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74화.
아침이 밝고.
상황 정리를 마친 우리는 도성을 살폈다.
도성에 있는 보물창고를 털기 위함이었다.
서창의 관리 트리클의 목을 베기 전, 아라타가 그의 기억을 읽어 여러 정보를 알아냈다.
가장 먼저 알아낸 정보는 그가 노예 상인들에게 막대한 양의 뇌물을 받았고, 서창 백성에게 막대한 과세를 책정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도성에 온 김에 그가 챙겨둔 뇌물과 세금을 챙길 참이었다.
“도둑질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형님.”
[걱정하지 마. 창고에 있는 돈 전부 노예들 지원금으로 나눠줄 거니까.]
“풀려난 노예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괜찮겠습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여기서 어디로 가? 위?아니면 아래?]
“아, 저기 저곳으로 내려가면 됩니다.”
아라타의 안내를 받아 횃불이 이어진 지하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끝까지 내려가자 암석을 깎아 만든 것 같은 문이 나타났다.
높이가 5미터를 넘는 큰 석문이었는데, 문 전체에는 침입자를 막기 위한 방어마법이 펼쳐져 있었다.
“결계로군요. 소승이 풀겠습니다.”
아라타가 결계에 손을 대고 힘을 일으켰다.
그러자 지하실을 두르고 있던 결계의 마력이 아라타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본래 승려는 결계를 치고 해제하는 것이 장기입니다. 불가에서 살생을 금한 만큼, 싸움보다는 싸움을 피하는 방법을 중점적으로 익힌 것이지요.”
[공격은 약하지만, 방어는 잘한다. 뭐 그런 의미냐?]
“맞습니다. 특히, 두영님 같은 마귀와 마괴의 힘을 막는데 뛰어나지요. 하하!”
[우쭐대기는. 됐고, 문이나 열어.]
“알겠습니다!”
아라타가 석문을 힘으로 밀었다.
열반에 올랐다고 신체 능력까지 오르는 것은 아닌지, 무거운 석문을 쉽게 열지 못해 낑낑댔다.
[쯧…. 비켜.]
나는 용쓰는 아라타를 돕기 위해 손으로 석문을 주먹으로 쳤다.
문이 부서지며 뒤로 넘어가자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보물창고의 모습이 드러났다.
“맙소사! 이렇게 많은 황금은 소승 처음 봅니다! 말 그대로 평생 놀고먹어도 남을 정도입니다!”
황금을 본 아라타의 눈이 탐욕에 물들었다.
[그렇게 욕심이 많은데 진짜 어떻게 열반에 오른 거냐?]
“욕심이 생겨도 번뇌만 이겨내면 됩니다. 보고 즐거워하되 취하지는 아니한다. 그것이 열반의 핵심입니다.”
[…그림의 떡 같은 거구만.]
“비슷합니다.”
[그나저나 비싸 보이는 물건 많네. 마법이 깃든 물건도 있고. 진짜 엄청나게 착복했구나. 이 나라 공무원은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에관한 법률도 없나.]
보물창고에는 금화와 보석들만 가득한 것이 아니었다.
방어 마법이 걸린 지팡이와 강화 마법이 걸린 단검 등등 다양한 물건이 널려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끄는 것은 중앙에 세워진 커다란 수정이었다.
[에너지 크리스털까지 있네.]
에너지 크리스털은 마력이 담긴 보석이다.
부족한 마력의 보충이나, 더 강한 마법을 사용할 때 그 매개로 쓰이는 매우 귀한 재료다.
성 전체를 감싸는 방어막을 만들어 적의 마법 공격을 막을 수도 있으며, 도시의 개발 및 정화에도 쓸 수 있다.
더러운 물을 정화하는 용도로 쓰면 식수 확보도 가능하고, 오물을 없애 질병을 예방할 수도 있다.
“담긴 기운이 적지 않군요. 이 정도면 여의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크기도 상당하네. 이정도면 최상급은 되겠어. 아무래도 크리스털과 마법 물품은 내가 가져야겠다. 분명, 도움이 될 거야.]
“형님.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입니다.”
[수고비야. 수고비. 딱 수고비만 챙길 거야.]
나는 네빌의 아공간 마법을 이용해 크리스털과 마법 물품들을 먼저 담았다.
남은 금화 역시 아공간에 모두 쓸어 남아 보물창고를 텅텅 비웠다.
챙기긴 했지만, 금화는 나눠 줄 생각이었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바로 노예들에게 돈을 나눠주시겠습니까?”
아라타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금화 하나를 집어 호주머니에 챙기며 물었다.
나는 답하지 않고아라타를 빤히 보았다.
“수, 수고비입니다. 이 정도는 노잣돈으로 챙겨도 괜찮지 않습니까?”
변명하는 아라타,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은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이리라.
[변명은 그만하고, 우선 앤디와 상인들을 데려오자.]
“알겠습니다.”
나는 워프 마법을 사용해 아라타와 함께 웨일 산맥으로 이동했다.
앤디와 사람들을 두고 온 바로 그 자리였다.
어제 구조한 노예들은 아침 일찍부터 땔감을 모아 불을 지피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바룸의 식량으로 스튜를 만들어 먹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라이프 센서로 남은 사람들의 숫자부터 파악했다.
용병들을 포함해 약 450명의 인원이 잡혔다.
250명이나 줄어버린 것이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앤디를 통해 확인하니….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분들이 먼저 떠났습니다. 아침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다들 기다릴 틈이 없다고 서둘러 떠났어요.”
“빨리 가족을 찾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사정을 들으니 떠난 사람들 대부분은 가족이 있는 집안의 가장이라고 한다.
가족이 아직 생존해 있고, 그 행방을 아는 사람들이었는데 흩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서 용병들의 신분패와 식량 그리고 돈이 될 물건과 무기를 챙겨서떠났다고 한다.
[돈이 되는 물건을 챙겼다면, 가족을 되살 생각인가 보네. 하긴, 싸워서 되찾을 순 없을 테니. 그게 당연하겠지.]
가족들이 노예가 되었다는 건, 반대로 돈을 모아 가족들을 되살 수도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니 돈으로 전쟁노예가 된 가족을 구할 수 있다.
급하게 떠난 것도 내가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다른 곳으로 팔려 행방이 묘연해지거나, 학대와 노동으로 죽을 위험이 있으니 서두르는 것이리라.
[뭐, 떠난 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이분은 누구인가요?”
[이 녀석은 아라타라고 한다. 보다시피 동토에서 넘어온 땡중이지.]
“네가 앤디로구나. 반갑다, 아라타라고 한다.”
아라타는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앤디가 자신의 손을 잡아 앤디의 기억을 읽었다.
“어린 것이 기구한 삶을 살았구나. 아미타불.”
아라타는 측은지심을 느꼈다.
앤디는 하멜 성에서 부모를 잃고, 성을 탈출한 후에는 형과도 헤어졌다.
더욱이 지금은 노예 신분.
아직 어린 소년의 운명치고는 너무나 가혹해 안타까웠다.
“허나, 이제 염려 없다. 네 앞길에 광명이 드리웠으니,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내 비록 행방이 묘연한 네 형을 대신할 순 없으나, 함께하는 동안에는 그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우고 싶구나. 앞으로 날 형이라고 부르거라. 나 또한 너를 아우로 여기고 정성을 다하마.”
“감사합니다. 혀, 형.”
새로운 동생이 생긴 아라타는 기뻐하며말했다.
“하하! 형제가 된 기념이다. 널 미남으로 만들어주마!”
“미남이요? 어떻게요?”
“일단, 거추장스러운 머리부터 밀자꾸나. 진정한 미남은 머리털이 없어야 하는 법이니까!”
“네!? 머, 머리카락을 깎으신단 말인가요?!”
“그래. 내 네게 반듯함과 매끈함의 미학이 무엇인지알려주마. 자. 이리 오너라.”
“죄송합니다. 형제 얘기는 역시 없던 걸로 해주세요.”
대머리로 만들겠다고 하자 앤디가 아라타를 곧바로 손절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형제라면서 머리에 고속도로를 개통하다 못해 민둥산을 만들어버리겠다고 하고 있으니까.
“어째서 그러느냐!”
[미친놈, 다짜고짜 머리를 밀겠다고 하니까 그러지! 보고도 몰라?]
“그 말씀은 좀 더 친해진 다음에 밀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밀지 말란 뜻이다! 멍청아!]
“그, 그럴 수가!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대머리로 만들지 않는다니! 너무 아깝습니다! 삭발하면 분명, 인기남이 될 것입니다!”
“아저씨. 이 형 이상해요. 무서워요.”
아라타의 이야기를 들은 앤디는 당황하며 내 뒤로 숨었다.
미친 놈을 봤으니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리라.
“형제가 되기로 하지 않았느냐? 두려워하지 마라. 동생! 이 형 나쁜 사람 아니다!”
[그래. 겉보기엔 또라이 같아도 속정은 깊은 놈이니 안심해도 된다. 가치관이나 미학은 좀 이상하지만.]
“이상하다니요? 제 기준에서는 반듯함과 매끈함의 매력을 모르는 형님과 이곳 사람들의 미학이 더 이상합니다!”
[뭐가 어째?]
“저, 저기 제가 머리를 밀겠습니다. 그러니 싸우지 마세요.”
우리가 싸운다고 생각했는지 앤디가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모발을 희생코자 했다.
아라타는 반색했다.
“정말?! 그럼, 지금 당장 모근 삭제 술법을 펼쳐주마!”
[하지 마! 어디 애 인생 망치려고!]
나는 기뻐하는 아라타의 뒤통수를 후려쳐서 그를 제지했다. 그러자 우리의 촌극을 지켜보고 있던 켈른 단장이 말했다.
“빌어먹을 언데드 놈이 인간들과 잘도 놀고 있군.”
양손이 포박된 채 마차에 묶여 있던 그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채 나와 아라타를 노려보았다.
스켈레톤 나이트와 데스나이트의 눈치를 보느라 바쁜 부하들과 다르게 할 말은 하는 것을 보면 그래도 단장이라는 직급을 거저 단 것 같지는 않았다.
[근데 너희 아직도 있었냐?]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 아직도 남아 있었느냔 말이다.]
“네가 우릴 이렇게 묶지 않았느냐!”
[밤중에 탈출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어차피 밧줄 정도는 금방 풀 수 있잖아? 그냥 밧줄 풀고 도망치지, 뭘 솔직하게 남아 있는 거냐.]
“빌어먹을 놈이! 지금 우리를 조롱하는 것이냐? 도망치려 했다면 스켈레톤 나이트와 데스나이트로 우릴 공격했을 것 아니냐!”
[아니, 데스나이트와 스켈레톤 나이트에겐 이 사람들을 지키라는 명령만 내렸다. 너희가 이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탈출할 수 있어.]
“그, 그럼. 우릴 놔 준단 말이냐? 죽이는 게 아니라?”
[악마도 아니고 사람을 함부로 해치진 않아.]
“악마가 스스로를 부정하다니….”
“거짓말이 분명해.”
켈른도 그 부하들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확실히 저녁 동안 천 명이 넘는 노예 상인과 그 조직을학살한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용병들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바룸이 고용한 하수인에 불과하니까.
비무장 상태로 풀어줄 생각이었다.
[믿기 힘든가 보네. 그럼. 직접 풀어주마.]
의심을 거두지 않는 켈른의 모습에 나는 스켈레톤 나이트들을 보내 그들의 밧줄을 풀어주도록 명령했다.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롱소드로 켈른과 용병들의 밧줄을 풀어주었다.
100에 달하는 켈른의 부하들이 밧줄에서 풀려나 자유를 되찾았다.
“지, 진짜 풀어줬어….”
“정말로 죽이지 않는 건가?”
밥을 먹던 사람들도 용병들도 깜짝 놀랐다.
용병들에게 당한 것이 있는 노예들은 겁은 먹은 채 물러났다.
애들은 여자들 뒤에 숨었고, 남자들은 밥을 먹다 일어나 무기를 들었다.
나는 스켈레톤 나이트로 두 진영 사이를 막았다.
[켈른이라고 했지? 죽이지 않을 테니, 부하들을 데리고 여기서 떠나라. 이대로 떠나서 다른 마을에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
“저, 정말로 우릴 살려줄 것이냐? 혹시 뒤에서 우릴 기습하려는 건 아니겠지?”
[죽일 셈이었으면 밧줄에 묶였을 때 죽였을 거다. 쓸데없는 의심하지 말고 얌전히 떠나라.]
“어, 어쩌죠? 단장님?”
“이대로 가시겠습니까?”
“잠깐, 그렇다면 나도 데려가 주게! 나도!”
켈른은 나와노예들 그리고 바룸을 보았다.
바룸은 자신도 데려가 달라는 듯 마차에서 나와 켈른에게 손을 뻗었다.
켈른은 그를 무시한 채말했다.
“알았다. 떠나도록 하지. 가자!”
켈른은 부하들과 함께 서창의반대 방향으로 떠났다.
그들이 멀어지자 노예들은 안심했고, 바룸은 절망했다.
“이 빌어먹을 놈들아! 나도 데려가! 나도 데려가란 말이다! 이 의리도 없는 쓰레기들아!!”
악다구니를 지르는 바룸.
이제 보니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간밤에 노예들에게 구타라도 당한 것인지 광대에 멍이 들고 입술은 터져 피가 딱지가 앉아 있었다.
“돈 줬잖아! 계약했잖아! 이 쓰레기들아! 쓰레기들아!”
[불쌍한 놈, 그렇게 가고 싶으면 너도 가라.]
“…예?”
[못 들었어? 너도 저들을 따라가란 말이다. 필요 없으니까.]
“저, 정말입니까?”
[그래.]
남겨둬 봤자 가족을 잃은 노예들에게 맞아 죽기만 할 것이다.
그에게 학대당한 노예들은 불만이겠지만, 그런 사사로운 복수까지 내가 책임져 줄 순 없다.
“정말로 가도 됩니까?”
[자꾸 같은 말 하게 만들지 마라.]
데스나이트가 바룸의 목에 검을 겨눴다.
“히익! 알겠습니다! 떠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겁먹은 바룸은 얼른 용병들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용병들은 마치 쓰레기를보듯이 바룸을 노려보았고, 바룸은 기가 죽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용병들과 10미터 이상 떨어져서 뚜벅뚜벅 걸었다.
[역시 사이가 안 좋은가 보네. 저래서야 다음 마을까지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저기 두영님.”
[응? 왜 그러냐? 앤디.]
“이제 우리는 어쩌면 됩니까?”
[음…. 지금 설명해주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이제 그릇을 치우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주목! 나머지 분들은 저와함께 서창으로 가시겠습니다. 그곳에서 돈을 드릴 테니, 그 돈으로 옷을 사고 떠날채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돈을 주신단 말입니까?”
“아무런 대가도 없이요?”
[그렇습니다.]
내 말에 사람들은 믿기 힘들다는 얼굴을 보였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1인당 제가 드릴 돈은 금화 30닢입니다. 이 정도면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서 새 삶을 시작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금화를 30닢이나!”
“그렇게 큰돈을 우리 같은 노예에게….”
[단,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앞으로 평생 노예제도를 거부하며 사는 것이고, 둘째는 금화를 받은 사람은 예외 없이 서창이 아닌 다른 도시로 떠나는 것입니다.]
“노예제도를 거부하란 말은 이해하겠습니다. 흑기사님. 헌데, 다른 도시로 떠나라고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꼭 떠나야 하는 겁니까? 이대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서창에 남아 정착하고 싶습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생각보다 정착을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아뇨. 떠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서창은 머지않아전쟁터가 될 테니까요.]
나는 언데드 군대를 일으키며 답했다.
새롭게 일어나는 언데드들을 본 사람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직감했는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