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64화.
검기의 돌개바람이 대지를 갈랐다.
거대한 고양이가 마구 할퀸 것처럼 대지가 난도질당해 쑥대밭이 되었으며, 백호와 그 뒤를 따르던 호랑이들은 믹서기에 갈린 것처럼 갈기갈기 찢겨 대지에 쓰러졌다.
백호가 일으키던 거대한 대지의 파도 또한 마구 찢긴 채 무너졌다.
망가진 대지가 수십, 수백 갈래로 찢긴 복잡한 협곡으로 변했으며, 사지가 찢긴 호랑이들은 하얀 수정으로 변해 망가진 대지를 채웠다.
형체도 남기지 않고 찢긴 백호의 힘과 기억이 먼지바람을 타고 흘러와 내게 스며들었다.
백호의 생에와 기억에 이어서 산과 땅을 지배하는 방법이 뇌리에 떠올랐다.
지금의 나는 재앙 그 자체가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비바람도, 해일도, 산사태도, 불지옥도 만들 수 있었다.
살아 있는 자연재해 그 자체가 된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꿈에 나올까 무서운 악마의 모습이리라.
같은 인간들과 섞일 수 없는 괴물이자 악몽 그 자체가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했다.
마치 자신에게 솔직해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같잖은 가식과 가면을 모두 벗어던지고,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솔직하게 모두 쏟아내는 심정이었다.
화를 감출 이유도, 다른 이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내키는 대로 아낌없이 힘을 휘두르는 것으로 나라는 존재를 과시할 수 있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았기에 나는 다시 검을 올렸다.
[마음에 안 든다. 산기슭부터 갈라주마.]
목표는 수미산이었다.
가장 높고 거대한 산, 저 하늘 높은 곳까지 치솟은 스님들의 정신적 지주 수미산을 산기슭부터 베어 무너뜨릴참이었다.
산이 없으면 지랄 맞은 땡중들이 갈 곳을 잃을 테니까.
[사라져라.]
높이 든 검에 마력을 불어넣고, 검기를 일으켰다.
더욱 거세진 검기가 로켓처럼 점화되어 불을 뿜자 먼지를 뚫고 누군가 나왔다.
“기다려 주십시오. 형님.”
아라타였다.
녀석은 양손을 앞으로 모은 합장 자세를 취한 채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느릿느릿 걸어오는 아라타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고 있자 증오와 분노가 말했다.
저 더러운 배신자를 죽여라, 가증스러운 양아치 새끼의 사지를 찢어버려라!
놈과 땡중들에게 고통을 선사하고, 놈들이 그토록 증오하던 망자로 부활시켜 진정한 치욕이 무엇인지 알려줘라!
안에서 일어난 충동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쳤다.
거스를 수 없는 악감정이 격류처럼 휘몰아쳤다.
나는 감정에 몸을 맡기고 검을 휘둘렀다.
땅을 가르며 날아간 새까만 검기가 아라타를 그대로 지워버릴듯이 육박했다.
태산마저 갈라버릴 것 같은 위세가 담긴 검기였다.
“형님…. 스스로를 잃지 마십시오.”
죽음이 몰아침에도 아라타는 도망을 치지도, 술법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날아드는 검기의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작고 평온한 그 걸음에 바닥에서 황금빛 빛의 물결이 퍼졌다.
망가진 땅을 타고 흐른 빛의 물결이 주위에 퍼지자 놀랍게도 아라타의 앞에 다다랐던 검기가 사선으로 휘어져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검기는 일곱 개의 산과 바다를 다시 가르며 멀쩡한 대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멀쩡했던 산이 갈라지면서 새로운 산이 탄생했다.
7개로 나뉜 칠해의 바다는 갈라진 산을 기점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바다가 되었다.
“마, 말도 안 되는 위력이다! 저것이 진정 한낱 마괴가 지닌 힘이란 말인가?!”
“한 번의 휘두름으로 일곱 산과 바다를 가르다니! 가히 신의 힘이로다! 살아 있는 재앙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망가진 산과 하나로 연결된 바다를 본 법주승들이 떠들었다.
겁에 질린 그들의 모습을 보면 검기의 위력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즉, 방금 내가 휘두른 힘은 분명 진짜고, 그것을 아라타가 막았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정면에서 막았다기보다는 옆으로 흘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테지만….
어쨌든, 아라타가 막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라타가 갑자기 저만한 힘을 내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저 이 힘을 휘두르면 충분하다.
마음 껏 휘둘러서 놈을 없애면 그만이다.
그러니 죽여라.
아라타를 없애라.
나는 다시 아라타에게 검기를 발사했다.
바닥을 가르며 날아간 검기가 놈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위세로 몰아쳤다.
아까보다 더 강한 힘으로 휘둘렀다.
이번에야말로 저 지긋지긋한 민머리가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놈의 지척에 다다른 순간 거대한 검기가 다시 옆으로 휘어지며 하늘로 향했다.
아직 남은 먹구름이 잘렸다.
초승달 모양으로 거대하게 잘린 검기를 보았다.
이번에도 아라타가 내 검기를 막은 것이다.
[너 이 새끼!]
“화가 좀 풀리셨습니까?”
[닥쳐라!]
나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속으로 검을 휘둘러 검기를 발사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치 포식자를 피해 달아나는 미꾸라지처럼 내가 발사한 검기가 아라타를 피해서 사라진 것이다.
아라타가 말했다.
“형님. 형님이 망가뜨린 저 산을 보십시오. 비록 망가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산입니다. 그저 하나였던 산이 둘로 나뉘었을 뿐이지요. 바다 또한 같습니다. 일곱이었던 바다가 형님 덕분에 하나로 연결되었을 뿐입니다.”
[이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아무리 강한 힘을 휘둘러도 세상은 변치 않습니다. 형님께서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멀리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놓지 마십시오. 인제 그만 본래의 형님으로 돌아오십시오.”
[지랄하지 마라!]
나는 방법을 바꿔서 검기를 발사했다.
이번엔 크가 아니라 개수를 늘려서 작은 검기를 다발로 발사했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검기가 맹렬한 기세로 뿜어져 아라타를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발사한 모든 검기는 그에게 닿지 못했다.
놈의 지척에 다다른 순간,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고 만 것이다.
엄한 곳으로 날아간 검기들은 엉뚱하게도 바다와 산을 때렸다.
아까처럼 산이 허물어지고, 바다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모두 아라타의 뒤로 이동해라!”
결계를 펼치고 있던 강명은 옆으로 튄 검기가 방어막을 산산이 부시자 얼른 아라타의 위로 이동해 법주승들과 함께 숨었다.
쏟아지는 폭포 밑에 톡 튀어나온 바위처럼 검기의 파도가 아라타를 밀어내지 못하고 옆으로 갈라져 엉뚱한 세상만 부쉈다.
다시 검기가 흩어지자, 마구 일어난 먼지를 뚫고 아라타가 나왔다.
녀석은 갈라진 땅을 초연히 걸으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다치긴커녕 겁도 안 먹는 아라타의 모습에 손이 멈췄다.
하지만 증오와 분노는 멈추지 말고 계속 검을 휘두르라고 지시했다.
계속, 계속, 계속, 계속, 계속.
놈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검을 휘두르고 검기를 발사했다.
궁지에 몰린 쥐가 발악하듯이, 점점 커지는 두려움에 몸을 맡기고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무리 공격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라타의 코앞까지 당도한 검기들이 그의 몸에서 나오는 황금빛의 기운을 피해서 휘어졌다.
[대체 어떻게…!]
“형님. 저를 베고 산을 베면 다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같으십니까?”
[뭐라고?]
“증오와 분노는 자신과 주위를 해칠 뿐입니다. 그러니 더는 자신을 망가뜨리지 말고 본래의 자상한 모습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네가 말하는 본래의 모습이 해골바가지였을 적을 말하는 거냐?]
“…….”
아라타가 침묵했다.
나는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입 닥쳐라!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네가 죽거나! 내가 죽을 때까지! 절대로!]
악을 지르며 다시 마력을 일으켰다.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휘어지지 않을 정도로 크고 거대한 검기를 직접 일으켰다.
검기를발사해서 놈을 벨 수없다면 힘으로 놈을 직접 베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니 이 땅이 아닌 세상을 부수고 가를 그런 검기를 만들었다.
나는 양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거대한 검기가 일어난 검을 직접 휘둘러서 놈을 공격했다.
이번엔 절대 피할 수 없으리라!
이번에는 검기가 휘어지지도 않으리라!
그렇게 자신하며 공격했다.
백열전구처럼 머리로 빛을 뿜으며 다가오던 아라타는 수평으로 날아드는 검기의 모습을 보더니 작은 행동을 취했다.
손바닥을 앞으로 뻗는 작은 움직임이었다.
곧이어 내 검기와 아라타의 손바닥이 마주쳤고, 충격이 일어나더니 번개가튀었다.
내가 일으킨 검기가 녀석의 손에 맞닿는 순간 맹렬한 번개를 일으켰다.
전기톱으로 쇠를 자르는 것처럼 금속과 금속의 마찰음 같은 것이 세상을 울렸다.
나는 더욱 힘을 주며 아라타를 밀었다.
하지만 힘을 강하게 하면 강하게 할수록 검기의 크기가 줄어들었고, 이윽고 힘을 잃은 채 깨지고 말았다.
유리처럼 깨진 검기가 흩어졌다.
검기가 사라진 내 검은 허공을 베었고, 바람이 밀리며 코앞의 바닥만 갈라졌다.
아라타가 막은 것이다.
고작 손바닥으로 내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적도 내가 쏘아 보낸 검기를 이렇게 가볍게 막지 못했다.
내가 본 지상 최강의 마법사 네빌조차 지금의 내 검기를 막을 수 없다.
그런데 고작 아라타 따위가 내 공격을 이렇게 쉽게 막아내다니?
믿기지 않았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네빌의 기억을 뒤져 아라타가 방금 한 짓이 무엇인지 찾았다.
네빌만이 아니라 다른 망자들의 기억까지 모조리 뒤져서 비슷한 자료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뒤져 보아도 지금 아라타가 보이는 현상과 관련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 추측만 남았다.
이블 나이트의 검기를 이토록 가볍게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지금의 나보다 더 높은 수준의 망자인 헬 나이트와 그에 버금가는 힘을 지닌 존재들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즉, 지금 아라타가 나보다 강하다.
이블 나이트인 날 뛰어넘고, 더 강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
나는 이 사실을 부정했다.
불합리했다.
다른 그 어떤 고수나 괴이도 아닌, 한참 어린 아라타 따위에게 밀리다니?!
이런 불합리함을 인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분이 차오르자 아라타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소용 없는 검기는 집어치우고 즉각 마법을 사용했다.
네빌의 주특기인 헬파이어였다.
이글거리는 화염에 위협을 느낀 것인지 아라타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래! 마법이라면 다르겠지! 마법이라면 다를 거다!]
아라타에게 헬파이어를 발사했다.
하나도 아니고 무려 백에 달하는 숫자의 헬파이어를대포알처럼 마구 쏴 아라타의 주위를 초열지옥으로만들 생각을 했다.
설령 헬파이어가 놈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더라도 뜨거운 열기가 놈의 몸을 녹이리라 기대하며.
“형님….”
거대한 지옥불들이 쏟아지자 아라타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합장 자세를 취하더니 알아듣기 힘든 작은 목소리로 불법의 구절을 외웠다.
그러자 아라타의 앞으로 조그만 구멍이 뚫린 방울이 나타났다.
비눗방울처럼 동그랗고 투명한 바탕에 무지갯빛 하이라이트가 있는 방울이었다.
헬파이어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초라한 크기의 방울이 아라타의 앞을 지켰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방울이다.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나는 아라타가 겁화에 휩싸일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 방울이 헬파이어와 닿는 순간 헬파이어의 화염이 비눗방울에 흡수되듯이 빨려 들어갔다.
[뭣?!]
100에 달하는 헬파이어의 모든 불길이 아라타를 덮은 방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도 안 돼.]
황당함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헬파이어를 저렇게 쉽게 막다니?
사상 최고의 화염 마법 중 하나인 지옥불을 저렇게 나약한 방울로 막아내다니?!
“형님, 형님이 아무리 증오와 분노를 휘둘러도 이 동생 꺾이지 않습니다. 형님을 구제하기 위해 멈추지 않고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무의미한 저항은 멈추고 자신을 되찾으십시오. 사악한 자의 간언에 넘어가지 마시고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아라타는 헬파이어가 사라지자 다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