덮인 몸에는 짧고 넓적한 네 개의 다리가 붙어있었으며, 각 다리는 맹금류 특유의 날카로운 발톱이 자라 있었다.
독사처럼 삼각형으로 굽은 머리에는 붉고 푸른 얼룩 같은 반점이 피부병 환자처럼 울긋불긋 솟아올라 있었으며, 얼룩의 중심에는 황소처럼 뾰족하게 자란 두 개의 뿔이 돋아나 있었다.
앞으로 툭 튀어나온 주둥이 아래에는 바늘처럼 뾰족하고 날카로운 송곳니 2개가 솟아 있었으며 송곳니의 끝에서는 강한 산성을 띤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독기가 어찌나 강한지 드문드문 떨어지는 빗방울에 섞인 독물이 바위에 닿자 지상의 바위와 돌기둥 등이 녹으며 작은 구멍이 생겼다.
맨들맨들했던 바위조차 그 표면이 우둘투둘하게 변했다.
독까지 지닌 것이다.
다양한 특징을 지닌 이 거대한 뱀의 정체는 바로 300년 묵은 교룡(蛟龍)이었다.
물에서 나고 자라는 평범하고 온순한 교룡과 다르게 지금 동명의 하늘을 넘실거리고 있는 거대한 교룡은 사악하고 괴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살아 있는 교룡이 아니라 마귀가 되어 부활한 마괴 교룡이었기 때문이다.
마귀는 망자와 마찬가지로 심장이 멈춘 존재를 가리킨다.
언데드를 가리키는 동토의 말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마괴는 그 마귀들을 부리고 조종하는 수괴를 뜻하는 말로 마귀 대군을 부리고 조종하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본디 마귀는 망자들과 마찬가지로 생자를 증오하며, 이성이 없고 잔인하다.
이것은 동명을 찾은 마괴 교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찾았다. 원수의 땅. 동명.]
교룡은 밝은 동명 땅을 보더니 썩어서 하얗게 변한 눈을 부라렸다.
교룡에게 있어서 동명은 원수들의 자손이 번성한 증오스러운 땅이었다.
300년 전, 그는 진정한용이 되기 위해 여의주를 품고 동명의 앞바다에서 용오름을 시도했다.
하지만 사악한 동토인들이 교룡의 부탁을 거부하고 훼방을 놓은 것으로 모자라 역린을 찔러 그를 살해했다.
이후 바다를 떠돌던 그의 육신은 원한을 품은 마귀가 되어 부활했으며, 지독한 원한에 이끌린 다른 마귀들이 그에게 붙으면서 모든 생자를 증오하는 마괴가되었다.
교룡은 자신의 증오와 원한을 담아 소리쳤다.
[가라! 가서 다 죽여라! 다! 동명에 있는 모든 인간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라!]
혓바닥을 도마뱀처럼 날름날름 거리며 썩은 눈을 핥은 교룡이 천둥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명령을 받은 마귀들이 움직였다.
무수히 많은 마귀가 동명을 향해 느릿느릿 진군하기 시작했다.
짐승부터 인간, 괴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마귀들이 생기를 잃은 딱딱한 걸음걸이로 이동했다.
마귀들이 동명의 하늘 위로 드리우는 먹구름을 쫓아서 진군했다.
교룡은 교룡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마귀들의 선두에 서더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소리 높여 크게 울었다.
분노에 찬 포효로 빗물이 밀려나며 하늘에서 우뢰가 쳤다.
요란한 천둥이 먹구름 사이에서 몇 번이고 번쩍이자 딱딱하고 차가운 비바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업 중인 바다가 요동치고, 땅이 뒤흔들렸다.
갑자기 불어온 비바람에 바닷물이 요동쳐 범람했으며, 딱딱했던 토양은 늪지처럼 질척거리기 시작했다.
토사가 흐르면서 산지의 나무들과 깊숙이 뿌리 내린 대나무들도 흐트러졌다.
흐트러진 대나무 숲을 지나 마귀들이 남하했다.
산을 타고 내려간 그들은 흉흉한 붉은색 안광을 번뜩이더니 저마다의 방식으로 동명의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작은 마을부터 시작된 마귀들의 공격은 점점 동명의 중심부로 향했고, 마귀들의 습격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마괴다! 마괴가 나타났다!”
“마귀여 물렀거라! 끄아악!”
“도망쳐라! 모두 도망쳐라!”
선두에 선 교룡이 거대한 꼬리로 치고, 맹금류처럼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지를 찌르고 베며 사람들을 죽였다.
무차별적인 공격에 동명 사람들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자비 없는 교룡의 학살극에 동명의 백성은 혼비백산하며 달아났다.
거대한 괴물이 마귀들을 이끌고 나타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니 겁에 질려 달아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달아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귀를 막아라! 놈들을 저승으로 돌려보내라!”
“승려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라! 지금이야말로 영웅이 될 때다!”
“마귀 따위에게 굴복하지 마라! 부처께서 우리를 굽어살피신다! 내세를 위해 악에 굴하지 마라!”
용감한 이들도 있었다.
세상을 떠돌며 자신을 갈고닦는 협객들이었다.
의협지사와 의용지사의 자질을 지닌 용감한 사람들은 위기에 처한 동명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검과 무기를 들고 나와 마귀들에게 대적했다.
검기를 일으켜 마귀들을 베어 죽이는 등 그들은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교룡을 해치울만한강자는커녕 마귀들을 상대할 실력자들의 수조차 압도적으로 부족해 전선은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동명의 남문에서 시작된 전투는 점점 중앙으로 치닫게 되었다.
“뭣이! 마괴가 쳐들어왔다고!?”
“예! 폐하.”
태산도 든다는 강력한 힘으로 동명의 왕좌를 차지한 거왕(巨王).
금은보화의 언덕 위에서 아름다운 여인들을 품에 끼고술을 마시고 있던 그는 부관이 전한 소식을 듣곤 깜짝 놀랐다.
그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동댕이치며 크게 외쳤다.
“감히 한낱 마귀 따위가 이 거왕의 땅을 노리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구나! 놈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동명은 그가 10년전, 지동왕을 처치하고 어렵게 차지한 금싸라기의 땅!
이대로 마귀들에게 잃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곳이었다.
심지어 절대고수도 아닌 한낱 마귀들에게 땅을 내주는 것은 자칭 천존을 자랑하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주먹으로 금은보화를 내리친 거왕이 몸을 일으켰다.
7척은 될법한 거대한 그의 몸에서 다부진 근육과 힘줄들이 꿈틀꿈틀 거렸다.
“대도(大刀)를 가져와라!”
“예!”
거왕이 웅장한 투기를 뿌리며 소리쳤다.
명령을 받은 그의 부관은 거대한 검을 들고 오더니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과거 지동왕에게서 동명을빼앗을 때 사용했던 그의 애도였다.
작은 아낙의 키 정도의 길이와 넓은 폭을 가진 대도로 말이 아니라 호랑이의 목이라도 나뭇가지를 쳐내듯 가볍게 자를 정도로 날카로운 무기였다.
비록 디자인은 망나니 칼 같아서 아쉬운 면이 좀 있지만, 대도의 크기가 커서 그의 덩치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부하들에게 마귀들의 토벌을 명하라! 지금부터 어리석은 마귀들을 나 거왕이 직접 단죄할 것이다!”
“존명!”
거왕의 명령에 부관이 밖으로 나갔다.
거왕 또한 술에 취한 미녀들을 두고서 바짓가랑이를 동여매더니 그대로 궁궐의 내벽 부수고 뛰쳐나갔다.
부서진 벽의 잔해들이 떨어지고, 뚫린 자리로 비바람이 들어갔으나 거왕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달려 높이 솟은 산사의 꼭대기에 섰다.
그리고 그꼭대기에서 동명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마괴 교룡과 마귀들을 보았다.
“이놈들! 나 거왕이 상대해주겠다!”
숨을 깊이 들이쉰 거왕이 화를 가득 담아 외쳤다.
그 순간 몰아치던 비바람도 그를 피해 떨어졌다.
[인간….]
엄청난 외침에 교룡도 썩은 눈으로 거왕을 보았다.
거왕은 등 뒤로 치는 번개를 무시한 채 대도를 높이 들었다.
그의 대도에 갈색을 띤 거대한 검기가맺혔다.
검기가 모두 맺히자 거왕이 그것을 모로 뉘인 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검기가 기와를 가르며 날아가 마귀들의 휩쓸었다.
가공할만한 위력에 마귀들의 몸이 두부처럼 잘려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실력이 있구나.]
거왕이 보통이 아님을 존재를 알아차린 교룡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리고 꼬리와 뒷다리를 튕겨 바닥을 때리더니 하늘을 날아올랐다.
비바람을 동반해 날아오른 교룡은 주둥이를 벌려 입김을 내뿜었다.
그 입김에서 차가운 음기가 나오자 쏟아지던 비가 우박이 되어 떨어졌다.
얼어붙는 대기를 본거왕이 체내의 기를 몸에 둘렀다.
자신의 기운으로 신체를 보호하는 호신강기라는 수법이었다.
“놈!”
호신강기를 펼친 거왕은 산사를 박차더니 쏟아지는 우박을 뚫고 교룡과 정면으로 부닥쳤다.
대도를 든 거왕과 천둥‧번개 속에서 울부짖는 교룡이 충돌하자 빛이 번쩍이며 하늘이 요동쳤다.
마치 신들의 싸움처럼 우뢰가 칠 때마다 먹구름에 둘의 그림자가 비췄다.
둘이 전투를 펼치는 사이.
“이, 이게 대체 무슨 난리란 말이오?!”
사냥꾼들에게서 빼앗은 돈으로 두영에게 가져다줄 하회탈과 검은 삿갓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검은 분소의를 챙기던 아라타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급히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나섰고, 곧 마귀들에게 쫓기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사, 살려주시오! 사람 살려주시오!”
엄청나게 많은 마귀의 군대를 피해 도망치는 백성들.
그 뒤를 바짝 따라붙어 아무 목적도 없이 그저 분노와 증오만으로 백성을 해치는 마귀들의 모습이 보였다.
잔혹한 그들의 행태에 아라타는 경악했다.
‘서, 설마 소승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두영님이 노하실만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것인가?!’
이 소란의 원인이 두영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 것이다.
“혹시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두영 님께서 크게 노하신 건가?! 이 모든 게 소승이 발걸음이 늦은 탓?!”
그는 마귀의 습격이 자신의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괜한 죄책감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그때 시끄러운 천둥과 요란한 폭음 사이로 한 노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룡의 저주다! 교룡이 마괴가 되어 쳐들어왔다!”
“교룡의 저주? 헉! 저게 뭐야?!”
등이 굽은 노파가 하늘을 가리키며 목이 떠나가라 소리치자 아라타는 그제야 하늘을 보았고, 교룡을 발견했다.
“실로 사악한독기다! 이 습격의 원인은 바로 저 마괴였단 말인가?!”
마괴를 보고 나서야 아라타는 이번 일의 원흉이 두영이 아닌 교룡이라는 것을 깨우쳤다.
“지독한 원념이 느껴진다. 맙소사! 거왕의 공격을 받고도 멀쩡할 정도라니! 놈의 원한이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아라타는 거왕이 하늘을 나는 거대한 교룡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는 것을 보았다.
거왕과 교룡의 전투로 얼어붙은 비가 떨어지고, 날카로운 검기가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절간을 비롯한 각종 건물이 무너져 내렸으며, 그 파편에 휩쓸리고 깔린 백성들이 시름시름 앓았다.
“막아라! 물러서지 마라!”
“고작 마귀 따위에게 겁먹지 마라!”
“우리에겐 거왕 님께서 계신다!”
거왕의 부하들이 소리쳤다.
그들은 협객들과 함께 마귀들을 상대했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하기에는 마귀들의 수가 너무나 많았다.
“마귀의 수가 너무도 많구나. 이대론 승산이 없다. 달아나야 한다.”
눈치 빠른 아라타가 승패를 점치는 그때였다.
“스, 스님 부디 저희를 도와주시오!”
한 남성이 아라타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뒤에는 사지가 찢어지고, 뼈와 머리 가죽만 남은 호랑이의 마귀와 수많은 마귀의 부대가 몰려오고 있었다.
“마귀놈들….”
마귀를 본 아라타는 결심한 듯 주먹을 쥐더니 해골물을 마셨을 때 깨우친 깨달음을 떠올렸다.
아라타의 손에서 성스러운 빛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