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75화.
우리는 다시 서창으로 향했다.
노예의 숫자도 많고, 마차나 다른 짐도 있어서 마법을 이용해서 이동하지 않고 걸어서 웨일 산맥을 넘었다.
산맥을 다 넘은 후에는 서창에서 해방된 노예들을 모아 예정대로금화를 30닢씩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길거리에 방치되어 있던 다른 노예들까지 불러 그들에게도 똑같이 금화 30닢을 지원하겠다고 알렸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노예들은 반신반의했다.
“거짓말이야. 사기를 치는 게 분명해.”
“언데드를 부리잖아. 흑마법사야. 분명, 우리의 영혼을 거둬들이는 거겠지.”
“저 돈을 받으면 카릴처럼 학대를 받다가 죽게 될 거야.”
금화 30닢이면 적지 않은 돈인데다 심지어 소환한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짐을 운반하느라 함께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언데드를 향한 거부감과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이 쉽게 다가오지못했다.
하지만 목마른자가 우물을 판다는 속담처럼 시간이 지나자 돈이 필요한 노예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온 사람은 남루한 차림에 묶은 머리를 하고 있으며, 몸 곳곳에 상처가 난 동토인 노예였다.
그는 스켈레톤 나이트가 아니라
“스님, 정말로 돈을 주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노예 표식을 보여주시면 금화를 드리겠습니다.”
쭈뼛쭈뼛 나온 그에게 아라타는 웃으며말했다.
“믿어도 되는 것입니까? 혹시 망자의 속임수인 것은….”
“소승은 승려입니다. 믿으십시오.”
“…알겠습니다.”
남자는 상의를 벗어 등에 새겨진 노예 표식을 보여주었다.
인두로 지진 것인지 주먹만 한 화상 자국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아라타는 남자의 상처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
“쯧쯧….”
기구하고도 처량한 기억에 아라타는 혀를 차더니기운을 일으켰다.
신성력 같은 빛이 일어나자 남자의 몸을 감싸자 노예 표식, 낙인이 사라졌다.
완치한 것이다.
“동토에서 이곳으로 끌려와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소협. 인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하시지요. 이 돈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스님! 스님이야말로 제 은인이십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아미타불, 스켈레톤을 따라가시면 도움을 줄 것입니다.”
아라타로부터 위로와 금화를 받은 남자는 감동의 눈물을 보이더니 내가 소환한 스켈레톤의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스켈레톤을따라간 남자가 도착한 곳은 식당이었다.
노예 상인이 운영하던 곳으로 상인은 죽었지만, 장사는 계속하고 있는 곳이었다.
남자는 그곳에서 옷과 음식을 받았다.
신발부터 상‧하의까지 새로 맞춰 입고, 식사를 마친 후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가 멀쩡해진 모습으로 다시 나오자 반신반의하던 노예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저, 정말로 도와주시는 건가요? 우리같은 노예를?”
이번엔 여인이 나왔다.
빼빼 마른 몸에 주근깨가 가득한 여인이었다.
여전히 믿지 못하는 노예들의 모습에 아라타가 크게 소리쳤다.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여러분의 기억을 읽고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겠습니다! 그러니 나서기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또한, 진정한 불가인은 어렵고 힘든 자를 내치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버틴 자. 온정과 도움이 절실한 자에겐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지급할 것이니! 당당히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우렁찬 외침에 여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낡고 해진 옷을 살짝 내려 빗장뼈 아래에 찍힌 노예 표식을 보여주었다.
아라타는 그녀의 표식에 손을 대더니 아까처럼 기억을 읽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을지 소승은 짐작도 하기 힘들군요. 그래도 원수 같은 자가 죽었으니, 인제 그만 괴로운 기억을 잊으시고 새 출발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억을 읽은 아라타가 마찬가지로 표식을 치료한 후 그녀에게 금화 30닢을 쥐여주었다.
표식이 지워진 것을 확인한 여인은 그간의 설움이 북받쳐 서럽게 울었다.
지켜보고 있던 노예 출신 사람들이 그녀를 스켈레톤 대신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녀 역시 나중에는 밥까지 먹고 말끔한 모습으로 다시 나왔다.
확신이 선 노예들이 모였다.
그들은 앞을 다투며 노예 표식을 보여주었고, 그들이 표식을 보여줄 때마다 아라타가 기억을 읽고 돈을 주며 상처를 치료했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별탈 없이 금화를 받아 새 출발을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노예에게 그런 기회가 오는 것은 아니었다.
“귀하에겐 어떤 것도 드릴 수 없소. 오른쪽으로 가시지요.”
“표식을 안 지워 주시는 겁니까?”
“그렇소.”
“왜 제게만 돈을 안 주시는 겁니까?”
“그대는 돈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오.”
“어째서, 어째서입니까?!”
“어허! 탐욕에 눈이 멀어 그토록 많은 인명을 해쳐놓고서 모르는 척하는 것이오?!”
“인명을 해쳤다니요? 난 그런 적 없습니다. 대,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소승의 관심법이 바로 근거요! 내 이미 그대가 탐욕에 눈이 멀어 다섯이나 되는 인명을 해쳤음을 다 읽었는데 어디서 뻔뻔하게 거짓을 고한단 말이오!”
“어떻게 그것을….”
“그대는 이렇게 풀려난 것도 감지덕지해야 할 것이오! 철퇴로 때려 죽이기 전에 빨리 물러나시오!”
아라타가 목소리를 높였다.
위엄이 깃든 그의 일갈은 마치 정의로운 판사 같았다. 아니, 어쩌면 아라타야말로진짜 정의로운 판사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기억을 읽고 심성까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거짓말도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불가의 가르침까지 받은 승려라, 비겁하게 자신을 속이는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죄를 따지고 판결하는데 있어서는 아라타만큼 완벽한 존재도 없다.
[아라타 녀석, 판사가 아주 천직이구나. 너 같은 사람이 세상에 많이 있으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게 바뀔 텐데 아쉽구나 아쉬워.]
“허튼 생각 말고, 얌전히 물러나시오!”
아라타가 손을 휘저으며 또 다른 사람을 몰아냈다.
이번엔 여성이었는데, 눈치를 보던 그녀는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궤짝 안에 들어 있던 금화에 손을 뻗었다.
“제길! 누가 가란다고 그냥 갈 줄 알고!”
금화를 훔쳐 달아나려는 것이다.
하지만 금화를 가져가기 전, 데스나이트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아아아악!”
데스나이트는 악력으로 여인의 팔목을 부쉈다.
팔목이 부러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쯧쯧! 부질없는 과욕은 이렇듯 자신을 해치는 칼이 되어 돌아오는 법이오. 그대는 새 출발을 하기 전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바라오.”
아라타가 쓰러진 여인에게 혀를 차더니 데스나이트를 보았다.
데스나이트는 눈치껏 여자를 어깨에 메더니 밖으로 끌어냈다.
“다음!”
다시 심판을 재개하는 아라타.
나는 판사가 된 아라타를 두고 줄을 선노예들을 보았다.
몇몇 노예들이 줄을 서다 말고 자리를 뜨는 것이 보였다.
범죄노예들이었다.
[세 치 혀로 타인을 아무리 잘 속여도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일 순 없는 법이지.]
“두영님.”
[응? 왜 그러냐? 앤디.]
떠나는 노예들을두고 한마디 하자 앤디가 다가왔다.
“아라타 형님은 범죄노예는 돕지 않기로 하신 건가요?”
[글쎄다. 실은 나도 아라타의기준은 잘 몰라서 뭐라 단정 짓기 힘들구나.]
“같이 온 범죄노예 중에서도 좋은 사람이 있던데, 그 사람들도 쫓겨나는 건가요?”
[아마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은 그렇게 될 거다. 하지만 아라타 녀석의 성품을 생각하면 자기가 지은 죄를 반성하고 뉘우치는 사람에게는 기회를 줄 거다.]
“그 말은 죄를 지어도 뉘우친 사람들은 도와준다는 건가요?”
[그래, 아마 충분히 고통받고 뉘우친 사람들은 아라타도 도우려 할 거야. 마침 그러고 있구나. 저기 봐라. 저 사람에게는 5골드만 주잖아. 그치?]
나는 금화 다섯 개만 들고 가는 남자를 가리켰다.
최고 지원금은 1인당 30골드지만, 죄질이나 뉘우친 정도에 따라 아라타가 금화를차등 지급했다.
그 재량은 전적으로 아라타의 소관이라 나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맡겨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랑 다르게아라타는 심안을 통해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있으니까.
사람들을 골라내며 금화를 주던 아라타가 한 여인을 붙잡고 말했다.
“소저, 소저께서는 마을에 돌아갈 예정이시지요?”
“네….”
“그렇다면 부탁이 있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부디 그 아이들을 함께 데려가 보살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제, 제가요?”
“소저처럼 바른 심성을 가진 사람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금액은 제대로 지급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미약한 도움이라도 바라신다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라타가 몇몇 사람들을 추려 마차 쪽으로 보냈다.
주로 정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건장한 군인과 용병 출신이거나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여인들이었다.
대부분 아너스 왕국 출신 백성이었다.
아너스 왕국에는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아라타는 그렇게 나눈 사람들에겐 50골드 이상의 금액을 지급하고, 양육비는 따로 챙겨주기로 했다.
“저 흑기사님, 추가 골드가 필요한데 괜찮을까요?”
건물 지붕에 있는 내게 한 여성이 다가왔다.
웨일 산맥에서 앤디를 위로해주던 여성이었다.
꼬질꼬질했던 아너스 왕국 출신 노예였지만, 바다에서 대충이라도 씻고, 옷을 갖춰 입고 돌아오자 평범한 여인처럼 보였다.
그녀는 아라타에게 금화가 부족한 것을 알려주더니 날 찾아왔다.
[아래에 있는 스텔레톤 나이트에게 달라고 하면 됩니다. 금화는 이미 저쪽에 다 맡겼으니.]
“예. 감사합니다. 흑기사님.”
여인이 금화를 쌓아둔 스켈레톤 나이트에게 향했다.
그리고 스켈레톤 나이트에게 금화를 받아서 다시 아라타의 곁으로 향했다.
“여기 부족할 것 같아서 더 가지고 왔어요.”
“감사합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세요! 뭐든 도와드릴게요. 스님.”
“그럼, 제가 금화를 책정할 테니, 그만큼의 금화를 분류해 주시겠습니까?”
“알았어요!”
그저 부족한 금화를 옮기고, 대신 건네주는 일이지만 뭔가를 하는 것이 기쁜 것인지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누나가 기뻐 보여요.”
[사소한 일이라도, 일하는 것은 기쁜 법이니까.]
“일하는 게 기쁘다고요?”
[그럼, 당연하지.]
“왜요? 노는 게 더 기쁘지 않아요?”
[일하면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잖아. 본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이란다.]
“저도 일할까요?”
[하고 싶니?]
“네! 인정받고 싶어요!”
[그럼, 식당에 가서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물어봐라. 서빙 정도는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을 테니까. 거기서 사람들을 도와주거라.]
“두영님도 같이 가실래요?”
[아니, 난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안 된다. 혼자 다녀와라.]
“네! 이따 봬요!”
앤디가 식당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나는 떠나는 앤디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바다를 보았다.
먼 바다에는 갈매기뿐만 아니라 까마귀도 날고 있었다.
각기 다른 장소를 감시 중인 까마귀들.
나는 그 까마귀 중 가장 먼 바다로 나간 까마귀에게 망자의 눈을 사용했다.
[많군.]
이국의 방향에서 배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르나르국의 상징인 칠각룡을 형상화한 깃발을 건 대형 범선 선단이 서창으로 귀항하고 있었다.
망망대해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배들, 그 위에는 르나르국의 병사들과 이국의 수인족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 속도면 내일이면 입항하겠군.]
동명과 서창의 거리가 짧지만, 그 위의 이국은 거리가 제법 멀다.
그래서 배가 들어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놈들이 돌아오기 전에 노예들과 서창 사람들을 다 내보내야 할 텐데….]
목표는 어디까지나칠각보전 정각이다.
되도록이면 무고한 자들을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피해를 줄이고 싸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군.]
망자의 눈을 거두는 그때였다.
“흑기사님! 큰일 났습니다!”
누군가 달려왔다.
처음보는 얼굴이지만, 어깨에 찍힌 노예 표식으로 보아 내가 구출한 노예 같았다.
[무슨 일이지?]
“군대, 군대가 오고 있어요! 르나르국의 군대가 오고 있어요!”
[르나르국의 군대라고?]
그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서창을 공격한 건 아직 하루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르나르국의 군대가 오고 있다니?
[대체 어디서 오고 있지?]
“웨일 산맥 방향이라는데, 자세한 건 부상자가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웨일 산맥으로 까마귀를 보냈다.
[부상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이쪽입니다.”
까마귀를 먼저 보낸 후 남자의 안내를 받아 식당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엔 어깨와 배에 화살에 맞은 남자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